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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루크레치아의 점성술사 사건 (2) (80/733)

<제80화> 루크레치아의 점성술사 사건 (2)2021.09.08.

루크레치아는 희망과 열정에 가득 차서 데 마레 추기경 관저로 돌아왔다. 하지만 점성술사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때는 설득력이 가득했던 말들도 막상 집에 오고 나니 긴가민가했다. 실제로 실행을 하려니 너무 위험한 것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16550991636735.jpg‘그 집시,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어.’

루크레치아는 점성술사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집시 방물장사로부터 처음 들었다. 정확히는, 무어 제국산 물건을 가지고 방문하는 방물장수가 루크레치아에게 루비나 백작 부인의 측근 점성술사가 올해는 남쪽 별궁으로 따라 내려가지 않고 산 카를로에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는 특급 정보였다. 루비나 백작 부인이 수도에 있을 때는 이 점성술사를 끼고돌며 절대로 바깥에 내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물장수가 알려줬던 것은 어디로 가야 점성술사를 만날 수 있는지 여부뿐이었다. 딱히 정식으로 만남을 주선해 준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점성술사도 방물장수로부터 루크레치아가 누구인지 소개를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최소한 루크레치아는 그렇게 믿었다.

16550991636735.jpg‘정말로 신통력으로 내가 추기경의 안사람인 걸 안 건가.’

……그리고 수정구슬! 그 수정구슬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였던 것은 이사벨라, 아라벨라, 그리고 아리아드네가 확실히 맞았다.

16550991636735.jpg‘그런 건 진짜일 수밖에 없어.’

연기로 가득 차 실루엣들이 춤을 췄던 수정구슬을 상기한 루크레치아는 고개를 흔들어 점성술사가 사기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냈다. 게다가, 점성술사는 금전을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사기꾼일 리가 없었다.

16550991636735.jpg‘‘푸른 심해의 심장’만 가지고 가면 내 모든 고민이 해결될 수 있어.’

심지어 영영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잠시 가지고 가서 정화 의식을 받고 다시 가져다가 있던 자리에 넣어두면 끝이었다. 얻는 것에 비해서 위험부담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한 루크레치아는 집시 점성술사가 시킨 일을 반드시 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 * * 구름 조각 하나 없는 새파란 하늘에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지금은 절기상으로는 초겨울이었지만 배 위의 날씨는 강렬한 태양을 봐서도, 갑판에 부는 따스한 바람을 봐서도, 마치 에트루스칸의 가을과도 같았다. - 파직!

16550991636753.jpg“아이고야!”

범선의 갑판 위에 앉아서 정화수를 담은 대야를 들여다보고 있던 노파는 깜짝 놀라서 펄쩍 뛰어올랐다. 전기가 오른 오른손이 찌릿찌릿해서 그녀는 삿된 기운을 떨쳐내기 위해 신물인 금속 방울을 들고 팔을 마구 털었다.

16550991636753.jpg“어떤 놈이 또 ‘황금률의 저주’를 걸었어!”

노파는 있는 대로 짜증을 냈다.

16550991636753.jpg“주술 구조를 보니 이번에도 또 암하라 놈이 저지른 짓이야! 이것들은 뇌가 있나 없나.”

붉은 치마를 걸친 그녀는 노르스름한 피부에 작고 쭉 찢어진 눈을 하고 흑단같이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동쪽 대륙의 기마 민족인 ‘발라사 오르도’ 사람이었다.

16550991636753.jpg“할머니, 다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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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파의 손주가 고개를 내밀며 할머니의 손을 살폈다. 여덟아홉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16550991636753.jpg“다친 건 아니다. 스치자마자 얼른 꺼 버려서 별달리 튀긴 건 없어. 암하라 놈들은 도대체 어쩌자고 ‘황금률의 저주’를 인세에 풀어대는지 몰라. 게다가 자기네 땅도 아니고 중앙 대륙에다가 풀었구먼! 어디서 그렇게 신기한 케이스를 찾았데.”

중앙 대륙에서는 동쪽 대륙에서 오는 것을 안이하게 모두 ‘무어 제국’ 산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중앙 대륙인들이 ‘무어 제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주로 옛 예사크 지역에 강성한 제국을 세운 에텔쾨즈 민족과 깊은 검은 땅에 사는 암하라 부족에 불과했고, 사실은 중앙 대륙 사람들이 잘 구분하지 못하는 세 개의 나라가 더 있었다. 무어 제국은 최고 위정자 자리를 다섯 개 나라의 왕들이 번갈아 가며 맡는 느슨한 연합체였다. 노파는 그중 가장 깊은 동쪽에 제국을 세운 ‘발라사 오르도’의 살만 무녀였다. 젊은 시절 신병을 앓은 이후로 화신의 힘을 받은 그녀는 발라사 오르도 최고의 여성 살만으로 군림해왔지만, 언제나 군주가 문제였다. 발라사 오르도의 새로 즉위한 젊은 칸이 폭정을 일삼자 고민에 빠졌다. 노파는 으뜸가는 살만 무녀로서 마땅히 칸에게 조언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누아-칸이 친족의 피를 손에 묻히자마자 정화수를 이용해 천기를 엿보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일한 혈육인 손주의 손목을 잡고 수도를 떠나버렸다. 그래서 노파는 지금 발라사 오르도를 뒤로 하고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 급기야는 에트루스칸으로 향하는 범선 위에 몸을 싣고 있는 참이었다. ‘검은 소금 바다’를 가로지르는 범선은 남쪽 땅 다운 뜨거운 공기 속을 바람 한 가닥에 의지해 쾌속으로 달렸다. 도망치는 길이라 심신이 편하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투덜대는 노파에게 손주가 물었다.

16550991636753.jpg“할머니, 근데 왜 ‘황금률의 심판대’가 저주예요? 성공만 하면 뭐든지 이룰 수 있잖아요!”

노파는 기겁하며 금속 방울을 휘둘러 네 개의 방위에 인을 맺어 재빨리 결계를 쳤다. 손주를 결계 안으로 끌어들인 그녀는 주변을 경계하듯이 살폈고, ‘높으신 자’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제야 소년의 현실 인식에 혀를 찼다.

16550991636753.jpg“쯧쯧쯧, 이놈의 자식아! 그래서 수천 년 동안 수천 명이 시도했는데 성공한 자가 누가 있느냐!”

16550991636753.jpg“희랍 사람 프로메테우스가 있잖아요! 불의 전달자, 선지자, 먼저 보는 사람!”

노파는 고개를 내저었다.

16550991636753.jpg“그래서, 그 프로메테우스가 행복해졌느냐?”

할머니의 지적에 소년은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16550991636753.jpg“아니요.”

하지만 순진한 혈기는 감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16550991636753.jpg“그렇지만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줬잖아요! 지금까지 칭송받지요! 역사에 영웅으로 이름이 남았어요!”

노파는 여기서 참지 못하고 소년의 뒤통수를 갈겼다.

16550991636753.jpg“이 할미가 다 내버리고 너를 데리고 서쪽 오랑캐들의 땅에 가는 보람도 없겠다, 이 녀석아!”

뒤통수를 감싸 안은 손주를 앞에다 둔 노파의 잔소리는 끝을 몰랐다.

16550991636753.jpg“양보에 양보를 더해서 그래, 프로메테우스는 성공했다 치자. 목적한 것조차도 이루지 못한 숱한 ‘심판대에 오른 자’들은 생각 안 하는 게냐? 상식적으로, 수천 명 중의 한 명이 성공하는데 네가 한 명에 속하겠니 아니면 그 나머지에 속하겠니?”

노파의 목소리가 점점 올라갔다.

16550991636753.jpg“과거를 바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인과를 끊는 게 쉬워? 실 한 가닥에 매달려 있는 ‘스페키에스’가 몇 개나 있겠니? 대부분은 운명의 실이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서 손도 못 댈 정도로 꼬여 있다. 사건 하나 막았다고 운명에 정해져 있는 ‘스페키에스’가 안 일어나는 게 아니야!”

그녀는 안심하지 못하고 소년에게 신신당부했다.

16550991636753.jpg“너, 눈 꽉 감고 있어. 우리는 아무것도 못 본 거다. 에트루스칸 땅에 가서 양 눈 밑에 하나씩, 점 두 개 찍고 돌아다니는 ‘심판대에 오른 자’가 보이더라도 입 다물고 귀 막고 있어. 나는 네가 영웅이 되기를 바라지 않아. 그냥 평생 잘 먹고 잘살고 천수를 누리다 갔으면 좋겠어.”

사적 영역을 벗어나 공적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치러야 하는 대가가 분명히 있었다. 노파는 세계의 인과율을 위해 개인을 갈아 넣는 것이 과연 할 만한 일인지 여부에 대해 스스로 가치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았다. 하지만 노파는 어린아이들은 늙은이들과 다른 판단을 하기 마련이라는 점도 아주 잘 알았다.

16550991636753.jpg“이 할미가 다 버리고 널 데리고 우리를 둘러싼 인과가 희박한 땅까지 가는 보람을 제발 느끼게 해 다오.”

평소와 다르게 애원하다시피 하는 할머니의 말투에 소년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내키지 않지만 마지못해 수긍했다.

16550991636753.jpg“네⋯⋯.”

  * * * 음악대학에 원서를 쓰기로 한 아라벨라는 신나게 작곡 중이었다. 아라벨라에게는 이사벨라와의 공동 작곡가로 기록되어 있는 미사 브레비스 외에도 이미 완성해 놓은 류트 독주곡 한두 개와 스트링 콰르텟 하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라벨라는 포트폴리오에 더 많은 것을 넣고 싶어 했다. 요새 아라벨라가 추가로 작업 중인 것은 언젠가 오페라를 쓸 때 넣으리라 결심한 소프라노 독창 아리아였다. 아리아드네는 작곡에 대해서는 조예가 없어 동생의 노력을 응원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수녀원 부설 음악대학에 입학하려면 누구의 마음을 녹여야 하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16550991664112.jpg‘결국에는 데 마레 추기경이 수녀원장에게 보낼 추천서가 핵심이지.’

그녀는 아라벨라의 작업을 독려하는 한편, 데 마레 추기경이 수녀원장에게 보낼 편지의 초안을 작성했다. 도장 찍는 사람들은 게으르기 마련이었다. 미리 작성된 초안이 없다면 데 마레 추기경은 차일피일 미루다가 기한을 넘겨 버릴 수도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아라벨라가 오선지와 악기를 가지고 씨름하는 옆에 앉아 짬짬이 추기경의 편지를 완성해 놓았다. 데 마레 추기경의 서명만 있으면 바로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추천서였다. 아리아드네는 아라벨라와 소녀들의 응접실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되었다. 자연히, 아리아드네의 서재는 비어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런데 그 뒤로부터 아리아드네는 간혹 서재에 앉을 때마다 기묘한 위화감을 받고는 했다.

16550991664112.jpg“산차, 잉크병이 어쩌다 바닥에 떨어져 있지?”

16550991636753.jpg“글쎄요⋯⋯. 분명히 잘 올려두고 나갔는데. 서재에는 드나들 사람도 딱히 없는데 말이에요.”

한 번 이상한 느낌을 받자 그 뒤로는 모든 게 다 수상하게 느껴졌다. 아리아드네의 지시로 그녀의 직속 하녀들은 순번을 정해 24시간 아가씨의 방을 지키기 시작했다.

16550991636735.jpg‘저러면 안 되는데……!’

그 조치에 제일 애가 타는 사람은 루크레치아였다. 루크레치아는 먼저 하녀장 지아다를 보내 아리아드네가 ‘푸른 심해의 심장’을 어디에 보관하는지를 알아 오도록 했었다. 아리아드네의 방을 샅샅이 뒤진 지아다는 그 목걸이가 서재에 있는 아리아드네의 금고 안에 있을 거라는, 나름 옳은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 잉크병을 떨어뜨려 버렸고, 그로 인해 아리아드네의 경계가 삼엄해졌다. 그 뒤로는 도통 진도가 나가지를 않았다.

16550991636735.jpg‘아이고, 답답하다. 답답해!’

루크레치아는 사람을 보내 아리아드네의 금고 비밀번호를 알아낼 생각이었지만 방 근처에조차도 얼씬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방법이 없었다. 아리아드네의 하녀를 매수하는 것도 방법의 하나였지만, 안나는 쓸데없는 일을 벌이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고 비센타는 어리고 대쪽같았다. 게다가 그 둘도 금고에는 접근할 권한이 없었다. 그렇게까지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은 산차가 유일했다. 하지만 빌어먹을 산차에게는 칼 하나 들어갈 틈조차도 없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접근한 지아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격침당했다.

16550991636753.jpg“우리 아가씨 방에 뭐 필요한 게 있으신가 보죠?”

16550991636753.jpg“으, 응?”

16550991636753.jpg“이렇게 손수 오신 걸 보니 애초에 방을 뒤진 게 누구였는지는 잘 알겠네요!”

산차는 야무지게 콧방귀까지 뀌고 가 버렸다. 지아다는 자기가 잉크병을 떨어뜨려서 이 사달이 난 것이라고 차마 루크레치아에게 고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에는 적의 강대함을 강조하는 것이 제격이다. 그래서 그녀는 산차 계집애가 매우 눈치가 빠르고 충성심이 깊어서 방법이 없어 보인다고만 보고를 했다.

16550991636735.jpg“정녕 방법이 없단 말이냐!”

루크레치아는 분통을 터트리며 지아다에게 화를 냈다. 루크레치아는 애초에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 혼자서 점성술사를 만나러 갔었다. 하지만 그녀는 태생적으로 입이 쌌다. 루크레치아는 자신이 목격한 놀라운 상황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혼자 간 보람도 없이 지아다에게 그만 다 털어놓아 버린 차였다. 원하지도 않은 일의 공범이 되어버린 지아다는 입장이 곤란했다. 지아다는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보탰다.

16550991636753.jpg“작은 아가씨가 몹시 신중하고 사람을 부리는 데에 물 샐 틈이 없습니다, 마님.”

16550991636735.jpg“그래서, 나더러 그냥 손가락 빨라고?”

16550991636753.jpg“아뇨, 아뇨, 그럴 리가요, 마님! 작은 아가씨 쪽을 노리는 대신에 그때 그 점성술사한테 한 번 다시 가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용하다는데, 실물이 없어도 정화 의식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옳거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16550991636735.jpg“네 말이 맞다. 수도에서 가장 용하다고 소문이 멀리멀리 퍼진 점성술사이니, 뭔가 방도가 분명히 있을 것이야.”

루크레치아는 다시 한번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이번에는 지아다까지 데리고 데 마레 가의 마차를 타고 산 카를로의 골목길로 향했다. 루크레치아가 알지 못했던 점은, 루크레치아의 검은 마차가 떠나는 것을 아리아드네가 2층 자신의 스위트 룸 커튼 너머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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