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내 것을 모두 빼앗아간 나의 숙적, 아름다운 이사벨라2020.12.13.
체자레가 코웃음을 쳤다.
"이사벨라는 처음부터! 나를 위한 여자였다. 가장 강한 수컷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어울려. 네 아버지가 네 언니 대신 너를 들이밀었을 때 내가 느낀 모멸감이 어땠던 줄 알아?“
아리아드네는 입을 벌린 채로 체자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네 언니는 산 카를로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애였어. 청혼서를 넣었더니 빌어먹게도 너를 대신 내밀더군! 내가 얼마나 억울했는데! 내가 어디가 모자라서!”
아리아드네를 앞에 두고 체자레는 자신이 거절당해서 슬펐던 감정을 구구절절이 나누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착한 여자’였다. 그녀는 자기 남자의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반복해서 받아주고는 했다. 그게 그녀가 유일하게 배운 사랑받는 방법이었다. 빼어나게 예쁜 그녀의 언니와 외모로는 도저히 경쟁할 수가 없었다. 공부하기는 좋아했지만, 신경질적인 그녀의 계모는 학문은 여자아이의 덕목이 아니라는 핑계로 한사코 그녀의 글공부에 훼방을 놓아 많이 배울 수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착해야’만 했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온순하거나 상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기의 것을 놓고, 양보하고, 수그리고, 미안해하고, 굴종하는 것으로서 그녀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 세계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나갔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오늘까지는.
“난 대체품이었다는 건가요?”
대리석에 새겨진 신상같이 잘생긴 체자레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미소가 새겨졌다. 광증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대체품?”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어 아리아드네의 턱 끝을 치켜들었다. 그는 잇새로 내뱉듯이 한 마디, 한 마디를 던졌다.
“대체가 되어야 대체품이지. 넌 대체품조차도 못 돼.”
아리아드네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체자레의 표정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화가 날 때 송곳니가 보이게 들어 올리는 윗입술, 높은 콧대와 거기에서부터 이어진 잘생긴 적갈색 눈썹, 높은 이마뼈와 그 위에서 분노로 푸들대는 이마 근육의 움직임까지. 그리고 새파란 눈. 이해할 수 없는 분노가 파랗게 서린 저 눈. 그녀는 체자레를 너무나 잘 알았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남자였지만 패턴을 마음속에서 체화하고 있었다. 아마 오늘이 그녀가 체자레를 마지막으로 보는 날이 될 것이었다. 그런 느낌이 왔다. 그는 그녀의 턱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거칠게 홱 뿌리쳤다. 남자의 팔 힘을 이기지 못한 아리아드네는 침실 바닥에 쓸리다시피 쓰러졌다.
“내 눈앞에서 꺼져. 다시는 나타나지 마.”
그녀에게는 수도 없이 많은 힌트가 있었다. 미련하게, 소처럼 희망을 되새김질하며 눌러앉아 있었던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 * * 데 마레 추기경은 성직에 몸을 담았지만 그 시대 다른 많은 성직자들처럼 자식을 여럿 두었다. 그의 정부(情婦) 루크레치아는 귀족 출신으로, 추기경과의 사이에서 자식 셋을 낳았고 정부인처럼 굴었다. 그 자식 셋도 대귀족의 자제처럼 키웠다. 그중 둘째이자 큰 딸인 이사벨라는 아직 열일곱 살이었지만 그 아름다움으로 사교계에 이름이 드높았으며 루크레치아의 보물이자 데 마레 추기경의 자랑이었다.
"아빠. 저는 그 남자에게 시집가기 싫어요."
복숭아 같은 피부에 아마빛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가 데 마레 추기경에게 귀엽게 칭얼댔다. 자수정을 닮은 두 눈동자가 애처롭게 반짝였다.
"그는 짐승처럼 포악하대요. 그리고 서출이라는 소문이 떠돌아요."
데 마레 추기경은 천사같이 아름다운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이 아비도 안단다. 왕자의 사촌이라고 공표됐지만 사실은 왕의 서자지. 나는 내 딸을 서자에게 시집보낼 생각은 없다."
마치 추기경의 자식은 정실 자식이라도 된다는 투였다. 이사벨라가 살풋 웃었다. 청순한 미모의 얼굴이 웃음기를 띄자 순간 귀여운 요정처럼 보였다.
"아빠는 항상 데 마레 가문의 이름을 떨치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여인이 될 거에요. 고작 백작 부인으로 끝날 수는 없어요"
"우리 이사벨라는 잠깐 앓아누운 것으로 하자. 아픈 아이에게 결혼을 강요할 수는 없지."
"그렇지만 데 코모 백작의 청혼을 무시할 수는 없잖아요?"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데 마레 추기경의 정부, 루크레치아였다.
"곧 변경백이 된다는데 서운하게 해서는 안 돼요."
변경백은 왕국의 국경을 수비하는 자리로, 수도에서 쫓겨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군사력을 갖게 되는 자리였다. 하지만 운이 없다면 갈리코 왕국과의 국지전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서, 딸의 혼처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사를 가진 변경백에게 딸을 주지 않았다가, 변경백이 역심을 품고 수도에 진군이라도 하는 상황이 온다면 큰일이 날 것이었다. 가장 소중한 자식을 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끈은 이어놔야 했다. 언제 끊어버려야 할지 모르는 패이기 때문에, 그 끈은 소중하지 않을수록 좋았다.
"서출은 서출과 어울리죠. 아리아드네를 보내세요, 추기경 예하."
“아리아드네라……. 거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군.”
데 마레 추기경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 * 아리아드네의 어머니는 정부 루크레치아의 하녀였다. 비가 몹시 오던 날 술에 얼큰하게 취한 데 마레 추기경은 루크레치아 대신 하녀를 취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루크레치아는 노발대발했다. 하지만 하녀는 이미 품속에 추기경의 씨를 품고 있는 상태였다. 하녀는 출산 직후 탑 위의 방에 갇혔고, 태어난 아이는 아들도 아니고 추기경을 전혀 닮지조차 않은 딸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사용인들의 숙소에서 자랐다. 별다른 교육을 못 받아서 아리아드네는 열다섯 살에 글을 쓸 줄도, 그림을 그릴 줄도, 악기를 다룰 줄도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봄에 데 마레 추기경의 집사, 니콜로가 아리아드네 '아가씨'는 짐을 싸서 내성으로 거처를 옮기시라고 통보를 했다. 그때는 드디어 아버지가 자신을 기억해 준 줄 알았다. 이제 나에게도 가족이 생겼다고, 성 너머에 있는 귀족 가족이 드디어 어머니의 미천한 신분을 용서하고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었다고 생각했었다. 가족은 무슨. 골수에 빨대를 꽂아 쪽쪽 빨아먹은 다음에 이용가치가 떨어졌다 싶으면 뒤통수를 거하게 치는 것도 가족이라면, 데 마레 추기경의 세 자식과 아리아드네는 나무랄 데 없는 가족이었다. * * * 「그대의 청을 받아들입니다. 데 마레 가문의 딸은 데 코모 백작과 약혼합니다.」 체자레 데 코모는 이 답장을 받아들었을 때 뛸 듯이 기뻤다. 데 마레 추기경이 사교계에 내놓은 단 하나의 딸인 이사벨라는 모든 남성의 마음속의 연인이자 최종 목표였다. 그녀를 얻게 되었다는 것은 수도에서 가장 잘난 남자가 되었다는 인증과도 같았다. 도자기같이 하얀 피부에 발그레한 복숭앗빛 홍조, 아마빛 머리카락이 드리워진 이사벨라는 그 아름다움이 성화에 나오는 천사와도 같았다. 어쩌다가 그 자수정 눈에 미소라도 얹힐 적에는 고대 신화의 요정 같이 장난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외모가 으뜸일 때에는 단연코 이사벨라가 숙연한 기색을 띠고 있을 때였다. 고귀하고 청순한 조각상에 슬픔이 어리면 그 누구라도 그 안타까움을 풀어주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리고 지금 체자레 데 코모 앞에 있는 이사벨라의 모습이 그러했다.
"이사벨라 양, 왜 그리 수심에 찬 모습을 하고 계십니까."
“…….”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비록 왕위계승권 대신에 귀족 작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왕의 사촌이고 데 코모 백작입니다. 곧 받게 될 제 영지는 부유하고 아름답지요. 지금 도성 안의 귀족 중에서 저 이상 가는 혼처는 없습니다. 저는 영애를 행복하게 해 드리기 위해 제 모든 것을 걸……!”
"제가 아니에요."
"예?"
"체자레 백과 약혼을 하게 된 것은 제가 아니에요."
체자레는 당황했다.
"하지만 청혼서에는 분명히 긍정적인 답장이……."
이사벨라는 자수정색 눈을 들어 안타깝다는 듯이 그를 응시하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청혼서에 쓰인 '데 마레의 딸'은 제 동생 아리아드네예요. 사교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가여운 동생이지요. 동생이 아버지께 자기 인생에는 아무것도 없냐고, 결혼이라도 이 에트루스칸 왕국에서 가장 훌륭한 남자에게 가게 해 달라며 난리를 쳤죠. 고집이 하도 세서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답니다."
이사벨라는 금빛 속눈썹을 내리깔며 한숨을 폭 쉬었다.
"저는…… 동생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살아왔으니까. 이번에는 동생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셔서 그만……."
그녀의 제비꽃색 눈동자에 호소력 있는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을 보이기 싫다는 듯 그녀가 짐짓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아버지를 거스를 수 없답니다. 체자레 백.“
가녀리게 떨군 고개가 안쓰러워 보였다.
“대예배에서 체자레 백을 먼발치에서 보면서 항상 흠모해 왔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제 가족이 되는 거잖아요? 가족 사이에서 애모하는 마음은 허용되지 않지요. 가슴 속 깊숙이 이 감정을 묻고, 친애와 호의로만 저를 기억해 주세요.“
“하지만……!”
“쉿.”
이사벨라는 손가락을 들어 체자레의 입술을 막았다. 이사벨라의 하얗고 투명한 손가락이 체자레의 입술을 살짝 누르며 그의 말캉한 입술 점막과 닿았다. 체자레는 무방비하게 맞닿게 된 체온에 흡, 숨을 들이켰다.
“아리아드네도 착한 아이예요. 잘 대해주세요. 저는 이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왔을 뿐이에요.”
그 말을 남기고 이사벨라 데 마레는 교회의 대예배실에서 가족석 쪽으로 사뿐히 돌아가 버렸다. 체자레는 망연자실하게 이사벨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바닥에 떨어진 이사벨라의 거즈 레이스 손수건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주워서 소중하게 품에 넣었다. 그 향기를 맡아보고 싶었지만 그조차도 불경하게 느껴졌다. 가슴팍에 들어있는 손수건에서 희미하게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오른손을 손수건이 들어있는 심장 위에 올렸다. - 두근, 두근. 심장박동이 울렸고, 그는 그것이 이사벨라를 보고 흥분한 탓에 뛰는 심장인지, 아니면 코앞에서 그녀를 빼앗겨서 분노한 탓에 울리는 심장 소리인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멀리서 주변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데 마레 추기경과 그 옆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까만 머리의 여자아이가 곧장 시야에 들어왔다. 여자아이는 쓸데없이 키가 컸고, 구부정한 등은 고위 귀족의 금지옥엽이 아니라 허드렛일을 하는 아랫것 같았으며, 햇볕에 그을린 피부는 촌스러웠다. 그는 흰옷의 추기경과 그 옆에 옹송그린 채로 서 있는 검은 머리의 여자아이를 하염없이 노려보았다. 금빛 트로피가 손에 쥐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저 둘이 내 인생을 망쳤다. * * *
"자코모!"
"예, 섭정공 각하!"
"아리아드네 아가씨를 서쪽 탑 꼭대기로 요양을 모셔라. 광증이 와서 도저히 왕비의 일을 수행할 수가 없구나. 보기에 추하니 남들이 오다가다 보지 못하게 은밀하게 처리해라."
"예, 각하!"
- 철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