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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체자레 백작이 속삭이는 진실 (55/733)

<제55화> 체자레 백작이 속삭이는 진실2021.06.13.

16550987548824.jpg“대포에다 화약 제조법? 아주 그냥 날로 드시려고 하시는군!”

르비엥 백작이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화약은 최근 무어 제국의 연금술사들로부터 중앙 대륙으로 알음알음 수입되기 시작한 비대칭 전력이었다. 화약을 사용한 총포류는 안정화가 관건이었는데, 아직 개인화기를 전투에 성공적으로 접목한 국가나 용병단은 아무도 없었지만 공성 병기로서의 대포는 실용화에 종종 성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갈리코 왕국은 그것을 가장 잘 해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16550987548824.jpg“그럼 수잔느 대공녀도 아닌 일개 대공의 딸로 에트루스칸 왕국의 서열 1위 왕위계승권자의 배우자 자리를 공으로 드시려고 하셨소?”

이번에는 마르케즈 백작도 물러서지 않았다.

16550987548824.jpg“갈리코 왕국이 최근 20년간 눈부시게 발전한 것은 인정하지만 갈리코 왕국은 제국이 아니오!”

여기까지 상대방을 밀어붙이던 마르케즈 백작은 이번에는 태도를 바꿔서 르비엥 백작을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16550987548824.jpg“20여 년 전, 마르그리트 왕비께서 시집오실 때는 지참금으로 가에타 지방을 받고 대신 신부대로 2만 두카토를 보냈고 8만 두카토의 차관을 대여했소. 그게 오늘날 갈리코 왕국의 번영을 가져온 것 아니겠소? 우리는 선대의 좋은 ‘협력’ 사례를 이어받아 좋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외다.”

16550987548824.jpg“좋은 ‘협력’ 사례요? 하!”

르비엥 백작은 코웃음을 쳤다.

16550987548824.jpg“갈리코 왕국이 당시에 힘이 없지만 않았어도 죽어도 가에타 지방과 10만 두카토를 바꾸지는 않았을 것이오! 영토와 현금을 바꾸다니, 게다가 그런 헐값으로! 그게 말이나 되는 금액입니까!”

금융이 발달한 에트루스칸 사람으로서는 땅이 돈보다 신성하다는 갈리코 촌뜨기의 입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16550987548824.jpg“그 10만 두카토가 없었으면 지금 브리앙 왕조가 왕좌를 지키고 있었겠습니까? 시의적절하게 제공된 그 돈으로 갈리코 왕국이 내전을 평정하고 왕조를 유지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가에타 지방을 지참금으로 받고 대신 신부대로 돌려보낸 것은 ‘브리앙 왕조’의 생명줄이지 단순한 현금 따위가 아니었소. 정녕 그렇게 생각한다면 르비엥 백작께선 ‘시기’의 중요성에 대한 감이 전혀 없으신 게로군요!”

양측의 주장은 팽팽했다. 이대로 결렬을 외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면 양측은 어디에선가 양보를 해야 했다. 르비엥 백작은 타협점을 내놓았다.

16550987548824.jpg“수잔느 대공녀가 아닌 라리에사 대공녀로는 계속 부족하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라리에사 대공녀가 직접 행차하셔서 에트루스칸 왕국을 방문하시는 안을 제안합니다.”

이는 외교 관례상 몹시 드문 경우였다. 왕위계승권을 가진 왕족들은 신변의 위협 등을 이유로 자기 왕국의 국경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고, 정략결혼을 하는 왕족들은 초상화 한 장과 세간의 평판에 의지해 배우자를 골랐다. 이건 결혼 당사자가 갈리코의 왕이건 에트루스칸의 왕자이건 예외 없는 일이었다.

16550987548824.jpg“실제로 만나보셔서 정말로 라리에사 대공녀가 어떤지 알아보시지요. 그쪽이 생각하는 그런 분은 아니실 겁니다.”

마르케즈 백작은 갈리코 왕국 측이 라리에사 대공녀라는 카드에 정말로 자신이 있는 건가? 라는 생각과, 왕위계승권이 없는 대공녀라서 마음 놓고 바깥으로 내돌리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심이 동시에 들었다. 이를 눈치챘는지, 르비엥 백작은 서둘러 보완책을 내놓았다.

16550987548824.jpg“대공녀의 신분상의 문제는 신분을 승격시켜서 치유할 수 있소. 그렇게 하는 것이 또 순리에 맞고. 필리프 4세 폐하께서는 라리에사 대공녀를 본인의 양녀로 입적하신 후 에트루스칸으로 보내는 것을 고려하고 계시오. 이는 본인의 자식과 동일한 순위의 왕위계승권도 부여하는 종류의 입적이오.”

튕길 때는 끝까지 튕겨 봐야 했다. 마르케즈 백작은 가장 당연한 반박을 했다.

16550987548824.jpg“그렇게 된다면 라리에사 대공녀는 알폰소 왕자님과 5촌지간이 됩니다! 성황청의 근친혼 금지 규율 위반이오.”

16550987548824.jpg“진짜 근친이 아니지 않소. 이는 루도비코 법황 성하의 ‘예외 조례’를 받으면 해결되는 문제요.”

회담의 밀도는 여전히 빡빡했고 양측의 분위기는 거칠었다. 마르케즈 백작은 물을 찾아서 단숨에 들이켰다. 시간이 많이 지나 벌써 늦은 오후, 아니 이른 저녁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16550987548824.jpg“당연한 말이지만 내 선에서는 결정할 수 없는 문제요. 일단 오늘 나올 이야기들은 다 나온 것 같으니 윗선에 보고를 드리고 재차 논의합시다.”

16550987548824.jpg“동의합니다. 다음 회의는 사전에 정해진 일정대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겠소이다.”

양국의 대표들은 기름과 땀이 배어 나와 축축해진 관자놀이를 시종들이 전달해 준 젖은 수건으로 닦으며 각기 막사를 나갔다. 진짜 의사결정권자들의 의중을 들으러 갈 시간이었다. * * *

16550987568143.jpg“아, 이거 좋지 않은데? 생각보다 해가 빨리 지네.”

체자레와 아리아드네는 결국 아리아드네가 말을 타고, 체자레가 말을 끌고 걷는 형국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고 있었다.

16550987568146.jpg“남쪽으로 한참을 걸은 것 같은데 점점 더 숲이 울창해지네요.”

16550987568143.jpg“다른 사냥대회 참가자들하고 만날 법도 한데 말이야.”

사냥대회는 하루짜리 일정이었고 그들은 당연히 당일치기 야외활동을 위한 복장과 준비만을 갖추고 있었다. 숲속에서 야영을 하거나 밤을 새울 장비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16550987568146.jpg“저기,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아요?”

아리아드네의 말에 체자레가 조용히 귀를 기울여보았다.

16550987568143.jpg“맞네. 개울 같은 게 있나 봐.”

그는 말고삐를 물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끌었다.

16550987568143.jpg“저쪽으로 가보는 게 좋겠어.”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16550987568143.jpg“아니, 근데 데 마레 영애는 어떻게 자기를 구하려다가 다친 남자한테 종자처럼 말고삐를 끌게 하시고 자기는 얌체같이 말을 타고 가시나?”

아유, 팔이 부어서 아파 죽겠네, 라며 그는 과장되게 왼팔을 흔들어 보이다가 정말로 아팠는지 아야, 하고 오만상을 찡그렸다. 아리아드네는 부끄러움과 불만스러움에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16550987568146.jpg“그럼 내릴게요! 당신이 타요! 애초에 타지 않겠다고 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태운 거잖아요!”

16550987568143.jpg“어떻게 신사가 되어서 레이디를 걸리고 자기가 혼자서 말을 타! 그냥 아가씨가 내 앞에 조용히 앉아 있으면 되잖아. 어휴, 깐깐하긴.”

체자레의 투덜거림은 끝을 몰랐다.

16550987568143.jpg“아니 왜 내가 보낸 말안장은 안 받아서는 이 사달을 내. 내가 보낸 안장을 타고 왔으면 등자 발등이 열려 있어서 발이 바로 빠졌을 거 아냐.”

체자레는 승마술의 달인이었고, 본인 취향에 맞게 안장과 마구를 개조해서 바꿔보는 취미가 있었다.

16550987568146.jpg“그런 부분이 있었어요?”

16550987568143.jpg“열어보지도 않았구먼.”

그는 계속 투덜거렸다.

16550987568143.jpg“그리고, 응? 왜 사촌오빠 신경은 건드려서 이 모양 이 꼴을 만들어. 이 체자레 백작님이 멋있게 구해 주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아리아드네는 가뜩이나 그가 투덜거리는 것에 짜증이 나 있었는데, 이 말로 인해 체자레가 팔까지 부러져가며 자기를 도와주었다는 데에서 생긴 부채감은 다 갚은 거로 치기로 했다.

16550987568146.jpg“그럼 나더러 그런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으란 거예요?”

아리아드네의 뾰족한 질책에 체자레는 키들키들 웃었다.

16550987568143.jpg“성질머리하고는. 아가씨가 먼저 그놈 말 엉덩이에 칼을 박아 버렸어야지.”

그는 고삐를 끌다가 말고 지긋이 아리아드네를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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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87568143.jpg“괜히 싸웠다가 네가 큰일 날 뻔했잖아.”

체자레는 한마디 덧붙였다.

16550987568143.jpg“문제가 생기면 이 체자레 백작한테 뛰어오든가. 내가 멋있게 나타나서 다 해치워주지.”

아리아드네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전생에서 내가 당신을 수십, 수백 번 보았어.

16550987568146.jpg“거짓말쟁이. 당신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아리아드네의 대답에, 체자레는 과장되게 놀란 척을 해 보였다.

16550987568143.jpg“아니, 내가 거짓말쟁이인 거 어떻게 알았지?”

그는 말고삐를 잡고 걸으면서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안장 위에 올라탄 아리아드네의 바로 옆으로 붙어 그녀를 지긋이 올려다보았다. 체자레의 애마는 유독 체고가 높은 준마여서, 체자레의 얼굴이 그녀의 허벅지 언저리까지밖에 올라오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허벅지에 그의 숨결이 느껴질 것만 같은 거리였다.

16550987568143.jpg“아가씨,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나한테 관심이 많은 거 아니야? 저번에 곤봉 차고 다니는 것도 알더니.”

아리아드네는 숨을 들이쉬었다. 체자레는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 난 누구보다도 당신에게 관심이 많아.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어.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14년간 모두 바라보았지. 바라만 보았지. 이젠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16550987568146.jpg“사실이 아닙니다. 신경 꺼 주세요.”

16550987568143.jpg“이야, 차갑다.”

필살의 혼을 다해서 치대고 있는데도 철벽을 무너뜨리지 않는 아리아드네에게 체자레는 혀를 내둘렀다.

16550987568143.jpg“이 산 카를로에서 나한테 이렇게 대하는 건 아가씨밖에 없는 거 알아?”

16550987568146.jpg“유행에 동참하지 못해서 참 안타깝군요.”

꼿꼿한 아리아드네의 태도에 체자레는 포기하고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16550987568143.jpg“난 오늘 ‘황금 사슴’을 잡으러 왔어. 그것만 잡으면 사냥대회 우승은 떼놓은 당상인데 말이야!”

아, 그 ‘황금 사슴’. 체자레가 편지에서도 타령했던 ‘황금 사슴’이었다. 체자레의 ‘황금 사슴’ 집착과는 별개로, ‘황금 사슴’의 이야기는 퍽 많이 알려진 이야기였다. 이는 오르테 숲에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오르테 숲에는 영생의 샘물을 마신 ‘황금 사슴’이 살고 있는데 이 ‘황금 사슴’이 에트루스칸 왕국이 건국될 당시 초대 왕, 유스티노 1세에게 올리브 나뭇가지를 물어다 주었다고 했다. 이 영생의 샘물로 몸을 닦으면 누구도 거부하지 못할 만한 매력이 생기고, ‘황금 사슴’을 잡는 사람은 왕좌에 오르게 되고, 왕좌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삶에서 승승장구한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오르테 숲은 수도 북부에 있는 숲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어서 진짜 영생의 샘물 따위가 있다면 이미 수도관을 매설해서 산 카를로 왕궁으로 이어놨을 것이었다. 아리아드네는 ‘황금 사슴’의 이야기가 전설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생의 체자레는 자기가 어렸을 적 오르테 숲에서 ‘황금 사슴’을 본 적이 있으며, 자기가 그렇게 잘생긴 것은 ‘황금 사슴’이 물을 마신 옹달샘의 물로 얼굴을 닦았기 때문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아리아드네는 체자레를 열망하던 그 시절에도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왕위계승에의 정당성이 모자란 체자레가 건국신화와 자신을 엮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 아닐까 하는 것이 그녀의 추측이었다. 체자레는 선이 섬세한, 인간 세계에서 드물게 보이는 조각 미남은 맞았다. 하지만 그의 미모는 타고난 것이었다. 약혼 직후에 돌아가셔서 거의 만나보지 못했던 체자레의 모친 루비나 백작 부인과 체자레는 눈 색깔을 제외하면 똑같이 생겼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16550987568146.jpg“당신은 거짓말쟁이이기도 하지만 허풍쟁이기도 하군요.”

16550987568143.jpg“앗,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시답잖은 소리를 주고받으며 물소리를 따라 걷던 그들의 눈앞에 과연 조그만 실개천이 나타났다.

16550987568146.jpg“개울이 나왔군요. 이걸 따라서 하류로 가면 숲을 벗어날 수 있겠어요!”

16550987568143.jpg“쉿!”

체자레가 말에 탄 아리아드네의 정강이를 잡으며 입단속을 했다. 뭐야 이 인간, 이라며 앞을 바라본 아리아드네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16550987568146.jpg‘황금 사슴이다!’

잘생긴 뿔이 대칭적으로 나 있는 커다란 황금빛 수사슴이었다. 연한 갈색이어야 했을 사슴의 털 빛깔은 털 한 가닥 한 가닥이 올올히 빛을 뿜어내는 찬란한 황금빛이었다. 미끈한 몸체에서는 하얀 점박이 무늬 대신 은빛 점이 빛났다. 아리아드네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황금 사슴’이 눈앞에서 고귀한 자태를 뽐내는 것을 보고 경외감을 느꼈다. 그리고 체자레를 다시 흘긋 쳐다보았다.

16550987568146.jpg‘허풍만 떠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진실을 이야기할 때도 있었네⋯⋯.’

약간 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 미안함은 그가 아리아드네에게 했던 짓의 새 발의 피만큼도 안 되는 것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누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체자레를 다시 한번 쏘아보았다. 가끔 멀쩡한 말을 하기는 하지만, 안 돼, 저 인간은 쓰레기야. 아리아드네만큼이나 경계심이 높은 사슴은 주의 깊게 주변을 살피며 개울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고요하게 고개를 숙인 모습에서 위엄이 흘렀다. 문득 ‘황금 사슴’이 고개를 들어 아리아드네와 체자레 쪽을 쳐다보았다. 사슴 하나와 인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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