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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화> 세 사람과 각자의 편지함 (61/733)

<제61화> 세 사람과 각자의 편지함2021.07.04.

아리아드네는 분명히 처음에는 알폰소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었다. 지긋지긋한 체자레와, 데 마레 가문의 골칫덩이들과, 기타 그녀의 모든 고난을 한 방에 타개해 줄 황금 열쇠로 여긴 것이다. 알폰소 왕자와의 결혼은 확실히 그녀의 모든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이후에 체자레의 반역이라는 이벤트가 남아 있었으나, 그녀는 반역을 도모하던 당시의 체자레가 가진 패들을 상당 부분 알고 있었다. 역사가 기존대로 흘러가기만 한다면 그 반역은 그녀가 막아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것이 완벽한 안배라고 생각했다. 알폰소에게도 이득이고 그녀에게도 이득이었다. 알폰소가 그녀와 결혼하는 것에 동의만 한다면 그들 앞을 막아설 장애물은 없었다. 그리하여 아리아드네는 일말의 죄책감조차도 없이 랑부예 구휼원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나, 왕비의 정원에서 두 번째로 마주쳤을 때 모두 의도적으로 17세 소년의 마음을 홀리려고 덫을 놓았다. 전생의 알폰소를 자기 손으로 함정에 빠뜨렸다는 죄책감도 점차 희미해졌다. 이번에는 알폰소와의 결혼을 통해 그녀가 그를 왕위에 올려놓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반응에 결코 걱정하거나 마음을 졸이지도 않았다. 넘어오지 않는다면 다음 덫을 놓으면 되고,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정치적인 신붓감이 되어 그의 옆자리를 쟁취하는 방법도 있었다. 방식이 어떻게 되건 결과는 정당할 것이었다. 알폰소의 결혼 서약서만 손에 넣는다면 아리아드네는 꿈꿔 오던 자유에 아주 가까워질 것이었다. 덤으로 알폰소도 그의 정당한 상속분인 왕위를 얻게 될 것이고. 하지만 어느 순간 전생의 형부이자 이 해맑은 소년은 그녀에게 스며든 모양이었다. 안 보면 보고 싶고, 그의 안부가 궁금했고, 그가 나를 궁금해 해 주었으면, 그도 나를 보고 싶어 했으면 하는 욕망이 가슴 속에 똬리를 틀었다. 정치적인 이용관계도 아니고 상호 호혜적인 공생관계도 아닌, 알폰소의 마음이, 그의 진심이 갖고 싶었다. 그를 불행에서 구해주고 근심과 걱정이 그를 덮치지 않게 도와주고 싶었다.

16550988733048.jpg‘정신 차리자.’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리아드네는 아직 완전하게 안전해진 것이 아니었다. 지금 루크레치아의 장부 감사 권한을 얻어 집에서 잠시 숨통이 트인 것은 맞지만, 유학 중인 장남 이폴리토가 돌아오면 집안의 역학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언젠가는 데 마레 추기경이 늙어 죽고 루크레치아의 아들이자 이사벨라의 친오빠인 이폴리토가 데 마레 가문을 이어받을 것이다. 그 전에 결혼을 통해 집을 떠나야 했다.

16550988733048.jpg‘남자한테 푹 빠진 나는 말미잘이나 마찬가지야.’

게다가, 그녀가 사랑에 빠졌을 때의 전적은 참담했다. 전생에서도 아리아드네가 그를 경계하던 시절의 체자레는 지금처럼 상냥하고, 유쾌하며, 봄바람처럼 즐거웠다. 하지만 그녀가 그에게 빠져 사랑의 포로가 되었음을, 가족과 친지와 친구들의 지지 없이 오롯이 약혼자인 그에게만 맹목적으로 헌신하고 있음을 알아챈 뒤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16550988733057.jpg- “산야에 피는 은방울꽃은 당신 같아.”

아리아드네는 벌판에 피는 공짜 꽃이었다. 꺾고 싶을 때 꺾고 질리면 다시 들판에 버렸다. 아리아드네의 사랑은 겨우내 월동했던 알뿌리가 5월이 되어 다시 찬란하게 은방울꽃을 틔우듯 혼자 내버려 둬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금 체자레를 향해 불타올랐다. 아주 약간의 훈풍, 예를 들어 그녀의 행동에 반응하여 그 깎아 놓은 대리석 같은 얼굴에 번지는 한 줄기 미소 같은 것을 볼 때면 은방울 구근은 봄이 온 줄 알고 온 힘을 다해 꽃망울을 터트렸다. 그녀가 그렇게 보답 없이 벌판에서도 체자레만을 바라보며 헌신할 때, 이사벨라는 온실에서 공들여 키우는 아름다운 장미가 되어 체자레의 관심과 사랑을 양분 삼아 자랐다. 비싸고 귀한 것이 이사벨라뿐이랴, ‘그저 친구’였던 바톨리니 백작 부인, 기악에 재능이 넘쳐 체자레의 ‘예술적 뮤즈’라던 산타로사 남작 부인 (체자레는 듣는 것 외에는 딱히 작곡이나 연주와 같이 생산적인 음악 활동을 하지 않았다), 평민이고 누가 봐도 교양이라고는 없지만 그녀는 ‘영혼의 단짝’이니 그녀와의 교류에 간섭하지 말라던 풍만하고 육감적인 젠틸리니 부인까지, 체자레에게 있어서 아리아드네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의 목록은 수도 없이 많았다. 여자가 없을 때는 친구들이 있었다. 망할 놈의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를 필두로 한 망나니 군단은 항상 아내와 약혼녀를 집에 두고 트럼프니, 사냥이니, 내기니 하며 자기들끼리 몰려다니고는 했다. 사랑에 빠진 아리아드네는 매력이 없었다. 최소한 그녀 본인은 그렇게 믿었다.

16550988733048.jpg‘다시는,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어.’

자노비의 사태를 겪으며 기겁을 한 아리아드네는 체자레는 물론이고 알폰소의 편지마저도 평가절하하기로 했다. 남자는 다 믿을 수 없어. 체자레 백작이야 당연하고 알폰소 왕자도 본심이 아닐 거야. 설령 본심이더라 하더라도, 거기에 빠지면 안 돼. 흔들리지 말자. 난 왕자님과, 그리고 또 그 누구와도 사랑에 빠지지 않은 채로 왕자님의 옆자리를 쟁취해서 왕비가 될 거야. 나의 자유와 안전을 위해. * * * 아리아드네의 폄하와 정반대로, 알폰소는 이 편지를 적는 데 본인의 비서관인 베르나르디노와 함께 많은 고민을 하고 또 토의를 거쳤다.

16550988733064.jpg“아리를 초대할 수 있을까?”

16550988733068.jpg“절대 안 됩니다 왕자님.”

왕자궁 명의로 아리아드네 데 마레 영애에게 남쪽 별궁에 함께 가자는 초대장을 발송할 수 있을지에 대한 비서관 베르나르디노의 단호한 대답이었다.

16550988733068.jpg“과년한 처자를 왕자궁 명의로 대체 뭐라고 하시며 초대하실 예정입니까?”

그 질문에는 알폰소도 할 말이 없었다.

16550988733068.jpg“왕자님께서는 아무 영식이라도 초대하실 수 있어요. 왕자님께서 공주님이셨다면 데 마레 영애를 초대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특히 이 상태로는 여자 손님은 절대로 안 돼요.”

베르나르디노는 정략결혼과 관련한 흥정이 이뤄지고 있는 작금의 정세를 콕 짚어서 알폰소를 말렸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를 무명의 영식으로 가장시켜서 남자 옷을 입힌 채 함께 남쪽 별궁을 뛰어다니는 상상을 잠깐 했다. 오전에는 산책을 하러 가고, 한낮에는 분수대에서 물장난을 치고, 오후가 되면 해먹에서 낮잠을 잔 다음에 포도를 나눠 먹는……. 그런 구름 위를 거니는 것과 같은 꿈만 같은 하루. 알폰소는 상상력이 별로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그는 가르쳐주는 대로 배우고, 배운 대로 충실히 이행하는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그런데 아리아드네의 일에만 관련되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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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모든 것이 구획된 대로 결정된 삶을 살아왔다. 태어나보니 왕자였고, 제왕학을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성군이 되는 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어머니는 그의 앞길을 열심히 터 주었고 아버지도 아들 앞의 일체의 장애물을 배제시켜 주었다. 때가 되면 군주의 여식을 만나 결혼을 하고, 그녀와 자식을 낳고, 존중하고 성스럽지만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을 유지해나가며 때를 기다리다가 아버지가 승하하시면 왕좌를 잇게 될 것이었다. 알폰소가 거두어야 할 것은 백성뿐이었고 백성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그런 인생을 살 것이라고 믿어 마지않았다.

16550988733064.jpg‘아리와 함께할 수는 없을까.’

영리한 아리아드네가 조언을 해 주고, 그는 국정을 이끌고―.

16550988733068.jpg“왕자님?”

알폰소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는 비서관 베르나르디노에게 ‘내 아이디어가 어떠냐’라고 물어볼까 생각했지만, 1초 만에 고개를 저었다. 알폰소가 마음대로 혼담을 파기하고, 자신의 결혼으로 인해 다른 우군을 확보하지도 못한다면 그때는 갈리코 왕국이 국경에 군사를 이끌고 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혼담까지는 파기해도 어떻게든 지나갈지도 모른다. 혼담이 확정되어 그것이 혼약으로 변한 이후에 그 혼약을 파기하면 그때는 정말로 국경에 갈리코의 중장갑 기사단과 화포 부대가 나타나겠지. 그리고 혼담의 파기든 혼약의 파기든 거기까지 진행되기 전에, 알폰소의 입에서 이 이야기가 나오면 일단 루카는 비명을 지를 것이다.

16550988733064.jpg“아니야. 오후 일정대로 속행하지.”

알폰소는 결국 ‘타란토의 별궁을 너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는 문장만 쓴 채 편지를 발송했다. 거기까지는 진심임과 동시에 지금의 그라도 지킬 수 있는 약속이었다. * * * 체자레 데 코모 백작의 편지함은 편지들로 터져나가고 있었다. 그가 아리아드네에게 보내는 편지는 계속 씹히다가 최근에 최초의 답장을 받는 데에 성공했는데, 그 이후로는 세 통 중 한 통꼴로 답장이 돌아왔다. 아리아드네 한정으로는 답장을 받는 성공률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체자레는 남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고, 남이 체자레에게 먼저 편지를 썼다. 그런 연유로 체자레 백작의 편지함에는 상자의 높이를 넘어서까지 편지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중 2/3은 체자레를 연모하는 여인들의 것이었다. 「친애하는 체자레 백작님께, 연모하는 님을 뵈온지 벌써 한 달이 넘어갑니다. 그때, 내 창틀 밑에 밤새도록 서서 새벽이슬을 맞았던 당신의 열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는 여기 혼자 비참하게 서서…….」  

16550988733057.jpg“아, 지겨워.”

체자레는 바네데토 자작 영애의 편지를 대충 구겨서 바닥에 던졌다. 옆에 있던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가 호기심에 편지를 집어 들어 들여다보았다. 체자레는 오타비오를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16550988748403.jpg“저번 달에 만나던 영애 아닌가. 벌써 질렸어?”

16550988733057.jpg“만나긴 뭘 만나. 그냥 한 번 논 거지. 도대체 왜 이렇게 눈치가 없는 거지? 한 달 동안 편지 한 통 없으면 그냥 대충 그만 만나자는 얘기 아닌가?”

16550988748403.jpg“자네는 죽을 때 분명히 여자한테 등에 칼 맞고 죽을 거야.”

오타비오는 체자레의 책상 위에 잔뜩 쌓여 있는 편지 더미를 보았다. 그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어서 소리를 내 읽었다.

16550988748403.jpg“약속했던 교외의 방앗간 앞에서 당신을 기다렸는데 당신은 끝내 나타나지 않으시더군요. 아, 야속한 사람.”

감정을 가득 싣고 강세를 팍팍 넣어 과장되게 편지의 대사를 읽은 오타비오는 혀를 찼다.

16550988748403.jpg“방앗간? 자네 설마 그걸 하자고 여자를 꼬셔서 방앗간까지 꾀어내 놓고는 막판에 안 나타난 건가?”

16550988733057.jpg“깜박했어.”

요새는 좀 집중할 만한 일이 생겼거든, 이라고 체자레는 덧붙였다.

16550988748403.jpg“그래도 그렇지 그걸 잊어? 이야, 이 처녀 평생 가는 상처로 남겠는걸.”

16550988733057.jpg“처녀 아닐세. 유부녀야. 내가 잊어준 거에 감사해야지. 내 변심 덕분에 평화로운 가정을 지킨 것 아닌가! 내가 안 나타났으니 그 부군 되시는 분과 뜨거운 회포를 대신 풀었겠지. 모두를 위해 잘된 일 아닌가?”

적반하장인 체자레였다. 오타비오는 혀를 내두르며 체자레의 책상 위를 마저 뒤지다가 구석에 놓인 편지 하나를 발견했다. 대충 뜯어본 다른 편지들과 다르게 붉은 밀랍이 조심스럽게 뜯겼다가 그 원형을 유지한 채 다시 조심스럽게 붙어 있었다. 데 마레 가문의 문장이었다.

16550988748403.jpg“이건 또 뭐길래 이렇게 성물함 모시듯 세워놨어.”

오타비오가 데 마레 가문의 편지 쪽으로 손을 뻗자, 체자레가 멀쩡한 오른손으로 오타비오의 손목을 '탁' 쳐냈다.

16550988733057.jpg“그 손 치워.”

16550988748403.jpg“뭐길래 나한테 숨겨?”

16550988733057.jpg“알 거 없어.”

체자레의 저항에 오타비오가 빙글빙글 웃었다.

16550988748403.jpg“이것 보소? 내놓으시지! 뭐길래 그러나!”

오타비오가 체자레에게 몸싸움을 걸어 편지를 채가려고 했다. 체자레는 부목을 댄 왼팔을 휘두르며 오타비오를 쫓아냈다. 황급하게 몸을 쓰느라 얼굴이 붉어지고 숨이 거칠어졌다. 늘 우아한 체자레 백작답지 않았다. 그는 간신히 오타비오보다 먼저 아리아드네의 편지를 집어 들어 서랍 속에 넣고 열쇠로 맨 위 서랍을 잠가 버렸다. 그는 본인이 쓰던 답장도 함께 들어 서랍 속에 숨겼다.

16550988733057.jpg“알 것 없다니까!”

16550988748403.jpg“뭐 도박판이라도 열려고 그러나? 그런 거면 왜 날 안 보여줘? 나 없이 도박 가려고?”

16550988733057.jpg“아니야!”

16550988748403.jpg“설마, 여자인가?”

16550988733057.jpg“시끄러워!”

알폰소의 편지는 ‘타란토의 별궁을 너와 함께 보고 싶다’에서 끊겼다. ‘너를 별궁으로 초대할게’ 같은 내용은 일절 들어있지 않았다. 그저 진실만을 기술한, 그가 지킬 수 있는 약속만을 적은 편지였다. 체자레가 아리아드네에게 보낼 답장에는 ‘예쁜 얼굴로 꾀어서 결혼할 여자분은 당신으로 하지, 날 책임져 준다면 왕국이라도 아가씨에게 바칠게’라고 적혀 있었다. 현재로서는 결혼이든 왕국이든 약속을 이행할 능력은 물론이고 진심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운, 지나치게 달콤한 말들이었다. 여인의 마음이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혹은 끝내 얼음처럼 얼어 있을지는 상황이 닥쳐봐야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정체를 가린 채 서로를 만날 수 있는 가면무도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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