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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갈리코에서 온 손님 (63/733)

<제63화> 갈리코에서 온 손님2021.07.11.

아리아드네는 미처 몰랐지만 체자레가 선물한 볼토 가면과 장신구 일습은 콜레지오니 의상실의 작품이었다. 가면무도회에 참가하기 위해 데 마레 가문의 마차에 함께 올라탄 이사벨라는 그것을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이사벨라는 이번 시즌 플뢰르 드 리스 문양 주문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체자레가 콜레지오니의 잡화 담당에게 한 달 반 전에 주문을 넣어 만들게 하고, 비슷한 물건은 주문도 받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바람에 콜레지오니에 가면을 맞추기 위해 문의를 넣은 이사벨라는 초장부터 거절을 당했다.

16550988963759.jpg- “데 마레 영애, 죄송합니다. 같은 물건은 주문을 받을 수가 없어요.”

꼭 볼토 마스크가 아니더라도 다른 가면이나 하다못해 플뢰르-드-리스 문양이 들어간 장신구라도 만들어 주면 안 되겠느냐고 사정을 했지만 콜레지오니의 거절은 단호했다.

16550988963759.jpg- “웃돈을 크게 받고 진행한 것이기 때문에 이번 시즌에는 어렵겠습니다. 내년 성 미카엘 축일 전에는 미리 연락 주세요.”

그래서 이사벨라가 카탈로그에서 보고서는 가지고야 말겠다고 물욕으로 몸서리를 치게 했던 붉은 루비와 녹색 토파즈의 플뢰르-드-리스 팔찌는 아리아드네의 손목에서 빛나고 있었다. 마차에 올라타는 언니들을 보며 나이가 어려 가면무도회에 참석할 수가 없는 아라벨라가 부러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1655098896377.jpg“언니들! 재미있는 이야기 많이 가져와야 해!”

아리아드네가 빙긋이 웃었지만 그녀의 따스한 미소는 턱 끝까지 가리는 황금색 볼토 마스크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다. 반대로, 입매를 모두 드러내는 은제 콜롬비나 마스크를 착용한 이사벨라는 입을 삐죽이며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아라벨라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고, 마차는 이내 출발했다. 자매 둘이 탄 마차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둘은 서로를 훑어보았으나 피차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를 보며 그래도 참 대단하다고 감탄하고 있었다. 그녀가 쓴 마스크는 순은으로 정교하게 세공한, 눈매만을 가린 콜롬비나 마스크였다. 아직 유행하려면 2-3년은 족히 남은 물건을 먼저 찾아 쓰고 나타나다니 이사벨라의 패션 감각은 경탄할 만했다. 그 외로도 항상 밝은 옷을 즐기는 이사벨라답게 거의 흰색에 가깝게 연한 은색 공단 드레스에 진주를 올올히 박아 넣은 가면무도회용 드레스는 100 피에디(약 40미터) 밖에서 보더라도 그녀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호화로웠다. 최근 데 마레 추기경의 긴축재정으로 드레스 수급이 어려울 법도 한데, 그간 넘치는 여유로 미리 올해분의 대금을 다 치러 놓은 모양이었다. 즐겨 입는 밝고 사치스러운 옷에, 은빛 콜롬비나 마스크 밑으로 드러나는 아름답고 가녀린 입매와 턱선까지, 가면을 썼으되 누가 봐도 이사벨라 데 마레라고 할 만한 차림새였다. 아리아드네는 정체를 드러내려고 노력한 이사벨라와 정반대로 누가 보더라도 그녀인지 알 수 없을, 가면무도회의 콘셉트에 충실한 착장을 갖추고 있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면과 맞춘 듯이 떨어지는 진한 황금색 드레스에, 안감과 옷 모서리의 마감은 모두 칠흑같이 검은 벨벳으로 대었다. 가면 윗부분에는 마르그리트 왕비의 희사함에서 받은 황금 세공 머리 장식을 달아 머리카락조차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나이치고는 키가 큰 편이라서 이렇게 다 가려 놓으니 전혀 소녀 같은 티가 나지 않았다. 특히 앳된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특유의 고요한 분위기와 합쳐져서 지체 높은 귀부인 같았다. 이사벨라와 단둘이 함께 타고 가는 마차는 어떻게 보면 가시방석일 수 있었겠지만, 얼굴까지 가면으로 모두 가린 상태에서는 미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이사벨라의 손 떨림, 입술이 부루퉁한 정도, 숨소리,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 같은 것은 모두 아리아드네의 시야각 안에 있었다. 반면에 아리아드네는 노출된 피부라고는 단 한 뼘도 없었다. 얼굴도 가면에 완벽하게 가려져 그 누구도 그녀의 표정을 상상할 수 없었다. 이것은 참으로 신기한 기분이었다. 일탈감과 더불어서 약간의 전능감이라니.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는 비록 볼 수 없겠지만, 가면 뒤에서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데 마레 가문의 위세는 대단해서, 왕족은 되어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두마차를 딸들의 가면무도회 행차를 위해 내어주었다. 경쾌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둘은 이내 산 카를로 왕궁에 도착했다. 도착을 알리는 왕궁 시종의 목소리와 함께, 이사벨라는 시종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추기경의 은마차에서 내려, 지지 않겠다는 듯이 여유를 부리며 아리아드네에게 고개를 까딱해서 인사를 해 보였다.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가 헛심을 쓴다고 생각했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마주 고개를 끄덕해주었다. 이사벨라가 떠났으니 이제 저 파티장 안에는 그녀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줄리아와 그 친구들과 무도회장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었으나, 친구들과 합류하기 전에 오랜만에 그녀가 살던 산 카를로 왕궁을 한 바퀴 돌아보며 추억 놀이를 하기로 했다. 왕궁에 들어올 기회는 드물었고, 혼자 있을 기회는 더더욱 드물었기 때문이다. * * *

16550988963759.jpg“많이 들었어요, 네 얘기.”

더듬거리며 에트루스칸 어로 인사하는 라리에사 드 발로아는 알폰소 왕자가 상상하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갈리코 왕국이 보내온 초상화에서는 머리카락 색깔만 다른 이사벨라 데 마레를 그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가녀린 절세미녀여서 위화감이 들었는데, 실물로 만난 라리에사는 결코 미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도 순한 인상에 미소가 밝은, 참한 스타일의 아가씨였다. 그녀의 첫인상은 생각보다는, 아니 객관적으로도 상당히 좋았다. 갈리코 사절들이 갈리코 어를 사용하며 고압적으로 굴었던 것에 비교해서, 라리에사 드 발로아는 최대한 에트루스칸 어를 사용하려고 했다. 갓 배운 외국어임을 숨기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최선을 다해 이 나라의 언어로 말을 하고 있었다.

16550988963781.jpg“반갑습니다, 알폰소 데 카를로입니다.”

16550988963759.jpg“저는 라리에사 드 발로아.”

그녀는 연한 갈색 머리카락에 짙은 갈색 눈을 가진 소녀였다. 알폰소보다 한 살 많았으므로, 소녀라기보단 여인에 더 가깝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약 3 피에디 8 디토(약 163 센티미터) 쯤 되는 중키에, 아주 깡말랐고, 약간의 매부리코가 있어서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보였지만 아래로 처진 눈과 상냥한 응대로 말을 하고 있을 때는 아주 다정한 사람 같아 보였다.

16550988963781.jpg“갈리코 어로 말씀하시는 게 편하시면 그래도 됩니다.”

16550988963759.jpg“노, 저 노력, 에트루스칸 말.”

황금빛 드레스를 입은 라리에사가 가면을 쓰려고 노력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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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예쁘지 않은 그녀는 훤칠하게 잘생긴 알폰소를 보고는 한눈에 반한 듯했다. 연신 눈가와 입매에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고, 알폰소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설레하며 크게 반응했다. 주변에서 어른들이 흐뭇한 얼굴로 소년·소녀인 왕자와 대공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16550988963832.jpg“얼른, 도와주지 않고.”

  가면을 쓰려고 애쓰는 라리에사 대공녀를 가리키며 마르그리트 왕비가 아가씨 들으라는 듯이 아들을 재촉했다. 알폰소는 티 나지 않게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라리에사 대공녀의 가면 끈을 머리 뒤에서 묶어 주었다. 왕자의 손길이 그녀의 머리카락 언저리를 스쳤다. 황금색으로 장식된 볼토 가면이 그녀 얼굴을 전부 가려주지 않았다면 라리에사 대공녀가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이 모두에게 들켰을지도 모른다.

16550988978977.jpg“자, 이제 늙은이들은 일어납시다. 젊은이들끼리 시간을 보내게 해 주어야지요.”

레오 3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르그리트 왕비도 미소를 띤 채 따라 일어났다.  

16550988963832.jpg“너희 둘은 좋은 시간 보내거라.”

  라리에사 대공녀가 귀엽게 무릎을 굽혀 약식 예를 취해 보이며 대답했다.  

16550988963759.jpg“왕비 폐하, 감사합니다.”

  * * * 마르그리트 왕비가 물꼬를 터 준 것을 계기로 둘은 자연스럽게 갈리코 어로 대화하게 되었다. 알폰소 왕자는 어머니가 갈리코인인 것도 있고, 어려서부터 교양으로 갈리코인 선생을 붙여 철저하게 배운 것도 있어서 갈리코 어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다.  

16550988963759.jpg“저희 아버지께서는 자매들의 교육에 열성적이셨어요. 저희 자매는 모두 문학, 자수, 음악과 미술에 조예가 깊답니다. 특히 시문과 회화에 관해서는 제 언니, 수잔느가 매우 뛰어나지요.”

  알폰소 왕자는 훌륭한 신사답게 라리에사 대공녀의 이야기를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그는 천성이 다정했고 의도치 않을 때도 배려가 넘쳤다. 알폰소가 듣기에 라리에사 대공녀의 이야기에는 그녀의 죽은 언니, 수잔느 대공녀 이야기가 무척 많이 나왔다.  

16550988963759.jpg“수잔느 언니는 참 아름다웠어요. 희고 투명한 피부는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군이었답니다.”

  알폰소는 라리에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16550988963781.jpg“그런데, 대공녀.”

  알폰소는 말을 이었다.  

16550988963781.jpg“대공녀께서도 아름답고 흰 피부를 가지고 계시던걸요. 왜 돌아가신 언니의 이야기만 하나요? 자기 이야기를 더 해 주세요.”

  볼토 가면 아래서 라리에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누군가가 그녀의 언니보다 그녀를 앞에 두라고 말해 준 것은 처음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라리에사보다 아름답고 뛰어난 수잔느 아래에서 그녀는 눈치를 보며 자랐다. 언니를 사랑하면서도 깊숙이 원망했다. 하지만 밖에서는 수잔느 언니를 선망하는 듯, 전혀 질투하지 않는다는 듯, 밝은 얼굴로 언니를 찬양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라리에사만의 사랑받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는 잘생긴 금발의 왕자님이 그녀 눈앞에 있었다. 인생 최초로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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