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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자매간의 알력 (45/733)

<제45화> 자매간의 알력2021.05.09.

남자가 규중처녀의 방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알폰소는 아리아드네가 진정이 되자마자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빠르게 아리아드네의 방에서 나왔다. 누군가가 보았다면 ‘데려다만 주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알폰소는 아가씨의 방에 남자가 못 들어가게 하는 이유를 일전에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생활공간, 사적인 물품들, 남자 방과는 확연히 다른 꽃향기 같기도 하고 분 냄새 같기도 했던 소녀의 체향이 밴 방 냄새, 그리고 그 안에서 무방비했던 아리아드네. 자꾸 자기가 본 것이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사회적으로 규중처녀의 방에 남자가 함부로 들어가게 허용했다가는 안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날 것이 틀림없었다. 알폰소는 고개를 흔들고 주먹을 꽉 쥐면서 생각을 떨치려고 노력했다.

16550986288087.jpg‘난 훌륭한 신사야. 이러면 안 돼. 상상조차도 고결한 레이디에게 폐를 끼치는 짓이야.’

복도에서 잠시 머리를 식힌 알폰소는 본인이 나름 잘 가라앉혔다고 생각했다.

16550986288087.jpg‘자제할 수 있어.’

그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기사도의 신봉자였고 가장 뛰어난 젊은 군주라는 평을 받았다. 자제와 인내는 그가 평생을 배워온 일이었다.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고 믿었다. 하지만 알폰소는 본인이 하도 손에 힘을 준 나머지 손톱에 찍혀 손바닥에 생채기가 난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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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0986288102.jpg‘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이사벨라는 오늘 이 속담을 실로 체감하는 중이었다. 아리아드네의 데뷔탕트 드레스에 손을 쓴 것까지는 좋았다. 이름을 까먹은 아리아드네의 새 하녀를 이용해서 광목천이 풀리도록 철제 후크를 납이 잔뜩 들어간 연한 것으로 바꿔치기한 것도 좋았고, 말레타를 시켜서 드레스 앞섶의 박음질을 몰래 뜯어놓은 것까지도 좋았다. 그런데 거기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가슴 주머니’와 비루한 솜뭉치가 아니라, 진짜 자기 가슴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16550986288102.jpg‘쟨 바보 아냐? 그걸 왜 드러내진 못할망정 동여매고 다녀?!’

외부의 도움 없이도 여름 복숭아처럼 단단하고 탄력 있게 봉긋 서 있는 가슴은 이사벨라가 꿈에도 그리던 것이었다. 이사벨라는 저 가슴을 가질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꽁꽁 싸매고 다니다니! 결과적으로 이사벨라가 상상하던, ‘가슴 주머니’가 드러나고 광목천 아래로 솜 주머니 두 개가 떨어지는 그림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영리한 이사벨라는 주어진 것으로 꾸려나갈 줄을 알았다.

16550986288102.jpg“쟤, 가슴 자랑하려고 일부러 뜯은 거 아니에요?”

귀부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조금 전에 일어난 ‘의상 사고’에 대해서 토의하고 있을 때 이사벨라가 비수처럼 던진 한마디였다.

16550986288102.jpg“제 동생은 항상 자기 몸매에 대해 과한 자부심이 있었어요. 시선을 끌기 위해 뭐라도 하는 성미인 건 알았지만⋯⋯.”

부인들과 영애들이 상상도 못 해봤던 가능성이었다. 그들은 갑자기 그것이 진짜일지 목소리를 낮추어 열띤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부인들은 ‘에이, 설마’ 하는 분위기가 컸지만 이사벨라의 친구들이 많은 어린 영애들은 주로 이사벨라의 의견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1655098628812.jpg“실수인 척 가슴까지 다 보여주면 다들 기억에 남긴 하겠네요.”

1655098628812.jpg“솔직히 이 무도회도 되게 과분하지 않아요? 자기가 뭔데 단독 데뷔탕트 무도회를 열어요? 누가 보면 왕족인 줄 알겠어요.”

1655098628812.jpg“왕자님은 대체 어떻게 파트너로 모셔온 거래요? 아는 사람 있어요?”

하지만 이사벨라와 그 친구들의 이야기는 아리아드네의 행동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아리아드네같이 시골에서 자란 하녀 소생의 서출이 어떻게 감히 그들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맞춰져 있었다. 미웠기 때문에, 아리아드네에게 일어난 일이 불운한 사고가 아니라 의도적인 행동이라고 이미 결론을 지어 놓은 다음에 비난을 퍼부은 것이다.

1655098628812.jpg“그 영애가 예뻐요?”

1655098628812.jpg“아니, 난 솔직히 모르겠어요.”

1655098628812.jpg“몸매는 좋더라.”

눈치 없는 누군가의 아리아드네를 향한 칭찬에 레오네티 자작 영애가 뾰족하게 반론을 던졌다.

1655098628812.jpg“가슴 까고 다니면 누구든 몸매 좋다는 소리는 들어요. 작은 데 마레 영애보다는 솔직히 카멜리아가 더 낫지 않아요?”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 남작 영애가 내심 뿌듯해하며 겸양의 말을 던졌다.

1655098628812.jpg“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리고 몸매는 남자들이 안 좋은 생각을 할 때나 보는 거 아니에요? 얼굴까지 다 전반적으로 합쳐서 보면 이사벨라가 제일 예쁘죠.”

소녀들은 자기들끼리 왈가왈부하면서 내부 서열을 정했다. 객관적인 외모 줄 세우기도 일부 들어가 있었지만 상당 부분은 소녀들 사이에서 그녀들이 차지하는 위상이 반영되어 있었다. 친하면 실제보다 과장해서 예쁘다고 해주었고, 인맥이 없는 소녀라면 하마평에 올라가지도 못했다.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동그랗게 둘러서서 자기들끼리 수군덕대는 이사벨라와 그 친구들 사이에 몹시 화가 난 듯한 남자의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16550986288087.jpg“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분노로 얼굴이 붉어진 알폰소 왕자였다. 레이디들의 내밀한 대화를 듣게 되면 모르는 척해주는 것이 신사의 매너였지만, 그는 저열하게 재창조되는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를 듣고는 차마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16550986288087.jpg“일부러 했다는 증거 있습니까? 본인이 얼마나 속상해했는데, 그런 끔찍한 사고를 자기 손으로 저질렀다고 왜 단정을 짓고 몰아가는 겁니까?”

소녀들은 당황해서 서로 얼굴을 두리번거렸다. 이것은 대참사였다. 왕자가 나설 줄은 몰랐다. 공식 석상에서 왕자에게 대놓고 지적을 당하다니! 상대는 모든 아가씨가 잘 보이고 싶어 꿈에서도 그리는 왕자님 본인이었다. 하지만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는 부류의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자기가 왕자님과 결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보일 생각 자체가 없던 레오나티 자작 영애는 자기들을 비난하는 알폰소 왕자에게 거칠게 반응했다.

1655098628812.jpg“제국의 작은 해를 뵙습니다, 알폰소 왕자 전하. 하지만 이건 여자들끼리의 일이에요.”

레오나티 자작 영애가 총대를 메자 주변의 소녀들도 같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1655098628812.jpg“그러게요, 알폰소 왕자님이 여자들의 여우 짓에 대해서 어떻게 아시겠어요. 작은 데 마레 영애를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1655098628812.jpg“가슴 보고 반했나? 어우, 왕자님 그렇게 안 봤는데.”

1655098628812.jpg“가슴 깐 여우한테 속았겠지! 걔가 얼마나 속살댔으면 왕자님이 저래요? 본인이 속상해한 건 어떻게 알았대?”

알폰소는 생각지도 못한 영애들의 호전성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의 일생 전체를 통틀어, 또래의 영애들은 그가 이상한 소리를 해도 그에게 웃어주었을지언정 그를 싫어하는 일이 없었다. 그가 맞는 말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녀들이 그에게 이렇게 적대적으로 군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소녀들을 친위부대처럼 거느린 이사벨라는 친구들의 뒤에 서서 교활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때 알폰소의 지원군이 나타났다. 마르케즈 백작 부인이었다.

1655098628812.jpg“또래 아가씨가 안쓰러운 일을 겪었으면 연대하고 위로할 줄 알아야지, 물 만난 고기처럼 덥석 뛰어들어서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으라고 영애들 부모님께서 가르쳤습니까?”

마르케즈 백작 부인은 지체 높은 가문에서 예절과 교양을 성황서 삼아 자란 사람이었다. 게다가 주군의 아들에게 안 좋은 평판이 생길 위기였다. 그녀는 서릿발 같은 호통으로 아가씨들을 혼냈다. 하지만 영애들은 지금 막 왕자조차도 퇴치하려던 찰나였다. 순순히 패배를 인정할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 귀족 부인이었다면 소녀들은 ‘저 아줌마 뭐야’라며 입방아를 찧고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마르케즈 백작 부인은 마르그리트 왕비의 최측근으로 이름이 난 사람이자 명문 마르케즈 백작가의 안주인이고, 산 카를로 사교계의 명사였다. 사교계에서 20년 넘게 구른 마르케즈 백작 부인을 두고 감히 그녀의 앞에서 ‘여자들의 세계를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표정만 구길 뿐 아무도 감히 거기에 덤벼들지 못했다. 노련한 마르케즈 백작 부인의 눈에는 누가 이 상황의 수괴인지가 빤히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 와중에 이사벨라를 콕 찍어서 한마디를 더 했다.

1655098628812.jpg“첫째 데 마레 영애, 훌륭한 부친 밑에서 곱게 자란 금지옥엽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부친께서는 모르긴 몰라도 자매간에 우애가 좋고 서로를 두둔해 주는 것을 바라실 겁니다!”

혈통을 중시하는 마르케즈 백작 부인이 가장 좋아하는 타령인 ‘천박한 정부의 딸’ 이야기는 데 마레 추기경 관저에서 열린 파티임을 감안해서 꺼내지 않고 꾹 눌러 참았지만, 마르케즈 백작 부인의 차가운 눈초리와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누구든 그 뉘앙스를 읽을 수 있었다.

16550986288102.jpg‘저 오지랖 넓은 아줌마가!’

이사벨라의 얼굴이 분노와 수치로 새빨갛게 익었다. 하지만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이사벨라로서는 차마 마르케즈 백작 부인에게, 그것도 왕자가 보는 앞에서 마음속에 있는 진심 그대로를 쏘아붙일 수 없었다. 그래서 이사벨라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기로 했다. 이사벨라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십분 활용해 눈물샘에 모아서, 강아지 같은 큰 연보라색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투명한 피부가 분홍색으로 달아오르며 작고 가녀린 몸 선이 바들바들 떨렸다.

16550986288102.jpg“그러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요정같이 아름다운 소녀가 또래 소년과 강퍅한 40대 부인 앞에서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니 사건의 전후를 불문하고 그림이 알폰소 왕자와 마르케즈 백작 부인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1655098628812.jpg- “아니, 저 소녀는 왜 울고 있대?”

1655098628812.jpg- “앞에 부인이 울린 것 아닐까요?”

1655098628812.jpg- “마르케즈 백작 부인이네, 저 부인이 좀 꼬장꼬장하긴 하지. 아니 근데 왜 왕자님도 같이 서 계시지? 왕자님이 뭐 실수라도 하셨나?”

웅성웅성하는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에 마르케즈 백작 부인은 적지않이 당황했지만, 당혹감을 갈무리하며 애써 우아하게 표정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과연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마르케즈 백작 부인이 알폰소 왕자를 이 난리 통에서 어떻게 데미지 없이 안전하게 빼낼지 궁리하던 차였다. 2층에서 두 번째 데뷔탕트 드레스로 갈아입은 아리아드네가 측근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내려오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두 번째 드레스는 좀 전의 사고를 만회하기 위해 일부러 맞춘 옷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드레스는 목선이 높이 올라오고 소매도 손끝까지 내려가 살갗이 보이는 부분은 최소화되어 있었지만, 몸에 착 달라붙는 선이 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아리아드네의 몸매를 아주 잘 살려 주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시선을 잡아끄는 오늘의 주인공으로 향했고, 소란이 인 것을 발견한 아리아드네는 이내 알폰소 왕자와 마르케즈 백작 부인의 옆으로 다가와서 그 옆에 섰다. 아리아드네와 이사벨라가 서로 나란히 서서 대치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데뷔탕트를 존중하여 진한 색깔의 드레스를 차려입은 다른 사람들 사이로, 눈처럼 흰 드레스를 입은 두 영애만 조명을 쏜 것처럼 눈에 튀었다. 오늘의 이사벨라는 솜사탕 같았다.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그랬다. 순백색 오간자 원단을 겹겹이 쌓아 올려 만든 동그란 치맛단은 빛이 들어올 때마다 반짝반짝 빛나 만인의 시선을 강탈했지만, 옷에 눌리지 않으려고 잔뜩 힘을 준 화장은 이사벨라의 최대 매력인 토끼 같은 청순함을 강조하기는커녕 각도에 따라서는 조금 어릿광대 같았다. 반면에 아리아드네의 착장은 몹시 점잖았다. 화장은 눈꼬리를 아래로 내려 눈을 둥글게 강조한 것을 제외하면 은은한 핑크빛으로 자연스럽게 볼과 입술을 물들인 것이 다였고, 단순한 드레스 아래에서 길쭉하고 볼륨 있는 체형이 은은하게 드러날 뿐, 무리한 치장을 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이제는 ‘푸른 바다의 심장’을 끄르고, 왕비 폐하가 희사하신 장신구 중 샹들리에처럼 빛이 번지는 다이아몬드와 화이트 토파즈 귀걸이를 한 것이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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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영애가 교차해서 서 있게 되자 이사벨라가 해명을 하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이 새삼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이사벨라 데 마레는 왜 자기 데뷔탕트 무도회도 아닌데 순백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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