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83화> 사랑하는 내 아들아 (82/733)

<제83화> 사랑하는 내 아들아2021.09.19.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추기경이 ‘뒤처리’를 언급했을 때, 오늘이 그녀의 손에 피가 묻을 날임을 직감했다. 데 마레 추기경은 교단에 적이 많았다. 다름 아닌 성황청의 수장, 루도비코 법황 본인이 그 적이었다. 신교파의 수장인 루도비코 법황은 구교파의 선봉장이자 에트루스칸 주교들의 리더인 데 마레 추기경을 어떻게 치워버릴 수 있을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추기경의 집에서 흑마술을 부렸다는 이야기가 바깥으로 흘러나가면 끝장이었다. 추기경의 집에서 흑마술을 부렸다는 이 막장 사건의 전말을 아는 자는 집시 점성술사를 뺀다면 데 마레 추기경 과 루크레치아, 아리아드네, 아라벨라, 집사 니콜로, 그리고 하녀장 지아다가 전부였다. . 가족들은 이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나갔을 때 다 같이 십자가에 매달려 화형당할 당사자이기 때문에 일단은 믿을 수 있었다. 그들은 강제로 모두 같은 배에 타고 있는 셈이었다. 가족 중 유일하게 걱정되는 것은 루크레치아였다. 악의가 있다기보다는 피아 식별이 안 돼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점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단 베르가모 영지에 갇혀 있을 테니 입을 놀릴 가능성이 작았다. 남은 것은 집사 니콜로와 하녀장 지아다였다.

1655099197825.jpg“⋯⋯.”

아리아드네는 본인의 쓸모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열심히 방 안을 쓸고 닦는 중인 지아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니콜로라면 믿을 수 있다. 그는 루크레치아의 허튼짓을 막으라고 데 마레 추기경에게 이른 장본인이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집사를 여전히 신뢰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집사 니콜로는 오늘 아리아드네가 처리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루크레치아의 심복인 지아다는⋯⋯.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추기경이 ‘뒤처리는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말했을 때 지아다를 죽여서 입을 막는 것을 의도했다고 생각했다.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잰 손놀림으로 청소를 하는 지아다가 애처로워 보였다. 사실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추기경의 의사가 지아다를 살려놓는 것이라고 해도 오늘 지아다를 쳐야 했다. 지아다는 둘도 없는 루크레치아의 심복이었다. 루크레치아의 팔다리를 자를 절호의 기회였다. 좋은 핑계도 있었다. 지아다는 이미 루크레치아를 한 번 배신한 사용인이었다. 한 번 배신한 자는 두 번도 배신하는 법이다.

1655099197825.jpg‘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일인 거고.’

불쌍한 것은 불쌍한 것이고 가족의 안위를 위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그래서 아리아드네는 팔짱을 끼고 지아다가 청소를 하는 내내 다른 사용인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친히 감시를 섰다. 목숨이 걸린 일인데 남의 손에 맡길 수는 없었다.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조차 하지 않고 있는 지아다가 카펫에 묻은 핏자국을 일일이 손으로 닦아내고 버너 위에 눌어붙은 유향과 몰약을 쓰레기 자루에 모두 집어넣자, 아리아드네는 지아다에게 여상스레 물었다.

1655099197825.jpg“은밀히 버려야 할 물건은 이게 다인가?”

16550991978266.jpg“예?”

1655099197825.jpg“어머니의 방에 이상한 게 더 남아 있지 않으냐는 말이야. 악마를 그린 그림이라던가 흑마법 주술책 같은 게 안방마님의 장롱에서 나오면 안 될 것 아닌가.”

지아다는 그제야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91978266.jpg“제가 무어인 여자한테서 받아온 자루에는 이것들 말고도 녹인 황금과 무슨 검은 환 같은 것이 더 있었습니다.”

무어인이라는 말에 아리아드네의 귀가 번쩍 뜨였다.

1655099197825.jpg“무어인? 그 점성술사가 무어인이었는가?”

아리아드네는 언제나 항상 회귀의 원인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돌아온 이후로 각종 서적을 뒤적여봤지만 산 카를로의 정상적인 문헌에는 아리아드네가 겪은 일 같은 것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중앙 대륙 정통 학문이 아니라 그 바깥에 답이 있을 것이다. 전생의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가 부린 그녀의 수하, 무어인 기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때 뭔가가 일어났다. 원흉을 찾자면 이사벨라이거나, 그 무어인 기사,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는 회귀의 원인은 아닐 거라고 여겼다. 이사벨라에게 그런 이능(異能)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영적인 일에 가장 관심이 없는 사람을 뽑으라면 에트루스칸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고도 남는 사람이 아리아드네가 아는 이사벨라였다. 남은 것은 그녀를 죽였던 무어인 기사와, 그의 눈에서 번쩍였던 붉은 빛무리다. 무어인을 만날 수 있다면 그 무어인 기사를 알고 있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힌트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리서치를 시작해야 하는 무어인의 문헌이라던가.

1655099197825.jpg“자네가 직접 받아왔어? 자네도 흑마술사를 보러 가는 데 동행을 했나?”

16550991978266.jpg“아⋯⋯. 흑마술사는 아니고⋯⋯.”

지아다는 자기가 만난 것이 흑마술사가 아니며, 어디까지나 무해한 점성술사에 불과하고, 본인은 흑마술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며 신실한 신자임을 어필하기 위해 아리아드네에게 여러 가지 변명을 했다. 지금 뭐가 문제인지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과연 루크레치아의 심복다웠다.

16550991978266.jpg“⋯⋯점성술사입니다. 루비나 백작 부인이 오랫동안 데리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했어요.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리아드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1655099197825.jpg“됐고, 어디서 그 점성술사를 만났지?”

16550991978266.jpg“캄포 데 스페지아 뒤에 있는 뒷골목입니다. 무어인들이 많이 사는 골목길의 단독주택에 있었어요.”

1655099197825.jpg“길을 아나.”

16550991978266.jpg“마부 주세페와 함께 갔었습니다.”

주세페는 산차 앞에서는 입이 가벼워지는 젊은 마부였다. 아리아드네는 곧장 자신의 겉옷을 집어 들었다.

1655099197825.jpg“지금 당장 가보세.”

16550991978266.jpg“네? 저도요?”

1655099197825.jpg“자네가 없으면 내가 만나는 것이 그 점성술사인지 그냥 지나가던 무어인인지 어떻게 아나?”

아리아드네는 책임을 회피할 궁리만 하는 지아다가 짜증스러워서 톡 쏘아붙였다.

1655099197825.jpg“그 여자가 어머니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들어야겠어.”

아리아드네는 산차를 불러 마차를 준비시키라고 일렀다. 지정 마부는 길을 알고 있는 주세페였다. 아리아드네는 일단은 무어인 점성술사를 만나서 입단속을 시킬 작정이었다. 우선 대화를 시도해 보겠지만, 말이 안 통하면 좀 더 강압적인 수단을 취할 예정이었다. 루비나 백작 부인의 귀에 데 마레 추기경의 정부가 추기경 관저 내에서 흑마술을 행했다는 이야기가 들어가면 몹시 곤란했다. 그 와중에 회귀에 대해 뭔가 알아낼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16550991993655.jpg“아가씨, 마차가 다 준비되었습니다!”

아리아드네는 산차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잠시 방 안에 서서 고민을 했다. 이윽고 그녀는 호신용 단도를 하나 집어 들어 품 안에 넣었다.

16550991993658.jpg

1655099197825.jpg“준비 끝.”

아리아드네는 꼼짝도 못 하고 그녀의 시야 안에 머물러 있던 지아다를 끌고 바로 마차에 올랐다.

1655099197825.jpg“가자.”

  * * * 루크레치아는 베르가모 영지로 쫓겨나기 전에 소지품을 챙길 잠깐의 시간을 얻었다.

16550991978266.jpg“마님. 빨리하셔야 합니다. 추기경 예하 눈에 띄면 경을 치십니다.”

집사 니콜로가 주변의 눈을 살피며 신신당부를 했다. 루크레치아는 우선 허겁지겁 귀중품과 패물을 챙겼다. 금화는 어디를 가더라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다. 각종 보석과 장신구도 싹 챙겼다. 작은 금고에 넣어두었던 금화를 모두 챙긴 루크레치아의 시선이 책상 한 켠에 닿았다. 거기에는 핑크색 사파이어가 아로새겨진 티아라가 놓여 있었다. 이사벨라가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에게서 받았던 바로 그 티아라였다. 티아라는 데 마레 추기경이 이사벨라가 남자들로부터 받은 사치품을 압수해서 안방에 보관해두라고 엄명을 내린 덕에 여기에 와 있었다. 루크레치아는 잠시 고민했다. 딸의 평판을 위해서 언젠가 이 티아라를 콘타리니 백작가에 돌려보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당장 돈이 필요했다. 우선 타란토에서 열흘 굶은 새끼 새들처럼 울부짖는 친정이 있었고, 또 언제 엄마가 도와줘야 할지 모르는 장남이 있었다. 여자의 비상금은 여자의 힘이었다.

16550992007118.jpg‘에이, 안 팔고 가지고 있다가 다시 가져오면 되지 뭐.’

루크레치아가 장녀, 장남, 친정 중 선택한 것은 결국 장남과 친정이었다. 루크레치아는 사파이어 티아라도 함께 챙겨 자기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러고 나니 약간 죄책감이 들어, 그녀는 딸의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루크레치아는 고개를 돌려 집사 니콜로를 보고 애원했다.

16550992007118.jpg“여보게, 가기 전에 이사벨라를 만날 수는 없겠는가.”

집사 니콜로는 난색을 표했다.

16550991978266.jpg“마님, 지금 잠깐 방에 올라오신 것도 제가 편의를 크게 보아 드린 겁니다.”

루크레치아는 니콜로에게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표정으로 사정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데 마레 추기경과 루크레치아 내외를 모신 집사 니콜로로서도 처음 보는 애처로운 모양새였다.

16550992007118.jpg“애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려야 하지 않나. 그렇다면 내 직접 보는 건 단념하겠네. 이사벨라와 이폴리토에게 각각 편지 한 통씩만 전해 주게.”

루크레치아는 챙긴 패물 중 새끼손톱 반만 한 보석이 달린 반지를 하나 꺼내 집사 니콜로의 손에 쥐여주었다. 니콜로는 끄응 소리를 내더니 재빠르게 반지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16550991978266.jpg“아가씨들한테 한 통, 도련님한테 한 통입니다. 지금 당장 쓰셔서 저한테 주세요. 빨리요.”

집사 니콜로의 승낙을 얻어낸 루크레치아는 펜에 잉크를 묻혀 본인이 쓸 수 있는 한 최대한 빠르게 편지를 썼다. 이사벨라에게 보내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고 짧았다. 엄마가 아버지 눈에 잘못 보여서 베르가모 영지로 쫓겨가니 몸조심하고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사랑한다는 첨언이 붙기는 했다. 이폴리토에게 보내는 것은 으리으리했다. 일단 집어 든 종이부터 달랐다. 메모지 대신에 제대로 된 편지지를 고른 루크레치아는 한 글자 한 글자 꼭꼭 눌러 담아 구구절절하고 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 사랑하는 아들 이폴리토에게, 언제나 보고 싶은 사랑하는 우리 아들아, 나는 너를 품고 낳느라 인생을 바쳤지만 그 사실을 하나도 후회하지 않는단다. 언제나 우리 아들이 잘되었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귀하게 키운 너에게 부탁을 하려고 하니 너무 가슴이 미어지고 미안하고, 정말이지 말을 꺼내기가 어렵구나. 사랑하는 아들아, 엄마를 도와다오. 엄마한테 안 좋은 일이 생겼어. 너희 아버지가⋯⋯(중략)⋯⋯베르가모 영지로 쫓겨가게 되었다. 집안의 권한은 아리아드네 계집애가 갖고 있게 생겼어. 저번 편지에 썼듯이 이사벨라도 자기 방에 감금당해 기약 없이 근신 중이어서 엄마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단다. 이폴리토, 네 답장이 없었는데, 편지가 잘 도착을 하기는 하는 거지? 곤란한 일은 없지? 공부는 잘되고? 이제 곧 방학이니 돌아와 있는 동안에 어떻게 좀 손을 써 주지 않겠니? 엄마는 우리 아들만 믿는다. 항상 네 앞에서 든든한 어미가 되어 주어야 하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참 염치가 없고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믿을 사람이 우리 아들밖에 없구나. 사랑하고, 보고 싶다 아들아. - 웃으며 만나길 바라며, 사랑을 가득 담아, 엄마가.」 루크레치아는 이폴리토에게 보내는 편지를 꼭꼭 밀봉해 니콜로에게 건넸다. 이사벨라에게 보내는 편지 역시 니콜로에게 주었다. 편지봉투에 잘 넣기는 했지만 밀봉까지는 생략한 채였다.

16550992007118.jpg“이렇게 두 통이네.”

아라벨라에게 보내는 것은 없었다.

16550992007118.jpg“잘 부탁하네. 잘 전달해 줘야 하네. 꼭 부탁하네.”

16550991978266.jpg“염려 놓으십시오, 마님.”

16550992007118.jpg“이폴리토한테 답장이 잘 안 오는데, 파두아로 가는 길이 멀어서 누락이 되는 것은 아니지?”

집사 니콜로의 표정이 조금 곤란해졌다. 파두아로 보내는 편지는 믿을 만한 인편으로 잘 가고 있었다. 이폴리토 쪽에서 답장을 보내오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난처한 상황에 처했고, 믿을 구석이라고는 자기 배로 낳은 장남밖에 남지 않은 마님에게 그 이야기를 정면으로 하기에는 니콜로는 마음이 좀 약했다.

16550991978266.jpg“제가 편지가 잘 오가는지 책임지고 확인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님. 아라벨라 아가씨한테 남기실 건 따로 뭐 없습니까?”

루크레치아는 표정 하나 망가지지 않고 답했다.

16550992007118.jpg“어린앤데, 편지를 받아보았자 알겠느냐. 게다가 아까 다 봤잖아. 따로 남길 것은 없네.”

니콜로는 아이고야 싶은 표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91978266.jpg“알겠습니다. 이제 출발하시지요. 아래층에 마차가 당도해 있을 겁니다.”

루크레치아는 두꺼운 벨벳 로브를 뒤집어쓰고 패물을 챙긴 보따리를 품에 안은 채 집사 니콜로를 뒤따라 나갔다. 그녀는 발걸음을 옮기며 지난 22년의 세월과 영욕이 맺힌 데 마레 추기경의 저택을 자꾸 돌아보았다. 여기는 그녀가 피와 눈물로 일군 보금자리였다. 절대로 서출 딸 같은 아이에게 밀려날 일은 없을 것이었다. 절대로.

16550992022808.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