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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루크레치아와 집시 점성술사 (79/733)

<제79화> 루크레치아와 집시 점성술사2021.09.05.

세간에서 집시 점성술사는 평소에는 심심풀이 땅콩 정도로만 여겨졌다. 기껏해야 타로로 연애운을 점쳐보는 여자들의 소일거리. 하지만 도시에 역병이 돈다거나 나라에 홍수, 화재 등 자연재해가 일어나서 희생양이 필요해진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대중은 집시들이 쓸모없는 자라고 비웃던 기존의 태도를 싹 바꾸어, 집시야말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불운의 원인이라고 콕 집어 비난했다. 어제까지 무능했던 자들이 오늘은 강대한 악마의 하수인으로 탈바꿈했다. 이단 심판관들이 집시들의 뒤꽁무니를 쫓으며 악마와 계약한 마녀 운운하는 일은 난세의 계고장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은 점성술사 같이 삿된 부류와 얽히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했다. 귀족은 물론이요 성직자와 그 가족은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 점성술사는 산 카를로 전역에서 명성을 떨친 지 20년이 넘은 자였다. 그 명성은 체자레 백작의 어머니인 루비나 백작 부인의 측근으로서 얻은 것이었다. 이 집시 여인은 루비나 백작 부인이 성마른 젊은이였던 시절에 그녀가 왕의 여자가 될 것이란 사실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집시 여인의 영험함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체자레가 태어나기도 전에 선고했다.

16550990962594.jpg‘필시 아들임이 틀림없소.’

루비나 백작 부인 태 속의 자식이 누군지 하늘의 길을 뒤져보아 미리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루비나 백작 부인 앞에 갈림길이 놓여 있을 때 그녀에게 값진 조언을 해주는 루비나의 최측근이었다. 루크레치아는 단견으로 생각했다.

16550990962599.jpg‘루비나 백작 부인이 지난 20여 년간 이단 심판관에게 끌려가지 않았다면 나도 괜찮지 않을까.’

요새 루크레치아는 너무 가슴이 답답했다. 되는 일도 없었고, 앞으로 잘 풀리리란 보장도 없었다. 그녀의 금쪽같은 이사벨라는 데 마레 추기경에게 근신 처분을 당해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는 상태였고, 자신은 얄밉기 짝이 없는 남편이 밖에서 데려온 어린애에게 장부를 감시당하는 상태였다. 루크레치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16550990962594.jpg“가슴이 답답- 하시지요?”

집시 여인의 질문에 루크레치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50990962599.jpg“맞아요!”

16550990962594.jpg“밤에 잠이 잘 안 오고 두통이 있지요?”

16550990962599.jpg“맞아요!”

16550990962594.jpg“집에 걱정거리가 있군요. 새로 들어왔어, 원래는 없었어.”

16550990962599.jpg“어머어머, 맞아요!”

루크레치아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집시 여인의 앞에 놓인 둥근 자수 쿠션에 앉았다.

16550990962594.jpg“어디 보자.”

탁자를 사이에 두고 집시 여인은 타로를 휘리릭 섞어 털썩 주저앉은 루크레치아에게 그중 일곱 장을 내밀었다.

16550990962594.jpg“세 장을 뽑아 보시오.”

루크레치아는 떨리는 손으로 첫 번째 카드를 골랐다. 두꺼운 종이에 은박과 붉은 염료로 화사하게 도안이 들어간 ‘검’(Swords) 카드였다. 주된 도형 뒤에 8개의 노란 꽃이 그려져 있었다. 소드 8 카드였다. 집시 여인은 혀를 찼다.

16550990962594.jpg“현재의 상황이오. 패배, 곤란, 손실, 이별. 다행히 아직 확정된 내용은 아니야. 부인의 별자리가 어떻게 되시오?”

16550990962599.jpg“6월 23일! 게자리입니다.”

16550990962594.jpg“‘검’ 카드와 쌍둥이자리가 만나면 폭발력이 있어서 아무도 뒤집을 수 없소. 하루 차이로 간신히 피했어. 운이 좋네, 운이 좋아.”

집시 여인은 덱을 내밀며 두 번째 카드를 뽑으라고 루크레치아를 재촉했다. 루크레치아는 떨리는 손으로 두 번째 카드를 뒤집었다. ‘광대’(The Fool) 카드였다. 광대 카드는 뒤집어진 채로 나와 얼핏 보면 ‘사형수’(The Hanged Man) 카드처럼 보였다.

16550990962594.jpg“이건 이 사태에 이르게 된 원인일세. 누군가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대서 일을 망쳐 놓았군.”

사실 역방향 ‘광대’ 카드의 뜻은 ‘경솔함’과 ‘어리석음’이었다. 카드는 루크레치아의 행동이 지금 그녀의 처지를 만들어냈다고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집시 여인은 숙련된 점성술사였다. 다 잡아 놓은 물고기를 쫓아낼 만한 멘트는 절대로 치지 않았다. 그래서 은근슬쩍 사고의 원인은 루크레치아 외부에 있다고 고객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한 것이다.

16550990962599.jpg“맞아요! 정확해요! 어떻게 아시죠!”

루크레치아는 숫제 눈물이라도 맺힐 만한 기세로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렇게 말이 통하는 사람은 오랜만이었다. 정말이지, 데 마레 집안에서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추기경은 이제 밤에 침실에 들어와서도 아무 말 없이 냉랭하게 촛불을 끄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나마 엄마 마음을 잘 알아주던 이사벨라는 남편이 무서워서 만날 수가 없었다. 얄밉기 짝이 없는 막내 아라벨라 계집애는 하나밖에 없는 엄마를 배신한 것인지 밖에서 굴러들어온 천덕꾸러기와 딱 붙어서 다녔다. 하녀장 지아다는 결국에는 아랫것일 뿐이었고 애지중지하는 장남 이폴리토 녀석은 엄마의 편지에 답장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친정 식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돈을 보내라고 애원과 협박 편지를 번갈아 보내더니, 루크레치아가 ‘상황이 좋지 않으니 잠시 기다려 달라’는 답장을 보내자 욕설과 분노만 반복해서 표했다. ‘그간 네가 고생을 했다’라거나, ‘힘들면 어쩔 수 없고 네 처지부터 챙기라’ 같은 따듯한 말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요사이의 루크레치아는 도무지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열광적인 루크레치아의 반응에 집시 여인은 마지막 타로를 뽑지 않고 덱 전체를 모아서 비단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16550990962594.jpg“더 볼 것도 없습니다, 부인. 부인의 댁에 새로운 근심거리가 들어왔어요. 그 근심거리를 제거해야만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일상이 평안해질 것입니다.”

루크레치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것은⋯⋯. 아리아드네를 치라는 이야기인가? 루크레치아가 대답하지 않자, 집시 여인은 몸이 달았다. 집시 여인에게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루크레치아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16550990962599.jpg“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을⋯⋯.”

머뭇대는 루크레치아를 본 집시 여인은 작정하고는 수정구슬을 꺼냈다. 타로는 맛보기일 뿐이었다. 수정구슬이야말로 그녀가 진정으로 영적 세계에 연결된 자임을 증명하는 물건이었다. 사용할 때마다 영적 대가가 있기 때문에 잘 쓰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물적 세계에서 받기로 한 대가가 너무 컸다. 설령 수정구슬을 쓰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반드시 루크레치아를 꼬셔야 했다.

16550990962594.jpg“이 수정구슬을 들여다보시지요, 부인.”

구슬 안에서 연기가 뿜어져 올라오며 희미하게 아름다운 소녀의 실루엣이 보였다. 루크레치아는 대경실색하며 외쳤다.

16550990962599.jpg“이사벨라!”

16550990962594.jpg“따님이시군요.”

집시 여인의 손길에 따라 연기가 피어오르고 소녀의 실루엣이 춤을 췄다. 그녀는 지금 천기를 훔쳐보고 있었다. 집시 여인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16550990962594.jpg“고귀한 혈통의 남자가 보입니다.”

16550990962599.jpg“네?”

16550990962594.jpg“부인의 따님은 왕의 반려가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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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크레치아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16550990962599.jpg“그러고요?!”

집시 여인은 손가락을 마저 움직였다. 이사벨라 앞에 떠올랐던 남자의 실루엣이 흩어지더니 수정구슬 안에는 연기의 소용돌이가 쳤고, 다시 한 덩어리로 뭉쳐진 남자의 실루엣이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는 친절하게 허리를 숙여 오돌오돌 떠는 이사벨라를 껴안아 자신의 옆자리로 올렸다.

16550990962594.jpg"난관이 잠시 있겠지만 결국에는 왕의 반려가 됩니다. 푸른 핏줄은 언제가 되었든지 간에 그녀를 원해요."

집시 여인은 손놀림을 계속했다. 이번에는 모여들었던 연기가 확 갈라지더니, 어린 소녀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집시 여인은 콧잔등을 찌푸렸다. 진정으로 하늘의 운명을 엿볼 때에는 떠오르는 심상을 그녀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가 없었다.

16550990962594.jpg“둘째인가요?”

16550990962599.jpg“둘째예요!”

수정구슬에 떠오른 것은 아라벨라였다. 루크레치아는 머릿속에서 아리아드네를 자식으로 치지 않았기 때문에, 둘째냐는 집시 여인의 질문에 대번에 긍정했다. 집시 여인은 이번에는 미심쩍은 기색으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연기 속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16550990962594.jpg“건강에 문제가 있습니까?”

16550990962599.jpg“아뇨? 어린 애가 무슨. 이제 곧 열한 살인데요.”

16550990962594.jpg“⋯⋯어두운 기운이 보여요. 역병? 불화? 다툼? 잘 지키셔야겠습니다. 당분간 몸조심시켜요.”

집시 여인은 연달아 천기를 누설하자 몸에 무리가 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수정구슬을 끄려고 했으나, 루크레치아가 잠깐 뭔가 더 보고 싶은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16550990962599.jpg“선생님, 우리 이폴리토⋯⋯!”

거기까지 말한 루크레치아는 자신의 혀를 깨물었다. 루크레치아는 그녀의 큰아들 이폴리토를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사랑했다. 그녀는 아들의 미래가 몹시도 궁금했지만, 그것을 물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엄습해왔다. 수정구슬에 연기가 차올랐을 때 눈치 없는 루크레치아조차도 직감할 수 있었다. ‘점성술’로 부를 수 있는 타로 장난은 끝났고, 이제부터는 정말로 흑마술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그녀는 자신의 호기심 같은 사소한 것 때문에 혹여나 이폴리토의 미래에 흑마술의 발자취가 남을까 봐 걱정했다. 자제력이 없는 루크레치아에게는 드물게 보이는 신중함이었다. 이사벨라의 미래는 점성술사가 보여주는 대로 들여다보고도 별로 걱정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되는 태도이기도 했다. 그녀의 장남을 향한 사랑은 큰딸을 향한 애틋함보다도 한 단계 더 높은, 절절한 모정이었다. 집시 여인이 루크레치아의 제지 때문에 수정구슬을 끄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그 누구의 의사도 묻지 않고 수정구슬에 갑자기 하나의 인영이 더 튀어나왔다. 아리아드네였다.

16550990962594.jpg“?!”

16550990962599.jpg“!”

두 여자가 놀란 사이에 아리아드네의 그림자는 힘차게 연기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갑자기 몰려드는 연기에 당황한 집시 여인은 수정구슬을 끄려고 손짓·발짓을 해댔다. 하지만 수정구슬은 과부하가 걸린 듯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수정구슬은 지나치게 많은 연기를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짧은 주파수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 쩌적, 쩌저적! 집시 여인은 허공에서 지고한 눈들이 자신을 주시하기 시작한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16550990962594.jpg“아, 안 돼……!”

집시 여인은 연결을 끊으려고 노력했지만 수정구슬은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불길한 기운이 모여들었다. - 팡! 급기야 수정구슬은 세 쪽으로 쪼개지고 말았다.

16550990962594.jpg“헉!”

16550990962599.jpg“에이그머니나!”

루크레치아는 몹시 놀라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집시 여인도 만만치 않게 놀란 듯했다.

16550990962594.jpg‘들여다봐서는 안 되는 천기⋯⋯!’

루크레치아는 허둥지둥 짐을 싸서 벌떡 일어났다. 방을 나가려는 것이었다. 집시 여인은 다급하게 루크레치아를 제지했다. 찌릿찌릿한 감각이 오른팔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오늘 수정구슬을 들여다보느라 그녀가 가져다 쓴 인과율이 얼마인데, 목표물을 저렇게 가도록 하면 안 됐다.

16550990962594.jpg“부인, 잠깐!”

루크레치아가 창백해진 얼굴로 집시 여인을 돌아보았다.

16550990962594.jpg“부인. 지금 수정구슬이 터진 것 보셨지요? 그게 부인의 미래입니다. 지금 당장 수습하지 않으면 큰일이 나요!”

루크레치아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사실 이 말이 듣기 싫어서 도망치려고 했던 거였다. 이런 말을 들어버리면 거기에 대해 대응을 해야 한다.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르는데 수습이라니, 루크레치아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들어버린 이상 답을 안 할 수는 없었다.

16550990962599.jpg“뭘⋯⋯. 뭘 해야 미래를 막을 수 있나요.”

루크레치아는 집시 여인이 아리아드네를 죽이라고 할까 봐 겁이 났다. 그녀가 피를 무서워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루크레치아가 이제껏 매질해서 죽인 하인만 한 다스가 넘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아리아드네를 혈육으로 인정해서 손속에 정이 생긴 것 역시 아니었다. 루크레치아는 지금 아리아드네와 대적해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새파랗게 어린 서출 딸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다행히 집시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 이야기를 했다.

16550990962594.jpg“부인의 집에 최근에 새로 들어온 귀보석이 있을 겁니다.”

16550990962599.jpg“귀보석이요⋯⋯?”

집에 새로 들어온 귀보석이라면 당연히 있었다. ‘푸른 심해의 심장’이었다.

16550990962594.jpg“그게 부인과 부인의 큰딸과 기운이 아주 상극이에요. 게다가 굴러온 돌의 기세를 아주 완벽히 북돋워 주고 있다고요.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으니 굴러온 돌이 연전연승 중이지요.”

이사벨라와 꼭 닮은 루크레치아의 자주색 눈에서 불꽃이 튀겼다.

16550990962594.jpg“그걸 나에게 가지고 오면 정화 의식을 시켜주겠습니다. 귀보석에 있는 악한 기운을 누르지 못한다면, 부인은 끝장이에요⋯⋯!”

잠깐만, 그것만 해치우면, 그 요망한 어린 것이 나한테 개기지 못하게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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