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1화> 치보 후작 부인의 살롱 (31/733)

<제31화> 치보 후작 부인의 살롱2021.03.21.

16550984128613.jpg

  로마니 부인은 흔쾌히 아리아드네의 샤프롱 역할을 받아들여 주었다. 랑부예 구휼원에 한 번 들리기로 한 것도 로마니 부인이 샤프롱을 보아 주기로 해서 아리아드네는 늦여름에 귀한 외출을 두 번이나 즐겼다. 치보 후작 부인의 미술품 살롱에 참석하기로 약속한 날짜는 금방 다가왔고 지금 아리아드네는 마차를 타고 치보 후작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16550984128619.jpg“아가씨, 왕자님이 오신대요!”

마차에 함께 탄 산차가 조잘거렸다.

16550984128619.jpg“오늘 이거보다 더 예쁘게 하고 와야 했는데요!”

아리아드네는 라지오네 양장점에서 맞춘 사랑스러운 노란색 드레스를 입고 일전에 이사벨라가 탐을 냈던 황금 위에 세팅된 토파즈 귀걸이를 찬 참이었다. 단정한 의상 위에 걸친 호화로운 장신구가 귀한 집 영애라는 것을 명실상부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16550984128619.jpg“왕비 폐하께서 내리신 장신구들은 참 예쁜데, 아가씨 의상은 가짓수가 너무 적어요. 라지오네 양장점에 조만간 다시 주문을 넣을 수 있을까요?”

아리아드네가 산차의 설레발에 미소를 지었다.

16550984128633.jpg“한 번 기다려보자.”

아리아드네가 오늘 치보 후작 부인의 살롱에 꼭 오고 싶었던 이유는 사실 왕자보다는 다른 데에 있었다. 오늘의 모임은 포르토 공화국의 상인들이 선보이는 실질적인 미술품 경매였다. 이 미술품 경매는 전생에 에트루스칸 왕국을 떠들썩하게 했었기 때문에 아리아드네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별로 좋은 일로 떠들썩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늘의 경매는 북쪽 도시 라스트라에서 새로 발견된 유적에서 발굴되었다는 고대 헬레니아 시대의 조각상들이 그 메인피스이자 하이라이트였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고대의 승리의 여신인 니케의 동상이었는데, 역사가이자 작가인 할리카르도토스의 <헬레니아 기행문>에 “더없이 강인하고 굳세어 하늘을 향해 떨쳐 오르는 인간의 의지를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극찬을 받았던 물건이었다. 중앙 대륙의 조각 기술은 미술가에 대한 귀족 패트론의 후원 시스템과 작가들의 개인적인 도제 시스템, 국가 단위 화가 협회의 예술제 시스템이 공존하며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현재보다 고명했던 고대 헬레니아 시대와 그 이후인 라틴 제국 시대의 조각에 대한 수요는 하늘을 뚫었다. 연구 목적으로도 그랬고 소유와 과시의 목적으로도 그랬다. 다만 고대 헬레니아 시대의 동상들은 설령 대리석 조각상이라 하더라도 땅속에 오래 묻혀 있다 발굴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는 점이 가장 큰 단점이었다. <비토리아 니케> 상의 운명은 개 중에서도 더욱 가혹해서, 할리카르도토스가 당대에 벌써 “그녀의 섬세한 날개는 셀레스폰 전쟁 중 신전을 훑고 간 무어인의 군대로 인한 한 차례의 파손으로 이미 손상되어 복구⋯⋯.”라고 한탄한 바 있었다. 그 뒤의 문언은 할리카르도토스의 기행문 자체가 일부 유실이 되어 확인할 수 없었다. 포르토 공화국에서 온 상인들은 오늘이 <비토리아 니케>의 부활이라며 설레발을 떨었고, 이렇게 온전하게 보존된 고대 헬레니아 시대의 조각상은 찾아볼 수 없다고 바람을 잡았다. 그들의 호언장담은 사실이기도 했다. 이에 혹한 산 카를로의 유력 귀족이 <비토리아 니케>를 역대 최고가에 구매했고, <비토리아 니케>를 설치하기 위해 귀족가의 저택 정문 앞뜰을 전면적으로 개보수했다. 산 카를로 시내에 가까운 대저택의 정문에, 분수가 있었던 자리를 뜯어내는 대공사는 단연 저잣거리의 화젯거리였다. 요란스러운 공사를 마친 해당 귀족가는 분수대가 있던 자리에 <비토리아 니케>를 설치해 그녀의 고고한 자태를 뽐내도록 하여 그 귀족가의 위세를 만인에게 알렸다. 그런데 그만 유실된 할리카르도토스의 기행문 후편이 발견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녀의 섬세한 날개는 한 차례의 파손으로 이미 손상되어 복구⋯⋯.」 이것이 원래 있었던 문구였는데, 새로 발견된 그 뒤의 문구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되었다. 「⋯⋯가 불가능해져서 날개 한쪽이 없는 상태로 전시되고 있었다. 그녀의 두상도 왼팔도 어디론가 사라졌으나 티보스 사람들은 셀레스폰 전쟁의 참화를 이겨낸 <비토리아 니케>의 모습 또한 승리의 한 단면이 아니겠냐고 하여 부서진 여신을 그대로 모셨다. 티보스 사람들의 성숙한 역사의식이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기존에 해석되던 대로 ‘이미 한차례의 복구를 마친 채로 전시되고 있었다’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기행문의 기존 해석이 바뀐 것 정도는 별일도 아니었다. 그저 교과서 몇 줄을 바꾸면 될 일이었다. 진짜 문제는 유력 귀족의 정원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던 <비토리아 니케>에는 아름다운 날개가 두 쪽 다 우뚝 솟아 있었다는 점이었다. 분명히 새로 발견된 <헬레니아 기행문>에는 <비토리아 니케>가 부서져서 복구가 불가능했다고 쓰여 있는데, 이 <비토리아 니케>에는 머리도, 양팔도 온전하게 모두 붙어 있었다. 하물며 고대 헬레니아 시대의 도시 티보스는 중앙 대륙의 동쪽 끝에 있어서 인종이 조금 달랐는데, <비토리아 니케>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에트루스칸 여인이 그 모델이어서 사람들이 말을 잃게 했다. 산 카를로 전체가 발칵 뒤집어져서 조각상의 진위 가리기를 시작했고, 이 사건이 산 카를로 전체 주민들의 취미 생활처럼 도시를 한 달 정도 달구었던 기억이 아리아드네에게는 생생했다.

16550984128633.jpg“우리는 물건을 사러 온 거야.”

아리아드네는 산차에게 일렀다. 물론 <비토리아 니케>를 살 것은 아니었다. 그럴 이유도 없었고 그럴만한 돈도 없었다. 아리아드네가 오늘 노리는 것은 함께 경매에 부쳐질 회화 몇 점이었다. 주머니 사정에 따라 몇 점을 살지 여부가 정하여질 터였으나, 오늘 경매에 나올 회화의 작가인 신진 화가는 내년이면 몸값이 확 올라갈 것이고, 불과 5-6년 뒤면 당대를 호령하는 성황청의 메인 화가가 될 것이었다.

16550984128619.jpg“도착했습니다!”

마부의 안내와 함께 아리아드네는 산차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치보 후작가의 하인이 안내를 위에 밖에 나와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산차가 씌워준 양산을 쓴 채 하인의 안내를 따라 천천히 치보 후작가의 본관 쪽으로 걷고 있었는데, 뒤에서 요란한 마차 행렬의 소리가 들려왔다.

16550984128619.jpg- “이랴! 이랴!”

- 덜커덩덜커덩. 황금으로 치장한 백마 네 필이 끄는 그 마차는 다른 귀족들이 내려서 걸어 들어가는 지점이 가까워져 오는데도 불구하고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았다. 황금 마차는 해당 지점을 지나쳐서 걸어가는 귀족들 몇을 스쳐 지나간 뒤 치보 후작가의 본관 현관에 아주 바짝 붙여서 마차를 댔다.

16550984128619.jpg“알폰소 왕자 전하 도착하셨습니다!”

16550984128619.jpg“왕자 전하 오셨습니까!”

16550984128619.jpg“미천한 저희 집에 방문해 주시다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멀리 떨어진 나머지 소리는 희미하게 섞여서 들렸지만 왕자의 시종의 목청이 워낙 우렁차서 왕자의 이름 석 자만은 똑똑하게 귀에 꽂혔다.

16550984128619.jpg“왕자님이 오신 모양이에요.”

흥분해야 할 산차는 왜인지 심드렁했다.

16550984128633.jpg“왜 그래, 산차? 아까는 왕자님을 볼 수 있겠다며 엄청 좋아하더니.”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산차는 부루퉁하게 답했다.

16550984128619.jpg“아니 그게, 우리는 다 저-어 앞에 내려서 걸어오는데 왕자님은 현관문 앞에 착 내려서 쏙 들어가셔서요. 높은 굽을 신으신 건 우리 아가씨고 몸이 더 약한 것도 우리 아가씨인데! 마차를 바싹 대개 해주려면 왕자님이 아니라 우리 아가씨한테 허용해야지요.”

아리아드네는 손가락으로 산차의 부루퉁 튀어나온 입술을 톡 쳤다.

16550984128633.jpg“그런 말 하지 마! 끌려갈라!”

아리아드네는 치보 후작가 하인들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들은 딱히 이쪽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목소리를 낮춰 산차에게 속삭였다.

16550984128633.jpg“좋은 군주는 자기의 백성을 전시에는 외세로부터 지켜주고 평시에는 약한 자들을 돌봐 준다. 그들이 누리는 권위는 그걸 더 용이하게 할 수 있는 도구야. 권위 없는 군주는 정말로 필요할 때 힘을 쓸 수가 없단다.”

그녀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산차에게 말했다.

16550984128633.jpg“나는 알폰소 왕자님께서는 좋은 군주의 자질이 충만하신 분이라고 생각해.”

16550984128619.jpg“지금 임금님은요?”

16550984128633.jpg“성군이시고 말고!”

주변의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대답한 아리아드네는 드레스의 소맷단 아래로 검지와 중지를 꼰 손 모양을 산차에게 슬쩍 보여주었다. 성황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거짓말을 하면 벌을 받는데, 불가피하게 거짓말을 해야 할 때 신에게 '한 번만 봐 주세요'라고 만드는 손가락 모양이었다. 산차는 빵 터졌고 둘은 명랑하게 웃으며 치보 후작가의 본관으로 들어갔다. * * *

16550984128619.jpg“작은 데 마레 영애 오셨습니다!”

16550984159405.jpg

  치보 후작가의 하인이 아리아드네의 입실을 알렸다. 안에서 수군대던 사람들이 각자 떠들던 소음이 일순 조용해졌다. 이것은 알폰소 왕자나 다른 권력을 가진 사람이 홀 안에 들어왔을 때의 압도적인 조용함이 아니라, 호기심에 의한 찰나 간의 조용함이었다. 아세레토의 사도 사건으로 인해 엄청나게 유명해진 추기경의 둘째 딸을 모두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한 번 자기 눈으로 추기경의 딸을 확인하고 나니 잠깐 멈춰 있었던 대화들이 폭발했다.

16550984128619.jpg- “미모가 언니만큼은 못 하네요.”

16550984128619.jpg- “그래도 저만하면 귀엽죠 뭐. 반만 피가 섞였다면서요?”

16550984128619.jpg- “그 집은 루크레치아가 그렇게 미인도 아닌데 어떻게 큰딸이 그렇게 예쁘지?”

모두가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막상 아리아드네 본인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초대장을 보낸 장본인인 치보 후작 부인이 서둘러 홀을 건너와 아리아드네에게 인사를 했을 뿐이다.

16550984128619.jpg“데 마레 영애, 오늘 이렇게 자리를 빛내 주어서 고마워요. 오시는 길은 괜찮았나요?”

16550984128633.jpg“덕분에 편안하게 왔습니다. 로마니 부인께선 어디에 계시나요?”

16550984128619.jpg“지금 잠깐 더위를 먹어서 부인들의 파우더룸에 갔어요. 금방 나올 거에요. 구경 좀 하고 있어요!”

치보 후작 부인은 파티의 호스티스였기 때문에 아리아드네 옆에 계속 있어 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미술품 경매라는 오늘 모임의 특성상, 아리아드네의 또래보다는 완숙한 귀족들과 그 부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아리아드네가 낄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아리아드네는 로마니 부인이 나올 때까지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홀에서 뒷짐을 진 채 어정어정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때 사람들로 가득 둘러싸여 있던 알폰소 왕자가 저 멀리에서 보였다. 아리아드네는 그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돌려 파티장의 구석으로 향했다. 아리아드네는 왜인지 그에게는 혼자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16550984128633.jpg‘왜 새삼스레……?’

아리아드네는 혼란한 마음을 가리기 위해 본인의 감정을 분석해 보았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산책하고, 혼자 서재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매우 편안하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마음에 걸려 하고 있었던 모양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왕자와 만나기 싫은 것이다. 그리고 그때, 인파에 휩싸여 있던 황금빛 머리칼의 소년이 아리아드네를 먼저 발견했다. 차마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지는 못하고, 알폰소는 아리아드네를 똑바로 바라보며 오른쪽 손을 번쩍 들었다. 아리아드네는 파티장을 떠나기 위해 발걸음을 돌린 차였지만, 왕자에게 향하는 시선만은 멈출 수가 없었다. 나가기 전에 그를 마지막으로 바라본 검은 머리의 소녀는 그런 알폰소 왕자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트리며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