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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왕비의 희사 (24/733)

<제24화> 왕비의 희사2021.02.24.

아리아드네의 급작스러운 부복에 마르케즈 백작 부인과 치보 후작 부인은 놀란 모습이었지만, 마르그리트 왕비만큼은 차분하니 전혀 동요가 없었다.

16550983272366.jpg- ‘도대체 저 보물을 왜 사양하는 거지요?’

16550983272366.jpg- ‘글쎄⋯⋯. 가문의 영광 아닙니까?’

16550983272366.jpg- ‘그렇죠? 이건 가보가 되고도 남을 보물인데요.’

하지만 전혀 영문을 모르겠어 하는 치보 후작 부인과 비교하면, 마르케즈 백작 부인은 약간의 힌트는 잡은 모양이었다.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속닥이는 두 귀부인을 뒤로 하고, 아리아드네는 부복을 한 채로 마르그리트 왕비에게 간절하게 청을 올렸다.

16550983272382.jpg“분수에 맞지 않는 보물은 그 주인을 해하는 법입니다. 저는 오늘 입은 옷에 어울리는 장신구가 없어서 머리 장식 대신 꽃을 달고 왔습니다. 이런 과분한 물건은 가질 급도 되지 않고 지킬 능력도 없습니다! 왕비 폐하, 제발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마르그리트 왕비의 입꼬리가 단호하게 다물렸다.

16550983272387.jpg“아리아드네 데 마레. 네가 왜 그러는지는 안다.”

왕비는 아리아드네가 불쌍하다는 눈초리로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기는 했지만, 왕비의 얼굴에 서린 냉한 기색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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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83272387.jpg“하지만 이건 국왕 폐하의 명이야. 나도 도와줄 수가 없구나.”

그녀는 왕비의 의자에서 내려가 무릎을 꿇은 아리아드네를 손수 일으켜 세워 아리아드네의 두 손에 ‘푸른 심해의 심장’이 담긴 흑단나무 보석함을 안겨주고 말았다. 왕비의 부축도, ‘푸른 심해의 심장’도 누군가에게는 가문의 영광이자 지고한 영예일 것이었지만 지금의 아리아드네에게는 목숨의 위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저 새파랗게 질려 있을 뿐이었다.

16550983272387.jpg“내 한마디를 해주마. ‘푸른 심해의 심장’은 확실히 네가 가지고 있기에는 지나치게 귀한 보물이지. 그렇지만 이건 국왕 폐하를 제외한다면 어차피 누가 가지기에도 사이즈가 너무 커. 이걸 노리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자기들끼리 균형을 잡게 하려무나. 네가 혼자서 ‘푸른 심해의 심장’을 지킬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여러 명이 동시에 ‘푸른 심해의 심장’을 노리게 해라.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것밖에 방법이 없구나.”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조아렸다. 조아린 고개는 더할 나위 없이 공손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하실 수 있으면 왕비 폐하 본인께서 해 보시던가요!’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건대 마르그리트 왕비는 본인이 해야 하는 선 이상의 호의를 아리아드네에게 베풀고 있는 것이 맞았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녀에게는 국왕 대신 여기에 나와 아리아드네와 대화를 나누듯이 알현을 받아줄 의무도 없었고, 어떻게 보면 떼를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아리아드네의 ‘푸른 심해의 심장’을 받기 싫다는 거절을 수용해 줄 의무는 더더욱 없었으며, 귀한 조언을 나눠줄 의무 또한 없었다. 그리고 사실, 현 상황에서 레오 3세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마르그리트 왕비의 조언 이상 가는 방책도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기왕 인심을 쓴 왕비가 조금 더 인심을 쓰기를 기대해 보기로 했다. 그녀는 최대한 불쌍하게 고개를 들어, 마르그리트 왕비와 청회색 두 눈을 맞추고 간절하게 물어보았다.

16550983272382.jpg“하오면, 왕비 폐하, 외람되오나 소녀가 청을 딱 하나만 드려도 되겠사옵나이까.”

16550983272382.jpg‘제발, 제발 된다고 말해주세요⋯⋯!’

왕비는 속눈썹을 짙게 드리우며 바닥 쪽을 잠시 내려다보았다가, 약간의 호기심을 띄고 아리아드네를 정면으로 다시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는 마르그리트 왕비의 두 눈에 떠오른 것이 희미한 승낙의 기색이라고 기민하게 판단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곧바로 왕비에게 다가가 그녀의 귀에 몇 가지 이야기를 속삭였다. 이를 다 들은 마르그리트 왕비는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건 채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16550983272387.jpg“못 들어줄 청도 아니로구나.”

16550983272382.jpg‘됐다!’

아리아드네가 희열을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잘 수납하고 있는 와중에 왕비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16550983272387.jpg“게다가 이미 너를 위해 비슷한 ‘선물’을 하나 준비하기도 하였단다.”

왕비는 아리아드네를 보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16550983272387.jpg“맹랑한 것. 그런데 부탁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지 않느냐.”

아리아드네는 대답할 말이 없어 그저 헤헤 웃어 보였다. 그러자 갑자기 팽팽했던 응접실의 분위기가 팡 풀렸다. 뒤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던 마르케즈 백작 부인과 치보 후작 부인이 소리 내어 웃었고 왕비의 갈리코 시녀들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16550983272366.jpg“왕비 폐하께서는 이 영애에게 너무 잘 대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소리 내어 웃은 마르케즈 백작 부인이 반쯤은 칭얼대는 말투로 왕비에게 투정을 부렸다. 왕비는 편하게 웃으며 마르케즈 백작 부인에게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16550983272387.jpg“자네도 나보다 반오십 년 어려 보게. 어리고 귀여우니 정이 가는구먼.”

16550983272366.jpg“왕비 폐하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습니다.”

16550983272366.jpg“영리하고 얌전한 것이 정말 똑같네요.”

왕비의 갈리코 시녀들이 호호 웃으며 말을 보탰다. 왕비는 웃으며 대답했다.

16550983272387.jpg“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구먼. 나와는 팔자가 달라야 할 텐데 말일세.”

왕비의 그 한마디에, 다 같이 발랄하게 웃고 있던 응접실의 분위기는 다시 한번 가라앉고 말았다. * * * 아리아드네는 왕비의 하사품을 이고 지고 돌아왔다. ‘푸른 심해의 심장’을 담은 흑단나무 보석함은 높이는 아리아드네의 팔뚝만 했고 가로 길이와 깊이는 아리아드네가 팔을 쭉 뻗은 것보다 조금 짧을 뿐이어서 또래치고는 키가 큰 아리아드네가 들기에도 지나치게 거대했다. 그렇지만 이 물건은 남에게 맡기기엔 지나치게 비쌌다. 결국 아리아드네는 보석함이 아니라 궤짝을 지고 돌아오는 느낌으로 ‘푸른 심해의 심장’을 간신히 집으로 들고 돌아올 수 있었다.

16550983272366.jpg“아리아드네, 한 번 열어봐!”

아라벨라는 해맑게 오늘 집에 새로 들어온 물건 중에 가장 비싸고 크고 좋은 것을 구경하고 싶어 했다. 몇 년 전 왕국에 소문이 자자했던 전설의 귀보석이라니, 구경을 한 번만 할 수 있다면 친구들에게 두고두고 자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면에 루크레치아와 이사벨라는 좀 더 현실적인 부분에 관심이 있었다. ‘푸른 심해의 심장’ 같은 거라면 그들이 본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보았을 때 괜히 배나 아플 뿐이지. 하지만 왕비가 내린 자잘한 장신구라던가, 금화라면?

16550983300376.jpg“큰 상자 같은 거 열어봐서 뭐 하니. 도둑이나 들지!”

루크레치아가 아라벨라를 혼냈다. 이는 아리아드네도 백 번 동감하는 바였다.

16550983300382.jpg“오늘 받아 온 왕비 폐하의 장신구 상자나 구경시켜줘.”

이사벨라가 아리아드네에게 찰싹 붙어서 친한 척을 했다. 평소보다 유독 가까운 신체 거리였다. 아리아드네가 불편하다고 이야기를 꺼낼 수 있기도 전에, 이사벨라는 하얗고 가느다란 팔로 날쌔게 왕비 폐하의 장신구 상자를 채가서 가까운 탁자 위에 놓았다. - 쿵! ‘푸른 심해의 심장’ 전용인 흑단상자 만큼은 아니지만, 3단으로 된 왕비 폐하의 장신구 상자도 제법 무거웠다. 이사벨라는 눈이 돌아가서 재빠르게 뚜껑을 열어젖혔다.

16550983300382.jpg‘아앗, 눈부셔!’

이사벨라는 뚜껑을 열자마자 반사된 빛에 두 눈을 찡그렸다. 오밀조밀한 5부에서 1캐럿 사이의 각종 장신구들이 벨벳으로 안감을 댄 상자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16550983300382.jpg“이거 너무 예쁘다!”

이사벨라는 장신구 상자의 맨 위 칸에서 가장 눈에 띄는 토파즈 귀걸이를 낚아챘다. 1캐럿의 노란 토파즈를 쿠션 컷으로 깎아 황금으로 나뭇가지 모양을 세공한 틀에 끼워 넣은 귀걸이였다. 메인 토파즈는 노란색이었지만 나뭇가지에 올올히 박아넣은 작은 장식들은 반짝이는 자수정이었다.

16550983300382.jpg“엄마, 이거 내 눈 색깔이랑 너무 똑같지 않아요?”

16550983300376.jpg“마치 너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구나, 이사벨라!”

이사벨라는 귀걸이를 대 보는 것을 넘어서서 자기가 하고 있던 귀걸이를 빼고 귀에 걸려고 했다.

16550983300382.jpg“아리아드네, 이거 나한테 주라. 너무 나한테 어울리잖아. 내 귀에 걸리지 못하면 귀걸이도 슬퍼할 거야. 황금은 금발에 해야 어울리는걸.”

고리가 잘 빠지지 않아서 낑낑대던 이사벨라는 보지 않고 빼는 것을 포기하고 짜증을 내며 귀걸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16550983300382.jpg“이거 왜 이렇게 안 빠져!”

귀걸이에는 아주 조그만 음각이 매우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성을 내는 이사벨라에게 담담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16550983272382.jpg“언니, 저도 몹시 드리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드릴 수가 없어요.”

16550983300382.jpg“뭐?!”

이사벨라는 왼쪽 눈썹을 치켜든 채로 아리아드네를 노려보았다. ‘네 주제에 감히?’ 같은 태도였다. 대번에 분위기가 가라앉고 공기가 싸늘해졌다. 이사벨라는 목소리를 깐 채로 아리아드네를 위협했다.

16550983300382.jpg“주기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던가.”

16550983272382.jpg“정말 그런 게 아니에요.”

아리아드네는 온화하게 웃으며 이사벨라가 빼지 못하고 고생을 하던 귀걸이를 건네받아 그 고리를 빼 주었다. 고리를 빼자 비로소 전체 음각이 보였다. - From MDB, to ARI. 마르그리트 왕비의 처녀적 풀네임인 ‘마르그리트 데 브리앙’의 첫 글자를 딴 이니셜에, 아리아드네의 이름 중 앞의 석 자를 딴 이니셜이었다. 성을 빼고 이름만 있는 것이 특이했다.

16550983272382.jpg“왕비 폐하의 희사품인지라 왕비 폐하께서 장신구들에 모두 이니셜을 새겨서 내려 주셨어요. 그래서……. 이 장신구들의 소유권이 상속 외의 사유로 변동되게 되면 왕족 모독죄로 처벌을 받게 되어요.”

아리아드네는 정말 곤란하다는 듯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16550983272382.jpg“타인에게 주어서도 안 되고.”

그리고 아리아드네가 자발적으로 주지 않더라도 충분히 다른 방식으로 장신구를 가지려고 들 수 있을 이사벨라를 향해 쐐기를 박았다.

16550983272382.jpg“절도를 하면 가중 처벌을 받아요.”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의 손에 쥐여 있던 다른 쪽 귀걸이를 힘주어 잡아 뺏었다. 이사벨라는 속절없이 손에 쥔 황금 귀걸이를 빼앗기고 말았다. 귀걸이 두 짝을 하나로 모아 장신구 상자의 원래 있던 자리에 도로 잘 넣은 아리아드네는 탁 소리를 내며 장신구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16550983272382.jpg“언니한테는 양해 좀 부탁드릴게요,”

이사벨라가 제비꽃 색 두 눈동자를 크게 뜨고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채로 아리아드네를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개의치 않은 채 장신구 상자를 집어 들고 몸을 돌려 상쾌하게 자기 방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16550983272387.jpg- “게다가 이미 너를 위해 비슷한 ‘선물’을 하나 준비하기도 하였단다.”

  이것이 마르그리트 왕비가 아리아드네를 위해 준비한 사려 깊은 ‘선물’이었다. 그리고 이사벨라는 가장 중한 것이 무엇인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아리아드네는 머리에서 끌러 품속에 넣어 가지고 온 느티나무 이파리 색깔의 비단 리본을 가만히 손에 꼭 쥐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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