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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왕자님의 첫사랑이 되다 (13/733)

<제13화> 왕자님의 첫사랑이 되다2021.01.17.

설마 저 슈미즈도 본인이 입던 거라고 변명하지는 않겠지. 저건 누가 봐도 부엌데기 옷인데.

165509813899.jpg“루크레치아는 데 마레 추기경의 둘째 딸을 하녀만도 못하게 키우고 있나 봐요.”

165509813899.jpg“먼 친척이나 시녀도 저런 옷은 안 입히지 않겠습니까. 정말 하녀 옷이네요.”

이사벨라의 동공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뭐라고 더 어떻게 수습을 할 방도가 없었다.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거짓말을 더 해야 할지 아니면 도망을 쳐야 할지 가늠을 하고 있던 차에, 입을 다물고 있던 마르그리트 왕비가 이사벨라에게 딱 한마디를 던졌다.

165509813899.jpg“저 슈미즈도 네가 입던 물건이냐?”

이사벨라는 새파래져서는 입을 조가비처럼 다물었다. 고작 열일곱 살인 소녀치고는 이사벨라는 과연 상황판단이 빨랐다. 외통수에 몰리면 말을 줄이고 탈출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친딸만큼 영민하지 못한 루크레치아는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을 해 보려고 했다.

16550981389914.jpg“그것이……. 제가 저렇게 입힌 것이 아니라 하녀들이 바꿔치기한 모양입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혀를 쯧 찼다. 루크레치아는 자기가 서녀를 괴롭히지 않았다고 주장을 하려다가 자기는 집안 관리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고 자백한 꼴이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단호하게 손을 밖으로 떨쳐내어 손짓으로 루크레치아의 발언을 막았다.

165509813899.jpg“되었다. 저 아이를 데려다가 제대로 된 슈미즈를 내주어서 갈아입혀 오거라.”

마르그리트 왕비의 시녀가 고개를 숙이고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아리아드네는 최대한의 연기력을 끌어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왕비의 시녀의 손에 이끌려 일어났다. 왕비의 응접실을 나가는 그녀의 시야 경계로 수치심에 얼굴이 시뻘게져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루크레치아가 보였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루크레치아에게 사회적 사망 선고를 내렸다.

165509813899.jpg“데. 로. 시. 양, 추기경의 둘째 딸은 내가 옷을 갈아입혀서 좀 더 데리고 있다가 보내겠네. 자네와 추기경의 큰 딸은 이만 돌아가 보시게.”

체면을 봐주지 않는 축객령은 화룡점정이었다. 미혼의 영애를 칭하는 호칭, 자녀들은 네 것이 아니라 추기경만의 것이라는 무시, 우리 무리에서 나가라는 내침까지, 루크레치아의 최악의 악몽에서나 나올 만한 대접의 집대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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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시녀를 따라 왕비의 내궁으로 가는 길은 아리아드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길이었다. 그녀가 섭정공의 약혼녀로서 9년간 머무르던 궁이었다. 이 길은 쪽문을 통해서 왕비의 내궁으로 들어가는 뒷길이었는데, 통행하는 사람이 적어서 아리아드네가 체자레를 위해 잠행을 해야 할 때 항상 통해서 나가던 길이었다. 그러니까, 전생 아리아드네의 모든 악행의 시발점이 되는 길이었다.

16550981389927.jpg‘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다.’

기억에서 모두 지우고 죄업을 다시 행하지 않으면, 이번에야말로 원래 되고 싶었던 올곧고 선한 사람으로 살 수 있다면, 과거의 죄는 없었던 일이 되어 주지 않을까. 이미 지은 죗값도 탕감받을 수 있지 않을까. 아리아드네는 상념에 싸여서 발걸음을 옮기다가 그만 왕비의 시녀가 걸음을 멈춘 그 등에 부딪혀 버렸다.

16550981389927.jpg“아야.”

하지만 시녀의 목소리가 높았다.

165509813899.jpg“알폰소 왕자님을 뵙습니다.”

왕비의 시녀는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깊게 숙였고, 그 등에 부딪힌 아리아드네는 허둥지둥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한 타임 늦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과거에 지었던 죄가 뽀얗고 말쑥한 소년의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16550981408918.jpg“아리아드네?”

16550981389927.jpg“알폰소?”

  * * * 으슥한 뒷 오솔길은 볕이 잘 들지 않았지만, 타이밍 좋게 스며들어온 한 뙈기의 햇빛이 알폰소 왕자의 금발을 찬란하게 비췄다. 아리아드네는 바로 이 뒷길을 통해 왕비궁 바깥으로 나가서 알폰소 왕자를 만나 죽음으로 몰아넣던 그 날이 떠올라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알폰소 왕자는 권력 투쟁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순진무구한 열일곱 살 소년이었다.

16550981389927.jpg“알폰소, 왕자였어?”

하지만 이번 생에서도, 아리아드네는 정직할 수가 없었다. 정직함은 가진 자의 여유였다. 가진 것이 없는 그녀로서는, 거짓과 기만을 섞어서라도 안전한 곳까지 발돋움해야 했다. 그녀에게는 알폰소 왕자의 호감과, 그래, 어쩌면 청혼이 필요했다. 거기에 닿기까지 수많은 역경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165509813899.jpg“데 마레 영애! 무엄합니다!”

아리아드네는 본인의 발연기를 걱정했지만 펄쩍 뛰는 왕비의 시녀가 주연배우의 연기력 부족을 커버해주었다.

165509813899.jpg“이분은 국왕이신 레오 3세 폐하와 마르그리트 왕비 폐하의 유일한 혈육이신 알폰소 데 카를로 왕자 전하이십니다!”

대로한 왕비의 시녀를 알폰소가 제지했다.

16550981408918.jpg“카를라, 그만해. 내가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어. 아리아드네는 몰랐어.”

시녀 카를라는 ‘그게 말이나 됩니까!’를 눈으로 외치며 아리아드네를 노려보았다. 그 눈총을 피해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숙였다.

165509813899.jpg“송구하옵니다, 왕자 전하.”

아리아드네는 시녀 카를라의 눈치를 보며 알폰소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16550981389927.jpg“소녀 불경을 저질렀으니 너른 아량으로 한 번만 용서해 주시기를 간곡히 비옵나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추기경의 딸이 왕비의 시녀에게 굽힐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이 시녀는 왕비의 직속이자 심복 시녀였고, 여기에서 있었던 모든 일은 마르그리트 왕비의 귀에 낱낱이 들어갈 것이 틀림없었다. 마르그리트 왕비가 제아무리 좀 전에 아리아드네의 편을 들어 루크레치아에게 창피를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리아드네가 예뻐서라기보다는 루크레치아가, 정확히는 모든 내연녀와 첩들이 싫어서였을 것이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평생토록 체자레의 어머니인 레오 3세의 정부, 루비나 백작 부인 때문에 적잖이 골머리를 앓았다. 그 분풀이를 루크레치아가 대신 당한 것뿐이다. 아리아드네가 본인의 하나뿐인 아들을 마구 대한 사실을 알게 되면 왕비는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꿀 터였다.

165509813899.jpg“흠, 흠. 예절 교육은 잘 받았군요.”

아리아드네의 격식 차린 사과에 시녀 카를라의 치켜 올라갔던 눈꼬리가 온화해지자 이번에는 막상 알폰소 왕자의 입이 부루퉁히 나왔다.

16550981408918.jpg“난 그런 거 싫어.”

16550981389927.jpg“예……?”

16550981408918.jpg“왕궁 안에서는 다 나를 왕자님이라고 부르지 알폰소라고 봐 주는 사람이 없어. 모처럼 내가 왕자인 걸 모르는 사람을 만났는데 도로 이게 뭐야.”

음. 속으신 것입니다만…….

165509813899.jpg“왕자 전하. 사람은 신분에 따라 지위가 달라지고 그 고귀함도 달라지며 타고난 성품도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왕자 전하를 개인이 아니라 왕자로 보는 것은 당연하니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시녀 카를라의 잔소리에 알폰소의 그린 듯이 잘생긴 선량한 눈매에 짙은 기색이 어렸다. 지루하다, 짜증 난다, 그런 유의 표정이었다. 제아무리 반듯한 사람이라도 사춘기의 반항심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왕자의 눈이 반짝거렸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겼다는 듯이 두 눈에 웃음을 가득 띤 알폰소는 갑자기 아리아드네의 손목을 잡아채고 왕비의 내궁 바깥쪽으로 냅다 달렸다.

16550981408918.jpg“아리아드네, 가자!”

16550981389927.jpg“아아아앗!!”

당황한 시녀의 외침만 메아리쳤다.

165509813899.jpg“왕자님!! 어딜 가시는 겁니까!! 왕자님!!!”

  * * * 알폰소 왕자가 아리아드네를 끌고 달린 곳은 사람들이 잘 찾지 않은 작은 분수대였다. 아이비 넝쿨이 오래된 분수대를 타고 감아 올라가고 정원사의 손길이 닿지 않은 수선화가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16550981389927.jpg“……너무 예쁘다.”

알폰소 왕자는 뿌듯하다는 듯이 웃었다. 사춘기 소년의 치기 어린 미소도 귀여워 보여서 아리아드네도 살며시 따라 웃었다. 그녀는 말을 툭 놓아 보았다. 예법 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지만 여자로서의 직감은 그래도 된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16550981389927.jpg“정말 싫었나 봐, 왕자님 취급.”

16550981408918.jpg“이게 훨씬 낫네.”

둘은 얼굴을 마주치고 왜인지 모를 일탈감에 낄낄대며 함께 웃었다. 하면 안 되는 짓을 함께 한다는 동지적 유대감이 차올랐다. 배가 아플 때까지 웃던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에게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16550981389927.jpg“저번에 구휼원에서 너한테만…… 다른 식사를 줬지.”

알폰소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는 새장에 갇힌 새처럼 왕자로서 특별 취급을 받는 것에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물었다.

16550981389927.jpg“그런데 뭐라고 부를까? 너?”

16550981408918.jpg“‘알폰소’라고 불러.”

왕자의 소탈함에 아리아드네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16550981389927.jpg“그러시면 안 돼요, 왕자님.”

16550981408918.jpg“갑자기 왜 그래.”

16550981389927.jpg“아까 카를라 부인 얼굴 못 봤어? 날 때려죽이실 기세던데.”

확실히, 무엄하다고 펄쩍 뛰기는 했다.

16550981389927.jpg“내가 널 ‘알폰소’라고 부르다가 들키면 퍽이나 날 가만두시겠다.”

16550981408918.jpg“왕자님은 싫은데.”

16550981389927.jpg“그럼, 우리.”

아리아드네가 반짝 웃었다.

16550981389927.jpg“비밀 이름 만들자.”

알폰소는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소년의 말간 얼굴에는 한 점의 악의도 없었지만 그 태도에서는 특권에 익숙한 남자의 관성이 묻어났다.

16550981408918.jpg“그렇다면 더 무엄하게 이름도 아니고 에트루스칸의 유일한 왕위계승권자의 애칭을 부르시겠다? 자신감이 과하신데요, 영애?”

어린 영애 같으면 여기서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고 의기소침했을 것이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아리아드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도리어 짐짓 눈썹을 올리며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16550981389927.jpg“자꾸 그러면 왕자님이라고 부른다?”

잭팟. 알폰소의 표정에 질색하는 티가 났다.

16550981408918.jpg“제발. 그것만은.”

16550981389927.jpg“왕자 저하,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옥체금안 하옵심을 앙축하나이다. 이래 버린다?”

16550981408918.jpg“아냐, 아냐. 그건 아니야.”

세차게 거절한 알폰소는 백기 항복을 했다.

16550981408918.jpg“미안해. 하고 싶은 대로 해. 뭐든지 좋아.”

승기를 잡은 아리아드네는 평범한 제의를 했다.

16550981389927.jpg“그럼, ‘알’?”

왕자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16550981389927.jpg“‘폰소’?”

16550981408918.jpg“‘폰소’는 애칭이라기보다는 그냥 멀쩡한 사람 이름 같잖아. 애칭이 아니라 가명 같다고.”

애칭의 종류에 관한 왕자의 저항이 거셌다. 이런 거엔 또 다 답이 있지. 아리아드네는 성큼 알폰소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소년답지 않게 크고 두꺼운 손이었다. 그녀는 몇 년 뒤에는 이 손이 더더욱 강인해질 것을 알았다.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손바닥을 억지로 펴서, 그 위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썼다. - A.  

16550981389927.jpg“Dear A. 이걸로 하자.”

불시에 손을 잡힌 알폰소는 굳은 채로 아리아드네를 쳐다보았다. 소녀의 탈을 쓴 여인은 맑게 웃으며 알폰소의 손아귀에서 손을 뺐다. 따스한 체온이 알폰소를 떠났다.

16550981389927.jpg“나,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

아리아드네는 일어선 채로 알폰소를 뒤돌아보았다. 소박한 아이보리색 드레스도 낡은 분수대와 흐드러진 아이비 잎사귀 사이에서는 썩 잘 어울렸다. 알폰소는 문득 눈앞의 아가씨가 마치 이 성의 일부처럼 이 자리에 더없이 잘 어우러진다고 생각했다.

16550981389927.jpg“나 왕비님께서 옷을 하사하신다고 하셔서 시녀분을 따라가던 길이었는데 이렇게 도망쳐 와 버렸어. 너무 오래 나와 있으면 안 좋은 소리를 들을 거야.”

붙잡고 싶었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16550981408918.jpg“아, 하긴. 어마마마께서는 내가 너랑 같이 있었던 걸 알게 되시면 별로 좋아하시진 않으실 거야.”

아리아드네는 조금 놀라 알폰소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도 해맑아서 아무 생각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 왕자는 의외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몹시 흥미로웠다. 알폰소는 주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16550981408918.jpg“사실 이야기 안 한 게 있어.”

‘이야기 안 한 것이라면 나도 많아. 난 자네가 왕자인 것도 알고 있었고 지난 생에서는 내 손으로 죽이기도 했어. 자네는 우리 언니랑 결혼한 사이였다네. 아 참, 나 회귀자야.’라고 차마 말을 못 한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알폰소에게 물었다.

16550981389927.jpg“뭔데?”

16550981408918.jpg“사실 어마마마께서는 나 때문에 너를 오늘 부르셨을 거야.”

아리아드네는 빙긋이 웃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환히 보였다.

16550981389927.jpg“구휼원에서 만났다고 내 얘기를 네가 했구나.”

그녀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16550981389927.jpg“아들 친구가 어떤 아이인지 궁금하셨나 보네.”

16550981408918.jpg“어떻게 알았지?”

알폰소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나 그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들이 여자아이를 만났다고 그 여자애를 바로 데려와서 호구조사를 하고 됨됨이를 알아보는 건 좀 집착 시어머니 같았지만, 서른 살의 눈으로 열일곱 살의 알폰소 왕자를 보니 이런 아들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폰소 왕자는 깊은 푸른 눈, 우뚝한 콧날, 단단한 턱선을 가지고 고대 신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잘생긴 완벽한 왕자님이었다. 과거의 아리아드네에게 이런 아들이 있었다면 통금은 오후 4시로 설정해두고 왕자궁에는 하녀는 출입금지시키고 대신 하인만 썼을 것이었다.

16550981408918.jpg“그런데 어마마마는 오늘 너를 초대했다는 이야기를 안 하셨어. 그냥 왜인지 오늘 부르셨을 것 같아서 내가 한 번 찾아와 본 거지.”

그렇게까지는 안 봤는데, 생각보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집착 시어머니의 자질이 충만했던 모양이다. 아리아드네는 뭐라고 대답할지 잠시 머리를 굴려 보았다. 보통 남의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면 무조건 칭찬해주는 것이 사회생활의 기초지만, 사춘기 소년이, 처음 보다시피 한 자신에게, 무려 엄마 욕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다 대고 ‘어머니는 나름의 사정이 있으셨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꼰대이니 앞으로 저와는 교류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교계의 최상층에서 9년을 굴렀던 아리아드네로서는 이 모든 계산이 찰나 간에 끝났다.

16550981389927.jpg“자유롭지 않겠네.”

아리아드네는 한 걸음 다가가서 알폰소의 머리카락을 대신 귀 뒤로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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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81389927.jpg“답답하겠다.”

소녀의 손이 소년의 매끄러운 머릿결을 쓸어내렸다. 소년은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빳빳하게 굳어 성큼 가까이 다가온 소녀를 쳐다보았다. 나를 이해해주는, 대화가 통하는, 좋은 냄새가 나는 사람. 그녀의 녹색 눈, 오뚝한 코, 붉은 입술이 차례대로 그의 눈 안에 들어왔다. 눈은 그냥 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그녀의 새카만 속눈썹이 짙게 드리운 초록색 눈동자 안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었다. 어제까지의 알폰소 데 카를로는 아이에 불과했다. 그는 타인에 대해서 별달리 관심이 없었다. 상대방이 관심사를 공유하는 또래 동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사람보다는 일어날 사건, 하게 될 놀이, 해야 하는 공부 같은 사건이 더 궁금했었다. 오늘에서야 그는 남자, 최소한 소년이 된 것 같았다. 가슴이 뛰었고, 그녀의 초록색 눈이 자꾸 생각이 났다. 초록색 눈의 반짝임, 눈웃음, 속눈썹 따위를 모두 그려본 다음에는 코, 코 다음에는 입술. 처음으로 타인의 이목구비가 의미 있게 그의 뇌리에 각인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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