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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아르테 숲속 깊은 곳 (54/733)

<제54화> 아르테 숲속 깊은 곳2021.06.09.

체자레는 망설임 없이 말을 몰았다. 체자레의 검은 애마가 아리아드네의 말 옆으로 바싹 붙었다.

16550987405132.jpg“등자에서 발 빼!”

체자레는 상체를 내밀어 아리아드네를 껴안았다. 아리아드네는 급하게 발등에 걸린 등자를 털어냈지만 그녀의 등자는 숙녀용으로, 넓고 발등이 낮게 만들어진 물건인 나머지 등자에서 쉽사리 발이 빠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오른쪽은 빼는 데에 성공했으나, 왼쪽 등자가 발에서 빠지지 않았다. 아리아드네가 발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이에 남자의 힘이 실린 팔은 그녀의 체중을 온전히 지탱하며 안아 올렸고, 아리아드네는 자기의 다갈색 말 위에서 체자레의 검은 말 위로 옮겨 타게 되었다. 하지만 왼쪽 발등에 걸린 등자는 그대로 끼워져 있는 상태였다. 체자레의 말이 앞으로 달려나가며 아리아드네의 말과 거리를 벌리자 아리아드네의 발이 원래 등자에 걸린 탓에 체자레의 품에서 몸이 빠져나갈 뻔했다. 체자레는 말을 잠시 멈추고 아리아드네를 다시 한번 추려서 꽉 안았다.

16550987405136.jpg“⋯⋯!”

아리아드네의 말은 과연 체자레가 본 대로 바위에 뒷다리가 걸려 한 번 크게 휘청이다가 오른쪽 엉덩이부터 바닥에 무릎을 꿇듯이 쓰러졌다. 네 다리 중 하나가 쓰러지자 나머지 세 다리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리아드네의 왼발이 등자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아리아드네와 그녀를 껴안은 체자레도 아리아드네의 말이 넘어지는 것과 동시에 크게 왼쪽으로 기울었다.

16550987405132.jpg‘이대로는 두 필 다 쓰러지겠어!’

체자레는 자신이 말에서 뛰어 내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본인이 등자에서 발을 빼고, 한 손으로 몰아 쥐었던 고삐를 놓고, 그대로 말의 옆구리를 차서 말을 앞으로 보냈다. 그리고 말이 출발함과 동시에 아리아드네를 품에서 안은 채로 말에서 뛰어내려 등부터 떨어지며 바닥을 크게 굴렀다.

16550987405136.jpg“흡⋯⋯!”

허공으로 뛰어오르자 등자와 발 간의 각도도 바뀌어 아리아드네의 발이 무너지는 말의 등자에서 빠졌고, 아리아드네를 품에 안은 체자레는 무사히 두 바퀴 굴러서 바닥에 착지할 수 있었다. - 쿵!  

16550987405136.jpg“으으⋯⋯.”

아리아드네의 말이 쓰러지는 소리와 체자레와, 체자레의 품에 안긴 아리아드네가 흙바닥에 떨어지면서 난 소리가 요란하게 숲속의 작은 공터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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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먼지가 가라앉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아리아드네는 체자레의 품속에서 눈을 살짝 뜨고, 몸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의 품에서 기어 나왔다. 흔들리지 않는 지상에 발을 대고 서 있는 것이 눈물 나게 기뻤다. 그녀는 자기를 몸으로 감싼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의 안부를 물었다.

16550987405136.jpg“저기, 괜찮아요?”

반면 체자레는 여전히 숲속 공터의 바닥에 쓰러져 누운 채였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16550987405136.jpg‘죽은 거야?!’

아리아드네는 당황했다. 숨을 쉬는지 코 밑에 깃털이라도 대어 보아야 하는지 두리번거리던 참이었다. 자노비의 화살이 아직 아리아드네 말의 엉덩이에 꽂혀 있었다. 저 화살에 달린 깃털을 코 밑에 대면 되려나⋯⋯? 그때 테너 톤의 목소리가 이죽거렸다.

16550987405132.jpg“야아, 미인이 안겨 있을 때는 좋았는데 그렇게 금방 나가버리네.”

최소한 입까지는 살아 있는 체자레였다. 아리아드네는 그가 죽지 않았다는 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6550987405136.jpg“다친 데는 없어요?”

그녀의 질문에, 체자레의 선택한 답은 응석이었다.

16550987405132.jpg“팔이 아파. 나 계속 누워 있을래.”

아리아드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체자레를 내려다보자, 그는 아리아드네와 눈을 맞추고 깊은 물빛의 눈으로 반달을 그리며 해사하게 웃었다.

16550987405132.jpg“기왕 내 품이 열려 있는 거, 내 팔 안에 쏙 들어오지 않겠소?”

그는 팔베개 자세로 왼팔을 쭉 열어둔 채였다. 아리아드네는 꿈쩍도 하지 않고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16550987405136.jpg“헛소리 그만하고 일어나시죠. 자꾸 그러면 그 팔 발로 차버릴 거예요.”

아리아드네는 체자레 옆으로 다가가서 바닥에 등을 대고 뻗은 체자레의 손을 잡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체자레의 요란한 앓는 소리에 깜짝 놀라 그의 손을 건드린 손을 놓고 말았다.

16550987405132.jpg“아야야! 진짜 아프다고.”

과연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슴 가죽 장갑을 낀 그의 왼손이 퉁퉁 부어가고 있었다. 장갑 낀 손에 약간의 여유가 있는 오른손과 달리 왼손의 장갑만 장력이 팽팽했다.

16550987405136.jpg“이거, 빨리 벗어야 할 것 같은데요.”

16550987405132.jpg“벗겨줘.”

평소 같으면 그의 뒤통수를 장화 신은 발로 차 버릴 발언이었지만 너무 급하게 붓고 있어서 빨리 벗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리아드네는 팔 위쪽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낑낑대며 그의 초록색 사슴 가죽 장갑을 벗겼다. 아리아드네는 그의 소매 위로 왼팔을 살살 눌러가며 물었다.

16550987405136.jpg“어느 쪽이 제일 아파요?”

16550987405132.jpg“좀 더 위, 악! 거기!”

체자레는 낙마하며 전완, 즉 팔꿈치 아래쪽이 부러진 모양이었다. 뼈 두 개 중 엄지손가락 쪽 요골이 부러진 것인지 새끼손가락 쪽 척골이 부러진 것인지는 아리아드네의 의학지식으로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16550987405136.jpg“빨리 돌아가요. 얼른 부목이든 뭐든 대야겠어요.”

아리아드네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체자레의 말은 얌전하게 공터 언저리에서 풀을 뜯고 있었지만 아리아드네의 말은 바닥에 쓰러져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바위에 걸려 넘어진 오른쪽 뒷다리의 관절이 아예 역으로 꺾여, 부러진 뼈가 모질 사이로 보일 정도였다. 말 엉덩이에는 여전히 자노비의 화살이 깊숙이 꽂혀 있었다.

16550987405136.jpg“칼 줘봐요.”

체자레는 자기의 허리춤을 가리켰고, 거기에는 항상 차고 다니는 곤봉에 더해서 사냥용 칼이 꽂혀 있었다. 단검이라기엔 길고 장검이라기엔 짧은 톨레도 수렵칼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사냥용 칼을 뽑아서 그 날로 승마복 안에 입은 슈미즈의 아랫단에 흠집을 낸 후 힘으로 쭉 찢어 간이 붕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부목으로 쓸 물건이 없나 살펴보다가 마땅한 것이 없자 나뭇가지 몇 개를 모아 간이 붕대로 둘둘 말아서 지지대를 만든 다음, 지지대를 나머지 간이 붕대로 체자레의 손목과 팔꿈치 바로 아래에 둘러 부목을 만들어서 댔다.

16550987405132.jpg“뭐야, 아가씨 이런 재주도 있었어?”

16550987405136.jpg“시골 농장에서 자라다 보면 이런 거 저런 거 다 배워요.”

단단하게 지지대를 만들어 꽉 묶으니 통증이 한결 나은 모양이었다. 체자레는 일어서서 몸에 붙은 낙엽이나 흙을 탁탁 털고, 풀을 뜯고 있던 애마의 고삐를 잡았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리아드네의 말을 보았다.

16550987405132.jpg“이 친구는 가망이 없어.”

아리아드네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녀가 보기에도 말을 오르테 숲 바깥까지 데려갈 방도가 없었고, 다리가 완전히 꺾여 버린 이상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도축용 고기가 되는 것 이상의 결과는 없어 보였다.

16550987405136.jpg“어떻게 하죠.”

16550987405132.jpg“여기서 죽여주는 편이 이 친구한테도 좋을 거야. 여기 혼자 남겨져 있어 봤자 늑대 떼한테 산채로 잡아먹히기나 하지.”

아리아드네는 말에게 미안했지만, 그게 말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체자레와 같은 의견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체자레는 아리아드네로부터 사냥용 칼을 건네받아 오른손만을 사용해 말의 경동맥을 숙련된 손놀림으로 땄다. 말은 잠시 반항을 하다가, 이내 잠잠해지더니 숨이 멎었다. 아리아드네는 말의 눈꺼풀을 감겨 주었다. 체자레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말의 엉덩이를 칼로 찢어 꽂혀 있는 자노비의 화살을 수거했다.

16550987405132.jpg“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이건 또 누구 화살이야?”

체자레는 피 묻은 사냥용 칼을 풀숲에 문대 닦은 후 다시 칼집에 넣으며 물었다.

16550987405136.jpg“그게, 이야기하자면 길어요.”

16550987405132.jpg“우리한테 있는 건 시간뿐이잖아? 천천히 말해 보라고.”

체자레는 그들이 있는 숲속 공터의 모양을 살폈다. 말도 안 되게 높은 침엽수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고, 이끼 낀 나무둥치와 바위들이 산재해 있었다. 하늘에는 정점에서 조금 낮은 곳에 가을의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16550987405132.jpg“점심시간 언저리인 거 같은데. 밥은 먹고 왔어?”

16550987405136.jpg“아뇨.”

체자레는 애마의 안장에서 마른 육포를 꺼내 본인에 입에 하나 물고, 아리아드네에게도 하나 건네주었다.

16550987405132.jpg“상당히 오래 달렸으니 꽤 깊이 들어왔을 거야. 내가 천막이 있는 곳을 기준으로 해서 계속 북쪽으로 들어왔으니 태양을 기준점 삼아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하고, 길이 막혀 있을 때는 물소리를 따라가자고.”

합리적인 이야기였다. 아리아드네도 여기까지는 동의했다.

16550987405132.jpg“자, 그럼 말에 탈까? 아가씨가 앞에 탈 거지?”

16550987405136.jpg“뭐라고요?”

사람은 둘이고, 말은 한 필이었다.

16550987405132.jpg“아니, 그럼 내가 앞에 타고 아가씨가 뒤로 타게? 이거 내 말이거든?”

16550987405136.jpg“걸어가면 되잖아요!”

16550987405132.jpg“멀쩡한 말을 내버려 두고 대체 왜 걷자는 거지? 아아, 나랑 숲속에서 밤새우고 싶구나, 정숙하고 신앙심 깊으신 우리 데 마레 영애?”

16550987405136.jpg“그 입 좀 닥쳐요.”

  * * * 레오 3세와 미레이유 공작을 위시한 양 국가의 최고 수뇌부가 샴페인을 마시며 겉으로나마 나름 화기애애한 우애의 장을 꾸미고 있을 때 양 국가의 실무진들은 사냥대회 천막 중 구석진 곳에 마련된 실내 협상장에 틀어박혀서 치열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주변에는 엿듣는 자가 없도록 군사들이 잔뜩 서서 철통 보안을 지키고 있었다. 긴 나무 테이블에 양옆으로 갈라져서 앉은 총 10여 명의 협상단은 점심때가 훌쩍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핑거 푸드 약간과 마실 물만 탁자 위에 올려둔 채로 여전히 공방전을 벌였다. 흔한 알코올 음료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16550987455822.jpg“에트루스칸 측에서는 신붓감의 신분에 대한 염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에트루스칸 측 실무진의 총 책임자는 마르케즈 백작이었다. 그는 양피지에 기재된 발로아 대공녀 라리에사의 혈통 및 가계도를 넘기며 상대방을 압박했다.

16550987455822.jpg“발로아 대공께서 갈리코 국왕 필리프 4세 폐하의 7촌이시고 왕가 방계이신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왕가의 방계이실 뿐이지 자치령의 군주는 아니시지요. 군주는 본디 군주와 혼약을 맺는 법입니다. 저희 알폰소 왕자님께서는 국왕이신 레오 3세 폐하의 유일한 아드님이시자 왕위계승권자이십니다.”

갈리코 사절단은 시종일관 냉소적이고 빈정대는 분위기였다.

16550987455822.jpg“그래서, 뭐 슈테른하임 대공국에서 거기 대공녀라도 데려오실 작정이오? 아니면 신분이 더 높으니 브룬넨 왕국의 공주 쪽이 더 취향이오?”

군주이기는 하되 국력이 미약한 약소국들의 이름을 줄줄 읊은 갈리코 사절단의 실무 총 책임자인 르비엥 백작은 왕자의 반려로 라리에사 대공녀 대신 브룬넨 왕국의 공주를 데려올 건 아니잖아, 라는 어감을 담뿍 담아 마르케즈 백작을 쳐다보았다. 브룬넨 왕국과 슈테른하임 대공국은 군주의 혈통과 과거 라탄 제국으로부터 내려온 계보에 근거하여 왕국이거나 자치권이 있는 대공령이기는 하되 북쪽 추운 곳에 있는, 몹시 가난한 소국이었다. 하지만 마르케즈 백작은 굴하지 않았다.

16550987455822.jpg“애초에 대공가의 여식을 우리 왕자 저하의 반려로 맞기로 한 것은 그 여식이 다름 아닌 수잔느 대공녀였기 때문입니다. 수잔느 대공녀와 같이 명성이 높고 뛰어난 귀부인이라면 신분이 조금 떨어져도 충분히 에트루스칸 왕국의 국모 역할을 하실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막판에 라리에사 대공녀로 바뀐 것 아닙니까! 우리의 황망함을 이해를 좀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16550987455822.jpg“돌아가신 것을 어떻게 합니까!”

발로아 대공의 장녀인 수잔느 대공녀는 국경을 넘어서까지 그 명성이 자자한 재원이었다. 뛰어난 미모와 투철한 신앙심, 현명하고 사려 깊은 인성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다고 이름이 높았던 영애였다. 안타깝게도 지난해 여름, 갈리코 왕국의 수도 몽펠리에에 역질이 돌 때 유행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라리에사는 수잔느의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동생이었다.

16550987455822.jpg“신부가 바뀌었으면 지참금도 바뀌어야지요.”

마르케즈 백작이 드디어 본심을 드러냈다.

16550987455822.jpg“신부가 가지고 오는 지참금에 대포 20문과 갈리코 정규군의 화약 제조법을 추가해 주시오.”

협상장에 삽시간에 극심한 긴장감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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