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말레타의 배신2021.01.20.
왕자와 친분을 쌓고 왕비가가 내어준 새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뒷수습이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데 마레 추기경 관저는 분노한 루크레치아의 난동으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데 로시 양? 데 로시 양?! 마르그리트 왕비가 미쳤지, 어떻게 나를 이렇게 홀대할 수가 있어?!”
- 쨍그랑! 루크레치아가 던진 화병이 응접실을 갈랐다.
“더러운 갈리코 왕국 년! 외국인 주제에 어딜 에트루스칸 사람한테 감히 그런 말을 해?!‘
이번에는 마구 집어 던진 편지 개봉용 칼이 날아서 난로 안으로 처박혔다. 아라벨라는 응접실 구석에서 귀를 막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이사벨라는 옆에서 열심히 어머니를 부추기는 중이었다.
“맞아요. 왕비면 다예요? 시집온 지 20년이 다 됐는데 아직도 악센트 하나를 못 고치나? 입 열었을 때 촌스러워서 깜짝 놀랐잖아요!”
“그렇게 적응할 생각도 안 하고 있으니 남편 사랑을 못 받지! 그깟 임금의 애정 하나 붙들고 있지를 못해서 남편 얼굴은 일 년에 다섯 번이나 볼까 말까 하잖아!"
"법률혼이 별거예요? 정실부인 하면서 저렇게 꿔다 놓은 보릿자루로 사랑 못 받고 살 거면 그냥 첩실이 차라리 낫겠어요!”
“무능한 년이 괜히 자기가 능력이 없으니까 괜히 자격지심에 남자 마음을 잘 아는 여자들을 욕하는 거야!”
둘의 성토는 점입가경이었다.
“루비나 백작 부인이 사실 실질적인 실세죠. 궁정에서 국왕 폐하한테 청원을 넣고 싶으면 루비나 백작 부인을 통하는 게 제일 빠르다는 소문이 돌아요.”
“네가 이 엄마보다 낫구나. 교류하는 부인들도 없고, 아이고 내 팔자야!”
“루비나 백작 부인이 수완은 또 얼마나 좋아요. 이번에 루비나 백작 부인한테서 태어난 체자레 백작한테 변경의 봉토를 하사한다는 얘기가 나오잖아요.”
“본부인인 왕비가 낳은 왕자보다 첩이 낳은 체자레 백작이 나이가 더 많으면 볼 장 다 본 거지. 마르그리트 왕비는 젊었을 때도 휘어잡지 못했던 왕을 이제 와서 어떻게 잡겠다는 거야! 알폰소는 아직 왕세자 책봉도 못 받았고! 다 그 어미가 무능해서 그래! .”
“그러니까 괜히 엄마한테 화풀이나 하는 거잖아요! 사람이 못됐어! 저열해! 비열해!”
‘자기소개 잘 들었고요.’
아리아드네는 저 난장판에 끼어들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지금 들어가면 굶주린 하이에나의 앞에 던져진 고깃덩어리가 될 뿐이었다. 분노한 루크레치아와 불쏘시개를 찾는 이사벨라가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게 틀림없었다.
‘조용히 방으로 올라가야겠다.’
정문에서 3층 다락방으로 올라가려면 중앙 계단을 올라가야 했는데, 1층 응접실은 하필이면 중앙 계단 초입에 딱 붙어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저들이 한풀 꺾여서 응접실을 비우고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1층 복도에 숨어서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둘째 딸이 몇 시에 귀가하는지 여부를 살뜰하게 챙겨줄 모녀 관계는 아니었으니 귀가 시간이 늦건 말건 알아차리지도 못하리라.
“이 계집애는 왜 들어오지를 않아!”
‘아…….’
귀가 시간을 챙겨주는 것이 아니라 화풀이 대상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말레타가 루크레치아에게 집사에게 물어보겠다고 고하고 응접실에서 나오자마자 복도에 숨어 있던 아리아드네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아……, 아리아드네 아가씨 오셨습니다.”
‘융통성 없기는!’
아리아드네는 말레타를 무섭게 째려보고는 속으로 욕을 하면서 실시간으로 세간살이들이 결딴나고 있는 응접실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슝! 응접실에 들어가자마자 백자 도자기가 아리아드네의 얼굴 옆을 스치며 날아갔다. - 쨍그랑! 벽에 부딪힌 도자기가 산산조각이 나서 그 파편이 머리카락과 드레스 자락에 붙는 것을 느끼며, 아리아드네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이? 네가 날 어머니로 퍽이나 생각을 했기에 왕비의 미사에서 그렇게 창피를 줬겠다!”
루크레치아가 화를 낼 때는 말대답을 하면 안 되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어려서부터 그 부분을 항상 까먹고는 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말대답을 하고야 말았다.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머니.”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루크레치아는 부지깽이를 들어 아리아드네를 향해 던졌다. 부지깽이가 공중에서 회전하면서 날아오는 것을 간신히 왼쪽으로 머리를 돌려 피했는데, 그게 뒤에 웅크려 있던 아라벨라의 방향으로 날아가서 아라벨라의 다리에 맞았다.
“아아악!”
열 살짜리 꼬맹이가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지만 불운한 아라벨라에게 신경을 써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노에 먹힌 루크레치아는 자신의 친자식이 본인이 던진 부지깽이에 맞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열하는 아라벨라만 있을 뿐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쪼그려 앉아 아라벨라를 품에 안아 주었다. 열다섯 살짜리의 부실한 말라깽이 팔다리가 크게 위안이 되었을지는 의문이었지마는 아라벨라는 그나마도 감지덕지한 지 허겁지겁 품 안으로 안겨들었다. 사람의 온기는 아라벨라뿐만이 아니라 아리아드네에게도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기에는 엄습한 위협이 너무나 컸다. 아라벨라를 쓰다듬는 아리아드네의 앞에 위압적으로 두 다리를 벌리고 선 루크레치아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상체를 들이밀었다.
“너! 슈미즈 그거 일부러 그런 거지?”
‘멍청한 주제에 감은 끝내주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우격다짐으로 주장할 뿐이었지만 진실에 정확히 와 닿은 루크레치아에게 감탄하며, 아리아드네는 얌전하게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어머니.”
아리아드네는 선량한 척 고개를 더 깊숙이 숙이는 것과 동시에, 보란 듯이 자세를 바로 했다. 아리아드네가 걸치고 있는 것은 마르그리트 왕비가 새로 입혀서 보내준 슈미즈를 제외하고는 드레스며, 장식이며 모두 다 루크레치아가 아리아드네에게 보낸 싸구려 물건들이었다.
“제가 가진 옷이 정말로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그 말을 뱉은 직후, 왼쪽 약지 마지막 마디가 욱신욱신 쑤신다고 생각했다. 체자레 대신 걸린 병 탓에 썩어 문드러졌다가, 회귀하며 돌아온 새 손가락이었다. 루크레치아의 눈이 희번덕대며 주변을 훑었다.
“이 애 옷가지에 책임 있는 년이 누구야. 어느 년이 떼먹었어.”
방 안에 있었던 하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며 루크레치아의 눈길을 피했다. 그런데 말레타의 기색이 좀 심상치 않았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손을 꼼지락거리는 모양새가 뭔가를 할지 말지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아리아드네는 숨을 들이켰다. 뭔가 일을 칠 것만 같은 기색이었다.
‘입단속을 미리 시켜놓을 것을……!’
협박? 회유? 전생에서 평생 보아 왔던 말레타는 사소한 이득에 목숨 거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슈미즈를 산차에게 주는 것이 아니었다. 산차에게 줄 것이라면 말레타에게는 미래의 이득에 대한 귀띔이라도 해 뒀어야 했다. 생각이 짧았다.
‘제발, 제발 그냥 무난하게 넘어가라……!’
아리아드네의 불안·초조한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레타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3초쯤 지난 후에 결심을 한 듯이 옆에 서 있는 산차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얩니다, 얘!”
주근깨 소녀 산차의 생기 없는 녹색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얘가 아리아드네 아가씨의 옷을 관리하는 애예요!”
루크레치아의 높은 광대뼈가 신경질적으로 당겨 올라갔다. 아리아드네는 본인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에 어쩔 수 없이 본능적인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산차는 겁에 질려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네가 저년의 속옷을 훔쳤겠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마님.”
손사래를 치는 산차를 두고 루크레치아는 말레타에게 이를 갈며 명령을 내렸다.
“아가씨가 입는 비싼 슈미즈가 갖고 싶어서 훔친 거면 이 하녀 계집애 물품 속에 들어 있겠지. 말레타, 가서 뒤져보고 와!”
“예, 마님!”
말레타가 아주 기껍게 명을 받았다. 재빠르게 하녀들이 지내는 3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뒷모습을 보며 루크레치아는 얼어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산차를 위협하며 으르렁댔다.
“너, 네 짐 속에서 저년 슈미즈가 나오면 각오해라.”
아리아드네는 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해야 하는지 갈등했다. 말레타의 조그만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이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아리아드네는 루크레치아를 고의로 음해했다는 죄명에서는 벗어난 상태였다. 하지만 슈미즈를 바꿔 입자고 제의했던 것은 아리아드네였고, 산차는 죄 없이 난도질을 당할 참이었다. 산차가 결백을 주장해도 루크레치아가 믿어줄 리가 없었다. 아리아드네의 슈미즈는 정말로 산차의 짐 안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 이미 믿고 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까지 나오면 그 믿음은 움직일 수 없다. 이대로라면 산차는 루크레치아의 희생양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아리아드네는 도저히 미친 짐승처럼 을러대는 루크레치아 앞에 뛰어들어서 진실을 고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9년간의 사교계의 지배자 생활을 하며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루크레치아의 으르렁대는 소리는 아리아드네의 뼛속 깊이 각인된 어릴 적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모친이 루크레치아에게 채찍으로 맞던 모습. 어린 아리아드네를 자기 몸 뒤로 숨긴 어머니를 루크레치아가 발로 차고 아리아드네의 머리채를 잡았던 기억. 루크레치아의 맏아들인 이폴리토가 아리아드네의 모친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지나가던 기억.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항의도 못 했던 엄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엄마의 나무 관 앞에서 무릎 꿇고 울고 있다가 루크레치아가 장례식장 대용으로 관을 안치해 둔 헛간 근처를 지나가자 루크레치아와 마주칠까 봐 무서워서 엄마를 내버려 두고 혼자 도망쳐서 숨어 있었던, 인생 최고의 죄책감을 느꼈던 기억. - 으흑, 흑, 흑. 잔뜩 웅크린 산차의 등이 바들바들 떨리며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산차는 제대로 눈을 감지도 못하고 휘둥그레 뜬 눈으로 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가련한 산차의 뒷모습을 보는 아리아드네는 공포와 양심의 가책 사이에서 심장이 두 개로 쪼개지는 것만 같았다. 무서워서 모른 척하자니 산차에게 너무 미안했고, 목소리를 드높여 앞으로 나서자니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엄마의 관을 내버려 두고 혼자 마구간으로 도망쳐서 떨던 그날 느꼈던 죄책감이 가슴을 난도질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드름처럼 얼어 있는 일 초 일 초가 견딜 만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 욱신!
왼쪽 약지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새로운 약지를 구성한 뜨거운 피가 피부 거죽에서 우글거리며 면적을 넓혀 가고 있었다.
‘……아파!’
얼핏 환청이 들렸다. 그 목소리는 인간의 말이되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 황금률.
이 세계의 것이 아닌, 신적인 목소리가 속삭였다. 머릿속으로 의미가 그대로 와서 들이박혀 소리가 어떠한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네 이웃을 대해라. 너는 네가 당한 배신은 원망하고 슬퍼했지. 막상 너는 타인을 배신하고 이득을 본 적이 참말로 없느냐?
이는 속삭임 같기도 했지만 일갈 같기도 했다. 응접실에 모여 있는 모두가 고통받는 사이에 말레타는 번개같이 하녀들의 숙소에서 돌아왔다. 돌아온 말레타는 손에 들고 온 낡은 헝겊 자루에서 깨끗한 아가씨용 슈미즈를 의기양양하게 꺼내서 루크레치아에게 내밀었다.
“저년 맞습니다. 짐에서 이게 나왔습니다, 마님.”
루크레치아는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 같은 표정으로 슈미즈를 한 손에 받아 쥐고 그것을 허공에 흔들더니,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산차의 얼굴 위에 던졌다.
“이래도 할 말이 있느냐, 쥐새끼 같은 도둑년아.”
산차는 입을 꼭 다물고 두 손을 꼭 쥔 채로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분에 겨운 루크레치아는 손에 잡히는 물건을 아무거나 집어서 산차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허공을 난 것은 문진이었고, 두 번째로 던진 것은 잉크병이었다. - 부웅! - 퍽 파란 잉크병이 공중을 날아 산차의 이마에 정통으로 부딪혔다. 잉크가 허공에 산산이 흩뿌려져 응접실 안이 푸른 얼룩으로 가득해졌다. 푸른 잉크를 뒤집어쓴 산차의 모습은 머리카락으로 붉고, 잉크로 푸르고, 억울함이 가득한 두 눈과 기가 질린 낯빛으로 초록색이었다. 루크레치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펜촉이 끼워진 상아 펜을 들어 손이 가는 대로 산차를 때리기 시작했다. - 퍽 산차는 앓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매를 맞았다. 하지만 한 대를 맞을 때마다 온몸이 바르르 떨리는 것은 가리지 못했다. 산차가 한 대 맞을 때마다 아리아드네는 산차와 같이 몸을 떨었다. 산차가 맞을 때마다, 정확하게는 구타당하는 산차를 아리아드네가 외면할 때마다 왼손 약지의 혈향이 이글거리면서 타올랐다. 붉은 기운은 확실히 부피를 늘려가고 있었다.
- 선한 자의 고통으로 이득을 본 자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되리. 그것이 황금률의 저주.
그렇지만 지금 느끼는 고통이 순전히 붉은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산차가 맞는 게 자기가 맞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인지 아리아드네는 알 수가 없었다. 상아 펜대를 쥔 루크레치아의 오른팔이 허공에 높이 올라간 순간 아리아드네는 그만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멈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