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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푸른 심해의 심장 (21/733)

<제21화> 푸른 심해의 심장2021.02.14.

‘푸른 심해의 심장’은 타란토 영지에서 발견된 30캐럿에 달하는 선명한 군청색의 사파이어였다. 크기도 크기지만 쨍하면서도 동시에 깊은 색상이 매우 희귀하여 그 가치가 탁월한 물건이었다. 발견된 경위도 신비로웠다. ‘푸른 심해의 심장’을 최초로 발견한 자의 말에 따르면 돌고래 떼가 해안가에 나타나 사파이어를 놓고 사라졌다고 했다. 타란토는 바닷가에 면한 영지로 알려진 사파이어 광산이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입소문을 타서 수많은 호사가들의 소유욕을 자극했다. ‘푸른 심해의 심장’이 발견되었을 당시의 타란토 공작이 이 보석을 레오 3세에게 진상했고, 그 뒤로 이 보석은 쭉 왕궁 금고에 잠들어 있었다.

16550982836387.jpg“어허. 자네가 뭘 몰라서 그렇지 이건 꿩 먹고 알 먹기라네.”

레오 3세는 마차 안에는 비서관과 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서관을 가까이 오라고 손짓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16550982836387.jpg“이걸 데 마레 추기경의 딸아이에게 내리면 결국에는 시집올 때 다시 들고 오지 않겠나?”

16550982836396.jpg“예에?”

16550982836387.jpg“‘푸른 심해의 심장’은 데 마레 추기경이 오매불망 탐내던 보석이지. 지금 추기경의 둘째 딸에게 준다면 자기 거로 생각하고 좋아할 거야. 하지만 소유주가 엄연히 딸인데 그걸 뺏어갈 수야 있겠나?”

16550982836396.jpg“아니, 그럼 누구랑 결혼시키시려고요? 알폰소 왕자님 말씀이십니까?”

레오 3세가 역정을 냈다.

16550982836387.jpg“자네는 왜 이렇게 눈치가 없나! 알폰소를 어디다 갖다 대나! 알폰소의 배필은 일국의 공주나, 아니면 최소한 어디 공국의 공녀는 되어야지!”

16550982836396.jpg“죄송, 죄송합니다.”

16550982836387.jpg“당연히 체자레 아닌가!”

레오 3세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뿌듯해했다.

16550982836387.jpg“체자레 녀석은 어디 좋은 곳에 봉토를 마련해주고 추기경 장인을 만들어줘서 등 뜨습고 배부르게 잘살 수 있게 해줄 예정이야. 추기경의 둘째 딸이 본인도 서출이고 똑똑하고 총명하다니 잘 되었지 뭔가? 그놈은 성질머리가 급해서 차분한 안사람이 필요해.”

아들의 미래 설계를 어찌나 살뜰히 하는지 손주들 이름까지 다 지어놓을 기세였다.

16550982836387.jpg“게다가 말일세, ‘푸른 심해의 심장’을 루비나가 그렇게 갖고 싶어 했었다네.”

16550982836396.jpg“익히 알고 있습니다.”

비서관은 ‘그래서 정말로 저 소녀에게 주실 거냐고 여쭤본 것 아닙니까’, 라는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16550982836387.jpg“왕비의 눈치 때문에 못 줬어. 원망 많이 받았지. 이걸 추기경의 차녀가 체자레와 결혼할 때 들고 가면 결국에는 루비나의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끌끌끌.”

16550982836396.jpg‘그게⋯⋯. 여자 마음이 그렇지가 않을 텐데요⋯⋯.’

오매불망 가지고 싶어 하던 귀보석을 새파랗게 어린 며느리가 가지고 있으면 그 어떤 시어머니가 기뻐하겠는가. 루비나 백작 부인의 성격상 들이닥쳐서 강제로 뺏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비서관은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지금 불필요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싸움을 국왕께서 조장하고 계시는 것 같다던가, 폐하께서 조금만 더 여자를 잘 아셨다면 마르그리트 왕비 폐하와 이렇게 사이가 나쁘지는 않으셨을 거라던가, 루비나 백작 부인이 국왕 폐하의 얼굴을 아직까지도 할퀴지 않은 게 신기하다던가 등등. 하지만 그는 이미 오늘치의 반론권을 다 써버린 터였다. 말한다고 들어줄 거였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비서관은 더 이상의 반론을 포기하고 말았다.

16550982836396.jpg“영명하십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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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0982855266.jpg“아리아드네, 넌 어디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냐?”

아세레토의 사도를 물리치고 돌아온 아리아드네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데 마레 추기경의 추궁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서 ‘아버지의 학문’을 운운하며 개평을 거하게 떼어 주긴 했어도 받아먹은 것은 받아먹은 거고 출처 확인은 출처 확인인 모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리아드네의 활약은 열다섯 살 짜리 여자아이가 집에서 혼자 끄적인 것 치고는 지나치게 걸출했다. 아리아드네는 고심하여 말을 골랐다.

16550982855271.jpg“소일거리 삼아 집 안에 꽂혀 있는 아버지의 책들을 읽었습니다.”

아리아드네가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서 아세레토의 사도와 논쟁을 하며 근거로 댔던 성황서의 구절들은 트레베로 공의회에서 중앙 대륙 최고의 신학자들이 아세레토 학파를 이단으로 규정하며 내세웠던 근거 구절들과 정확하게 같았다. 데 마레 추기경은 이것을 이단 심판관이 법황의 칙서와 함께 들고 온 트레베로 공의회의 결론을 요약한 문서를 읽고서야 파악을 할 수 있었다.

16550982855266.jpg“이걸 네가 혼자 알아냈다고?”

밖에서는 데 마레 추기경의 신학적 지식이 넓고 깊어서 그가 키워낸 어린 딸마저 신학적 소양이 뛰어남을 찬양하고 있었지만 데 마레 추기경 본인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트레베로 공의회의 결론은 성황서의 체계에 통달한 자들이 창의성과 집단 지성을 발휘해서 토론의 결과로 이끌어낸 것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도 본인 휘하의 사제들을 동원하여 장기 집단 과제로 이끌어나간다면 모를까, 혼자서 책상머리 앞에 앉아 이러한 결론을 도출해 낼 자신은 없었다. 열다섯 살짜리 아이가 두 달간 신학 공부를 해서 혼자서 파악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는 여기서 지식을 뽐을 내기로 했다. 허세를 섞어서라도 단숨에 돌파해야 할 구간이었다.

16550982855271.jpg“위클리프의 <성자의 본질에 대한 소고>와 펠라기안의 <트리니타스를 연구하는 편지 모음>을 제일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나중에야 널리 알려지게 되겠지만, 실제로 트레베로 공의회의 결론을 도출해내는 데에 기반이 되었던 저술들이었다. 일이 년만 지나면 아이들의 필수 교양으로 온 중앙 대륙에서 달달 외우게 될 필독서가 될 책들이었지만 지금은 추기경의 자택쯤 되어야 그 필사본이 있을 정도로 희귀했다.

16550982855266.jpg“네가 그걸 다 읽었다고?”

16550982855271.jpg“위클리프가 문장 구조에 천착하여, <명상록>에 “성자께서 성부를 통하였다”고 저술되어 있는 부분이 다수 반복되고 있는 점에 착안하여 성자와 성부가 하나이심을 증빙한 부분이 제일 흥미로웠습니다.”

미심쩍어하는 데 마레 추기경에게, 아리아드네는 본인이 정말로 이름을 댄 책들의 내용을 알고 있음을 과장되게 과시했다.

16550982855271.jpg‘그냥 알고 있었어요, 내지는 미래를 보았다고 말하면 나는 끝장이야.’

아리아드네가 무엇보다도 피하고 싶은 것은 ‘성녀’로 불리게 되는 것이었다. 성황청의 공인이 없어도 문제였고 있어도 문제였다. 법황의 시성(諡聖)이 없이 성녀로 불렸다가는 이단 심판관에게 끌려가기 딱 좋았다.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시성 받는 것이 달갑지도 않았다. 루도비코 법황은 무서운 자였고, 살아서 성인, 혹은 성녀로 공인된 사람이 급작스레 이단으로 선포되어 화형대로 끌려가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흔한 일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이 성황청 안에서 막아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이미 전생에서 친딸을 팔아먹은 전적이 있었다. 성녀로 추봉(推捧)된 딸은 둘도 없이 이용해먹기 좋은 패일 것이다. 그녀는 성황청 내의 권력 관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내밀한 내막을 아는 것도 없었고, 아버지는 더더욱 믿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알고 있는 익숙한 판, 즉 산 카를로의 귀족 세계 안에서 스스로가 가진 패를 최대한 활용하고 싶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의심쩍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에게 그녀가 아직 접하지 못했을 트레베로 공의회의 최신 문서들에 기반을 두고 아무리 예리한 신학적인 질문들을 퍼부어대도 아리아드네는 마치 정답지를 외운 것처럼 정확하게 대답을 했다. 교리를 물어보아도, 근거 조문을 물어보아도, 최신 문답을 물어보아도 답은 기계로 찍은 것처럼 완벽했다. 그는 결국 수많은 의문점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자신의 둘째 딸이 신학 천재이며, 트레베로 공의회의 신학자들과 동일한 결론에 자력으로 도달하였다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심쩍었으나, 이것이 진실이라면 정말로 천 년에 한 명 나올만한 재능이었기 때문에 딸에게 권유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550982855266.jpg“대성황당에서 사제들과 신학 공부를 진행하고 있다. 너도 참여하겠느냐?”

아리아드네는 펄쩍 뛰며 거절했다.

16550982855271.jpg“아니요, 아버지! 저는 그러기에는 너무 학문이 얕아 부끄럽습니다. 집에서 공부하며 때때로 아버지께 모르는 것을 여쭤볼 터이니 그것만 허락해 주셔요.”

밑천이 드러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리아드네의 재능은 굳이 따지자면 장부 관리나 행정 업무 쪽이었지 신학 공부는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데 마레 추기경은 반쯤은 자기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에도 불구하고 아리아드네에게 정말로 재능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머지 절반쯤은 신학은 여성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리아드네의 필사적인 거절이 소녀다운 수줍음이라고 생각하고 굳이 더 권하지는 않았다. 하늘이 도우신 일이었다. * * * 산 카를로의 천재 소녀에 대한 이야기는 약간의 과장을 붙인 채로 온 에트루스칸 왕국에 퍼졌다.

16550982836396.jpg- ‘이단을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서 단신으로 내쫓았다지 뭐야!’

16550982836396.jpg- ‘신앙이 드높은가 보군.’

16550982836396.jpg- ‘역시⋯… 출생이 좀 그렇다고는 해도 추기경의 자식이야.’

여기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사람은 의외로 국왕의 정부, 루비나 백작 부인이었다.

16550982871205.jpg“체자레. 이것 좀 들어봐라.”

루비나 백작 부인은 아들을 잡아 앉혀 놓고 시중을 자자하게 울리는 아리아드네의 칭송을 들려주었다.

16550982871205.jpg“넌 왕이 될 사람이야. 배우자로는 인덕이 높은 사람을 만나야 도움이 된다.”

체자레는 콧방귀를 꼈다.

16550982871213.jpg“어머니. 정신 좀 차리세요. 알폰소가 자리를 저렇게 차지하고 있는데 제가 무슨 수로 왕이 됩니까?”

16550982871205.jpg“또, 또 삐딱하게 군다! 네 아버지는 너를 사랑하셔!”

16550982871213.jpg“그렇게나 절 사랑하셔서 봉토조차 없는 궁정 귀족의 작위나 하나 덜렁 내리신 겁니까! 고작 백작위!”

  - 쾅! 체자레는 정오를 넘기자마자 마시기 시작한 포도주잔을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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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82871213.jpg“어머니, 꿈 깨세요. 아버지가 날 왕위에 올릴 생각이 있으셨으면 데 코모 백작으로 남겨두는 게 아니라 왕의 핏줄이라고 공식 발표를 하셨을 겁니다. 지금 당장 저 망할 왕성에 벼락이 떨어져서 알폰소 놈과 아버지가 동시에 돌아가셔도 ̄.”

그는 일말의 양심이 있는지 여기서 성호를 긋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16550982871213.jpg“에트루스칸 왕위에 계승권을 가진 건 열두 살 먹은 타란토의 비앙카 계집애지 제가 아닙니다. 아시겠어요?”

얼마 남지 않은 포도주를 벌컥 단숨에 끝내버린 그는 친모에게 거칠게 으르렁댔다.

16550982871213.jpg“그러니까 쓸데없는 말씀 좀 그만하세요. 제 여자는 제가 골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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