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진짜 싫은 데뷔탕트 파트너2021.04.18.
루크레치아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네, 제 친정 조카예요. 둘째 오빠인 스테파노의 아들인 자노비입니다.”
일전에 왔던 라틴어 선생 조반니는 루크레치아와 오촌 관계였는데, 이번에는 더 가까운 혈육이었다. 제대로 챙겨주려는 모양이었다. 한 달간의 근신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아라벨라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아, 그 못생긴 오빠?”
“넌 좀 닥치고 있어.”
루크레치아가 식탁 머리에서 아라벨라에게 목소리를 낮춰 으르렁거렸고, 기가 죽은 아라벨라는 접시에 코를 막고 밥만 먹었다.
“집에 친척이 얼마 없으니 별수 있습니까? 친가 쪽 친척이 있으면 당연히 모셔왔을 텐데 없으니깐 제가 그러죠.”
데 마레 추기경이 고아 출신이어서 친가 쪽의 친척이 아무도 없는 것을 은근히 꼬집는 이야기였다. 과연 데 마레 추기경은 이 이야기를 듣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침음성만 흘렸다.
“그 오빠는 요새 뭐 하고 있는데요?”
이사벨라의 질문에 루크레치아가 장황한 대답을 했다. 장래가 촉망되는, 착한, 성실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등등의 단어가 나왔지만 미사여구를 다 떼고 요약을 해 보자면 결국에는 기사도 아니고, 견습기사도 아닌 기사의 종자라는 이야기였다. 기사의 종자는 기사에게서 짬짬이 무예를 배우는 대신에, 무급으로 기사가 탄 말을 끌고, 갑옷을 입혀주고, 말의 먹이를 주고 등등의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기사 집안의 귀족 소년이 기사의 종자로 일하는 경우라면 스무 살 언저리에 대개 견습기사로 승급이 되지만, 다른 일을 하던 집안의 아들이 기사의 종자로 일을 하는 중이라면 그가 언제 기사로 승급할지는 정말로 기약이 없었다. 5년이고 10년이고 기사 서임과 신분 상승의 꿈을 꾸며 부모의 등골을 빨아먹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즉, 집안에 돈이 좀 있는 소년이, 율사나 상인 같은 직업을 가질만한 머리는 안 되지만 농사 따위는 시시해서 짓고 싶지 않을 때, 직업 선택을 보류하는 의미로 택하는 자리가 이 기사의 종자였다.
“그거 너무 급이 떨어지는 거 아니요?”
결국 데 마레 추기경이 참지 못하고 한소리 했다. 처가댁 조카한테 할 말은 아니었지만 루크레치아의 친정은 엄밀히 따지자면 진짜 처가도 아닌 것이 지난 20여 년 동안 데 마레 추기경의 고혈을 수태 빨아먹었다. 말이 곱게 나가지 않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말을 듣는 루크레치아의 입장에서는 그게 또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신경질을 팩 내면서 쏘아붙였다.
“내가 무슨 자노비랑 쟤랑 결혼이라도 시키래요? 데뷔탕트 파트너로 잠깐 서는 것뿐이잖아요! 자노비 안 시키면, 뭐 대신 파트너 시킬 친척이라도 있어요 당신?!”
루크레치아가 이렇게 나오면 못해도 사흘 동안은 싸한 분위기와 잔소리 폭격, 신세 한탄의 공격이 이어지고는 했다. 그렇게 되면 데 마레 추기경은 자기 집 안에서 눈치를 보며 다녀야 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엄습해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 그래, 사람이 없네 없어! 다 친척 없는 내 죄지! 당신 마음대로 해!”
* * * 루크레치아의 행동력은 대단했다. 그녀의 조카인 자노비는 이미 일주일 전에 루크레치아의 기별을 받고 고향인 타란토 영지를 출발한 상태였다. 데 마레 추기경 일가의 점심 식사에서 루크레치아가 데 마레 추기경에게 일방적으로 자노비를 데려오겠다는 통보를 하던 그 시점에는 이미 산 카를로의 도시 경계를 넘고 있었다. 당일 오후에 데 마레 추기경의 관저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티파티에 초대되어 아리아드네에게 첫선을 보이게 되었다.
“이 댁 안주인께 초대받고 온 자노비 데 로시입니다. 저택이 완전 으리으리하네요. 이야, 너희는 너희끼리만 이렇게 호화롭게 살고 있었냐?”
일체의 생활비를 루크레치아에게 의존하는 집안의 아들답게, 감사한 줄은 모르고 탓은 잘하는 욕심 많은 자노비였다. 그는 땅딸막한 키에 두꺼운 목과 짧은 팔다리를 가진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조그만 눈과 양 볼에 가득한 살, 그리고 무턱 때문에 나이보다도 더 어려 보였다. 이사벨라, 아리아드네, 그리고 아라벨라 세 자매는 소녀들의 응접실에 앉아서 이 ‘사촌’을 각기 다른 생각을 하며 바라보았다.
아라벨라가 가장 단순했다.
‘못생긴 거 맞잖아.’
아리아드네는 이 청년의 관상에서 싸함을 느꼈다.
‘눈이 탁하네.’
이사벨라는 자노비가 응접실에 제대로 들어와서 앉기도 전에 호구의 냄새를 맡았다.
‘저런 스타일. 내 말 잘 듣지.’
자노비는 데 마레 추기경 휘하의 세 자매가 자기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으스대며 고모에게 인사했다.
“루크레치아 고모! 오륙 년 전에 작은할아버지 장례식에서 뵙고는 처음 봅니다. 잘 지내셨죠?”
“자노비. 요새 열심히 살고 있다고 들었다.”
“그럼요.”
자노비는 루크레치아와 자매들을 앉혀 놓고 자기 자랑을 했다. 주로 기사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최근에 훌륭한 기사는 누가 있었는지, 기사들 사이에서는 무엇이 화제인지에 대해서 마치 자기가 기사인 양 썰을 풀었고, 추기경 이모부의 집에 방문한 주제에 기사가 잘 풀리기만 하면 성직자보다 훨씬 훌륭한 직업임을 암시하며 양껏 으스댔다. 한참 자기 자랑을 하던 자노비는 자매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참, 이 중에 제가 데뷔탕트에 데리고 가야 할 레이디가 있다구요.”
그는 세 자매를 위아래로 훑더니 아라벨라를 제쳤다.
“넌 완전 꼬맹이니까 아니고.”
어린이 취급받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아라벨라의 표정이 콱 구겨졌다. 시선을 옆으로 돌린 자노비는 청순하고 오밀조밀하게 아름다운 이사벨라를 보고는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지만 그도 들은 것은 있었다. 데 마레 추기경 가문에는 천금인 아름다운 큰딸이 있고 그저 그런 새로 생긴 둘째 딸과 원래 있던 막내딸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타란토는 워낙 남쪽 끝에 있는 영지라, 산 카를로를 자자하게 울리고 있는 ‘진실을 꿰뚫어 보는 소녀’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기 주제에 아름다움으로 명성이 자자한 큰딸이 자기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자기객관화가 잘 안 되는 자노비로서도 알고 있었다. 오늘 그의 데이트 상대는 아름다운 큰딸이 아니라 비루먹었다는 둘째 딸이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자노비는 아리아드네를 보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등 키스를 위해 자기 손 위에 아리아드네의 왼손을 얹으라는 거였다.
“너겠구나. 자노비 데 로시. 네 사촌오빠다.”
아리아드네의 왼쪽 눈썹이 높이 하늘로 올라갔다. 뒤에서 시립하고 있던 산차의 두 눈도 연두색 불을 뿜었다. 루크레치아만 없었으면 산차가 쟁반으로 자노비를 때렸을지도 모른다. 아리아드네는 양손을 등 뒤로 숨겼다. 앞으로 내민 자노비의 오른손이 허공에서 무안하게 혼자 남았다.
“손은 조금.”
입으로는 완곡하게 돌려서 ‘말이 짧다?’는 항의를 건넸다. 자노비는 루크레치아의 친정 조카였지, 루크레치아와 피가 섞이지 않은 아리아드네와는 실질적으로 남남이었다. 초면에 편하게 말을 놓을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손에 키스하겠다는 자기의 제스처가 무시당한 게 분했던지 자노비의 언사가 시비조로 변했다.
“우리 고모가! 어? 네 어머니이니 사촌오빠 맞지. 야, 친척 오빠가 친척 동생한테 말도 못 놓냐?”
주먹을 부르는 태도였지만 자노비의 말은 원칙적으로는 모두 맞았다. 산 카를로의 인지된 서출은 정실부인을 친어머니처럼 여기고 행동하는 것이 미덕이었고, 주변 사람들도 다 그 서출이 정말로 정실부인의 자식인 것처럼 구는 것이 예의였다. 문제는 손등 키스는 성적인 뉘앙스가 있어서 진짜 친인척 사이에는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사촌 오빠 운운하는 주제에 손등 키스를 하자고 덤비다니 그 저의가 심히 불순했다. 아리아드네는 이를 꽉 물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노비 오라버니. 만나 뵙게 되어 기쁘네요. 손등 키스는 지금 장갑도 끼고 있지 않으니 다음에 해요.”
레이디 쪽이 장갑을 끼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는 신사 쪽에서 손등 키스를 청하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레이디가 맨손인데 불가피하게 손등 키스를 하게 되는 경우라면 입술과 손이 닿지 않게 허공에 하는 것이 매너인데, 자노비의 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그런 매너를 전혀 지켜줄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저 녀석은 잘못에 대한 지적을 하면 ‘나는 당연히 허공에 키스하려고 했다, 사람을 뭐로 보는 거냐’고 난리를 칠 게 뻔한 스타일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시시콜콜하게 시비를 다투느니 그냥 자기가 예민한 사람인 것으로 치고 대범하게 넘어가 주기로 했다. 하지만 루크레치아가 거기에 한마디를 안 보탤 위인이 아니었다.
“손등 키스가 뭐라고, 식구들끼리 뭐 그렇게 까탈스럽게 구니. 자노비 오빠 속상하겠다.”
“아리아드네가 좀 까칠하기는 하죠. 자기가 싫으면 싫은 거고 남의 사정을 안 봐줘요. 융통성이 전혀 없어, 쟤가.”
어머니의 영혼의 단짝인 이사벨라가 끼어들어 아리아드네 이상한 사람 만들기에 동참했다. 여기에 더 앉아 있다가는 도저히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았다. 아리아드네는 빠른 탈출을 시도하기로 했다.
“저는 잠시만⋯⋯.”
아리아드네는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일어섰다. 화장실에 한 시간 정도 틀어박혀 있다가 천천히 돌아올 생각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를 보며 자노비는 혀를 찼다.
“이야. 너 진짜 키 크다.”
아리아드네는 듣기 싫은 소리에 자노비 쪽을 홱 돌아보았다. 데 마레 추기경 관저로 들어온 이후 아리아드네는 극도로 식사를 자제했는데도 불구하고 물 먹은 대나무처럼 키가 쭉쭉 자라서 벌써 3 피에디 10 디토(약 166 센티미터)나 되었다. 그 나이 또래치고는 상당히 큰 키였다. 아리아드네의 데뷔탕트 파트너로 무도회의 입장을 함께 하고, 또 첫 춤을 함께 추게 될 자노비는 하필이면 자기 또래치고도 작았다.
“그렇게 키가 큰데 굽도 신어?”
아리아드네는 무심코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1 디토(3.6 센티미터) 정도 되는 높이의 낮은 굽이 달린 신발이었다.
“오빠가 친척이니까 조언 하나 해줄게. 잘 들어라.”
자노비는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비밀 팁을 알려준다는 듯이 의기양양한 태도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요새 여자들은 응? 자기가 돋보이면 된다고 생각해서 막 높은 힐 신고 그러는데 그거 진짜 배려 없는 거야. 자기 옆에 있는 남자를 돋보이게 해줄 줄 아는 여자가 진짜로 돋보이는 여자라구.”
자노비는 으스대며 말했다.
“당일에는 굽이 없는 신발을 신고 와. 진짜 현명한 여자라면 그래야지.”
루크레치아가 흐뭇한 얼굴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사벨라는 배꼽을 잡고 좋아하며 강 건너 불구경 중이었다. 뭔가 혐오스러운 덩어리를 보는 것처럼 자노비를 넋 놓고 쳐다보는 아라벨라와 산차, 아리아드네만이 한편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그래도 우아하게 표정 관리에 만전을 기해서 자노비를 포함한 모두에게 미소를 남기고 나오는 데에 성공했다. 웃으면서 방을 나온 아리아드네는 응접실 문이 탁 닫히자마자 썩은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한 시간 뒤에 돌아갈 생각을 버리고, 따라 나온 산차에게 15분 뒤에 아리아드네 아가씨가 몸이 아프셔서 오늘은 차를 더 마실 수 없다고 이르라고 시키고는 굳은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내가 웬만한 건 다 참는데,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네. 제가 봐도 아닌 것 같아요 아가씨.”
총총 자신의 서재로 돌아온 아리아드네에게 집사가 보낸 하인이 서신이 하나 도착했음을 알렸다. 하인이 들고 온 봉투는 황금빛 장식이 그려져 있었고 붉은색의 밀랍에 AFC라는 이니셜이 찍혀 봉해져 있었다.
“왕자님이네요, 아가씨.”
“답은 왕자네.”
아리아드네와 산차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