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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묵은 빚 갚아 주기 (5/733)

<제5화> 묵은 빚 갚아 주기2020.12.20.

어린 아리아드네의 삶은 고달팠다. 농장에서 자랄 때는 매질과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산 카를로의 대저택에 입성한 다음에는 교묘한 계략으로 인한 푸대접과 배신을 당했다. 아리아드네는 본인이 귀족인 루크레치아가 아닌 미천한 하녀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이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었다. 서출이지만 그래도 큰 범주에서는 가족이라고, 최소한 절반은 고귀한 데 마레 추기경의 딸이기 때문에 스스로는 운이 좋다고, 성실하고 착하게만 살면 착하게 대해준 사람들로부터 보답이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현실은 반대였다. 가만히 있으면 착취당하고 기만당했다. 이기적이고 목소리가 큰 사람들에게 모든 보상이 돌아갔다. 잔 갈레아초 할멈도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다. 성에서 집사인 니콜로가 왔을 때 자신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며, 아리아드네 아가씨를 곱게 키운 보람이 있다며 알랑방귀를 뀌며, 이렇게 고생한 할멈을 잘 대해주지 않으면 아리아드네 아가씨를 내줄 수 없다면서 니콜로에게 금화를 받아갔었다. 할멈의 빗자루로 매일 맞았던 어린 아리아드네는 그날 어이가 없고 울화가 치밀었는데, 그때는 자비롭고 공정한 아버지가, 혹은 미덕으로 충만한 산 카를로 사회가 그녀에게 잘못한 자들을 찾아서 단죄해 줄 줄 알았다. 이런 어리석은 기대라니. 나 스스로는 내가 지켜야 하는 거였다.

16550980306277.jpg‘다시는 가만히 당하지 않겠어.’

  * * *

16550980306284.jpg"아이고 집사님! 이런 누추한 곳에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냉막한 인상의 집사 니콜로가 용건을 말했다.

16550980306289.jpg"아리아드네 아가씨를 본성으로 모시러 왔다.“

16550980306284.jpg"아리아드네 그 계집애……. 아니, 아가씨를요?"

잔 갈레아초 할멈이 크게 당황했다. 오늘 아침에도 아리아드네를 빗자루로 두들겨 패서 얼굴에 구타 자국이 남았고 갈아입을 좋은 옷도 따로 챙겨주지 않은 참이었다.

16550980306284.jpg"아리아드네 아가씨가 게을러서 이 시간에는 잘 일어나 있지 않습니다요. 좀 씻으시고 단장을 하셔야 대저택에 들어가실 만할 텐데요."

16550980306289.jpg"여기서 준비해봤자 번거롭기만 하다. 당장 모시고 가겠다."

잔 갈레아초 할멈이 두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때 아리아드네가 집사 니콜로 앞에 나타났다.

16550980306277.jpg"바로 들어갈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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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편없이 낡고 초라한 옷이었다. 그러나 집사 니콜로는 엉망인 아리아드네의 꼴을 분명히 보았지만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끈 떨어진 서출 아가씨의 편을 굳이 들어줘서 성황청 직할령, 베르가모 농장의 실세인 잔 갈레아초 할멈과 불편한 사이가 될 필요는 없었다.

16550980306289.jpg"음. 들어가시죠. 잔 갈레아초 할멈. 그간 아리아드네 아가씨를 보필하느라 수고했네."

16550980306284.jpg"아이구!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이 잔 갈레아초의 충심은 누구도 오해할 수가 없지요!"

아리아드네의 짙푸른 청록색 눈동자에 장난기가 어렸다.

16550980306277.jpg"잔 갈레아초 할멈. 그동안 수고했어. 그렇지만 이제부터 나는 집사 니콜로에게 신세를 져야 할 텐데, 루크레치아 마님께서 매월 나를 잘 돌보라고 보내주신 2 두카토 (약 200만 원) 중에서 남은 걸 수고비로 니콜로에게 주지 않겠어?"

집사 니콜로는 꾀죄죄한 행색의 서출 아가씨를 모른 체할 생각이었지만, 돈이 연관되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16550980306289.jpg"2 두카토? 아니 그렇게나 많이 받아먹었으면서 아가씨의 꼴이 이 모양 이 꼴인가? 그 돈은 다 어디다 썼나?"

잔 갈레아초 할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16550980306284.jpg"아니, 모함입니다요! 루크레치아 마님께서는 돈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요. 다 제가 제 사비로 아리아드네 아씨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느라 이렇게 궁핍했던 것입니다요."

아리아드네가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짓고 할멈의 말을 끊었다.

16550980306277.jpg“잔 갈레아초 할멈, 자네는 지금 내 부모님이 아랫사람에게 보상도 없이 자식을 맡기실 만큼 경우가 없으신 분들이라고 모함하고 있는 건가?”

잔 갈레아초 할멈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리아드네는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16550980306277.jpg“거짓말은 여기까지야, 잔 갈레아초 할멈. 매달 1일에 돈을 받은 것 알고 있어.”

아리아드네는 집사 니콜로를 돌아보며 말했다.

16550980306277.jpg“집사, 믿어지지 않는다면 잔 갈레아초 할멈의 침대 머리맡을 뒤져보세요!"

집사 니콜로를 따라온 하인 둘이 잔 갈레아초 할멈을 바닥에 무릎을 꿇렸고 나머지 두 명은 우르르 잔 갈레아초 할멈의 방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이내 돈주머니 하나와 장부를 꺼내 들고 돌아왔다.

16550980306289.jpg"집사님, 여기 있습니다!"

과연 금화 더미가 수북했다. 하지만 금화의 양은 15년간 매월 2 두카토 (약 200만 원)를 모은 것이라고 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었다.

16550980306289.jpg"이래도 발뺌을 할 테냐?"

16550980306284.jpg"아이고! 쇤네가 잘못했습니다요. 루크레치아 마님이 매월 돈을 주시긴 주셨어요. 하지만 절대로 저는 매월 2 두카토씩 받지 않았구만요.“

잔 갈레아초 할멈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비굴하게 굽신대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16550980306284.jpg“루크레치아 마님께서는 저한테 50 플로린 (약 50만 원)밖에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리아드네 아씨를 잘 먹이고 입히고 재우다 보니 이것밖에 안 남은 것이구만유."

16550980306277.jpg‘됐다.’

아리아드네가 속으로 웃었다.

16550980306277.jpg‘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온 이상 너는 이제 끝장이야, 잔 갈레아초.’

차라리 2 두카토를 모두 써서 호화롭게 키우느라 남은 것이 없다고 하지 그랬어. 어차피 증거도 없는 이상, 그편이 루크레치아 마님 보시기에 차라리 나았을 텐데.

16550980306289.jpg"처음에는 받은 적이 없다고 하더니 이제는 50 플로린밖에 받지 않았다고 하는군!”

아리아드네는 열다섯 살 소녀답지 않은 차가운 표정으로 잔 갈레아초 할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16550980306277.jpg“내가 알기로는 분명히 루크레치아 마님께서는 잔 갈레아초 할멈에게 월 2 두카토씩을 주셨어.”

누군가가 1 두카토 50 플로린을 매달 횡령했다. 그 누군가는 잔 갈레아초이거나, 루크레치아 마님 둘 중 하나였다.

16550980306289.jpg“루크레치아 마님께 매월 얼마를 주셨냐고만 여쭤보면 누가 거짓말쟁이인지 알 수 있겠군. 지금 당장 마님께 가서 여쭤보게!"

집사 니콜로의 입가에도 미소가 올라왔다. 이것은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횡령범이 잔 갈레아초 할멈이라면 루크레치아 마님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할멈이 집사 니콜로에게 뇌물을 줄 것이었다. 횡령범이 루크레치아라면 그녀는 잔 갈레아초에게 모두 뒤집어씌우고, 그 와중에 잡음이 나지 않게 집사 니콜로에게 조금 찔러 줄 것이다. 작은 서출 영애의 말에 영이 설 리가 없지만, 부수입을 올릴 기회를 집사 니콜로가 그냥 날려버릴 리는 없었다.

16550980306289.jpg"알겠습니다. 여봐라, 잔 갈레아초를 창고에 잘 가두어 놔라!"

16550980306284.jpg"아이고, 억울합니다 나으리, 살려주세요 아씨!"

하인들 둘이 다시 달려들어 잔 갈레아초 할멈을 질질 끌고 돼지우리 겸 청소도구를 모아두는 창고로 끌고 갔다. 이런, 지금 당장 니콜로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전 재산을 뇌물로 썼으면 살아날 수도 있었을 텐데. 잔 갈레아초는 자기의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저번 생의 기억에 따르면 아버지, 데 마레 추기경이 책정했던 아리아드네의 생활비는 2 두카토가 맞았다. 다만 그것마저도 아까웠던 추기경의 내연녀, 루크레치아가 1 두카토를 떼먹고 잔 갈레아초 할멈에게 지급했고, 할멈은 거기에서 또 알뜰하게 매달 50 플로린씩을 횡령했던 것이었다. 이 사태는 둘의 합작품이었고 무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6550980306277.jpg‘루크레치아가 돈 떼먹은 걸 아버지에게 들킬 여자가 아니지.’

이 이야기가 루크레치아 귀에 들어가면 잔 갈레아초 할멈은 목숨을 부지한 채로 쫓겨나면 다행인 처지였다. 늦어도 오늘 밤에는 죽거나, 최소 다리몽둥이가 부러진 채로 내쫓길 터였다.

16550980306277.jpg“가지. 니콜로.”

아리아드네는 어느새 집사에게 공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누더기를 입고서도 당당하게 본성 쪽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밤, 아니나 다를까 잔 갈레아초 할멈이 가두어져 있던 돼지우리 겸 창고에 건장한 검은 인영 두 명이 숨어들었다. 루크레치아는 아리아드네의 예상치를 꽉 채워서 잔인한 여자였다.

16550980306284.jpg“악!”

돼지우리에서 약간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났고, 돼지 멱따는 소리가 날카롭게 한 번 울렸으며, 가벼운 손으로 들어갔던 검은 인영 둘은 나오면서 커다란 검은 보따리 하나를 이고 나왔다. 검은 보따리는 안에 돌을 잔뜩 넣은 채로 티베리 강에 던져졌다. 다음 날 아침에 잔 갈레아초 할멈의 아들들과 큰딸이 어머니에게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허겁지겁 베르가모 농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잔 갈레아초 할멈은 종적이 묘연하게 사라진 후였다. 묵은 빚으로 달려 있던 원한 하나가 결국 대가를 받아내고 끝났다. * * * 데 카를로 본성의 추기경 관저는 웅장하고 화려했다. 성직자의 본분 중 으뜸인 검소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흰 대리석 벽과 마루에는 최고급 태피스트리와 양탄자가 장식되어 있었다. 누더기를 입고 압도적인 호화로움을 뽐내는 추기경 관저의 정중앙을 가로지르자 삼삼오오 몰려다니던 하녀들이 아리아드네를 쳐다보았다. 개중 대담한 무리 중에는 킥킥대는 것들도 있었다.

16550980306289.jpg“뭐야, 새로 들어온 하녀야?”

16550980306289.jpg“하녀복도 저거보다는 비싸거든?”

소문이 빤한데 아리아드네가 이 집의 작은 아가씨라는 것을 모르고 저럴 리는 없었다. 추기경 관저 사용인들의 기강이 엉망이거나, 아니면 이 집의 주인어른들이 보시기에 아리아드네가 그래도 되는 대상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16550980306277.jpg‘후자겠지.’

추기경 관저의 1층은 응접실, 거실, 소연회장과 식당, 손님방 등이 있는 공적인 공간이었고, 2층은 부부 침실과 아이들의 침실, 추기경의 서재가 있는 비교적 내밀한 장소였다. 집사는 손님방이 있는 1층도, 가족의 거처가 있는 2층도 지나쳐서 3층으로 아리아드네를 인도했다. 3층은 사용인의 숙소와 다락방, 창고 따위가 있는 곳이었다.

16550980306289.jpg“여기가 아가씨의 방입니다.”

아리아드네가 배정받은 것은 잘 쓰지 않는 가정교사의 방처럼 보이는 3층 날개의 방이었다.

16550980306289.jpg“편하게 지내십시오. 시중들 하녀는 곧 올려보내겠습니다.”

집사 니콜로가 문을 닫고 물러가자 아리아드네는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그럭저럭 깔끔한 방이었다. 옷장 안에는 소박한 실크 드레스가 두어 벌 걸려 있었다. 외출복 하나, 실내용 하나, 그리고 밤에 입을 면으로 된 잠옷 하나. 거기에 신발 한 켤레. 딱 구색만 맞춘 옷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쓰게 웃었다. 이 집안의 그녀에 대한 취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옷가지였다. 체면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최소한으로. 회귀까지 했는데 바뀌는 게 없네. - 똑똑.

16550980306289.jpg"들어갑니다. 아가씨."

하녀가 노크의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불쑥 들어왔다.

16550980306289.jpg“어서 옷 갈아입으세요. 추기경님께서 부르세요.”

묘하게, 아니 대놓고 오만불손한 태도였다.

16550980306289.jpg“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빨리 나오세요.”

16550980306277.jpg“너, 소속이 어디니?”

16550980306289.jpg“아가씨가 그거 알아서 뭐 하시게요?”

하녀의 태도에서 무시를 잡아낸 아리아드네의 진녹색 눈에서 불꽃이 튀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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