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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회귀, 그리고 복수의 시작 (4/733)

<제4화> 회귀, 그리고 복수의 시작2020.12.16.

결정은 오래전부터 나 있었으니 실행은 신속했다. 아리아드네는 잠옷 차림으로 산 카를로 성안의 서쪽 탑에 유폐되었다. 차가운 돌바닥 위에 밀짚만을 깔고 앉아 있으려니 지난 14년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체자레는 까다로운 게 많았지만 맞춰주기만 하면 여름 바람처럼 상쾌한 남자였다. 그들은 꽤나 유쾌한 14년간을 보냈다. 체자레는 즉흥적이었다. 그는 데 마레 추기경 저로 놀러 와서는 아리아드네를 말 뒤에 태우고 곧잘 산책에 나서고는 했다. 그는 숲길에서 은방울꽃을 꺾어서 아리아드네에게 주었다.

16550980179322.jpg"순종적이고 나만 아는 것이 당신 같아."

의지할 곳 없는 야생화는 고개를 떨구고 바닥을 보고 있어 볼품이라고는 없었지만 그때는 그것이 최고의 칭찬인 줄 알았다. 저 멀리서 국왕 폐하 내외의 즉위식의 음악이 흥겹게 들려왔다. 그 음악은 모두 그녀가 고르고 준비한 것이었다. 내 즉위식이 될 줄 알았다. 지난 14년간의 헌신과 사랑이 보답받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아드네의 상념은 낭랑한 목소리로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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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80179335.jpg"밖에서 피는 은방울꽃은 결코 온실에서 키우는 장미만큼 소중하게 대해지지 않지."

서쪽 탑 꼭대기에 갓 즉위했을 새 왕비, 이사벨라가 올라와 있었다. 아마빛 머리칼은 하나로 틀어 올려서 진주를 아끼지 않고 사용해 호화롭게 장식했다. 그 위에는 민들레 홀씨처럼 섬세한 레이스 베일이 씌워져 있었고, 몸에 걸친 흰 비단 드레스는 튤립처럼 포개져서 그녀의 가녀린 체형을 포근하게 보완했다. 공을 많이 들인 것이 한 눈에도 티가 났지만, 처음 본 드레스였다. 이사벨라는 이날을 미리 알고 드레스를 미리 맞춰둔 것이 분명했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대체 왜. 체자레를 원했다면 본인이 약혼을 했으면 됐지, 나에게 미루었으면서 대체 이제 와서 왜. 아리아드네는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이사벨라를 올려다보았다. 언니, 이사벨라는 조그만 턱을 치켜들고 아리아드네를 내려다보았다. 이사벨라는 적반하장이었다. 그녀는 아리아드네와 시선을 맞추자마자 아리아드네를 몰아붙였다.

16550980179335.jpg“어떻게 감히 내 남편한테 그래?”

아리아드네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사과부터 했다. 오랜 세월 몸에 밴 대응이었다.

16550980179346.jpg"……알폰소 왕자님에 관한 일이라면 미안해. 내가 할 말이 없어."

하지만 이사벨라가 원한 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16550980179335.jpg“체자레 얘기하는 거야, 이 멍청이야. 네가 어떻게 감히 나를 두고 왕비가 되려고 들어?”

16550980179346.jpg‘뭐?’

놀란 아리아드네에게 이사벨라는 사정없이 쏘아붙였다.

16550980179335.jpg“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여자는 나야. 이쯤 됐으면 알아서 섭정공의 약혼녀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것 아니야. 내가 너 같이 버러지 같은 것 때문에 이렇게 고생까지 해야 해?”

이사벨라는 혼돈에 빠진 아리아드네를 두고 부채를 팔랑팔랑 흔들며 말을 이었다.

16550980179335.jpg“아버지도 그러셨어, 데 마레의 이름을 드높일 딸은 나라고. 너는 잠시 자리만 채우면 됐던 거였어. 너무 건방져.”

여기서 이사벨라의 예쁜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16550980179335.jpg“너 때문에 내 이름에 미망인이라는 둥, 아이를 가진 적이 있다는 둥, 진흙이 너무 많이 묻었어. 어떻게 책임질 거야?"

아리아드네는 뒤늦게 찾아온 황당함에 저도 모르게 이사벨라에게 말대답을 해 버렸다.

16550980179346.jpg"화가 난 게 그거 때문이야? 알폰소 왕자님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항상 하지 말자고 다짐을 하면서도 말이 먼저 튀어나가고 말았다.

16550980179346.jpg"그분께서는 언니한테 잘 해 주셨어. 사랑받지 않았어?"

16550980179335.jpg"사랑?"

이사벨라가 생글 웃었다.

16550980179335.jpg“남자들은 모두 다 나에게 잘 해줘. 그 마음에 모두 보답해야 하면 나는 창녀인 양 만인을 모두 사랑해야 하게?”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로 마치 투정을 부리듯이 알폰소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대는 이사벨라는 악마같이 아름다웠다.

16550980179335.jpg“알폰소는 나한테 가장 고귀한 여인의 자리를 가져다주지 못했어. 죽을 이유로 충분하지.”

아리아드네는 사색이 되어서 반문했다.

16550980179346.jpg"체자레는……. 언니는 체자레는 사랑해?"

체자레는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무언가였다. 그녀 자신보다도 고귀한 가치였다. 스스로가 다치더라도 그녀는 체자레를 숭배하고 또 보호했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정말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웃음기가 가득 찬 두 눈으로 아리아드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요정 같은 보라색 눈이 금방이라도 깔깔 웃을 것 같았다.

16550980179335.jpg"이런 나의 귀엽고 어리석은 동생아. 인생은 등가교환의 연속이란다. 체자레는 나를 왕비로 책봉해 주었어. 그 대가로 이제 나를 가질 수 있지. 우리가 한 건 공정한 거래야. 알폰소는 내 몸값에 걸맞은 대가를 가져오지 못했을 뿐이야. 그러니까 계약 해지. 거기에 사랑은 없단다."

이사벨라의 미소가 한층 더 진해졌다. 웃고는 있으되 웃음기가 싹 빠진, 조화로 만든 장미같이 화사한 미소였다.

16550980179335.jpg"사랑 대신에 갈망이 있지. 알폰소가 죽기 전에, 체자레가 나를 찾아와서 애원을 하더구나. 너와 약혼을 했던 이후로 단 한 번도 나를 잊어 본 적이 없었다고. 꿈에서도 나왔다고. 너를 안으면서도 내 상상을 하며 안았다고."

16550980179346.jpg"뭐라고?"

16550980179335.jpg“너는 덩치가 너무 커서 남자를 안는 것 같대. 머리카락은 시꺼메서 갈가마귀 같다네.”

이사벨라의 예쁜 눈이 악의로 번득였다.

16550980179335.jpg“네 가슴은 너무 크고 쳐져서 젖소인 줄 알았대.”

말문이 막힌 아리아드네를 앞에 두고 이사벨라는 자신의 아마빛 고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16550980179335.jpg“여자는 조그맣고 품 안에 쏙 들어와야 지켜줘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고 하더라. 내 머리카락은 고귀한 금발이라서 성황서에 나온 천사 같대.”

작고 가녀린 자수정 천사가 사악하게 미소지었다. 이사벨라는 완벽한 이목구비의 작은 얼굴을 아리아드네의 코앞으로 들이밀고 물었다.

16550980179335.jpg“너는 누구에겐가 이렇게 허기진 갈망의 대상이 되어 본 적이 있니?"

숨이 막혀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체자레가, 내 체자레가 그럴 리가 없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걸리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었다. 섭정공위에 오른 뒤부터 달라진 그의 태도, 끼고 다니지 않았던 약혼반지, 점점 식어가는 그의 열정과 미뤄졌던 결혼 날짜.

16550980179335.jpg"이게 너와 나의 차이야. 남자한테 목숨을 걸고 헌신해봤자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단다.”

이사벨라는 우직한 여동생에게 충고를 건넸다. 곧 죽을 여동생이 그 충고를 활용할 기회가 있을지는 다른 문제였지만.

16550980179335.jpg“그들은 고마움을 몰라. 남자를 믿지 말려무나.”

이사벨라는 도톰한 입술을 삐죽였다.

16550980179335.jpg“체자레도 지금은 내가 갖고 싶어 미칠 것 같겠지. 하지만 일 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나면 결국엔 내가 질릴 거야.”

그것은 절세 미녀인 서른두 살의 이사벨라도 도무지 극복하지 못한 난제였다.

16550980179335.jpg“남자들은 참 이상하더라. 혼날 만한 짓을 하고도 화를 내면 나를 미워해.”

그녀는 흘러나온 아마빛 귀밑머리를 손가락을 빙빙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16550980179335.jpg"그러다 보면 자기 밑에서 14년을 굴렀으면서도 찍소리 한 번 내지 못한 충직한 내 동생이 생각나겠지.“

16550980179346.jpg“……충직?”

16550980179335.jpg“난 후환은 좋아하지 않아. 아빠께서 가르쳐주셨지. 모든 가능성을 깨끗하게 제거하는 게 안전하다고. 안 그러니 사랑하는 내 동생아?"

이사벨라가 손을 들자 그녀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무어인 기사가 검을 들었다.

16550980179335.jpg“나는 나가볼게. 이제는 즉위식 2부 행사에 참석해야 해.”

그 즉위식은 아리아드네의 것이었다.

16550980179335.jpg“아프지 않게 해 줘요, 아고스토. 어쨌거나 사랑하는 내 동생이니까.”

이사벨라는 끝까지 가증을 떨었다. 돌아 나가는 이사벨라의 조그만 등 뒤로 이사벨라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호위를 서는 무어인 기사가 검을 곧추세워 들고 다가왔다. 그의 왼쪽 눈이 불길하게 적색으로 빛났다. 그 왼 눈의 적색 빛무리는 램프의 화력을 올리는 것처럼 점점 더 새빨갛게 변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이사벨라의 뒷모습을 노려보느라 바빠 무어인의 눈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단 한 마디도 대꾸해 주지 못했던 게 너무 억울했다! 아리아드네의 부릅뜬 두 눈 위로 무어인의 반월도가 스쳐 지나갔다. - 촤악! 목에 불에 덴 것 같은 고통, 솟구치는 피분수, 그리고 멀어지는 이사벨라의 작은 뒷모습. 자신의 피로 얼굴이 뜨끈했다. 그리고 어둠. 영원히 쉴 수 있었지만 아직 세상에는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이대로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16550980226655.jpg- 황금률.

희미하게 귓전에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16550980226655.jpg- 저지른 업보는 그 대가를 치르고 베푼 선행은 돌려받고. 그것이 황금률.

그러고 싶어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왜 세상은 그렇지 못할까요?

16550980226655.jpg- 너는 할 수 있겠느냐?

아리아드네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할 수 있어요. 기필코 해내고야 말겠어요. 목소리의 주인이 피식 비웃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혹은 또 다른 목소리가 그녀를 안타까워하는 기색도 느껴졌지만, 혼몽한 무거움이 온몸을 타고 신체 말단까지 가득 메우며 기어가 아리아드네는 그만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16550980179346.jpg"헉!"

불에 데는 통증을 각오하며 눈을 떴지만 아무 고통도 없었다. 대신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낡은 목조 주택의 천장이 보였다. 어릴 적 살던 농장이었다.

16550980179346.jpg‘어떻게 된 일이지.’

이상하게 몸이 가벼웠다. 아리아드네는 두 손을 들었다. 깡마른 팔과 조그만 두 손이 보였다. 쫀쫀한 피부는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덩치는 남자 같고 가슴은 젖소 같다는 악담을 들은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았기에 그녀는 무심코 자신의 몸통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아직 자라는 중인 깡마른 여자아이는 아직 편편한 가슴과 작은 흉통, 좁은 어깨를 가지고 있었다.

16550980179346.jpg‘맙소사.’

아리아드네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서 낡은 거울 앞으로 뛰어갔다. 울퉁불퉁한 싸구려 거울 안에는 열다섯 살 정도의 소녀가 서 있었다. 키가 크느라고 비쩍 말랐지만 팔다리가 보기 좋게 길쭉하고 까만 머리카락이 허리께까지 닿았다. 초록색 눈동자는 형형하게 거울 속의 자신을 쏘아보았다. 과거의 본인이었다. 두 가지만 빼고는. 아리아드네는 손을 들어 왼쪽 눈 밑을 만졌다. 새빨간 눈물점이 있었다. 원래는 없던 것이었다. 그리고 반짝반짝 빛나는 길쭉한 왼손 약지의 마지막 마디가 있었다. 체자레를 위해 절단했던 것이었다. 마치 마법처럼, 온전한 손가락이 제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원래 없었던 마지막 마디는 손의 나머지 부분보다 조금 붉었다. 빨간 홍조가 요요하게 약지 마지막 마디에 감돌고 있었다. 아리아드네의 감탄은 불청객으로 인해 방해받았다. - 벌컥!

16550980226655.jpg"아리아드네 이 쓸모없는 것!"

깡마른 할멈이 소리를 지르며 아리아드네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16550980226655.jpg"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직까지 게으름을 피우고 있어!'

할멈은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를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아리아드네의 머리와 목덜미를 무작위로 두들겨 팼다.

16550980226655.jpg"기상 시간 하나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니! 너 때문에 지금 몇 명이 굶고 있는 줄 알아?"

아리아드네는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그녀는 오늘의 청소 당번이었기 때문에 식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해명을 할 수 있었더라도 잔 갈레아초 할멈이 봐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린 하녀들을 두들겨 패는 것은 잔 갈레아초 할멈의 취미생활이었고, 할멈은 그 중 특히 아리아드네를 괴롭히는 것을 즐겼다. 귀한 혈통인데 저 애가 나와 마찬가지로, 아니 나보다도 못하게 더러운 바닥을 구르고 있다는 사실은 항상 심술 맞은 할멈을 짜릿하게 했다. 아리아드네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빗자루가 팔과 얼굴을 순차적으로 때려서 맵고 아팠다. 과거가 다시 반복되고 있었다. 15세의 봄날.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야수들이 득실대는 사교계로 던져진 날. 오늘은 아리아드네가 산 카를로의 본성에 있는 추기경 관저로 불려가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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