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산 카를로의 여왕벌2021.04.14.
“데 마레 영애! 일찍 오셨군요.”
먼저 들어와 있던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가 이사벨라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사벨라의 친구인 카멜리아보다, 아니, 하다못해 오늘 파티의 주최자인 레티시아 데 레오나티보다도 빠른 응대였다. 이사벨라는 예쁜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가득 띠고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의 인사를 받았다.
“이사벨라. 이사벨라라고 불러주세요. 우리 사이에 무슨 가문명인가요.”
“그럴까요, 아름다운 이사벨라?”
약혼자와 이사벨라가 시시덕거리는 모양을 본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가 부채를 쥔 손을 꽉 쥐었으나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어머나, 이사벨라!”
“레티시아.”
집주인인 레티시아 데 레오나티 자작 영애도 몹시 반갑게 이사벨라를 맞이했다. 이사벨라는 친우들의 인사를 받으며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봤지? 줄리아 데 발데사르. 네가 제아무리 후작 영애라도 사람들은 날 더 좋아해.’
막상 줄리아 데 발데사르 후작 영애 본인은 이사벨라의 차력 쇼에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카멜리아가 약혼자의 관심을 이사벨라에게 뺏기고 바들바들 떠는 모양 역시 보았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고 걸치고 온 숄을 벗어 잘생긴 일 도메스티코에게 건넸다. 그녀의 아버지는 높은 작위에도 불구하고 지방에 근거지가 없는 수도의 궁정 귀족이었기 때문에 수도의 추기경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사벨라가 벌이는 바보 같은 추태는 눈에 빤히 보였지만 줄리아는 딱히 거기에 끼어들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고 이사벨라와 똑같은 부류인 카멜리아를 도와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무료하게 손님들 목록을 훑고 있는 줄리아 데 발데사르의 시선에 아까의 일 도메스티코가 다시 한번 걸렸다.
‘정말 잘생기기는 했네.’
레오나티 자작가에서 고용하기에는 분수에 맞지 않을 정도로 훤칠하게 잘생긴 시종이었다.
‘자작가 따위가 아니라 왕궁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미남인데, 왜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지?’
줄리아 데 발데사르는 나중에 레티시아 데 레오나티에게 저 일 도메스티코의 내력을 물어보리라고 다짐했다. * * * 그 기회는 생각보다 몹시 빨리 왔다.
“이번에 새로 저희 집에서 일하게 된 일 도메스티코예요.”
레오나티 자작 영애는 턱 끝으로 잘생긴 남자 시종을 가리켰다. 제아무리 시종이라도 이름 정도는 불러줄 법한데, 정말로 턱 끝으로만 가리키는 것을 보니 레오나티 자작가는 고용인들을 인간적으로 챙기는 분위기가 아닌 모양이었다.
“원래 갈리코 왕국 출신인데, 에트루스칸으로 급하게 이민을 오게 되었다더군요.”
오타비오는 짐짓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재작년에 선대 갈리코 왕이 승하한 후에 갈리코 왕국 내부에서 반역죄로 사람들을 많이 쳐냈었지요.”
오타비오는 호의적이지 않은 눈초리로 몹시 잘생긴 일 도메스티코를 바라보았다.
“혹시 저자도 역도의 무리라 에스투스칸 왕국으로 도망 온 것 아닌가요?”
“어머, 그러면 귀족이 레티시아네 집에서 일 도메스티코로 일하고 있는 건가요?”
이사벨라가 까르르 웃었다.
“귀족의 시중을 받다니, 왕족이라도 된 기분인데요?”
오타비오는 저 시종이 반역자의 무리일 수도 있으니 거리를 두고 내쫓아버려야 한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었지만, 이사벨라는 오타비오가 말하는 ‘중요한 정치적 함의’니 ‘반역의 무리’ 같은 것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잘생긴 일 도메스티코가 귀족이기까지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만 온 관심이 쏠려 있었다. 피상적이기는 레오나티 자작 영애도 마찬가지였다.
“어쩐지, 저 일 도메스티코가 귀족이라면 설명되는 게 많네요. 갈리코 사람이라면서 에트루스칸어와 라틴어를 둘 다 하거든요. 예법에도 능하고 시문도 잘 알더군요. 시종 치고 잘생기고 똑똑해서 좋아요. 고상하기도 하고.”
줄리아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레오나티 자작 영애에게 물었다.
“저자의 이름이 뭔가요?”
“⋯⋯프랑수아예요.”
“평민치고는 재수 없을 정도로 고상한 이름이군요.”
못마땅한 티를 숨기지 못한 오타비오가 불쑥 끼어들었다. 이사벨라가 예쁘게 눈을 접어 눈웃음을 치면서 오타비오의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 주었다.
“평민치고는 지나치게 기생오라비처럼 생기기도 했는데―.”
이사벨라는 옆에 앉아 있던 카멜리아를 돌아보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우리 카멜리아, 오늘 못 보던 예쁜 드레스를 입고 왔는데, 레티시아에게 미리 잘생긴 일 도메스티코가 있다고 귀띔받고 잔뜩 꾸미고 온 거죠?”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는 깜짝 놀라서 손사래를 쳤다.
“아뇨, 제가 무슨. 정말로 몰랐어요, 레오나티 자작가에 저렇게 잘생긴 일 도메스티코가 있는 줄은.”
“어머. 그럼 카멜리아도 저 일 도메스티코가 잘생겼다고는 생각하는 거네?”
이사벨라의 몰아붙이기 실력은 범상치 않았다. 레오나티 자작 영애는 가뜩이나 능력이 좋은 이사벨라를 찰떡같이 어시스트했다.
“무슨 소리예요, 카멜리아. 제가 저번 서신에서 우리 집에 너무 잘생긴 일 도메스티코가 새로 생겼으니 다음번에 놀러와서 보라고 했잖아요.”
레오나티 자작 영애의 말에 동석한 영애와 영식들이 왁자지껄하게 카멜리아를 놀렸다.
“부끄럽다고 거짓말하는 거야?”
“카스틸리오네 영애, 약혼자를 옆에 두고 그러시면 안 되죠!”
카멜리아의 얼굴은 새빨개졌고, 젊은이들은 카멜리아가 부끄러워한다며 한 번 더 그녀를 놀렸으며, 카멜리아의 약혼남인 오타비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약혼녀가 일행들에게 놀림당하는 것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약혼녀가 본인을 앞에 두고 다른 남자를 쳐다본다고 생각해서 화가 난 것이었다. 이사벨라는 솜사탕처럼 웃으며 새하얀 손으로 깃털처럼 가볍게 오타비오의 뺨을 쓸어내렸다.
“얼굴에 열 오른 거 보세요.”
이사벨라는 오타비오의 눈을 바라보며 제비꽃 색 눈동자에 애처롭다는 빛을 띄웠다.
“사내다운 오타비오, 저런 시종 따위는 괘념치 마세요. 당신 같은 약혼자를 둔 카멜리아는 참 행운아예요.”
앉은 자리에서 코를 베인 카멜리아는 한 것 없이 욕은 배부르게 얻어먹고, 이사벨라가 자기 약혼자에 침을 바르는 꼬락서니도 두 눈으로 똑똑히 관람하는 날벼락을 맞았다. 하지만 어디 하나 억울함을 호소할 곳이 없었다. 이 자리에 앉은 영애들은 대부분 이사벨라와 몹시 친했고, 영식들은 친하건 친하지 않건 무조건 이사벨라의 편이었다. 애먼 부채만 가열하게 부쳐대는 카멜리아를 옆에 앉혀 놓고 이사벨라는 주변에 앉은 영애·영식들에게 조만간 본인의 집에서 무도회가 있을 것을 알렸다.
“이번에 데 마레 추기경 예하께서 제 여동생인 아리아드네의 데뷔탕트 무도회를 집에서 따로 열어주시기로 하셨어요.”
이사벨라의 선언에, 산 카를로의 차기 사교계는 웅성웅성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하는 데뷔탕트 무도회요? 추기경께서 둘째 딸을 몹시 중하게 여기시나 봐요.”
이사벨라는 저 질문을 듣자 창자가 뒤틀리는 것 같았지만 남들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표정을 잘 갈무리하고 예쁘게 웃어 보였다.
“그럼요. 우리 아리아드네가 이번에 큰 공을 세워서 국왕 폐하 내외께 인정과 희사를 받지 않았습니까. 그에 걸맞게 가문에서도 서포트를 해 줘야죠.”
집안에 잘 나가는 자식이 하나 더 있는 것은 나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라고 마음을 다스리며 이사벨라는 심호흡을 해 보았다. 그녀는 이번 일에서 콩고물이란 콩고물은 다 주워 먹을 작정이었다. 그래야 배가 아픈 것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이다.
“모처럼 저희 집에서 열리는 파티잖아요?”
파티의 주최자는 아무래도 특별 취급을 받고는 했다.
“어머니께 승낙을 얻어서 따로 응접실을 빼서 파우더룸을 만들어놓을게요. 우리끼리 거기서 수다 떨어요.”
영애들은 반색했다.
“무도회에서 어중이떠중이들과 어울려야 되는 것 너무 싫어요.”
“우리끼리 오붓하게 있을 수 있으면 너무 좋죠!”
“역시 이사벨라예요. 수완이 좋아.”
이사벨라는 영애들도 영애들이지만 영식들에게 달콤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다들 참석해 주셔야 해요? 꼭.”
그녀의 무어 제국 산 옷감을 아낌없이 사용한 드레스를,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촌스럽고 음침한 그녀의 여동생보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이사벨라를 보아 줄 관객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저 영식들이 참석한다면 체자레 백작 역시 참석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었다. 그녀는 산 카를로에서 가장 콧대 높은 남자의 관심을 가지고 싶었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은 다 그녀의 것이어야만 했다. 지금까지 삶은 대체로 그렇게 풀려가고는 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 틀림없었다. * * * 이사벨라가 친구들 앞에서 잘난 척을 하며 어떻게 해야 동생보다 더 돋보일까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 막상 무도회의 주인공은 몸치장에 관해 별생각이 없었다.
“라지오네 양장점의 마리니 부인 오셨습니다.”
돈이 이렇게나 많이 생겼는데 더 좋은 의상실과 거래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산차의 의견을 묵살하고 원래 거래하던 라지오네 양장점을 부른 것이다.
“예산이 넉넉지가 않아. 옷에 쓸 수 있는 건⋯⋯. 내 생각엔 아마 5 두카토(약 500만 원)?”
“아가씨! 추기경 예하께서도 더 필요하면 더 주시겠다고 하셨잖아요!”
“일단 주신 것 안에서 꾸려나가 보기는 해야지. 그리고 이번에 화장품 일습도 마련해야 해서 생각만큼 넉넉지가 않네.”
그 말에 불만 가득하던 산차는 나름 수긍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 카를로에서 데뷔탕트 신고식을 치르지 않은 여자아이는 화장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리아드네도 기초적인 피부용 연고를 제외한 일체의 화장은 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드디어 이번 데뷔탕트 무도회를 기점으로 아리아드네도 색조 화장을 하고 바깥에 나갈 수가 있었다.
“아가씨는 이목구비 위치가 잘 잡혀 있어서요, 화장만 하시면 한 미모 하실 거에요.”
의욕이 가득한 산차였다. 의욕만큼 재능도 있었다. 드레스 셀렉션 시에도 산차의 의욕은 하늘을 찔렀는데, 이는 마리니 부인의 극찬을 받았다.
“단순하고 점잖은 것으로 합세. 번잡한 장식은 없었으면 좋겠고 피부가 많이 안 보였으면 좋겠어. 목둘레선은 쇄골 위까지 올라오는 거로 하지.”
아리아드네는 전생에 부정적인 관심의 한가운데에서 십 년 가까이 살았었다. 깊이 파인 것을 입으면 야하다고, 화려한 것을 입으면 천박하다고, 수수한 것을 입으면 초라하다고 비난하는 목소리를 근 십 년을 견디다 보니 그녀의 드레스 선택은 점점 더 보수적으로 변해갔다. 아름답거나, 어울리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욕먹지 않는 것을 위주로 옷을 선택하다 보니 ‘패션 감각이 없다’는 이야기도 무수히 들었다. 패션 감각이 없다는 이야기를 십 년간 듣다 보면 사람이 위축되는 법이다. 이는 결국에는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었다. 아리아드네는 정말로 옷을 택할 때 보는 눈이 없었다. 그런 아리아드네의 주문에 산차와 마리니 부인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안 됩니다!”
“그건 아니죠!”
마리니 부인은 지난번에도 아리아드네에게 설파한 바 있던 평소 지론을 펼쳤다.
“상체에 볼륨감이 있으면 마냥 덮기만 하면 안 된다니까요! 적당히 파서 시원하게 공간감을 줘야 더 날씬해 보입니다.”
“맞아! 맞아! 게다가 아가씨는 쇄골이 예쁘고 얼굴이 작지만 목이 긴 편은 아니시라고요! 목둘레선을 올리면 엄청 답답해 보여요.”
마리니 부인은 제법이라는 듯이 산차를 돌아보았다.
“데 마레 영애, 영애의 측근이 보는 눈이 있는데요? 아주 예리해요.”
“당연하죠!”
마리니 부인의 칭찬에 콧대가 높아진 산차는 아리아드네를 설득했다.
“아가씨, 목둘레선은 파고 대신 평소에 두르시는 광목천을 그날 더 빽빽하게 멜게요. 그러면 앞판도 판판해 보이고, 야한 느낌도 없고, 목은 길게 드러나서 시원해 보일 거예요.”
아리아드네는 두 손 두 발을 모두 들고 말았다.
“두 분이 그렇게 입을 모아 설득하시니 제가 어쩔 수가 없네요. 첫 번째 드레스는 단순하고 우아하게, 두 번째 드레스는 활동하기 편하게 만들어 주시고, 디테일은 두 분께서 알아서 해주세요.”
산차와 마리니 부인은 서로 손뼉을 마주쳤다. * * * 데뷔탕트 무도회 준비에 드레스 고르기처럼 즐겁고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데 마레 가문의 점심 식사 시간에 루크레치아는 아리아드네의 데뷔탕트 파트너 이야기를 꺼냈다.
“예하, 아리아드네의 데뷔탕트 파트너는 사실 원래대로라면 이폴리토가 서 주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음. 그렇지.”
이폴리토는 데 마레 추기경과 루크레치아 사이의 장자로, 대학의 도시 팔로마로 현재 유학을 떠난 상태였다.
“이폴리토가 이것 때문에 산 카를로로 돌아올 수는 없지 않겠어요?”
“아무래도 어렵겠지.”
“그래서 먼 친척을 하나 데려다가 아리아드네의 데뷔탕트 파트너를 세우기로 했어요.”
아리아드네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데 마레 추기경의 눈썹도 찌푸려졌다.
“설마 당신 친정집 아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