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진실을 꿰뚫어 보는 소녀2021.04.04.
정체를 묻는 질문을 받자 시뻘게져 있던 포르토 상인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그는 불안정하게 눈알을 양옆으로 굴리더니, 두말없이 가장 가까운 홀의 출구를 향해 몸을 던졌다.
- “잡아!”
- “놓치면 안 된다!”
일군의 사람들이 도망치는 포르토 상인을 향해 몸을 던졌지만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상인을 잡기는 쉽지 않았다. - 퍽! 정작 포르토 상인을 잡은 것은 알폰소 왕자였다. 또래 중에서 키도 크고 몸집도 좋은 편인 그는 운동신경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발군이었다. <비토리아 니케>가 무너질 때 초대손님 석의 중앙에 앉아 있다가 귀부인들을 에스코트해서 우측으로 피한 그는 포르토 상인이 우측 문으로 달려오는 것을 놓치지 않았고, 날렵하게 어깨로 몸통 박치기를 해서 한 번에 바닥으로 쓸어 버렸다. 포르토 상인을 바닥에 엎어 놓은 채로 두 손을 등 뒤로 모아 제압한 알폰소 왕자는 수하들을 불렀다.
“이자를 포박하여 왕궁 감옥에 가두어라!”
“예! 전하!”
“또한, 나머지 미술품의 진위를 감정하여, 위작이라면 거래를 무효로 하고 진품이라면 저 상인이 아닌 원주인에게 판매 대가를 정산해 주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 * * 치보 후작가는 전쟁통을 방불케 했다. 1층의 파티용 홀 한가운데에 마루를 뚫고 처박혀 있는 가짜 대리석 미술품과, 온 집 안을 어수선하게 뛰어다니면서 포르토 상인의 일행과 치보 후작 부인 내외를 심문하는 왕궁의 치안 관리들과, 산 카를로가 떠나가라 지저귀는 호사가들의 수다 소리가 아주 시끄러웠다.
- “데 마레 가문의 차녀는 아세레토의 사도 사건에서도 활약하더니 오늘도 대단하네요!”
- “이게 15살짜리 소녀에게 가능한 수준의 학식입니까?”
- “신학에 미술에 역사까지⋯⋯. 분야도 다종다양하고, 이쯤 되면 공부를 해서 아는 게 아니라,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요?”
아리아드네에게는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이라는 별칭이 붙어버리게 되었다. 막상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 본인은, 치보 후작가의 뒤뜰에 서서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고민해봐도 도통 모르겠는 남자와 언성을 높여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다.
“데 코모 백작, 도대체 무슨 생각이죠?!”
호칭도 ‘체자레 백작’이 아닌 ‘데 코모 백작’이었다. 원래 작위에 이어서 부르는 호칭은 이름이 아니라 성인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산 카를로의 그 누구도 해당 원칙을 체자레와, 그의 어머니인 루비나 백작 부인에게는 적용하지 않았다. 성과 작위를 이어 부르는 것은 가문에 대한 존중을 표하는 것인데, 체자레가 그 작위를 계승했을 서류상의 아버지인 선대 ‘데 코모 백작’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허무인이란 사실을 산 카를로의 사교계 상류층이라면 모두가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굳이 ‘데 코모 백작’이라는 호칭을 고수하는 것은 그의 혈통적 약점을 꼬집는 것 같이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노한 아리아드네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뒤처리도 생각 않고 다짜고짜로 남한테 거짓말로 떠밀다니 도대체 무슨 짓거리예요?”
체자레는 어깨를 으쓱 해 보일 뿐이었다.
“이거 봐, 꼬마 아가씨. 결국 다 잘 끝났잖아.”
“공대하세요! 당신 나랑 친해요? 나는 이 교구 추기경의 차녀입니다!”
“워워, 이거 봐.”
체자레는 아리아드네의 앞이마를 손가락 하나로 꾹 눌렀다.
“너, 데뷔탕트 무도회도 안 치렀잖아. 그럼 아직 아이라고. 어린이가 어딜 어른한테 말을 높여라 말라 하는 거야?”
체자레는 아리아드네를 위아래로 훑더니 한마디를 보탰다.
“이거 봐. 완전 어린이 같은 노란색 병아리 드레스나 입고 나오고.”
아리아드네는 분을 못 이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체자레는 놀리듯이 뒷말을 이었다.
“아가씨가 되면 얼마든지 높여 주지.”
“당신같이 무책임한 사람이랑 다시는 말 섞을 일 없을 겁니다!”
체자레는 드디어 자기변호를 시작했다.
“나 꼬마 아가씨가 보는 것처럼 무책임한 사람 아니야. 아무 단서 없이 저지른 건 아니었어. 진짜 ‘빈센시오 델 가토’가 석 달 전에 티베리 강에서 떠오른 사실은 알고 있었지.”
그가 했던 조사는 그것보다 좀 더 광범위했지만 그는 굳이 아리아드네에게 모두 밝히지는 않았다.
“그럼 알아서 해결하셔야지 그걸 왜 나한테 미뤄요?”
“내 처지 알잖아?”
체자레는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각보다 더 조각 같은 이목구비에 처연한 표정마저 얹히니 과연 시선을 잡아끄는 대단한 미남이었다.
“국왕의 서자, 버려진 아들, 나 같은 놈이 권력에 탐을 내는 것처럼 보이면 그날로 쓱싹 당하는 거지.”
그는 손으로 목이 그이는 시늉을 했다.
“내 처지에 어떻게 ‘저 상인이 뒤가 구립니다, 행정력과 군권을 발동해서 저 상인 뒤를 캐봅시다’라고 발언을 하겠어?”
“그럼 가만히 있으시던가!”
“결국 다 잘 풀렸잖아. 꼬마 아가씨랑 나랑 죽이 척척 맞는 스타일인가 보지, 우리 좀 괜찮은 콤비 아니야? 뒷조사를 하고 판을 깔아주는 귀족 백작과 앞에서 추리를 풀어내는 성직자의 여식!”
능글맞게 들이대는 체자레는 어려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아리아드네를 향해서는 기분이 아주 좋을 때 간혹 보여주는 모습이었고, 대개의 경우에는 누군가에게 얻어낼 것이 있을 때 그가 매력발산을 하는 모습이었다. 옆 나라 공주라던가, 대사라던가, 혹은 이사벨라라던가. 아리아드네가 주최하는 정례 티파티에서 아름다운 미망인인 이사벨라를 향했던 그의 환대, 농담과 장난들. 아리아드네를 존중해서 아리아드네의 언니인 처형한테도 잘해주는 거라고 좋게 생각했지만 그녀의 호의가 치명적인 배신으로 돌아왔던 과거. 애교를 부리다시피 들이대는 체자레는 퍽 매력적이었지만, 지금 와서 자기에게 이렇게 들이대는 꼬락서니를 보자니 기분이 오묘했다. 나를 이렇게 박대하던 네가 지금은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알랑방귀를 뀌고 있네, 같은 알량한 승리감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죽음을 거슬러서 돌아오기까지 했는데, 그녀를 내치고 목숨을 빼앗은 전 약혼자가 한번 들이댔다고 좋다고 홀라당 넘어가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말미잘 수준의 기억력을 가진 거였다. 그는 여전히 몹시 매력적이었고, 그가 흘리는 모양새가 기껍기는 했으나 절대로 받아주고 싶지 않았다.
“데뷔탕트도 안 치른, 안면도 안 튼 소녀에게 책임을 다 떠미는 악당 아니신가요? 어디 가서 나랑 콤비라고 말이라도 꺼내지 마세요. 꿈에라도 나올까 무서우니까.”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라니까. 사기꾼이 가짜 모조품을 가지고 내 친애하는 동생에게서 2000 두카토를 날름 먹어치우는 것을 두고 보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웠던 나의 정의감의 발로라고 해 두지. 우정? 혈육의 정? 용기?”
“하.”
더 이상 말을 섞는 의미가 없겠다고 판단한 아리아드네가 몸을 돌려 떠나려고 하자 체자레가 손을 내밀어 대뜸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잠깐만. 오늘은 용건이 있어서 특별히 꼬마 아가씨를 만나러 여기까지 온 거야. 치보 후작가에서 초대장도 안 보내줘서 몰래 들어오느라 고생했다고. 우리 대화 좀 하자구.”
아리아드네는 손목을 뒤로 슬쩍 빼내어 체자레의 손길을 밀어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미미한 불쾌함이 묻어나는 아리아드네의 표정을 보고 체자레는 두 손을 들어 항복 표시를 해 보였다. 보통 남자들 같으면 못 알아챌 정도의 미세한 기색 변화였지만 체자레는 이런 것을 기가 막히게 잘 잡아냈다.
“미안, 미안. 실례했어. 아가씨의 손목을 잡다니. 내가 잘못했네. 나는 신사야. 긴장하지 않아도 돼. 용건은 간단해.”
체자레는 아리아드네를 바라보며 아주 좋은 제안이 있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우리 신사 숙녀답게 거래를 하자고.”
“난 당신과 할 거래가 없어요.”
“그러지 말고 내 얘기 들어봐봐.”
그는 친근하게 아리아드네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바람이 훅 불어왔고, 체자레 백작이 애용하는 장미와 유향, 단향나무로 만든 향수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는 이렇게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를 아름다운 세계로 데려가곤 했다. 그는 언제나 그녀의 방비를 무너뜨렸다. 체자레의 내민 손을 잡으면 뒷일은 생각 않고 그의 환상적인 모험의 세계로 떠날 수 있었다. 체자레 데 코모가 입을 열어 오늘의 제안을 했다.
“‘푸른 심해의 심장’을 나한테 팔지 않겠어? 값은 제대로 쳐 주지.”
“……아아.”
아리아드네의 심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을 찌르는 고통. 일말의 기대가 있었나 보다. 고통 이후로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수치심이 엄습했고, 바로 그 뒤를 따라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는 ‘푸른 심해의 심장’의 대가로 치를 물건들을 줄줄이 읊었다.
“‘린빌의 백조’라고 들어봤어? 내가 소유한 보석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값진 축에 드는 다이아몬드지.”
아리아드네는 ‘린빌의 백조’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15캐럿짜리의 불순물 없고 컬러가 뛰어난 다이아몬드를 눈물방울 모양으로 연마해 진주와 함께 세팅한 브로치였다. 체자레 백작이 열세 살 되던 해에 국왕 레오 3세가 그에게 하사한 산 카를로 시내의 저택에 그 컬렉션으로 딸려 갔던 물건인데,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에게 선물하는 보석’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었다. 지난 생의 아리아드네는 ‘린빌의 백조’를 몹시 가지고 싶어했었다. 보석 그 자체의 가치도 가치려니와,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에게 준다는 별칭이 붙은 보석을 받게 되면 정말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체자레의 마음이 그녀에게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같아서 더욱 의미부여를 했던 것이다. 약혼 기간 중에는 절대로 주지 않더니, 결혼 선물로 달라는 그녀의 보챔에 웬일로 그렇게 흔쾌히 승낙을 하나 했더니만은. 그녀가 결코 그 결혼 선물을 받을 일이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서 그랬던 것이 틀림없었다.
“‘푸른 심해의 심장’에 대한 대가로 ‘린빌의 백조’에 금화 6000 두카토 (약 60억 원)과 각종 자잘한 보석들을 얹어 주겠어.”
그런데 지금 이렇게 새파랗게 어린 체자레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아리아드네에게 ‘린빌의 백조’를 제시하고 있었다. 이번 생의 아리아드네는 그를 위해 청춘을 바치지도, 살인을 방조하지도, 병에 걸리지도, 목숨을 걸지도 않았다. 그녀가 한 것이라고는 다만 스스로의 가치를 높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그에게 헌신해도 그녀에게는 돌아오지 않던 ‘린빌의 백조’가 이렇게나 쉽게 손아귀에 들어오기 직전이었다. 아니 사실, '린빌의 백조'를 주는 것은 아니었다. '푸른 심해의 심장'과 교환을 하겠다는 것이었지. 거래 상대방이나 이용의 객체는 될 수 있어도 사랑을 담은 보석은 절대로 받을 수 없는 여자, 그게 체자레에게 있어 아리아드네 데 마레였다. 그녀는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화가 하늘 꼭대기를 찌르도록 솟아오르니 나오는 건 웃음뿐이었다.
“체자레 데 코모 백작. 당신은 정말로 헛똑똑이군요.”
“내가?”
당신은 당신에게 진심으로 모든 것을 다 바쳤던 사람을 잃었어. 당신, 크게 손해 본 거야.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입술은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은 말과 다른 말을 했다. 차마 본심을 말할 수는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들릴 테니까.
“국왕의 아드님이니 뭐니 하며 국왕 폐하를 모욕하시긴 했지만 그건 뭐 그렇다고 칩시다. 나도 추기경의 서녀이고, 뭐 피차 떳떳한 처지 아니니까.”
체자레의 가장 약한 곳을 바늘처럼 찔러 들어가는 공격이었다.
“그런데 국왕 폐하의 피 한 방울을 이어서, 정치와 군사에서 모두 배제되고 성총 한 가닥에 의지해서 그 가느다란 목숨줄 부지하는 처지라면 최소한 국왕 폐하 눈치는 좀 제대로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체자레는 의외의 공격에 놀란 눈치였다. 그가 기껏 제 매력을 끌어모아서 사람에게 넉살을 떨었는데 그의 웃는 면전에서 이렇게 듣기 싫은 소리를 정곡으로 찔러대며 훅 들어오는 사람은 여태껏 없었다.
“국왕 폐하께서 저에게 ‘푸른 심해의 심장’을 엿 바꿔먹으라고 주셨겠습니까? 맘대로 홀라당 팔면 퍽이나 좋아하시겠습니다?”
“뭐?”
“가격 잘 쳐준다고 갈리코 왕국에 팔고 포르토 공화국에 팔면 국왕 폐하 보시기에 그것참 보기 좋겠다고요!”
아리아드네는 격앙된 목소리로 그대로 쏘아붙였다.
“‘푸른 심해의 심장’은 국왕 폐하께서 제게 맡기신 물건에 가깝습니다. 저는 실질적인 보관자지 소유자가 아닙니다. 이건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여기까지는 팩트였다. 하지만 이 뒤부터는 감정이었다.
"저조차도 알고 있는 성심을, 아들입네 하면서 생각조차 못 하고 나타나서는 ‘푸른 심해의 심장’을 팔라 말라 하는 걸 보니 참! 보기에 딱합니다. 뭐가 옳고 그른지, 뭐가 좋고 나쁜지, 뭘 가져야 하고 뭘 가지지 말아야 하는지 구분도 못하시는 분이 지나치게 큰 꿈을 꾸고 계십니다. 정신 차리세요.”
‘당신은 전생에서 정말로 가져야 할 여자와 가지지 말아야 할 여자를 가늠하지 못했지. 이번에도 똑같아. 그 대상이 보석일 뿐.’
아리아드네는 이번에야말로 자리를 뜰 작정이었다. 체자레와 14년간 동고동락한 사람으로서, 그를 이해하지는 못해도 패턴은 외우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서 그는 분명히 자제하지 못하고 화를 낼 것이 뻔했다.
“거기 너! 서!”
아니나 다를까, 체자레 백작은 뒤로 홱 돌아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리아드네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리아드네는 아까보다 거세게 뿌리쳤지만 체자레도 이번에는 진심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성인 남자의 손아귀 힘에 눌린 손목뼈가 아팠다.
“이거 놔!”
아리아드네의 날카로운 비명 위쪽으로 한 톤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그 손 놓으시지, 데 코모 백작.”
산 카를로 전체에서 정당하게 체자레를 ‘데 코모 백작’이라고 꼬박꼬박 부를 수 있는 단 두 사람 중 한 명인, 알폰소 왕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