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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이사벨라의 업보 (72/733)

<제72화> 이사벨라의 업보2021.08.11.

16550990087489.jpg“이사벨라 이 계집애 어디 있어!”

분노한 데 마레 추기경은 1층 현관에서부터 이사벨라를 찾았다. 집사 니콜로가 허둥지둥 이사벨라 아가씨를 모시러 위층으로 올라가자, 그 모양새마저 답답했던 데 마레 추기경은 크게 성을 내며 집사를 제지했다.

16550990087489.jpg“됐다! 내가 직접 가겠다!”

오랜만에 집에서 난 난리에 식구들은 모두 토끼 눈을 뜨고 분노한 가장을 좇았다. 무슨 영문인지 전혀 몰랐지만 안절부절못하는 루크레치아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아버지를 따라가는 아리아드네도 그 행렬의 일부였다. 그는 쿵쿵쿵 걸어가 노크도 없이 큰딸의 방문을 홱 열어젖혔다. 이사벨라는 하필이면 옷을 갈아입던 와중의 한가운데였다.

16550990087497.jpg“어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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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티코트만 입은 상태였던 이사벨라는 비명을 지르며 양팔을 모아 상체를 가렸다. 데 마레 추기경도 제아무리 친딸이라지만 훌륭한 성직자답게 흠칫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페티코트만 입은 상태라면 상체는 알몸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의 딸은 분명히 몸통에 진한 분홍색의 뭔가를 입고 있었다. 집에서 입는 실내복이나 잠옷도 아니었고 보온을 위해 입는 내복도 아니었다. 애초에 아직은 내복을 입을 날씨조차 아니다. 그는 긴가민가해서 가는 눈을 찡그리고 그 진분홍색 물건을 째려보다가 문득 그것의 용도를 깨닫고는 입을 쩍 벌렸다.

16550990087489.jpg“어쩌려고, 어쩌려고, 저……. 저……! 막돼먹은……!”

데 마레 추기경은 혈압이 올라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애지중지 고이 키운 요정 같은 큰딸이 코르티잔이 아니고서야, 아니, 코르티잔 중에서도 저잣거리 밑바닥 인생이 아니고서야 할 일이 없을 삿된 물건을 가슴에 차고 자랑스레 온 산 카를로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니!.

16550990087489.jpg“네가 정말 어쩌려고 그래!”

그는 신경질적으로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하녀에게 눈짓했다. 그 기색을 알아챈 말레타가 허둥지둥 뛰어와서 이사벨라가 두를만한 로브를 가져다 덮어 주었다.

16550990087489.jpg“네가 코르티잔이야? 아니면 무어 제국의 이교도라도 돼! 정말 사교계에 도는 소문이 거짓이 아닌 게야?”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이사벨라는 두리번대며 아버지에게 항의를 했다.

16550990087497.jpg“아빠 왜 말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와요! 소문? 무슨 소문이요?”

그 와중에 데 마레 추기경의 눈에 띈 건 이사벨라의 화장대 위에 얹혀 있는 핑크색 사파이어가 장식된 티아라였다. 몹시 값비싸 보였으나 그는 저런 물건을 딸에게 사준 적이 없었다.

16550990087489.jpg“……저건 또 뭐냐.”

데 마레 추기경은 핑크 사파이어 티아라를 집어 들어 뒤집어 보았다. 안쪽에 음각으로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From O. Contarini, to dear I. Mare.」  

16550990087489.jpg“이건 대체 뭐야?”

슬슬 노안이 오는 것인지 아니면 읽기 싫은 마음에서인지 글자가 잘 읽히지 않았다. 뒤에 서 있던 아라벨라가 냉큼 티아라를 받아들어 어린애의 밝은 눈으로 읽고 확인사살을 해주었다.

16550990106354.jpg“오 콘타리니? 오 콘타리니면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

아라벨라의 질문과 데 마레 추기경의 절규는 동시에 나왔다.

16550990106354.jpg“그 오빠가 여기서 왜 나와?”

16550990087489.jpg“그놈이 준 티아라가 왜 네 방에서 나와!”

  * * * 발데사르 후작은 캄파 후작에 대한 소문을 전달해 주는 것 외에도 사교계에서 도는 이사벨라의 평판 몇 가지를 더 귀띔해주었다.

16550990106422.jpg“예하. 물론 신경 쓸 만한 위인은 아니지만, 카스틸리오네 남작이 귀댁의 큰따님을 벼르고 있답니다.”

16550990087489.jpg“네? 아니, 그 양반이 내 딸한테는 왜요?”

카스틸리오네 남작은 수도와 중북부 지역에서 크게 양잠 산업을 벌이는 신진 사업가였다. 도매업 위주로 사업을 운용하는 중년 남자로, 어디로 보나 도무지 이사벨라와의 접점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다.

16550990106422.jpg“카스틸리오네 남작가 장녀가 외모가 나름 출중하지 않습니까.”

16550990087489.jpg“그렇죠. 그렇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카멜리아였던가. 이사벨라만큼은 아니지만 하여간에 예쁘장한 딸이 있다고는 들었다.

16550990106422.jpg“카스틸리오네 남작의 소원이 봉토를 가진 구 귀족과 혼맥을 맺는 거였답니다. 그런데 콘타리니 백작가 장남이 마침 여자 얼굴만 보는 거로 유명해서, 카스틸리오네 남작이 큰돈도 쓰고 지참금을 바리바리 싸가기로 약조도 해서 콘타리니 백작가의 장남과 약혼을 성사시켰다고 하네요.”

16550990087489.jpg“그, 그런데요?”

데 마레 추기경은 점점 불안해졌다. 아니야, 아니다. 내 딸과는 관계가 없을 것이다.

16550990106422.jpg“그런데……. 귀댁의 따님이…….”

이야기를 다 들은 데 마레 추기경의 입에서 장탄식이 나왔다.

16550990087489.jpg“……신이시여.”

  * * * 사교계 가십이란 때때로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를 피워낸다는 현실을 익히 아는 데다가, 친딸의 덕성을 믿는 마음이 그래도 조금은 남아 있었던 데 마레 추기경은 물증을 눈앞에서 목도하자 그만 이성이 날아가는 기분을 느꼈다.

16550990087489.jpg“……아이고, 머리야.”

뒷목을 붙드는 데 마레 추기경을 보고도 이사벨라는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16550990087497.jpg“이게 왜요, 아빠?”

데 마레 추기경은 여기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16550990087489.jpg“넌 도대체 행실이 어떻게 되먹은 것이냐!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사는 게야? 외간남자한테 이런 비싼 선물을 도대체 왜 받아와!”

16550990087497.jpg“제가 먼저 달라고 한 거 아니에요! 시뇨르 오타비오가 친구 사이에 생일선물이라고 준 건데 왜 그게 내 행실 문제가 돼요?”

16550990087489.jpg“친구 사이에는 저런 선물을 안 해!”

딸아이의 개념에 머리가 빠개질 것만 같았던 데 마레 추기경의 시야에 또 다른 물건이 들어왔다.

16550990087489.jpg“이건 또 뭐야.”

3캐럿은 족히 되어 보이는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아버지가 화장대 선반에 놓인 반지를 쳐다보자 막내 아라벨라가 뽀르르 달려가 반지를 집어 아버지의 손에 건네주었다. 결혼반지 비슷해 보일 정도로 클래식한 디자인에 값진 재료와 고급스러운 세공이었다.

16550990087497.jpg“아. 이건 이번에 친해진 이아코포 경이 길 안내를 해줘서 고맙다고 주신…….”

16550990087489.jpg“네가 도대체 어디서 외간남자한테 길 안내를 해 줄 일이 있어!”

데 마레 추기경은 정말로 깜짝 놀랐다. 그는 절대로 애지중지 기른 장녀를 바깥에 마구 내돌린 적이 없었다.

16550990087497.jpg“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서요. 길을 잃었다고 해서 데려다줬어요.”

데 마레 추기경은 어이가 없어서 탄식을 발했다.

16550990087489.jpg“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산 카를로 사람이 다른 데도 아니고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 안에서 길을 잃는단 말이냐!”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은 직선으로 쭉 뻗은 대회랑을 중심으로 베이가 양쪽으로 추가로 붙는 아주 간명한 구조였고, 산 카를로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갓난쟁이일 때부터 매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이아코포 아텐돌로라면 5대째 산 카를로 토박이인 아텐돌로 가문의 아들이었다. 그는 아마 갓난아기 시절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서 영아 세례를 받은 이후로 20여 년간 매주 일요일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서 기고, 걷고, 뛰어다녔을 것이다.

16550990087489.jpg“그리고 대체 누가 길 안내 따위를 해줬다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줘!”

이사벨라는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16550990087497.jpg“제가 길 안내를 엄청 친절하게 잘 해줬거든요.”

데 마레 추기경은 정말 자기 딸의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해부라도 해 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16550990087489.jpg“넌 이아코포 아텐돌로에게 시집가고 싶은 생각이 있느냐.”

이아코포는 나쁘지 않은 집안의 그저 그런 기사였지만, 집안의 작위를 승계할 수 없는 차남이었다. 머리 꼭대기에 달라붙은 이사벨라의 눈높이에 찰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사벨라는 펄쩍 뛰었다.

16550990087497.jpg“아빠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해요? 아아아뇨!”

16550990087489.jpg“지금 네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혼처가 이아코포 아텐돌로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란 말이다! 네 바보스러운 처신 때문에!”

16550990087497.jpg“네? 뭐라고요?”

이사벨라 데 마레는 잘하면 알폰소 왕자, 못해도 체자레 백작를 노리던 몸이었다. 이아코포 아텐돌로라니, 이 무슨 끔찍한 농담이란 말인가.

16550990087489.jpg“사교계에 캄파 후작의 내연녀가 너라는 소문이 돌아.”

16550990087497.jpg“네에에에?”

이사벨라는 손에 들고 있던 향수병을 떨어뜨렸다. 두꺼운 포르토산 유리가 둔탁한 소음을 내며 바닥을 굴렀다.

16550990087489.jpg“제발. 저것도 다른 남자가 보낸 물건이라고는 말하지 말아다오. 아니, 이아코포 아텐돌로 정도라면 감사한 것 아니냐? 캄파 후작의 내연녀가 너라는 소문이 기정사실로 되면 이아코포 아텐돌로라고 가능하겠니?”

데 마레 추기경은 참 특이한 사람이었다. 이 와중에도 ‘네가 진실로 캄파 후작의 내연녀가 맞느냐’고 딸에게 묻지 않은 것이다. 부도덕한 행위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그 행위가 불러온 안 좋은 결과에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지극히 합리적이되 너무나도 성직자답지 않은 실리주의적 태도였다. 그러나 진짜로 저지른 사건을 억지로 묻는 것과 정말로 억울한 사건을 해명하는 것은 접근 방법 자체가 다른 법이다. 그래서 아리아드네는 겸사겸사 그 부분을 짚어주기로 했다. 절대로 언니의 치부를 까발리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16550990148866.jpg“그래서, 정말 캄파 후작이랑 정원에 있었던 게 이사벨라 언니인가요?”

그녀는 약간의 극적인 효과도 덧붙여 주기로 했다. 아리아드네는 입술을 깨물고 약간의 울먹임을 더했다.

16550990148866.jpg“……설마, 캄파 후작이랑 붙어먹은 건 본인이면서, 제가 캄파 후작의 내연녀라고 몰릴 때 입 다물고 한마디도 안 도와준 거예요?”

데 마레 추기경의 표정에 충격이 어렸다. 그는 같은 팀 내에서 내분이 생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리더였다. 그가 아버지로서 누누이 강조해왔던 것이기도 했다. 우애 좋게 지내라. 제발.

16550990087497.jpg“절대로 아니야!”

이사벨라는 단호히 부정했지만 아리아드네는 새로 생긴 사교계 친구들로부터 전해 들은 것들이 있었다.

16550990148866.jpg“언니는 캄파 후작의 밀회 장소에 최초부터 있었던 사람이에요. 다피아니 남작 부부마저도 현장에 도착했을 때 언니가 이미 있었다고 했어요.”

다피아니 남작 부부는 캄파 후작의 최초 발견자라고 알려진 귀족 부부였다.

16550990148866.jpg“언니가 밀회 당사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왜 소리를 지르지 않았죠?”

이사벨라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잠시 당시 상황을 이실직고할까도 고민해보았다. 진실은 다음과 같았다. 이사벨라가 풀숲에 숨어 있는 동안 다피아니 남작 부부가 도착해서 캄파 후작을 발견했다. 캄파 후작을 발견한 남작 부인이 먼저 소리를 질렀고, 이사벨라는 가만히 있다가 도망치는 여자에게 밀쳐졌다. 하지만 이 진실한 버전의 이야기를 하려면 ‘다피아니 남작 부부의 도착 전까지는 자기는 풀숲에 숨어서 조용히 좋은 구경 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16550990087497.jpg“그, 그게…….”

이사벨라의 눈동자가 잠시 불안하게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변명의 기조를 정했다. 할 말이 없을 때는 약한 척이 제일이었다.

16550990087497.jpg“너무 놀라서, 너무 놀라서 그랬어요.”

이사벨라는 씨알도 안 먹힐 아리아드네가 아니라 감정적으로 호소해 볼 여지가 있는 아버지를 상대로 호소하기로 했다.

16550990087497.jpg“남녀가 그러고 있는 건 정말 태어나서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광경이어서 그만 굳어 버렸다고요!”

안타깝게도, 로브 사이로 삐쭉 튀어나와 있는 분홍색 가슴 가리개가 진술의 설득력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뻔뻔하게 이 기조를 밀어붙이기로 했다.

16550990087497.jpg“아무것도 못 한 게 잘못인가요? 저는 지나가던 사람일 뿐이었는데, 거기서 꼭 뭘 해야 해요?”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여기서 이사벨라가 완전히 간과하고 있던 포인트를 추가로 짚어냈다.

16550990087489.jpg“미리 와서 봤으면 여동생이 곤란에 빠져 있었을 때 도움을 주었어야지!”

이사벨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만 이럴 때도 다 방법은 있다.

16550990087497.jpg“미안해, 아리아드네!”

그녀는 눈의 요정이 마법으로 빚은 것처럼 황홀한 이목구비로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16550990087497.jpg“내가 너무 무서워서, 용기를 내지 못했어. 진심으로 사과할게, 응?”

이사벨라의 이목구비에는 드라마가 있었다. 찡그린 얼굴에서는 괴로움이 읽혔고 떨리는 입꼬리에서는 슬픔이 느껴졌다. 그녀는 데 마레 추기경에게도 진심으로 반성하는 표정으로 호소했다.

16550990087497.jpg“죄송해요, 아버지. 제가 정말 언니답지 못한 행동을 했어요. 진정으로 반성합니다. 두고두고 갚을게요!”

고개를 숙인 이사벨라는 분위기를 타고는 절절하게 억울함을 어필했다.

16550990087497.jpg“그렇지만 천신님께 맹세코 캄파 후작의 내연녀는 정말 제가 아니에요!”

분위기가 슬슬 넘어가고 있었다. 루크레치아는 믿을 준비가 다 된 상태였고, 데 마레 추기경마저 표정이 누그러져가고 있었다. 이사벨라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버지는 믿어주셔야 해요’라고 쐐기를 박으려던 찰나, 요란한 ‘땡그랑’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온 가족이 소리의 근원지를 돌아보았고, 거기에는 언제나처럼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 그러니까 이사벨라의 소지품 뒤지기를 하고 있던 아라벨라가 있었다. 아버지에게 화장대에 놓인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넨 이후로 계속 화장대 근처에서 부스럭대던 차였다. 아라벨라의 손에는 이사벨라의 손가방이 들려 있었고, ‘땡그랑’ 소리는 거기서 굴러나온 새빨간 마퀴즈 컷의 루비가 이사벨라의 화장대 위에 놓인 은쟁반 위에 떨어진 소리였다. 커다란 빨간 루비가 요요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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