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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알폰소의 비밀 공간 (23/733)

<제23화> 알폰소의 비밀 공간2021.02.21.

아리아드네가 목소리를 따라 위를 올려다본 시선 끝에는 버려진 분수대 옆에 잎사귀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느티나무가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 가지 위에 책 한 권을 들고 누워 있던 참이었다. 그는 펼쳐서 얼굴에 덮고 있던 책을 닫아 옆에 올려놓으며 아리아드네에게 손짓했다.

16550983117378.jpg“올라오라고?”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83117386.jpg“나무 위가 제일 사람들 눈에 안 띄어.”

왕비 폐하의 알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작약을 굳이 급하게 따러 갈 필요 역시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왕자 옆까지 기어 올라가기 위해 자기 힘으로 나무의 둥치를 디뎠다. 하지만 풍성한 드레스 자락 때문에 힘을 주어 훌쩍 뛰어오를 수가 없었다.

16550983117386.jpg“도와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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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을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알폰소 왕자 쪽으로 내밀었고, 알폰소 왕자는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아주었다. 유난히 두껍고 커다란 손이 아리아드네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과 맞닿았다.

16550983117386.jpg“이쪽으로, 옳지.”

손을 잡아주는 정도로는 아리아드네가 가지 위까지 안전히 앉을 수가 없었다. 팔뚝 안쪽까지 손을 대어 그녀를 들어 올리다시피 해서 느티나무 가지 위에 앉힌 왕자는 그제야 문제점을 하나 발견했다.

16550983117386.jpg“이런, 너 드레스가 흰색이었네.”

아리아드네는 웃음을 빵 터트리며 대답했다.

16550983117378.jpg“뭐야, 보지도 않고 일단 올라오라고 한 거야?”

알폰소는 유쾌하게 함께 웃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워서 바로 부른 것이었다. 옷 따위는 볼 사이도 없었다. 알폰소는 잠시 고심하더니, 본인이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었다.

16550983117386.jpg“잠깐만 이 위로 올라와 볼래?”

왕자가 가리키는 것은 본인의 무릎이었다. 아리아드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6550983117378.jpg‘이건 너무 직진인데.’

하지만 역시,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다. 알폰소 왕자의 호의는 아리아드네가 이번 생을 체자레와 데 마레 가문으로부터 자유롭게,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줄 황금 티켓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알폰소의 무릎 위로 무게중심을 옮기자, 그는 비게 된 느티나무 가지 위에 본인의 망토를 깔고 아리아드네를 도로 가지 위에 앉혔다.

16550983117386.jpg“자, 이제 괜찮지?”

불필요한 터치 하나 없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몸놀림이었다. 사심은 아리아드네의 가슴 속에만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괜히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만 끄덕였다.

16550983117378.jpg“알폰소, 아니 근데 왜 여기에 있었던 거야?”

알폰소는 마주 웃었다.

16550983117386.jpg“내가 할 말이야. 너야말로 어쩌다가 여기로 온 거야?”

하긴, 왕자가 왕궁에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아리아드네는 바보 같았던 본인의 질문에 쓰게 웃었다.

16550983117378.jpg“오늘 마르그리트 왕비 폐하의 알현을 하게 되어 있어.”

16550983117386.jpg“아! 오늘이 그날이었구나!”

아세레토의 사도를 무찌른 데 마레 추기경의 차녀가 왕궁에 와서 국왕 내외의 치하와 왕비 폐하의 희사품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다.

16550983117386.jpg“아바마마께서 네 칭찬을 몹시 하셨어.”

16550983117378.jpg“그래?”

아리아드네는 국왕에게서 높이 평가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순전히 기뻐하지만은 못했다. 평판이 높아져야 운신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레오 3세는 특이한 아이디어를 많이 가지고 있는 군주였다. 고약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의 눈에 띄는 것이 꼭 좋기만 한 것인지는 확신이 가지 않았다.

16550983117386.jpg“너에게 기사단 훈장(Order of Chivalry)을 수여 못 하시는 게 아쉽다고 하셨대.”

알폰소 왕자는 유일한 왕위계승권자이자, 아직까지는 국왕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편이었다. 국왕은 그의 어린 아들을 귀여워했다. 그래서 국왕의 측근들은 알폰소 왕자에게 임금의 동향을 알리는 데에 크게 스스럼이 없었다.

16550983117378.jpg“아깝다. 기사가 될 기회였는데.”

농담처럼 웃었지만 진심으로 아쉬웠다. 그 작위 하나만 있으면 데 마레 가문에서 뛰쳐나와 혼자 자유롭게 살 수 있었을 텐데.

16550983117386.jpg“기사가 되고 싶어?”

알폰소 왕자의 눈이 빛났다. 그는 마상 창시합, 승마, 검술, 방패술 등 기사에게 요구되는 모든 기예에 능통했다. 또한 기사의 일곱 가지 자질이라고 일컬어지는 용기, 정의로움, 너그러움, 고결함, 신에 대한 경외, 그리고 금욕과 절제를 잘 체화하였다고 평가받았다. 기사 중의 기사, 모든 기사의 존경을 받는 중앙 대륙의 군주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16550983117386.jpg“언젠가 네게 서임을 줄게.”

16550983117378.jpg“충성의 맹세를 해야 하는 거야?”

  - 나의 영혼에 맹세컨대, 오늘 이 순간부터 나의 주군께 충성을 바치겠나이다. 그 어떤 역경 앞에서도 그를 보호하고 경의를 표하며 주군의 안위를 나의 목숨보다 앞에 놓겠나이다. 개인의 이익보다 더 큰 선을 위해 살겠습니다. 주군께 항상 진실만을 고하고, 그에게 한 약속을 지키며, 변하지 않고, 떠나지 않고, 주군의 곁을 항상 지키겠나이다. 기사가 주군에게 바치는 충성의 맹세는 아리아드네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저것이 도무지 지킬수가 없도록 만들어진 형편없이 로맨틱한 맹세라고 생각했다.

16550983117378.jpg‘게다가 주군의 목숨을 앗아간 기사라니, 성황서에 나오는 배신자, 카리옷 사람 쥬다스나 마찬가지군.’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에게 충성의 맹세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리아드네는 알폰소를 함정에 빠뜨린 적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체자레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죄를 저질렀으면서 알폰소의 기사가 된다면 지옥불에 영원히 불타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16550983117386.jpg“지금은 내가 군주가 아니니까 줄 수 없어. 그날이 오면 내 기사가 될 영광을 주지.”

16550983117378.jpg“난 칼도 못 쓰고 창도 못 쓰는걸.”

16550983117386.jpg“그때까지 배워놔.”

아리아드네는 그의 확고한 창검주의에 까르르 웃었다.

16550983117378.jpg“나라를 칼로만 지키려는 거야? 문관도 쓸모가 있을 수 있잖아.”

16550983117386.jpg“그 사람들 역시 꼭 필요한 사람들이지. 훌륭한 인재야. 하지만 기사는 아니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최전방에서 나라를 보위하기 위해 적군과 격돌하는 기사. 알폰소는 언젠가 충성심에 불타는 금빛 기사단과 함께 에트루스칸 왕국을 융성시키는 군주가 될 작정이었다.

16550983117378.jpg“능력주의가 아니라 연고주의를 계획하고 계시는군요. 칼도 창도 쓰지 못하는 사람을 자기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기사로 서임하겠다고 하다니.”

16550983117386.jpg“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러네. 암군이 되지 않으려면 취소해야겠다.”

아리아드네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16550983117378.jpg“아니야. 빨리 배울게, 창검술.”

아리아드네는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며 큰 소리로 고했다.

16550983117378.jpg“제가 얼른 이제부터라도 검술을 배워 천하제일의 기사가 되어 전하의 첫 번째 검이 되겠나이다. 제 빼어난 검술에 실망하지 않으시도록 하겠습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하는 기사라니, 훌륭한 기사의 안티테제나 다름없었다. 둘은 얼굴을 마주 보며 까르르 웃었다. 크게 웃던 아리아드네는 몸의 균형이 어긋나는 것을 느꼈다.

16550983117378.jpg‘어, 어?’

등 뒤에 묘하게 부양감이 있었다. 아무것도 몸무게를 받쳐주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두 팔을 허우적댔다.

16550983117386.jpg“위험해!”

나무에서 떨어지려는 아리아드네를 구해준 것은 알폰소 왕자였다. 알폰소는 몸을 던지다시피 해서 그녀를 잡았다. 먼저 팔과 팔이 닿았고, 그 다음에는 알폰소가 그녀를 잠시 껴안듯이 감싸 안았고, 무게중심이 안정되자 사방이 고요해지며 나뭇잎이 바람에 쓸리는 소리와 함께 공단과 공단이 마찰하는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났다.

16550983117378.jpg“아앗.”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왕자 쪽에서는 한 톨의 사심도 없어 보이는데 본인의 기대가 쌓여가는 거 같아서 아리아드네는 입 안쪽의 살을 깨물며 표정 관리를 하려고 노력했다. 어색해지면 안 됐다.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그랬지만 그녀는 감정적으로도 지금 알폰소 앞에서 우스운 꼬락서니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황금의 왕자님 앞에서 바보 같은 몰골을 보이다니, 최악이다. 다행히 왕자 쪽에서 먼저 그녀를 단정히 앉히고는 대화의 주제를 바꾸어 주었다.

16550983117386.jpg“이쪽에는 무슨 일로 온 거야? 어머니의 알현실로 가는 길이 아닌데.”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이번에는 당황으로 물들었다.

16550983117378.jpg“그게…….”

그녀는 공식적으로 왕비의 후원에 무슨 꽃이 있는지 몰라야 했다. 아리아드네는 재빨리 변명을 찾아냈다.

16550983117378.jpg“꺾어서 머리에 달 꽃을 찾고 있었어. 왕비 폐하를 알현하러 가는데 몸단장이 너무 초라한 것 같아서……. 이쪽이 정원이 맞지?”

거짓말은 반 스푼만. 정원을 찾아가던 길인 것은 맞았다. 정원이 어딘지 지나치게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뿐이지. 차려입은 옷이 변변치 못하다고 알폰소에게 이실직고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사람은 가지고 싶은 것을 모두 다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알폰소는 반대로 휘둥그레한 눈으로 아리아드네를 쳐다보았다.

16550983117386.jpg“초라해?”

그의 눈으로 보건대 이 검은 머리의 소녀에게는 더하거나 뺄 것이 없었다.

16550983117386.jpg“예쁜걸?”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다시 한번 빨개졌다. 알폰소 왕자 앞에서는 자신이 정말로 열다섯 살 소녀가 된 듯해서 생경했다. 그녀는 자기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항변했다. 정답을, 감정을 모르겠을 때에는 머리와 논리로 생각하자. 아리아드네가 평생을 살아왔던 방식이었다.

16550983117378.jpg“장신구가 없어서 생화로 장식했는데, 꽃봉오리가 작아서 화려함이 덜하잖아. 산 카를로에 이러고 왕비 폐하를 뵈러 가는 영애는 나밖에 없을걸.”

여성의 복식에 무지한 왕자도 아가씨의 머리 장식에 보석이 없고 꽃만 있다는 이야기는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16550983117386.jpg“아―. 그게 마음에 걸렸구나.”

그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16550983117386.jpg“어마마마의 알현이 몇 시지?”

16550983117378.jpg“오늘 오후 세 시.”

한 시간여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알폰소는 고개를 저었다.

16550983117386.jpg“그럼 시간이 좀 촉박한데.”

왕자궁에는 금은보화가 많았지만 여자의 머리 장식 따위가 레디메이드로 굴러다니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융통해 줄 수 있을지 잠시 고심해 보았다.

16550983117386.jpg“일단은 이걸로 하자.”

그는 소매에 장식용으로 들어간 긴 끈을 당겨 풀었다. 녹색 비단 위에 자잘한 보석이 자수 하나하나 사이에 아로새겨져 찬란한 광채를 뽐냈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머리에 보석 끈을 리본처럼 묶어 주었다.

16550983117386.jpg“이러면 되겠지?”

아리아드네는 녹색 리본이 농작물에 묶인 볏짚 비슷한 느낌으로 개발새발 메여 있으리라는 점에 돈도 걸 수 있었다. 왕자의 손놀림으로 보아하니 그는 여자의 머리끈을 어떻게 묶어야 하는지 잘 아는 부류의 남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직접 옷 장식을 떼어 자신의 머리에 묶어 준 알폰소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예뻤다. 그녀는 예쁘게 눈을 접어 웃음으로써 알폰소에게 화답했다.

16550983117378.jpg“고마워. 진짜로 마음에 들어.”

  * * * 알폰소 왕자와 버려진 분수대에서 노닥이던 아리아드네는 늦지 않도록 시간을 맞추어 왕비궁의 대기실로 되돌아왔다. 국왕 폐하의 하사품 증정식은 보통 궁정 관리 여럿이 주관하는 화려한 행사였다. 하지만 마르그리트 왕비는 성격이 극도로 폐쇄적이라 원체 그런 것을 즐기지 않았고, 규모가 큰 증정식을 열게 되면 왕비의 입장에서 공식적으로는 아리아드네의 모친인 루크레치아를 초청하지 않을 핑계가 없었다. 그래서 왕비의 알현은 일전에 왕비의 미사 초대를 받았던 바로 그 응접실에서 왕비의 갈리코 출신 시녀들 한두 명, 마르케즈 백작부인과 치보 자작부인 정도가 있는 소규모 공간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16550983174452.jpg“-그리하여 나 국왕 레오 3세는 데 마레 추기경의 차녀에게 아래와 같은 상을 내리니, 앞으로도 국가를 위하여 정진하길 바란다.”

아늑하게 꾸며진 왕비의 의자에 앉아 자기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꿇어앉은 아리아드네를 향해서 앞부분에 ‘공덕’, ‘효심’, ‘신실함’ 같은 단어들이 가득 찬 국왕의 칙령을 드디어 다 읽어내린 마르그리트 왕비는 한 손을 내밀며 인자하게 말했다.

16550983174452.jpg“드디어 일어나도 되겠구나. 이리 가까이 오련.”

아리아드네는 궁정 예법에 정확히 맞추어 오른발에 힘을 주어 일어난 다음 무릎 인사를 올리고 왕비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16550983174452.jpg“이리, 좀 더 가까이.”

왕비가 꺼내놓은 것은 흑단나무에 세밀한 조각을 새기고 그 위를 황금과 순은으로 칠한 거대한 보석함이었다.

16550983174452.jpg“이것을 폐하께서 너에게 내리실 줄은 몰랐단다.”

아리아드네는 왕비의 말투에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16550983117378.jpg“그것이 무엇인지 감히 여쭈어볼 수 있겠습니까?”

왕비는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왕비의 의자 옆 협탁에 올려놓은 국왕의 칙령서를 열어 양피지 끝부분을 마저 읽었다.

16550983174452.jpg“하사품은 금 50두카토, 마르그리트 왕비가 선택하여 고르는 장신구 한 상자, ‘푸른 심해의 심장’으로 한다.”

아리아드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마르그리트 왕비가 흑단나무 보석함의 뚜껑을 열었고, 눈부신 광채가 흘러나왔다. 조그만 밤톨 크기의 군청색 사파이어가 아주 작은 눈부신 다이아몬드들로 둘러싸이도록 세공된, 압도적으로 호화롭고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목걸이였다. 아리아드네는 즉시 일어나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바닥에 양 무릎을 모두 꿇고 머리를 바닥에 조아린 후 높이 외쳤다.

16550983117378.jpg“왕비 폐하, 소녀 이를 도저히 받을 수가 없나이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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