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업적 빼앗기2021.03.07.
아리아드네는 익히 익숙한 그 표정을 보고는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잖아, 아라벨라.”
이사벨라는 여동생을 극히 친근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아리아드네를 향해서 나가라고 턱짓을 했다. 아리아드네가 영 내키지 않아 뭉그적거리자, 이사벨라는 아라벨라에게 짐짓 다정하게 속삭였다.
“자매끼리 할 이야기가 있잖아.”
데 마레 추기경 앞에서는 ‘이제는 언니라고 부르렴’ 등등 가증을 떨던 이사벨라였지만 너무나 쉽게 안면을 바꿨다. 아라벨라는 약간의 죄책감을 띤 채 아리아드네를 쳐다보았다. 이사벨라가 아라벨라를 재촉했다.
“어서.”
아라벨라는 이사벨라의 재촉에 마지못해 아리아드네를 향해 말했다.
“저기⋯⋯, 나가 줄래?”
아라벨라는 왜인지 모르게 아리아드네를 쳐다보며 ‘언니’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이사벨라가 쳐다보는 와중에 아리아드네를 ‘언니’라고 부르기가 어려웠다. 아라벨라의 축객령까지 받았으니 아리아드네는 더는 앉아 있을 명분이 없었다. 그녀는 일어서서 목례를 하고 자매들의 응접실을 나갔다. 아리아드네가 나간 것을 확인한 이사벨라는 예의 그 조그만 눈의 미소를 진하게 지으며 아라벨라를 쳐다보았다.
“가문은 제일 잘난 한 사람이 있음으로 인해서 다 같이 귀해져. 알지?”
아라벨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벨라의 아름다움에, 혹은 손윗자매의 무게감에 위압감이 든 모양이었다.
“넌 바깥에서 굴러들어온 돌한테 그 자리를 넘길 거야?”
이사벨라는 아라벨라의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자기 얼굴을 바라보게 했다.
“난 네 친언니야.”
이사벨라는 홀릴 듯이 아름다운 자수정 색 눈동자로 어린 아라벨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새를 어르듯이 얼렀다.
“조만간 국왕 폐하와 왕비 마마, 왕자 전하께서 모두 참석하시는 축성 미사가 있어. 거기에 귀족 영식이나 영애들은 재능 기부를 할 수 있다고, 신청하라는 이야기가 있었거든.”
이사벨라는 아라벨라의 얼굴을 놓더니, 아마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면서 말을 지었다.
“넌 어차피 너무 어려서 신청할 자격도 안 돼. 이거, 나한테 주면 내가 대신 제출해 줄게. 그리고 연습을 해야 하니까 파이프 오르간도 있어야 하잖아? 그것도 어머니께 구해 달라고 할게.”
아라벨라는 약간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10살짜리 소녀로서는 친언니의 꿀이 떨어지는 다정한 말투가 나오니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어딘가 싸했지만, 그게 어떤 부분인지 확언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사벨라 언니. 파이프 오르간 잘 쳐?”
“아니. 건반악기는 그다지.”
“그러면 어떻게 성황당에 봉헌할거야? 이건 주로 파이프 오르간용 곡으로 고칠 건데. 언니 현악기는 잘 켜는 편이 아니잖아.”
이사벨라는 너무나 바보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표정으로 아라벨라를 쳐다보았다.
“당연히, 작곡했다고 악보를 낼 거야. 연주는 다른 사람이 할 거고.”
아라벨라는 오묘한 표정으로 이사벨라를 바라보았다. 여동생의 시큰둥한 반응에 이사벨라는 살짝 기분이 상한 기색을 내비쳤다.
“저기, 아라벨라. 난 이 곡을 제출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파이프 오르간도 필요 없어. 그런데 순전히 너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께 파이프 오르간을 사 달라고 부탁까지 드리려고 하는 거잖아. 난 널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데 넌 이렇게 찝찝하게 굴 거야?”
이사벨라는 머리카락을 '탁' 쳐서 어깨 뒤로 넘기며 아라벨라에게 딱 붙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하려면 말아.”
‘똑똑한 친언니인데, 설마 나한테 해 되는 일을 하겠어?’
“언니, 잠깐만.”
“잠깐만은 무슨 잠깐만이야. 지금 당장 결정해. 질질 끌지 마라, 짜증 나게.”
아라벨라는 이사벨라의 압박에 그만 수긍하고 말았다.
“아니야, 언니. 미안해. 이 곡은 언니 줄게.”
이사벨라의 예쁜 얼굴이 승리로 빛났다. 그녀는 다시 달콤한 목소리로 돌아가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 생각했어.”
* * * 이사벨라는 교활한 협잡꾼이기는 했으되 믿을 만한 거래 상대방이었다. 그녀는 자기 몫의 계약 조건은 충실하게 지켰다. 이사벨라는 루크레치아와 데 마레 추기경에게 가서 파이프 오르간이 필요하다고 애교를 부려서 정말로 집에 작은 파이프 오르간이 들어오게 되었다. 물론 파이프 오르간은 주석과 납의 합금으로 파이프를 만들고, 공방에서 가조립을 한 후에 설치장소에서 본조립을 하는 등 집에 들이는 데에 3-4년은 족히 걸리는 물건이어서 즉시 들여올 수는 없었다.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이사벨라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자 흔쾌히 몇백 두카토에 육박하는 금화를 치러 주었고 루크레치아는 기꺼이 동쪽 별관의 천고가 높은 기도실을 파이프 오르간 설치를 위해서 내어 주었다. 대공사가 시작되었고, 그때까지는 이사벨라가 이용할 수 있도록 조그만 풍금을 하나 들여놓았다. 아라벨라는 파이프 오르간이 거침없이 들어오는 모양을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파이프 오르간은 전문 연주자가 아닌 고작 추기경의 따님이 집에서 치고 싶다고 해서 가정집에 설치되기에는 지나치게 비싼 물건이 맞기는 맞았다.
‘하지만 왜 이사벨라 언니는 되고 나는 안 되는 걸까.’
동쪽 별관의 2층 난간에서 인부들이 공사를 하는 현장을 착잡하게 내려다보던 아라벨라에게 아리아드네가 조용히 다가왔다.
“결국 얻었네, 파이프 오르간.”
아라벨라는 아리아드네를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게 되어서 기분이 좋아?”
아리아드네의 질문에, 아라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 이사벨라 언니는 왜 내 곡을 자기 이름으로 내야지만 내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한 걸까? 그거 나쁜 거 아니야?”
“모든 사람이 다 선하지는 않아, 아라벨라.”
잠시 뜸을 들이던 아리아드네는 아라벨라에게 물었다.
“너, 정말로 그 미사 브레비스, 이사벨라 언니에게 줄 거야?”
아라벨라는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로 반문했다.
“이제 와서 안 줄 수가 있어?”
“파이프 오르간은 이미 들어왔는걸. 악보를 안 주면 자기가 이제 와서 어쩌겠어? 설치한 거 뜯어가라고 그럴까?”
아라벨라의 진녹색 눈이 기쁨으로 반짝반짝해졌다. 파이프 오르간은 받아먹고 악보는 떼어먹는 것을 상상만 해도 신이 나는 듯했다.
“킥킥킥, 넌 천재야, 아리아드네!”
아라벨라는 신이 나서 강아지처럼 아리아드네에게 머리를 문댔다. 하지만 좋아하던 것도 잠시, 뒷수습할 생각을 하니 도저히 안 되겠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언니가 날 가만 안 둘 거야. 이사벨라 언니랑 싸우면 엄마도 나를 혼낼걸.”
“부당한 대우에는 맞서 싸워야 하는 거야. 큰 소리를 내지 않고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어느 정도는 과거의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였다. 아리아드네는 재차 다짐하듯 말했다.
“그 사람들, 나쁜 사람들이고 널 뜯어먹으려고 하는 거야. 사랑받으려고 노력해봤자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어. 루크⋯⋯ 어머니는 이사벨라만 사랑해. 이사벨라는 근본부터 글러 먹었고.”
아라벨라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이사벨라 언니는 내 친언니잖아? 엄마도 마찬가지고. 너한테는 나쁘게 굴 수 있어도 나한테는⋯⋯, 나한테는 그럴 리 없을 거야.”
아리아드네는 반문했다.
“왜 네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는 안 된다고 했던 파이프 오르간이 이사벨라가 갖고 싶다고 하니까 갑자기 나타났지? 이사벨라가 현악기 연주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거 추기경 예하도, 어머니도 두 분 다 알고 계시잖아? 두 분은 네 친부모님 아니야?”
아라벨라의 손아귀에 힘이 꾹 들어갔다.
“가정교사들도 그래. 네 진도에 맞추려면 음악 선생님인 만치니 양은 사실 더 명성 높으신 선생님으로 바뀌어야 해. 하지만 이사벨라의 진도에 맞추려다 보니 계속 만치니 양이 오고 계시잖아! 그런데 궁정 예법은 이사벨라 진도에 맞춰서 선생님이 바뀐 거라며? 왜 네 진도는 안 맞춰 주고 다 이사벨라 본위로만 해주는 건데?”
아리아드네는 멈추지 않고 아라벨라를 몰아세웠다.
“네가 입을 다물고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기만 하면 아무도 잘못된 걸 몰라. 이득 보는 사람이 양심이라도 있어서 만류해주면 모를까, 이사벨라가 그럴 사람이야? 이사벨라는 악보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그냥 훔친 거잖아!”
“그만!”
아라벨라가 아리아드네와 착 붙어 있던 몸을 떼어내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악보는⋯⋯. 그래. 어차피 난 그걸 가져도 쓸 데가 없으니까 잘 쓰려고 그런 걸 거야. 우리 친언니가 나한테 나쁘게 대하려고 그랬을 리가 없어. 파이프 오르간도, 너무 비싸니까, 나 혼자 쓰기에는 부담스러우니까 언니랑 나랑 둘이 같이 쓰면 되겠다 싶어서 추기경 예하랑 엄마가 사주신 거였을 거야. 나는 안 사주고 언니만 사준 게 절대 아니야. 선생님은⋯⋯ 내가 아직 어려서 그래.”
아라벨라의 눈매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내가 요새 너랑 너무 친하게 지내서 그래. 그런 걸 거야. 내가 미사 브레비스도 이사벨라 언니한테 주고 너랑도 친하게 안 지내고 그러면 이사벨라 언니도 전처럼 나한테 잘 대해 줄 거야. 그러면 엄마도 나한테 잘 대해주실 거라고.”
아라벨라는 아리아드네에게 조그만 손가락을 들어 삿대질했다.
“너! 나한테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조금 잘 나간다고 우리 언니 욕하지 마. 우리 엄마는 나를 사랑해! 나는 진짜 데 마레야. 너는 아니고!”
소리 높여 폭언을 한 아라벨라는 새어 내오는 눈물을 훔치며 후다닥 달아나 버렸다. 아리아드네는 동쪽 별관의 2층 난간에 혼자 서서 착잡한 심정으로 아라벨라가 떠난 층계 쪽을 바라다보았다. 험한 말을 들었지만, 기분이 그다지 상하지 않았다. 그 말들을 아라벨라가 스스로를 어떻게든 위안하려고 내뱉었다는 것이 너무도 잘 보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나?’
* * * 파이프 오르간의 몸통 부분을 이룰 리드 파이프가 동쪽 별관의 공사 현장으로 반입되던 날, 이사벨라는 부모님의 애정을 등에 업고 의기양양하게 아라벨라로부터 악보를 채어 갔다. 새틴으로 만든 여름 실내용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이사벨라에게 양피지로 된 악보를 뺏기는 아라벨라의 조그만 뒷모습은 유독 주눅이 들어 보였다. 아라벨라는 악보를 넘기면서도 새엄마에게 친자식을 넘겨주는 엄마처럼 이사벨라에게 구구절절이 주의사항들을 알려 주었다.
“미사 브레비스라서 화성을 줄였고 길이도 짧아. 합주곡이라서 스코어 악보로 그렸어.”
(스코어 악보: 여러 대의 악기가 연주할 부분을 악보 한 장에 모두 그려 넣은 악보. 보통 오케스트라 등에서 지휘자가 보는 악보이다.) 이사벨라는 악보를 대충 받아 건성으로 훑어보았다.
“그러니까, 이게 악보라 그거지? 이건 ‘미사 브레비스’라는 거고?”
“그, 그렇지.”
“알았어. 이리 내고 가 봐.”
이사벨라는 내용물을 제대로 훑지도 않고 악보를 받아서 응접실의 테이블 위에 잠시 올려두었다가, 자기 하녀에게 자기 방의 책상 위로 가져다 두라고 일렀다. 그래서 악보가 정갈하게 또박또박 그려져 있는 두꺼운 양피지들 사이에, 음표를 대충 휘갈겨 그린, 연습할 때 쓰는 비교적 덜 비싼 얇은 양피지 한 장이 잘못 끼워져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