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2화> 왕비 폐하 알현을 위한 드레스 (22/733)

<제22화> 왕비 폐하 알현을 위한 드레스2021.02.17.

그러나 루비나 백작 부인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들이 늑대처럼 흉맹했다면 백작 부인은 산을 타고 내려온 대호 같았다. 그녀는 아들이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은 포도주 잔을 손날로 쳐서 탁자 바깥으로 날려 버렸다. - 쨍그랑! 대리석 바닥에 떨어진 유리잔은 요란한 소리가 나며 산산조각이 났다. 그녀는 유리잔의 잔해를 밟고 일어서 아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며 을렀다.

16550982980204.jpg“내 배를 빌려 나온 녀석이 어디다 대고 감히 어미한테 큰소리를 내.”

솜털과 솜털이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붙어 있어서 체온과, 숨소리가 느껴졌다. 미동도 없는 체자레를 루비나 백작 부인은 거칠게 을렀다.

16550982980204.jpg“너는 왕이 될 거야. 못 한다고 말하기만 해 봐. 안 되면 되게 해야지, 못난 것!”

몸을 세워 일으킨 루비나 백작 부인은 구두를 또각거리며 응접실 안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16550982980204.jpg“폐하께서 그 아이에게 ‘푸른 심해의 심장’을 하사하실 거라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푸른 심해의 심장’이라니! 이 엄마가 그걸 왜 가지고 싶어 했는지 알아?”

16550982980219.jpg“압니다, 알아요, 어머니의 점성술사가-.”

16550982980204.jpg“빈정거리는 말투 집어치워라!”

루비나 백작 부인은 크게 화를 내며 아들을 돌아보았다.

16550982980204.jpg“‘푸른 심해의 심장’을 지닌 자가 왕이 된다고 했어.”

그녀의 눈은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이 확신을 담고 있었다.

16550982980204.jpg“내가 왕의 여자가 될 거라는 것, 네가 아들일 거라는 것, 모두 다 예언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아들에게 다가간 그녀는 손가락으로 아들의 가슴팍을 꾹 눌렀다. 그 힘에 체자레의 상체가 뒤로 밀렸다.

16550982980204.jpg“다 너를 위한 거야. ‘푸른 심해의 심장’을 가져와.”

  * * * 국왕의 하사품은 왕궁에서 왕비를 알현하고 전달받기로 하였다. 국왕의 하사품이니 국왕이 내리는 것이 원칙이지만, 급한 회의가 있던 레오 3세의 일정상 마르그리트 왕비가 대신 희사를 내리기로 한 것이다. 지난번에 마르그리트 왕비에게 단단히 수치를 당한 바 있는 루크레치아는 이번에 아세레토의 사도를 아리아드네가 물리친 사건으로 인해 데 마레 추기경에게 추가적으로 한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16550982980274.jpg“온 산 카를로가 봤소. 애가 입을 게 없어서 후줄근한 걸 말이오!”

16550982980278.jpg“여보, 전 그 아이에게 줄 것을 모두 다 줬어요! 금귀걸이도 해 줬다고요!”

16550982980274.jpg“호칭이 왜 그따위야! 내 얼굴에 먹칠을 해 놓고 지금 ‘여보’ ‘당신’ 소리가 나와? 아니 그래서, 당신은 지금 아리아드네한테 입혔던 것들이 남들 보이기에 떳떳했다는 거요?”

둘은 팽팽하게 설왕설래를 했다. 루크레치아 입장에서는 적지 않이 억울했을 것이었지만 결국 데 마레 추기경이 아리아드네의 옷장을 열어보자고까지 하여 3층 다락방에 다 같이 올라가 둘째 딸의 허름한 워드로브를 열어젖힌 순간 루크레치아는 자기가 잘못했음을 추기경 앞에서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아리아드네의 옷장에는 딱 세 벌의 옷이 덜렁 걸려 있었다. 왕비의 미사에 입고 갔었던 크림색 외출복 하나,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 입고 갔던 검은 외출복 하나, 그리고 마지막은 밖에 입고 나갈 수 없는 실내용 원피스였다. 심지어 신발은 농장에서 신고 다니던 신발을 제외하면 동그란 앞코의 어린이용 구두 한 켤레밖에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이 신발을 집 뒷마당에도, 대미사에도, 왕궁에도 모두 신고 다녔다.

16550982980274.jpg“아이고, 머리야!”

옷장을 열어본 데 마레 추기경은 이마를 짚었고 루크레치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여기서 말대답을 했다가는 생활비의 용처 문제가 나올 것이 틀림없었다.

16550982980274.jpg“나는 당신이 도대체 어디에 돈을 쓰는지 모르겠어. 둘째는 똑같은 옷을 입고 왕비를 두 번 만날 뻔했소. 이 애의 생활을 언제 누가 들여다보더라도 둘째가 우리 집에서 못 먹고 못 입는다는 소리는 안 나오게 하시오!”

그리하여 아리아드네는 회귀 후 처음으로 양장점이라는 호화로운 신문물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 * *

16550983004314.jpg“어리지만 참 팔다리가 길쭉길쭉하세요.”

티베리 강가에 모여 있는 고급 의상실 거리 뒤에, 루크레치아가 거래하는 질 좋은 양장점이 잘 숨어 있었다. 라지오네 양장점은 솜씨에 비해 가격대가 좋아 루크레치아는 이곳을 쑥쑥 자라는 아라벨라의 옷을 해서 입힐 때 애용하고는 했다. 오늘 라지오네 양장점의 마리니 부인은 데 마레 추기경 관저에 와서 아리아드네의 치수를 재어 여름 외출복과 가을옷을 어떻게 맞출까 토의를 하는 중이었다.

16550983004314.jpg“금방 클 거에요. 키뿐만이 아니라 흉통도, 다른 곳도요.”

마리니 부인은 아리아드네를 향해 눈을 찡긋 해 보였다. 아리아드네는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16550983004314.jpg“데콜테를 좀 파 둘까요? 아직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으신 건 알지만, 체형은 곧 아가씨들처럼 될 거에요. 어린아이처럼 맞추기에는 이제 너무 컸어요.”

보통은 어머니가 함께 앉아 사춘기 소녀의 옷을 어떻게 맞출지 꼼꼼하게 훈수를 두었겠지만, 아리아드네는 산차와 단둘뿐이었다. 루크레치아는 데 마레 추기경에게 아리아드네의 옷장 문제로 호되게 혼이 난 다음에 자기가 있어봤자 속이나 상한다며, 라지오네 양장점에 5두카토 (약 500만 원)를 한도로 해서 최대한 많은 종류의 여름 외출복과 가을 외출복을 만들어달라고 하며 보지도 않고 전권을 통째로 맡겨 버렸다. 그래서 아직 어린애의 데콜테를 파면 어떻게 하느냐고,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우고 치마 기장은 최대한 길게 만들어 달라고 호들갑을 떨어줄 어머니 대신, 아리아드네는 스스로 양장점 주인을 말려야 했다.

16550983004324.jpg“그럴 일은 없어. 최대한 옷깃을 올리고 목둘레선은 깊게 파지 마.”

회귀 후의 아리아드네는 루크레치아가 하는 각종 구박에 불만이 좀 있었지만, 유일하게 아리아드네와 루크레치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부분은 식사였다. 루크레치아는 데 마레 추기경의 눈이 안 닿을 때면 아리아드네에게 음식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16550983004327.jpg- “너는 덩치가 너무 커서 남자를 안는 것 같대. 네 가슴은 너무 크고 쳐져서 젖소인 줄 알았대.”

회귀 전의 아리아드네는 키가 크고 골격도 있는 늘씬한 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체격이 있어 보이는 자신의 몸을 옹송그리고 다녔다. 키는 커도 체구가 호리호리한 체자레의 옆에서 거대해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이번 생의 아리아드네는 필사적으로 적게 먹었다. 절대로 자라고 싶지 않았다. 체자레의 품 안에 쏙 들어가는 조그만 사이즈의 이사벨라처럼 작고 가녀려지고 싶었다. 그리고 몸매가 드러나는 것은 질색이었다. 타인의 시선이 절대로 나를 훑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아리아드네는 소망했다.

16550983004324.jpg“너무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네. 붙거나 드러나게 만들지 말고, 품을 넉넉하게 잡아서 최대한 가려줘.”

마리니 부인은 아리아드네의 주문이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16550983004314.jpg“네⋯⋯? 아니, 영애께서 뭘 걱정하시는지는 알겠어요.”

그녀는 아리아드네의 치수를 재며 드레이핑 해 두었던 천을 느슨하게 풀어 거울 앞에서 아리아드네에게 직접 보여주었다.

16550983004314.jpg“기본적으로 볼륨이 있으세요. 앞으로는 더 생길 거에요. 그런데 상의를 풍성하게 입어 버리면⋯⋯. 이거 보세요. 도리어 더 부해 보이죠?”

그녀는 반대로 드레이핑 한 천을 등 뒤에서 단단하게 잡아서 실루엣을 보여주었다.

16550983004314.jpg“이렇게 밀착되게 입으면 윤곽이 꽉 잡히면서 오히려 더 날씬해 보입니다. 흉곽이 눈에 띄지 않길 바라도 마찬가지예요. 차라리 좀 두꺼운 천으로 힘있게 눌러서 가슴 윤곽이 눈에 띄지 않도록 하는 편이 나아요.”

눈으로 보니 과연 전문가의 이야기가 정확했다. 더 이상 고집부리기도 난처했다. 아리아드네는 마리니 부인이 권하는 대로 의상을 맞추되 광목천을 가슴에 둘러서 가슴께의 볼륨을 한 번 더 눌러줘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 * * 결국 아리아드네의 손에 쥐어진 것은 화사한 연한 녹색의 외출복 한 벌, 사랑스러운 노란색의 외출복 한 벌, 우아한 흰색의 드레스 한 벌이었다. 신발은 구두장이가 곧 맞춰서 보내기로 했다. 거기에 약간의 잡다한 실내복이 추가되었고, 나머지는 가을까지 준비해 주기로 했다. 오늘 왕비 폐하를 알현하러 가면서 입을 옷은 흰색 드레스였다. 에트루스칸 국내에서 제작된 도톰한 공단으로 은은한 광택이 도는 재질의 원단을 깔끔하게 재단하여 노출이 적고 우아한 느낌을 냈다. 전혀 어린 영애의 옷 같아 보이지 않았다.

16550983004314.jpg“세상에, 아무도 몰라보겠어요 아가씨!”

16550983019406.jpg

  아리아드네의 머리를 단장시켜 주면서 산차가 내뱉은 탄성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찡그리며 웃었다.

16550983004324.jpg“그렇게 못났었느냐.”

16550983004314.jpg“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었죠.”

아리아드네가 산차의 어깨를 때렸다. 산차는 혀를 내밀어 보였다.

16550983004314.jpg“아, 칭찬이에요 칭찬! 이제는 예쁘다고요.”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을 땋아 반 묶음으로 올려 주면서 산차는 약간 아쉬움에 한숨을 쉬었다.

16550983004314.jpg“그렇지만 우리 아가씨도 이렇게나 어린데, 좀 더 귀엽고 화려한 모양으로 꾸미셔도 좋을 텐데.”

아리아드네는 질색했다.

16550983004324.jpg“난 그런 거 안 어울려.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마.”

산차가 아리아드네를 향해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냈다. 아직 가진 장신구라고는 루크레치아의 금귀걸이와 은 십자가 목걸이가 고작이었기 때문에, 산차는 생화를 구해서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에 꽂아 주었다. 제철을 맞은 흰 리시안셔스였다. 같은 꽃으로 조그맣게 부케를 만들어 리본을 묶어서 손목에다 차니 장신구 없이도 썩 어울리는 치장이 되었다.

16550983004314.jpg“자, 왕비님을 어서 뵙고 오자고요!”

  * * * 데 마레 추기경이 왕궁까지는 데려다주었지만 왕비의 알현은 아리아드네 혼자 들어가게 되었다. 왕비의 알현이 여성들만 모이는 소규모 응접실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기 때문에 데 마레 추기경이 들어가기에 부적절하기도 했고, 데 마레 추기경이 왕궁에서 별도의 일정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데 마레 추기경에게는 둘째 딸을 살뜰히 챙길 의지가 부족했다.

16550982980274.jpg“문제 일으키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아리아드네를 왕비궁의 입구에 내려 주며 데 마레 추기경이 한 당부였다. 아리아드네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16550983004324.jpg“아무렴요.”

내 아버지는 나를 걸어 다니는 화약고쯤으로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자녀는 본인보다 그 부모가 그 성품을 더 잘 알 때가 왕왕 있는 법이다. 아리아드네는 왕비 폐하의 알현시간이 되기 전까지 왕비궁의 전면에 마련되어 있는 대기실에서 기다리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벽에 장식된 유리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니 장신구가 하나도 없는 모양새가 생각보다 많이 초라했다. 보석 대신 생화를 풍성하게 단다고 달았지만 리시안셔스는 꽃송이가 크지는 않은 꽃이어서 화사함에 한계가 있었다.

16550983004324.jpg‘왕비궁 뒤뜰에는 작약을 키우고 있을 텐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색뿐이어서 핑크색 작약 한 송이만 얹으면 훨씬 생기있고 눈에 띌 것 같았다. 왕비 폐하의 알현 시간까지는 넉넉잡아 한 시간 반이 넘게 남아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왕비궁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았다. 일단 궁전에 들어온 이상 내부에는 따로 출입을 막을 경비병도 없었고, 시간 역시 후원까지 살짝 다녀오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아리아드네는 치맛단을 살짝 들어 올리고, 다람쥐처럼 양옆을 살핀 후에 몰래 대기실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 * * 왕비궁의 후원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중앙회랑을 따라 걷는 것이지만, 버려진 분수대를 통하면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뒤뜰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재빠른 동작으로 뒤뜰을 향해 버려진 분수대를 가로질렀다. 여기는 원래 가장 외진 곳이었다. 사람과 마주칠 가능성은 여기가 제일 낮았다.

16550983038919.jpg“아리아드네?”

하지만 확률과 현실은 달랐다.

16550983004324.jpg“누구?”

팔라지오 카를로에서 그녀를 이름으로 부를 만한 사람은 알폰소 왕자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리아드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근처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16550983038919.jpg“여기야, 위에.”

역광 사이로 느티나무 위에 앉아 있는 남자의 실루엣이 비치고 있었다.

1655098303893.jpg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