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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배신, 머리채, 집착, 애정, 그리고 의미 없는 약속 (1/733)

<제1화> 배신, 머리채, 집착, 애정, 그리고 의미 없는 약속2020.12.06.

- 풀썩. 금발의 왕세자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는 직전에 아리아드네가 건넨, 수송아지로 만든 상귀나치오 돌체를 의심 없이 받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던 참이었다. 그녀를 믿은 결과였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끄덕여 대기하던 병사들에게 알폰소 왕세자의 신병을 넘겼다. 이렇게 허탈하게 왕국의 주인이 바뀌었다.

1655097970103.jpg “미안합니다, 왕세자 전하.”

아리아드네는 나직하게 뇌까려 보았다. 옳지 못한 짓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왕궁 안을 제집처럼 걸어가 국왕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왕궁 안을 휘젓는 동안 아무도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국왕의 침실 안에는 그가 있었다. 그녀의 맹목적인 사랑이자 숭배의 대상, 그녀의 완벽한 약혼자. 체자레 데 코모. 왕의 사생아. 왕자가 되지 못한 왕의 아들.

16550979701037.jpg “어떻게 됐어?!”

1655097970103.jpg “⋯⋯알폰소 왕세자의 신병 확보를 완료했어요. 피사노의 군인들에게 넘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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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들은 체자레의 조각 같은 얼굴에서 예민함이 사라지고 환한 미소가 번졌다. 마치 방 안의 촛불을 일순간에 모두 켠 것처럼, 세계의 조도가 올라가고 온도가 따듯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거면 됐어. 체자레는 걸터앉아 있던 아버지의 옥좌에서 뛰어 내려와 아리아드네의 손을 맞잡았다. 전달되어 오는 체온에 아리아드네는 그의 기쁨과 애정이 전염되는 것 같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16550979701037.jpg “잘했어. 그놈의 목숨만 취하고 나면 나는 당신을 왕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자로 만들 거야.”

1655097970103.jpg “체자레…….”

16550979701037.jpg “아버지는 오늘내일하셔.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아.”

늙은 왕이 병석에 누운 지금, 알폰소 왕자마저 실각하고 나니 체자레 데 코모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16550979701037.jpg “이로써 우리의 시대가 오는 거야.”

그녀는 새 시대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그가 기뻐한다면, 그런 그의 옆에 있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 * * 체자레 데 코모, 에트루스칸 왕국의 변경백이자 알폰소 왕자의 ‘사촌’인 그는 국왕 레오 3세가 병석에 눕자 곧바로 국경의 군사를 일으켜 왕성을 점령했다. 명분은 알폰소 왕자가 레오 3세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왕성을 가득 채운 체자레의 사병 앞에서 불만을 토로하는 자는 없었다. 그리고 번개같이 알폰소 왕자의 시체가 수도, 산 카를로 성의 성벽에 내걸렸다. 적국, 갈리코 왕국으로 망명하려다가 국경에서 잡혔다는 것이 체자레 측의 발표였다.

16550979701037.jpg "보라! 알폰소 왕자는 적국과 내통하여 임금님을 독살하고 왕위에 오르려던 간악한 반역자다! 나 체자레 데 코모, 아니 체자레 데 카를로가 에트루스칸 왕국을 보위하여 국왕을 지키고자 섭정공에 오르니 국민들은 나를 믿고 따르라!"

* * * 체자레는 쿠데타가 성공하여 에트루스칸 왕국의 섭정공이 된 이후로도 자기의 지위를 다지는 데에 9년이라는 시간을 썼다. 그 시간 동안 체자레는 그의 옆자리에서 궁전을 다스릴 역할을 해줄 여자가 필요했다. 레오 3세의 왕비는 오래전에 서거하였기 때문에, 왕국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여자는 체자레의 약혼녀인 아리아드네였다. 갓 왕궁에 입성했을 당시 아리아드네의 사교계 평판은 처참했다.

1655097970108.jpg - “스물두 살밖에 안 됐다면서요?”

1655097970108.jpg - “어려서 농장에서 자랐대요. 교양이 없다던데요.”

1655097970108.jpg - “파티에서 봤는데 올바른 옷차림도 못 맞추더군요. 본데없이 자라서 그렇죠 뭐.”

아리아드네는 정의롭지 못한 모든 것의 상징이었다. 적법한 왕자를 몰아낸 왕의 사생아의 여자. 본인의 출생은 성직자인 추기경의 사생아. 체자레 섭정공과 아직 정식 혼인도 하지 못한 사이였고, 그녀 본인의 교양도 출중하지 못했다. 그녀는 체자레에게 온 정성을 다했지만 그조차도 내세울 것 없는 여자라서 남자에 목을 매는 거라며 우습게 취급당했다. 자연히 섭정공에 대한 비웃음도 높아만 갔다. 불손한 분위기가 정점에 다다른 어느 날, 그녀가 주최한 정례 티파티에서 일이 일어났다. 나이가 지긋한, 유서 깊은 수도 출신의 한 백작 부인이 체자레 섭정공의 출생의 비밀을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이는 중앙의 궁정 귀족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알려진 이야기였지만, 변경에 터를 잡고 있는 지방 귀족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였다.

1655097970108.jpg “사실은 체자레 공이 왕자의 사촌이 아니라 레오 3세의 서출이라면서요?”

중앙 귀족들은 그 전부터 아리아드네와 체자레를 탐탁지 않아 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가 있는 자리에서 들으란 듯이 큰 소리로 체자레의 이야기를 떠드는 것은 도를 넘은 일이었다. 부채를 쥔 그녀의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1655097970108.jpg “사실이에요?”

1655097970108.jpg “그 얘기 저도 듣기는 했어요.”

1655097970108.jpg “서출은 천신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부정한 결합의 산물인데…….”

그들은 숫제 티 테이블의 상석인 아리아드네가 앉은 쪽에서 몸통을 완전히 돌리고 앉았다. 백작 부인을 중심으로 해서 아리아드네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대형이었다. 그들의 태도가 외치고 있었다. -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반쪽짜리 귀족인 너 따위가 어떻게 할 거야, 이 부정한 권력을 등에 업은 추기경의 사생아야.

1655097970108.jpg “설마 아니겠죠.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그런 사람을 국왕으로 모십니까?”

1655097970108.jpg “그런데 믿을 만한 얘기가……. 그 모친이…….”

그는 그녀 인생의 목적이자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는 고결했고, 강했으며, 많은 고통을 참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누군가가 자신의 욕을 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체자레의 험담을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1655097970108.jpg “출생 기록이 깨끗해야 왕가의 혈통인지 아닌지가 판명될 것 아닙니까. 체자레 공은, 국왕이 되기에 부적합한 더러운 출신이네요.”

이야기의 끝에서 이야기를 처음 시작한 백작 부인이 마치 대법관이라도 된 양 결론을 내렸다. 그녀의 단호한 논평이 아리아드네의 응접실을 울렸다. - 뚝!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인내심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그녀는 그만 맹수처럼 테이블을 뛰어넘어서 그 백작 부인의 머리채를 잡아채고 말았다.

1655097970103.jpg “취소해!”

아리아드네는 그 백작 부인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며 짐승처럼 그르렁댔다.

1655097970103.jpg “아무것도 모르면서! 증거도 없이!”

수도의 닳고 닳은 귀부인들과 그들의 방식으로 싸워서 이길 방법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시골 농장에서 하녀들과 섞여서 자란 젊은 아리아드네는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그녀의 사랑하는 체자레가 저런 젠체하는 쓰레기들의 우스갯거리로 전락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1655097970103.jpg “체자레에 대해 그 가벼운 입 놀린 것 취소해!”

1655097970108.jpg “아악!”

백작 부인이 헝클어진 머리로 비명을 질렀고 디저트 트레이와 간식거리들이 하늘을 날았다. 같이 떠들던 온실 속 화초 같은 귀부인들은 얼음처럼 굳어서 그 광경을 쳐다보기만 했다. 아리아드네는 두 팔로 백작 부인의 머리채를 뒤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1655097970103.jpg “뚫린 입이라고 뱉기만 하면 다야? 당장 정정하고 사과해!”

1655097970108.jpg “세상에나! 교양 없는!”

양 당사자의 악다구니 외에는 얼음 같은 침묵이 응접실을 지배했다. 이런 상황은 전대미문이었다. 귀부인들은 우왕좌왕하며 왕궁 사교계 한복판의 머리채 사건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 순간, 갑자기 남자들의 무거운 군홧발 소리가 방 전체를 울렸다. - 쿵쿵! 제식 근위병들이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응접실로 입장해서 정지했다. 그들 뒤로 제식용 정복을 차려입은 유난히 잘생긴 남자가 유유히 들어와 멈춰 섰다. 큰 키에 비해 체구는 호리호리했으며 한 박자 느린 몸짓이 색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만 명 사이에 섞여 있어도 저절로 시선이 갈 만한 대단한 미남자였다. 체자레였다.

1655097970103.jpg “체자레!”

아리아드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천군만마가 나타난 것만 같았다.

1655097970103.jpg ‘이 상황에서 날 구하러 와줬구나.’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완벽한 왕자님이 그를 위해 헌신한, 가녀린 그의 여자를 위해 적에게 호통을 쳐 주기를. 그와 그녀를 무시한 간악한 무리에게 정의의 철퇴를 내려 주기를. 그녀는 쥐고 있던 백작 부인의 머리채를 놓고 다람쥐처럼 일어나 조르르 체자레의 뒤로 가서 섰다.

1655097970103.jpg “저들이……!”

16550979701037.jpg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체자레가 적갈색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아리아드네를 돌아보았다. 더없이 다정하고 나른한 목소리. 하지만……. 그의 입매는 몹시 차가웠고 눈에는 애정이 없었다. 약간, 지긋지긋하다는 눈초리.

16550979701037.jpg “아리아드네. 말해봐. 이 소란은 도대체 뭐지?”

1655097970103.jpg “그게, 저들이 당신에게⋯⋯!”

16550979701037.jpg “세상에. 마르케즈 백작 부인!”

그는 아리아드네와 대화가 하기 싫은 것 같았다. 넘어져 있는 백작 부인은 그녀와 말을 섞지 않을 매우 좋은 핑계였다. 그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급하게, 그리고 동시에 다정하게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16550979701037.jpg “백작 부인, 제 손을 잡고 일어나시지요.”

머리채를 잡힌 백작 부인 본인조차도 섭정공이 자기편을 들어줄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굴러들어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자존심은 여전히 하늘을 찔렀다.

1655097970108.jpg “저 여자와 달리 섭정공의 예법은 왕실에서 배운 것이기는 하군요.”

자리에서 일어난 백작 부인은 머리카락을 매만진 후 아리아드네의 손이 닿았던 드레스 부분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 아리아드네를 똑바로 노려보며 코웃음을 쳤다.

1655097970108.jpg “흥!”

백작 부인의 주변으로 다른 중앙 귀족들에 몰려들어 그녀에게 안부를 물었다.

1655097970108.jpg “마르케즈 백작 부인, 괜찮으셔요?”

1655097970108.jpg “다치신 데는 없지요?”

1655097970108.jpg “섭정공 약혼녀가 정말로 선을 넘었습니다!”

아리아드네는 ‘선을 넘은 게 누군데!’라고 바로 맞받아치고 싶었지만, 체자레의 짜증, 아니 분노 섞인 눈초리에 튀어 나가려는 자신의 혀를 깨물었다.

16550979701037.jpg “중앙 귀족한테 뭐 하는 짓이야.”

체자레는 이를 악물고 나직하게 아리아드네에게 짜증을 냈다.

16550979701037.jpg “지지기반이 필요한 것 몰라? 마르케즈 백작가 사람에게 손을 대다니 지금 제정신이야?”

1655097970103.jpg ‘나한테 막 대하는 사람에게 비굴하게 굴종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친구가 되어 주는 건 아니잖아요, 체자레.’

아리아드네는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체자레의 기세에 주눅이 들어서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기실, 말대답을 하면 그는 펄펄 난리를 칠 것이 틀림없었다. 아리아드네는 결코 수도의 귀부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체자레와 싸우는 모습, 아니, 체자레가 그녀를 하대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희망을 무참히 짓밟았다.

16550979701037.jpg “당신 따위보다 저 부인 하나가 나한테 훨씬 도움이 돼.”

그가 낮게 이를 악문 목소리가 응접실 안의 소음을 비집고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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