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참교육2021.01.03.
아름다운 이사벨라는 말레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았다면 결코 말레타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말레타는 본인이 한 짓은 쏙 빼고 이사벨라에게 ‘아리아드네 아가씨가 나를 때렸다’고만 일렀고, 정의로운 구원자 역할을 마다할 리가 없었던 이사벨라는 바로 루크레치아에게 이 일을 일렀다. 일전의 가정교사 사건으로 아리아드네를 벼르고 있던 루크레치아는 옳다구나 하고 말레타를 앞세워 기세등등하게 아리아드네의 거처로 쳐들어왔다. 아리아드네의 조그만 3층 구석 다락방으로 이어진 복도가 호전적으로 쿵쿵대는 대여섯 명의 발소리로 소란스러워지더니, 오래된 떡갈나무 문이 벌컥 열렸다.
“계집애가 어딜 몸가짐을 조심하지 못하고 남한테 손을 함부로 올리고 다니는 게냐!”
예의 노출이 심한 딱 붙는 드레스를 입고, 이사벨라, 말레타와 함께 항상 데리고 다니는 하녀들을 몰고 나타난 루크레치아였다. 말레타는 루크레치아 앞에서 퉁퉁 부은 뺨을 보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제가 아가씨께서 입으실 옷가지를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리아드네 아가씨가 다짜고짜 저를 때리셨습니다.”
루크레치아는 말레타의 말에 고개를 크게 주억이며 호통을 쳤다.
“아랫사람을 덕으로 다스리는 것이 윗사람이 할 역할인데 너는 다짜고짜 손부터 드니 성품이 포악하여 큰일이로구나!”
올 것이 왔구나. 아리아드네는 당황하지 않고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어머니, 윗전은 아랫것의 잘못을 계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말레타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욕하니 저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뭐라고?”
“말레타는 아버지께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전부 다 사생아인 자식들을 귀족 자녀처럼 키우니 사생아에 불과한 저에게 공손하게 대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말레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이사벨라를 쳐다보며 어떻게 좀 해 달라고 눈으로 호소했다. 이사벨라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아니, 아리아드네 아가씨가 포악해서 맞았다고 해서 편을 들어주려고 어머니를 데려온 것이지, 말레타가 데 마레 추기경에 대해서 저런 폭탄 발언을 했을 줄 어찌 알았나! 루크레치아가 낯빛이 파리해져 말레타를 쳐다보았다.
“이게 사실이냐?”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는 도리어 이사벨라 아가씨와 아라벨라 아가씨는 귀하신 분들이니 아리아드네 아가씨께서 두 분께 맞먹으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리아드네는 미끼를 하나 더 던졌다. 말레타가 뭐라고 루크레치아에게 이를지,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반론을 해야 할지는 조그만 3층 구석 다락방에 누워 열 번도 넘게 시뮬레이션을 해 봤던 터였다.
“정확하게는, 아버지의 피는 천하고 귀한 것은 어머니의 피뿐이니 어머니의 핏줄을 타고난 이사벨라 언니와 아라벨라는 귀하되 모친이 자기와 똑같은 하녀에 불과한 저는 깍듯하게 대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요.”
이는 루크레치아와 이사벨라 입장에서 듣기에 내심으로는 흡족한 말이었을지는 몰라도 절대로 공개적으로 긍정할 수는 없는 말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의 출신이 원래는 아비·어미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천애 고아였고, 그래서 어려서 주워서 키워준 성황당에서 직업을 고를 기회도 없이 사제로 시작했다는 사실은 데 마레 추기경의 역린이었다. 이 말이 추기경의 귀에 들어간다면 아주 경을 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새파랗게 질린 루크레치아 앞에 아껴두었던 회심의 한 수를 던졌다.
“또한 아버지의 눈에 들어서 자기가 애를 낳으면 그 애는 저와 신분이 같으니 본인은 저한테 깍듯이 굴 필요가 없다고도 하였습니다.”
갑자기 루크레치아의 두 눈에서 불꽃이 터졌다. 이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뭬라?”
그제야 본인이 큰일 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말레타가 사지를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었다. 루크레치아는 암표범처럼 도도하게 고개를 돌려 말레타를 노려보았다. 긴 시간이 아니었지만 시선이 자기에게 천천히 이동하는 그 시간이 억겁과도 같이 느껴져서 말레타는 그만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닙니다 마님! 제가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다 아리아드네 아가씨가 순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루크레치아는 아리아드네와 말레타 중 누굴 믿어야 할지 가늠하기 위해 위아래로 말레타를 훑어보았다. 하녀는 미녀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통통하고 육감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말레타에게서 가장 봐줄 만한 부분은 몸통이었는데, 가슴과 팔뚝이 전반적으로 살집이 풍부하고 육감적이었고, 허리는 쏙 들어가 있어 짧고 굵은 팔다리와 평범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눈에 띄는 편이었다.
‘남편이 이 하녀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말레타 본인도 자신의 장점을 잘 알고 있어서, 하녀복을 몸에 착 맞게 수선한 터였다. 루크레치아가 입은 드레스와 자못 앞섶이 비슷했다. 이를 깨달은 루크레치아의 눈이 희번덕이며 빛났고, 노성을 질렀다.
“이 천한 계집이 어딜 남의 남편을 노려!”
그녀는 고개를 홱 돌린 다음에 뒤에 시립하고 있던 하녀장에게 일갈했다.
“이 맹랑한 년에게 채찍 열 대를 쳐라!”
말실수한 것 치고는 매우 무거운 벌이었다. 스무 대를 맞으면 나이가 많은 하인들은 종종 죽기도 했다.
“예, 마님!”
“아악! 아닙니다! 다 거짓입니다! 살려주세요 마님!”
하녀장과 루크레치아 직속의 하녀 두세 명이 추가로 우르르 말레타에게 덤벼들더니 몸부림을 치는 말레타를 강제로 끌고 하인들이 지내는 3층 안쪽의 공간으로 재빠르게 내려갔다. 말레타는 과거 이사벨라의 직속 시녀였지만 이사벨라는 단 한 마디도 도와주지 않았다. 이 일은 이대로 일단락 된 것 같았지만, 루크레치아는 아리아드네를 순순히 보내줄 수는 없었다. 이것은 안방마님으로서의 위엄의 문제였다.
“그리고 너! 그런 일이 있었다면 나한테 와서 처리를 물어봤어야지, 하녀를 다짜고짜로 때리면 어떡하니!”
그녀는 눈을 사납게 뜨고 아리아드네를 혼냈다.
“폭력은 어떤 일이 있어도 안 돼!”
- ‘어떤 상황이건 폭력은 안 돼!’
지난 생에 체자레로부터 티파티의 머리채 사건 이후 들었던 말이 귓가를 울렸다. 아리아드네는 비뚜름하게 웃었다. 어떤 상황이건 폭력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정당화할 힘이 없는 자가 폭력을 행사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치면 체자레가 끌고 수도로 몰고 왔던 변경백의 군사들이 저지른 폭력은 폭력이 아닌가? 알폰소 왕자를 죽이고 성벽에 매달아버린 체자레는 순백처럼 깨끗한가? 이 루크레치아는 순결한가? 직접 휘두르는 주먹과 하녀장을 치켜서 치는 채찍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가? 말레타 입장에서는 아리아드네에게 뺨 몇 번 맞은 것이 지하실에서 묶인 채로 채찍 열 대를 맞는 것보다는 백번 낫지 않을까?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 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어머니께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 직접 처리했는데 제가 잘못했습니다.”
재차 고개를 숙이며 그녀는 죄를 청했다.
“반성하는 의미로 랑부예 구휼원에 가겠습니다. 삼일 밤낮을 봉사하며 잘못을 뉘우치겠습니다.”
랑부예 구휼원은 악명이 높은 곳이었다. 레오 3세의 왕비인 마르그리트가 산 카를로의 빈민을 돕기 위해 세운 곳인데, 뜻은 좋았으나 왕비의 예산으로 산 카를로의 빈민들을 모두 먹이고 재우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빈민이 들어가면 죽어서 나오기 일쑤였다.
“말레타도 저의 부덕함으로 계도를 잘못한 탓도 있으니 데리고 가서 신앙심을 북돋워 주고 싶습니다.”
루크레치아는 약간 놀란 듯이 보였다. 랑부예 구휼원이라니. 피와 고름이 흐르는 인세의 지옥에 자기 발로 간다고? 하지만 옆에서 이사벨라가 끼어들었다.
“5일이 낫지 않을까?”
얼굴에는 천사 같은 미소를 띤 채였다.
“성황서의 아스테이아 성녀도 죄를 지은 후 5일 밤낮을 기도하여 죄사함을 받으셨다고 해. 성황서의 본을 엄격하게 따르면 더 좋은 결과가 있지 않겠니?“
이사벨라에게는 한 방울의 신앙심도 없다는 사실은 아리아드네가 제일 잘 알았다. 친동생의 남자를 뺏기 위해 혈육의 피를 손에 묻히신 분이 성황서는 무슨. 이사벨라는 순전히 아리아드네를 괴롭히기 위해 저러는 거였다. 하지만 3일이건 5일이건 아리아드네에게는 큰 차이가 아니었다. 더럽고, 춥고, 위험한 것을 버티는 데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언니의 말씀이 맞습니다. 5일간 반성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당황하는 루크레치아의 귓가에 이사벨라가 속삭였다. 엄마 앞에서는 가면을 벗은 채였다.
- ‘엄마! 구휼원에서 돌아오면 벼룩이나 옴이 옮았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한 달 동안 작은 방에 가둬놓으면 되잖아요.’
- ‘아리아드네를 한 달이나 가둬두면 예하께서 아무 말씀 안 하실까?’
- ‘랑부예 구휼원에서 병을 옮아왔을까 봐 깨끗해질 때까지 격리해두자는데 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시겠어요?’
산 카를로는 페스트와 콜레라가 주기적으로 창궐하는 곳이었다. 랑부예 구휼원은 그 산 카를로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가는 곳이었다. 이사벨라는 한마디 보탰다.
- ‘새로 들어온 쟤, 고분고분한 척은 하는데 이상하게 맘에 안 들어요. 길들이기를 해둘 필요가 있어. 이번 기회에 누가 위인지 제대로 보여주자고요.’
루크레치아는 금쪽같은 큰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아드네는 그날 저녁 당장 행장을 꾸려서 다음 날 아침 일찍 랑부예 구휼원으로 향하게 되었다. * * * 구휼원으로 향하는 데 마레 가의 마차는 검게 칠을 한 간소한 것이었다. 추기경이 주로 타는 화려한 은마차가 있었지만 그것을 탈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내주지도 않을 것이었고, 준다고 하더라도 사양했을 것이었다. 좁은 마차의 한편 구석에는 채찍질로 엉망이 된 몰골의 하녀 말레타가 눈치를 더럭더럭 보며 앉아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미소지으며 운을 띄웠다. 그녀는 심복 하녀가 필요했다. 루크레치아와 이사벨라의 영향을 받지 않는 그녀만의 사람이.
“말레타. 이제 닷새 동안은 너와 나 둘뿐이로구나.”
“…….”
“그동안은 이사벨라 언니가 너를 보호해 줄 수 없는데 이를 어쩌나?”
말레타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 이사벨라 언니가 너를 돌봐주기는 할까? 어머니께서 채찍 열 대를 외치셨을 때 보지 않았니? 언니가 한마디만 해 줬어도 네가 채찍을 맞지는 않았을 텐데.”
고대 라틴제국의 장군인 테오도시우스는 사람은 공포로 지배하거나, 사랑으로 지배할 수 있다고 했었다. 전생의 아리아드네는 둘 다 성공하지 못했다. 주변인과 아랫사람들로부터 우습게 여겨졌고, 사랑받지도 못했다. 이번에는 공포부터 시도해 볼 참이었다.
“집에서도, 네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건 이사벨라 언니가 아니라 나와 함께지.”
아리아드네는 말레타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훤칠한 키와 직각으로 곧은 어깨가 위압적으로 가까워지며 동그랗고 통통한 말레타를 압박했다.
“처음에 판단을 잘못할 수는 있어. 실수할 수도 있지. 하지만 잘못한 것을 알게 되면 빨리 태도를 고쳐야 하지 않겠니?”
말레타가 숨을 들이켰다.
“나는 너그러운 주인이란다. 과거의 일은 잊어줄 수도 있어.”
그때 갑자기 마차가 크게 덜컹 흔들렸다. - 히힝!
“도착했습니다.”
말레타에게는 다행이게도 마차는 타이밍 딱 맞춰서 구휼원에 도착했다. 아리아드네는 쳇, 짧게 혀를 차며 마차에서 내렸다. 랑부예 구휼원은 대륙 전체에서도 보기 드물게 성황청에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서 운영하는 빈민 구휼 시설이었다. 왕비의 관리의 안내를 받아 차가운 방에 짐을 푼 아리아드네는 추기경의 서출 딸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 감을 못 잡고 있는 왕정 관리들에게 그저 봉사활동을 하러 온 영애일 뿐이니 편하게 일을 맡겨 달라고 부탁했다.
‘빈민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야지. 말레타를 데리고 여기까지 온 이유는 그것 때문이니까 말이야.’
* * *
“줄을 서시오! 한 사람에 한 그릇이오!”
아리아드네가 배치된 곳은 수프를 퍼 주는 배식줄이었다. 수프 통은 멀겠지만 그것도 국자질을 하루에 500번 가까이하니 팔이 떨어져 나갈 듯이 아팠다. 첫째 날에도, 둘째 날이 되어도 찾는 사람이 보이지 않자 아리아드네는 함께 일하는 하급 관리에게 물어보았다.
“구휼원에 있는 빈민들은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아는데 왜 배식을 받는 사람들은 이것밖에 없나요?”
“병이 아주 깊은 사람들은 배식줄에 설 기력도 없지요.”
중증 병자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먹일 인력이 따로 배치되어 있지는 않았으니, 굶기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아이는 거기에 있겠구나.’
아리아드네는 그녀를 찾으러 가기로 결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리아드네는 자기가 찾는 사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여기서 만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