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이번 생 첫 번째 청혼2021.07.21.
알폰소는 웃으며 아리아드네의 손바닥에 자기 것을 마주 대어 사이즈를 가늠해 보았다.
“이렇게 작은 손으로 포도를 따려면 어림도 없을걸? 한 번에 한 송이나 딸 수 있겠어?”
아리아드네는 손바닥을 사부작사부작 위로 올려서 기준점을 팔목과 이어진 손바닥 시작 부분이 아닌 손가락 끝으로 바꿨다.
“이렇게 보면 별로 작지도 않다고! 그리고 네 손이 큰 거지, 내 손이 작은 게 아니야!”
자기들만의 달콤한 세계에 빠져 있는 두 남녀를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 한 것은 성큼성큼 다가와 아리아드네의 팔목을 대뜸 낚아챈 한 남자였다.
“⋯⋯!”
아리아드네는 놀라서 사슴처럼 굳었고, 알폰소는 본능적으로 아리아드네와 그 남자 사이를 몸으로 막았다. 모르는 남자의 손이 아리아드네의 팔찌 찬 손목을 꽉 잡아 팔찌가 손목으로 파고들었다. 그녀가 괴로워한 것과 알폰소의 커다란 손이 가면인, ‘역병 의사’의 팔뚝을 꾹 잡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누구인지 몰라도 그 손 놓지.”
알폰소의 손아귀 힘에 잡힌 ‘역병 의사’는 전완의 신경이 눌려 손에 힘에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를 악문 채로 아리아드네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놓쳤다. 풀려난 아리아드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역병 의사’는 그제야 자기 가면을 반쯤 들어 올려 얼굴을 보였다.
“데 코모 백작!”
“데 코모 백작이로군.”
체자레는 알폰소 쪽을 흘긋 바라보며 비아냥댔다.
“우리 고귀하신 왕국의 작은 태양께선 가면무도회 날에도 정체를 다 드러내고 다니시나 봅니다? 아주 내가 왕자다 소리를 지르시지 그래요.”
알폰소가 얼굴의 절반을 드러내는 바우타 가면을 쓰고, 누가 봐도 왕자라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착장을 하고 있는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가면무도회 날이니까 촌스럽게 왕족에 대한 예를 강제하진 않으시겠지요?”
빈정대는 체자레를 알폰소 왕자는 싸늘하게 무시했다. 그는 체자레 따위에 시비를 붙기엔 놀랐을 아리아드네를 살피느라 바빴다. 되려 풀려난 아리아드네가 체자레에게 일갈했다.
“데 코모 백작!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가씨를 구해주려고 왔지. 그 손 떼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알폰소 왕자야.”
“그게 무슨 소리지요?”
알폰소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서서 질문하는 아리아드네를 두고, 체자레는 알폰소 방향을 바라보며 짙은 조소를 흘렸다.
“‘황금의 왕자님’, 대체 라리에사 대공녀는 어디에다가 갖다 버리고 여기에서 순진한 처녀를 꼬시고 계셨던 건가?”
알폰소 왕자는 순간 할 말을 잊고 굳어 버렸다.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감싸던 그의 손이 조금 허공으로 떴다.
“불쌍한 에트루스칸 아가씨 가슴에 대못 박지 말고 지금 손 떼시지요. 왕자님의 고귀하신 외국인 대공녀나 찾으러 가라고.”
알폰소가 말이 없는 사이에 체자레는 다시 아리아드네를 돌아보았다.
“꼬마 아가씨. 저런 젖비린내 나는 놈은 놔두고 나랑 같이 가자.”
그는 이번에는 아리아드네의 손목을 강제로 잡는 대신에, 그의 손을 내밀었다. 항상 끼고 다니는 사슴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그의 오른손이 허공에서 아리아드네를 기다렸다. 아리아드네는 허공에 멈춘 체자레의 손을 잡는 대신 차분하게 반문했다.
“라리에사 대공녀가 그 발로아 대공령에서 오셨다는 국빈인가요?”
체자레가 어이없다는 듯이 알폰소를 쳐다봤다.
“국빈이 누구인지도 이야기 안 한 거야?”
알폰소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모든 단계에서 처신에 문제가 없도록 사려 깊게 고심했다고 생각했다. 거짓말을 한 것도 없었고, 선을 넘은 일도 없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에게 국빈이 누구인지, 그녀가 왜 산 카를로를 찾는 것인지 알리지 않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굳이 그렇게까지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폰소와 아리아드네는 원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모두 하는 사이였다. 그래, 내가 왜 숨겼을까.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흔들림 없이 알폰소를 차분하게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 분이라면 당연히 찾으러 가야지요. 저도 함께 찾을게요.”
되려 당황한 것은 아리아드네가 질투로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던 체자레였다.
“아가씨!”
그는 아리아드네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넌 억울하지도 않아? 저놈은 너랑 만날 수가 없어! 지금 갈리코 왕국의 대공녀와 혼담이 오가고 있다고! 네 마음을 흔들어놓고, 날름 외국 군주의 딸과 혼인해서 널 떠날 거라고! 넌 이용당하고 있는 거야!”
체자레는 이번에야말로 아리아드네의 반향을 기대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미동도 없었다. 그녀는 도리어 정색을 하며 체자레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체자레 백작님. 지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와 알폰소 왕자님은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그 단호한 말에 더 놀란 것은 체자레보다는 옆에 서 있었던 알폰소였다.
“교제 신청을 받은 적도 없고, 사사로운 마음으로 만났던 것도 아닙니다.”
교제 신청을 한 적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사로운 마음이 없이 만났는가? 그는 그런 적이 없었다. 양심에 손을 얹고 반추해 보면, 언제나 사심 아홉 스푼에 대의명분 한 스푼이었다. 그녀는 그렇지 않았던 것인가?
“좋은 우정을 삿된 시선으로 몰아가지 말아 주세요.”
이 발언에 알폰소는 숨을 삼켰다. 우정, 그렇지, 우정. 그녀의 눈에는 우정이었으려나. 그는 우정을 생각하고 그녀와 교우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게, 그녀에게 그 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가? 의무에 묶인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아리아드네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이야말로 대체 뭐라고, 아무 관계 아닌 제 사생활에 간섭하시는 거죠?”
알폰소는 지켜야 할 것이 많은 몸이었지만 체자레는 자유로운 남자였다. 알폰소에게는 국가가, 백성이, 어머니가 있었지만 체자레에게는 그렇게까지 절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 질문에 충동적으로 외칠 수 있었다.
“너에 대한 구애자라고 해 두지. 난 너한테 청혼을 할 수 있어, 젠장. 그래 할게, 하면 되잖아!”
그 선언에 제일 놀란 것은 단연코 알폰소였지만, 입 밖에 그 말을 꺼낸 체자레 본인도 놀란 것 같았다. 기왕 입 밖으로 꺼낸 것, 체자레는 아리아드네에게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섰다.
“청혼서 넣을게. 내일 아침에 당장 데 마레 추기경한테 보낼게. 그러니까 인제 그만 그놈 옆에서 떨어져. 눈 뜨고 못 보겠어.”
체자레 백작은 이제껏 살면서 수많은 여성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많은 경우 만난 첫날에, 상대방이 평민이든 외국인이든 유부녀이든 가리지 않고 꺼냈다. 이것은 바람둥이라는 체자레 백작의 악명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잘 먹혔다. 자신이 체자레 백작과 결혼하는 것이 현실성이 있건 없건 저 바람둥이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사실 자체에 여성들은 대단히 기뻐하며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다. 이는 그들의 침대로 가는 직행 티켓이 되고는 했다. 하지만 그가 이제껏 남발한 청혼 중 가장 구체적인 청혼은 지금 막 입 밖으로 낸 물건이었다. 실제 결혼으로 현실화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청혼이기도 했다. 신분도 맞았고 지위도 맞았고 나이도 맞았으며 그 무엇보다도 체자레 본인의 약속을 이행할 의향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이제껏 발한 청혼 중 가장 싸늘하게 거절당한 청혼이 되었다.
“하, 하, 하하하하하하하하!”
청혼을 받은 처녀가 미친 듯이 구석진 정원의 오래된 분수대에서 웃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웃더니, 웃다 흘린 눈물을 훔치려고 했으나 가면에 막혔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체자레 백작님.”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가면 쓴 얼굴로 체자레를 지긋이 응시했다. 체자레는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새하얀 가면 뒤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볼토 가면의 소름 끼치는 무표정이 그의 두려움을 자극했다.
“당신의 마음이 갈대보다도 가볍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 같은 것에게 매이지 마시고 자유롭게 사셔야죠.”
아리아드네는 이번 생은 전생과 정말로 드라마틱하게 다르다고 생각했다. 역병을 피하듯이 체자레와의 약혼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그 장본인이 떡하니 청혼을 해 오다니, 이 얼마나 얄궂은 운명의 장난인가! 전생에서 그가 이래 주었다면 정말 행복에 겨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사건의 배열은 바뀔 수 있어도,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신의 전생을 모르는 체자레가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갈대보다도 가볍다는 말에 발끈했다.
“뭐? 내가 가벼워? 마음이 없다고? 아가씨는 나를 아직 잘 모르는 거야.”
그는 그 와중에도 능글맞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아가씨가 내 신붓감으로 어때서. 너 같은 거라니. 완벽하지.”
알폰소는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며 뒤늦게 체자레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발로아 대공녀와 혼담이 오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직 혼담일 뿐이었다. 정혼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눈앞의 저 불한당처럼 교제하는 여인들이 따로 있지도 않았다. 알폰소는 언제나 점잖았다. 레이디 앞에서 남자의 벨트 아래 문제를 파헤치는 것은 치사한 일이라고 교육받았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일이 연관될 때마다 그는 항상 그가 배워온 교육을, 아니 신중하게 타고난 그의 성정 자체를 잃었다. 아리아드네는 그를 그가 아닌 어떤 것으로 만들었다.
“데 코모 백작. 그 더러운 입 다물지. 내가 아리아드네를 이용하고 있다고 말을 하면서 본인의 처신은 되돌아보지 않나? 자네가 고귀한 여성한테 청혼할 주제가 돼?”
알폰소는 체자레를 몸으로 막아 아리아드네를 그의 시야로부터 가렸다. 알폰소는 소년에서 완연한 청년으로 거듭나는 중이었다. 몇 달 새 자란 훤칠한 키와 떡 벌어진 어깨가 위압감을 주었다.
“장난처럼 레이디에게 들이대는 건 그만둬. 자네의 추문이 왕궁 안에까지 들려. 라구사 부인은 이제 정리했나?”
이번에 원한 맺힌 편지를 보낸 방앗간 유부녀 말고, 그녀 전에 데리고 놀았던 평민 미망인이었다. 체자레는 정리한 지 6개월도 넘은 여자의 이름이 나오자 발끈했다.
“왜 여기서 쓸데없는 얘기를 꺼내? 다 옛날 일이야!”
체자레는 공대도 잊고 쏘아댔다. 하지만 알폰소의 공격은 매서웠다. 알폰소가 언변이 날카롭기 때문이 아니라, 체자레의 행적이 너무 공격당하기에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떠들썩하게 만나 놓고 벌써 옛날 일이라고? 너는 인생에서 책임이라는 걸 져본 적은 있나? 부왕께서 널 인지하지 않으시는 건 당연한 수순이지! 너 같은 골칫덩이를 인지하셨다가 무슨 꼴을 당하시려고!”
“이 X 같은⋯⋯!”
체자레가 주먹을 들어 올렸다가 차마 치지는 못하고 손만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아직 왕궁 안에서 알폰소 왕자의 얼굴을 칠 만큼 미치지는 않았다. 여기서 사건을 끊은 것은 아리아드네였다.
“그만!”
그녀는 알폰소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 그만 가자. 발로아의 대공녀를 찾아야지. 내가 도와줄게.”
알폰소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알폰소의 옷소매를 끌어 그를 강제로 분수대에서 멀리 데리고 떠났다. 이럴 때 인간은 자존심 때문에 종종 알면서도 멍청한 짓을 저지르고는 했다. 떼어 놓는 것이 최선이었다. 알폰소는 맞는 말을 하는 여자에게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스타일의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두말 않고 순순히 아리아드네의 손길을 따라 자리를 떴다. 아리아드네가 알폰소를 이끌고 떠난 분수대 옆에는 체자레가 혼자 동그마니 남았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푸르르 떨던 그는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거칠게 발로 찼다.
“씨X!”
돌멩이가 분수대에 맞고 요란하게 튕겨 나갔다. 그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몇 번 더 발을 구르고, 분수대마저 발로 찬 후 몸을 떨었다. 뭐가 제일 화가 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청혼이 거절당한 것? 그 여자가 알폰소 왕자와 함께 떠난 것? 알폰소에게서 받은 비난? 하지만 씩씩대던 체자레도 이내 정원 속으로 떠나버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는 모든 것을 빛나는 눈으로 지켜보던 이사벨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