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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타고난 재능 (26/733)

<제26화> 타고난 재능2021.03.03.

아세레토의 사도를 무찌르고 왕비 폐하를 알현하고 온 사건 이후로, 아리아드네와 산차의 생활 수준은 수직으로 상승했다. 일단 2층의 서재와 응접실이 딸린 서쪽 끝의 방을 갖게 되었다. 편의상 '방'이라고 불렀지만 실질적으로는 스위트 룸처럼 자신의 거실에 내실 두 개가 딸린 작은 생활공간을 갖게 된 것이다. 원래 큰아들인 이폴리토가 쓰던 방이었기 때문에, 자녀들이 사용하는 방 중에서는 가장 크고 좋은 방을 차지한 것이었다.

16550983511693.jpg“아가씨! 정말 으리으리하네요!”

산차가 아리아드네의 새 침대에 놓인 오리털 이불을 팡팡 털며 그 폭신폭신함에 감탄했다. 새 이불이라 더 털 필요도 없었지만 산차는 이불을 두 번, 세 번 털면서 그 감촉을 즐겼다.

16550983511699.jpg“얘는, 네가 직접 할 필요도 없잖아.”

그들에게는 안나와 마리아라는 새 하녀들도 배정이 되었다. 산차는 하녀 인생 불과 몇 개월 만에 부하 직원이 생긴 셈이었다. 하지만 산차는 눈을 부라리며 아리아드네에게 화를 냈다.

16550983511693.jpg“아가씨는! 그 애들을 어떻게 믿고 아가씨 몸에 직접 닿는 것들을 맡깁니까! 걔들은 서재까지예요!”

아리아드네는 산차의 설레발에 살포시 웃었다. 꼼꼼해서 나쁠 것이야 없다만, 저러다가는 본인이 지칠 텐데. - 똑똑! 아리아드네의 방문에 거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예의상 노크는 해준다는 듯이 노크 한 번을 하더니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열리는 문 뒤에서 나타난 것은 아라벨라였다. 아라벨라는 자기 몸통의 절반만 한 류트를 껴안고 들어왔다.

16550983511708.jpg“흥, 딱히 같이 놀고 싶어서 온 건 아니야. 어떤 바보 같은 짓을 하는지 감시하러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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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아드네는 산차와 단둘이 있었을 때의 느슨함을 삽시간에 정돈하고 ‘좋은 언니’처럼 빙그레 웃으며 아라벨라를 맞이했다.

16550983511699.jpg“류트는 왜 들고 왔어. 원래 류트를 좋아하니?”

16550983511708.jpg“네가 뭘 모르나 본데, 나는 류트 천재라고.”

아라벨라는 입이 찢어져도 ‘언니’ 소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사사건건 ‘너’라고 부르는 여동생에게 굳이 호칭 지적을 하지 않았다. 아라벨라에게 언니 노릇을 해줄지, 혹은 해줄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서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돌려줄 수 없는 호의를 받는 것은 질색이었다. 돌려줄 수 없다면 애초에 받지도 않는 것이 편했다.

16550983511699.jpg“연주에 재능이 있나 봐?”

16550983511708.jpg“연주뿐이야? 난 작곡도 잘해.”

열 살 소녀는 삐딱하게 내뱉었지만, 아리아드네는 아라벨라의 태도에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요 몇 달간 집에서 겉도는 아라벨라의 처지를 눈으로 모두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루크레치아는 이사벨라는 무조건적으로 싸고돌았고, 반대로 아라벨라는 혼내지 않아도 될 것들로도 과도하게 훈육을 했다. 기준점도 없었다. 어렸을 때는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게다가 전생에 제대로 된 영애 교육을 받지 못하고 바로 사교계로 던져졌던 탓에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없어서 천박하다며 무시를 당했던 아리아드네로서는 아라벨라의 호언장담이 약간은 신기하고, 약간은 부러웠다.

16550983511699.jpg“네가 정말 그렇게 잘해? 한 번 연주해 봐!”

아리아드네의 질문을 도발로 인식하고 발끈한 아라벨라가 자세를 가다듬고 류트를 무릎 위에 얹었다. 왼손으로 헤드를 잡고 오른손으로 현을 타자 부드러운 음률이 흘러나왔다. - 디리링. 옥타브의 위아래를 넘나드는 화려한 곡이었다. 쉴 새 없이 바뀌는 음정 사이에서 아라벨라의 자그만 손가락들은 실수 하나 없이 현을 따라 움직였다.

16550983511699.jpg“와우.”

  - 짝짝짝!  

16550983511699.jpg“잘하는데?”

16550983511693.jpg“아라벨라 아가씨, 대단하세요!”

산차도 아리아드네와 둘이 있을 때의 흉금을 모두 털어놓는 태도를 숨기고 고용인 모드로 돌아와 영혼 없는 칭찬 세례를 퍼부었다. 하지만 아라벨라의 연주는 정말로 좋았기 때문에 산차도 흔쾌히 박수를 칠 수 있었다.

16550983511699.jpg“어떤 곡이야? 되게 어려워 보인다.”

아라벨라는 류트를 껴안은 채 약간 얼굴을 붉혔다.

16550983511708.jpg“내가 작곡한 거거든!”

16550983511699.jpg“네가?”

아리아드네는 이번에는 정말로 조금 놀랐다.

16550983511699.jpg“진짜로? 기존에 있던 곡을 알아서 조금 고친 것 아냐?”

16550983511708.jpg“아니야! 화성부터 멜로디까지 다 내가 손수 만든 거라고!”

아라벨라가 발끈하자 아리아드네는 아라벨라를 달랬다.

16550983511699.jpg“워, 워, 너무 노래가 좋길래 그랬지. 너 정말로 재능이 있구나?”

16550983511708.jpg“흥, 대단한 건 아니야.”

추켜올려주면 부끄러워하고 무시하면 화내는 아라벨라를 보고 산차가 조그맣게 킬킬 웃었다. 아라벨라는 산차에게 대번에 눈을 부라렸지만, 아리아드네가 엄하게 쳐다보자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16550983511708.jpg“사실 파이프 오르간이 가지고 싶어. 파이프 오르간을 메인으로 해서 현악기 일곱 대가 합주하는 미사 브레비스로 편곡하고 싶은데.”

16550983511699.jpg“대성황당에 있는 걸 사용하면 되지 않니?”

파이프 오르간은 건물을 건축할 때 진공관을 넣을 자리를 미리 고심해야 할 정도로 거대한 기물이었다.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의 식솔들은 추기경의 위세를 빌어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을 사용할 수 있었다.

16550983511708.jpg“거기는 주일에 미사의 반주를 맡을 때만 쓸 수 있어. 반주 연습을 한다고 거짓말을 해도 수요일과 토요일에 각기 세 시간 정도가 한계야. 사제들과 수녀들이 계속 쓰고 있다고.”

16550983511699.jpg“어머니나 추기경 예하께 파이프 오르간을 사 달라고 하면 안 될까?”

아라벨라는 미간을 팍 찡그렸는데,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감정이 상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일그러진 미간과 별개로 입은 조심스러웠다.

16550983511708.jpg“어머니는⋯⋯ 파이프 오르간은 비싼 거니까. 여자아이 혼자만을 위해서 투자하기는 비싼 거라고.”

아리아드네는 아이가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닌 것을 하는 아라벨라를 지긋이 쳐다보았다.루크레치아가 한 대사를 그대로 읊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이미 한 번 사달라고 졸라 보았다가 거절당한 모양이었다.

16550983511708.jpg“여자아이는 착하게 좋은 물건을 자매들과 나누어 써야 하니까⋯⋯. 파이프 오르간은 이사벨라 언니는 쓰지 않는 물건이잖아. 그래서 나만을 위해서는 사줄 수 없대.”

아라벨라는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입을 삐죽 내밀었다.

16550983511708.jpg“너한테 부탁하는 건 아니야! 네가 자매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네가 쓰고 싶다고 해도 어머니는 사주시지 않을 거라고!”

아리아드네는 부드럽게 웃으며 아라벨라의 의미 없는 공격을 웃어넘겼다. 정말이지, 아라벨라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엄마는 나만 사랑해. 내 파이프 오르간 건드리지 마’이고, 그 말을 하고 싶었던 대상은 이사벨라 아니었을까.

16550983511699.jpg“나는 파이프 오르간을 칠 줄 몰라서 사주신다고 해도 나눠 쓸 수 없단다. 걱정하지 마. 나는 네 것을 빼앗지 않아.”

의구심과 안도가 반반 섞인 얼굴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는 아라벨라에게 그녀는 다시 부드럽게 권했다.

16550983511699.jpg“파이프 오르간이 꼭 가지고 싶다면 이사벨라 언니에게 파이프 오르간을 사달라고 하라고 해. 이사벨라 언니가 부탁하면 어머니께서는 승낙하실걸?”

아라벨라는 상처와 물욕이 뒤섞인 오묘한 표정으로 류트를 껴안았다. 아리아드네는 아라벨라를 다시 뒤에서 껴안아 주었고, 아라벨라는 아직 어려서 그런지 이를 밀어내지 않았다. 사춘기만 되었어도, 사람을 조금만 더 제대로 경계할 줄 알았어도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을 것이다.

16550983511699.jpg‘정에 굶주린 불쌍한 아이로구나.’

그렇지만 그보다 더 못한 처지에 있는 나. 내가 어딜 감히 데 마레 추기경과 루크레치아 사이의 아이에게 동정심을 갖는가? * * * 아라벨라는 영특한 아이였다. 엄마의 언니에 대한 편애는 일단 바뀌지 않는 사실이었고, 이를 부정해보았자 변하는 것은 없었다. 반면에, 일생 내내 유지해왔던 친언니에 대한 비굴한 태도를 조금만 더 연장한다면 꿈에도 그리던 파이프 오르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아라벨라는 이사벨라에게 부탁을 해 보기로 했다. 혼자 하기는 조금 무서웠기 때문에 세 ‘자매’가 모두 모여서 가정교사 선생님이 오시기 전에 대기를 하며 각자 시간을 보내던 2층의 소녀들의 응접실에서였다. 이사벨라는 아마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서 한쪽으로 드리우고, 몸에 잘 맞는 연보라색 실내용 드레스를 입고 속눈썹에 향유를 바르고 있었다. 향유를 머금고 반짝이는 속눈썹과 그 아래의 자수정처럼 빛나는 눈동자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고 또 권태로웠다. 친언니의 불꽃 같은 아름다움에 기가 질린 아라벨라는 주눅이 든 채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16550983511708.jpg“저기, 언니.”

이사벨라가 향유로 촉촉한 속눈썹을 들어 아라벨라를 내려다보았다. 몸짓에서는 귀찮은 태가 났지만 목소리만큼은 은쟁반에서 옥구슬이 구르듯 상냥했다.

16550983555013.jpg“어쩐 일이니, 아라벨라?

16550983511708.jpg“저기, 어머니한테 파이프 오르간을 사 달라고 얘기 좀 해주면 안 돼?”

모르는 척 어깨너머로 둘 사이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아리아드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사벨라가 파이프 오르간을 갖고 싶게 만들어야지, 이렇게 대놓고 부탁을 하면 이사벨라는 뱃속까지 우려먹으려고 들 것이 뻔했다. 과연 이사벨라는 고운 얼굴을 찡그리며 짜증을 내려다가, 아리아드네를 힐끔 쳐다보고는 한 번 참았다. 이사벨라는 아직 아리아드네 주변에서는 최소한도의 이미지 관리를 하고 있었다.

16550983511699.jpg‘나만큼 본인을 잘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 아무리 착한 척을 해도 쓸데없어.’

이사벨라는 아리아드네가 무슨 생각을 하건 말건 여전히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16550983555013.jpg“아라벨라, 파이프 오르간은 네가 갖고 싶다고 해서 마구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사치는 나쁜 일이니 훌륭한 아가씨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16550983511708.jpg“사치가 아니야! 정말로 쓸 거란 말이야! 새로 지은 찬송가를 파이프 오르간에 맞게 고치고 싶은데 대성황당에 있는 건 오래 쓸 수가 없어서 잘 안 된단 말이야.”

울상이 된 아라벨라는 이사벨라를 향해 ‘너도 동방의 무어 제국에서 들여오는 화장품과 사치품을 무려 금화를 주고 사서 모으지 않느냐, 그거보다는 파이프 오르간이 훨씬 건전하다’고 공격을 시작하려고 했으나, 그 모양새를 보고 아리아드네가 부드럽게 아라벨라를 뒤에서 당겨서 입술 위에 손을 얹어 버렸다. 발끈하려는 아라벨라의 볼을 쓰다듬으며 아리아드네는 요령 없는 막냇동생을 대신해 한마디 거들어 주었다.

16550983511699.jpg“이사벨라 언니, 아라벨라의 찬송가는 정말이지 아름다워요. 아이들 장난 수준이 아니에요.”

아리아드네는 아라벨라에게 류트를 쳐다보며 눈짓을 했다.

16550983511699.jpg“아라벨라. 한 번 연주해 보렴.”

  - 디리링. 아라벨라가 두말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부드럽게 류트의 현을 뜯었다. 류트의 소박한 소리와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겹겹이 쌓인 멜로디였다. 연주를 듣던 이사벨라는 금세 두 눈이 커지더니, 30초 즈음 지나자마자 손을 저으며 그만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고는 연주가 다 끝나기도 전에 아라벨라에게 말을 걸었다.

16550983555013.jpg“잠깐만, 이거 정말로 네가 작곡한 거라고?”

16550983511708.jpg“응!”

16550983555013.jpg“어디에다가 쓰는 곡인데?”

16550983511708.jpg“미사 브레비스*야. 아직 미완성이라서, 조금 더 손 봐야 할 부분은 있어.”

이사벨라의 권태로운 자수정 눈이 반짝반짝 빛나며 조그매졌다. 그녀가 뭔가 나쁜 짓을 꾸밀 때 짓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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