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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황금률의 비밀을 엿듣다 (83/733)

<제84화> 황금률의 비밀을 엿듣다2021.09.22.

아리아드네는 두꺼운 로브를 뒤집어쓴 채 입을 꾹 다물고 캄포 데 스페지아로 향하는 마차 안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목적지에 거의 다 도달한 참이었다. 아리아드네의 옆에는 산차가 있었고, 맞은편에서는 지아다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16550992087191.jpg“아가씨, 저는 꼭 같이 들어가야 하나요. 굳이 제가 없어도…….”

16550992087196.jpg“지아다 아줌마가 없으면 아가씨가 사악한 흑마술사를 무슨 수로 알아보십니까?”

산차가 짜증을 내며 톡 쐈다. 이 주종(主從)은 화내는 포인트가 똑같았다.

16550992087191.jpg“흑마술사가 아니고 점성술사…….”

지아다는 이제는 숫제 아랫것처럼 부리던 산차의 눈치마저 보며 오그라들었다. - 히힝!  

16550992087191.jpg“도착했습니다. 여기서 내리시겠습니까?”

모자를 눌러쓴 마부 주세페가 물었다. 아리아드네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92087211.jpg“지아다. 앞장서라. 산차. 주세페와 함께 마차에 남아 있어.”

마차에서 내린 아리아드네는 지아다를 앞세워 낡은 단독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 삐걱. 오래된 마룻바닥이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질렀다. 지아다는 움찔, 몸을 웅크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아리아드네는 지아다를 쳐다보았다. 아리아드네의 눈길을 받은 지아다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16550992087191.jpg“저 맨 안쪽 방입니다…….”

  - 저벅, 저벅. 아리아드네는 마룻바닥이 삐걱대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복도를 빠르게 걸어갔다. - 삐이익. 그 와중에 아리아드네가 내지 않은 소음이 낡은 단독주택 안을 울렸다. 문이 열리면서 녹슨 경첩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리아드네는 품속의 단도를 움켜쥐며 기민하게 소리의 진원지를 노려보았다. 맨 안쪽 방의 문 앞에는 집시 여인이 우뚝 서 있었다. 짐을 모두 싸서 보퉁이를 등에 지고, 수정구슬을 품 안에 안은 채였다. 막 떠나려던 참인 듯했다. 지아다가 옆에서 소리쳤다.

16550992087191.jpg“저 여자입니다, 아가씨!”

아리아드네는 성큼성큼 걸어가 좁은 복도에서 집시 여인을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집시 여인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16550992087191.jpg“이 무슨……!”

아리아드네는 몸으로 집시 여인을 막아 세운 채 단호하게 물었다.

16550992087211.jpg“자네가 루비나 백작 부인의 점성술사인 무어인이 맞는가.”

복도 끝까지 몰린 집시 여인은 아리아드네를 뿌리치고 뛰쳐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아리아드네는 망설임 없이 집시 여인의 발을 걸었다. - 쿵!  

16550992087191.jpg“아악!”

집시 여인은 등에 멘 보퉁이와 품에 안은 수정구슬 탓에 중심을 잃고 제대로 넘어졌다. 그 와중에도 그녀가 수정구슬을 소중하게 품 안에 껴안고 있는 것을 본 아리아드네는 그것이 협상의 지렛대임을 깨달았다.

16550992087191.jpg“지아다. 저걸 뺏어.”

16550992087191.jpg“……!”

16550992087191.jpg“어서!”

흑마술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멈칫대던 지아다는 아리아드네의 호통에 흑마술사에게 덤벼들었다. 흑마술사도 두렵긴 하지만 어떻게 해꼬지를 할지 모르는 흑마술사보다는 당장 자기의 목줄을 쥐고 있는 작은 아가씨가 더 두려웠다. 집시 여인은 몸부림을 치며 반항했다. 지아다의 힘이 달려 보이자 아리아드네도 함께 뒤에서 덤벼들어 집시 여인의 양팔을 잡아 눌렀다. 집시 여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만 수정구슬을 지아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바닥에 사지가 깔려 제압된 집시 여인에게 아리아드네는 차가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16550992087211.jpg“자네가 데 마레 추기경의 안사람에게 사특한 흑마술을 소개했지?”

이 말을 듣고는 집시 여인은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로브 소녀와 나이 먹은 하녀가 어디에서 유래한 재앙인지를 깨달았다. 집시 여인은 몸부림을 치며 부정했다.

16550992087191.jpg“나는……. 나는 흑마술사가 아니오! 너는 데 마레 추기경의 식솔이지?”

지아다의 얼굴을 뒤늦게 알아본 집시 여인이 오리발을 내밀었다.

16550992087191.jpg“나는 그저 타로점이나 좀 봐 주는 사기꾼일 뿐이야.”

무능력한 사기꾼이라고 잠깐 쪽팔리고 마는 것이 사악한 흑마술을 부리는 마녀라고 지목되어 두고두고 쫓기는 것보다는 백번 나았다. 집시 여인은 아리아드네를 살살 얼렀다.

16550992087191.jpg“왜 왔는지는 알겠어. 그때 그 귀부인의 일행이군. 오망성, 개구리 피, 그거 다 그냥 사기요. 돈 좀 우려내려고 그랬던 거라고. 난 그냥 연애 타로나 좀 볼 줄 아는 점성술사야.”

그녀는 짓눌린 몸이 좀 편안해지도록 자세를 뒤틀었다.

16550992087191.jpg“돈은 얼마 돌려줄게. 일부는 썼지만 남은 건 줄게. 내 수정구슬 돌려줘. 그거 내 장사 밑천이라고.”

16550992087211.jpg“사기라고?”

아리아드네가 점성술사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16550992087211.jpg‘루비나 백작 부인 옆에서 20년이나 버텼는데 사기일 리가 없잖아! 나는 회귀에 대해 들어야 한다고!’

분기탱천한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쳐드는 바람에 그녀의 머리에 쓴 로브 모자가 흘러내리며 소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로브 그림자 아래로, 왼쪽 눈 밑에 선명한 붉은 점이 보였다.

16550992087191.jpg“히익!”

아리아드네의 눈 밑 점을 본 점성술사는 못 본 것을 본 사람처럼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비명을 질렀다.

16550992087191.jpg“너로구나! 그래서, 그래서 수정구슬이 터졌던 거군!”

점성술사는 황망하게 말을 쏟아냈다. 스스로도 몹시 당황한 듯 보였다.

16550992087191.jpg“그런데 왜 점이 반쪽밖에 없지? 너는 무어길래 암하라 주술을 안은 채로 에트루스칸 땅을 돌아다니고 있느냐? 누가 너를 ‘심판대’에 올렸어?”

‘심판대’라는 단어가 나오자 점성술사는 고통을 느끼는지 몸서리를 쳤다. 그와 동시에 하녀장 지아다도 귀를 막으며 몸부림을 쳤다. - 쿵! 지아다가 집시 여인의 수정구슬을 바닥에 떨궜다. 수정구슬은 도르르륵 굴러가서 벽에 닿고서야 멈췄다. 아리아드네는 본인만 멀쩡한 이 상황에 당황했지만 일단 집시 여인을 더욱 힘있게 잡아 눌렀다.

16550992087211.jpg“‘심판대’는 뭐지? 당신, 뭔가 알고 있지?! 내 눈 밑 점은 왜 생긴 거지?”

점성술사는 되려 당황한 듯했다.

16550992087191.jpg“모른다고? 네가 가장 잘 알아야 할 것 아니냐! ‘심판대’에 오른 자가 자기가 ‘심판대’에 왜 올라갔는지를 몰라? 네 손으로 올라갔을 것 아니냐!”

지아다는 ‘심판대’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구석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지아다의 상태에 당황해서 집시 여인에게 물었다.

16550992087211.jpg“지아다는 왜 저러는 거지?”

이때, 눈알을 사방으로 굴리며 기회만 엿보던 집시 여인이 갑자기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녀는 몸을 굴려 바닥에 굴러 있는 수정구슬을 잽싸게 잡아챘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등짐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수정구슬을 품에 안고 복도를 질주해서 단독주택에서 도망쳐 나가려고 했다.

16550992087211.jpg“멈춰!”

아리아드네는 그대로 집시 여인의 뒤를 달려서 쫓았다. 그녀는 달음박질로 단숨에 거리를 좁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집시 여인의 등으로 그대로 몸을 던졌다. - 와장창! 집시 여인과, 그녀의 품에 안긴 수정구슬과, 아리아드네가 한 덩어리가 되어서 바닥을 굴렀다. 인간 둘의 덩어리는 함께 굴러 복도 중간쯤에 있는 장식장을 덮쳤다. 장식용 접시 따위가 우수수 쏟아져 내려 둘에게 부딪혔다. 집시 여인은 다시금 아리아드네 밑에 깔린 처지가 되어 옴짝달싹도 못 하게 되었다. 아리아드네는 집시 여인이 언제든지 도망치리라는 사실을 깨닫자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 집시 여인의 목에 겨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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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92087211.jpg“네가 아는 거 모두 다 불어. ‘심판대’라는 게 도대체 뭐지?”

16550992087191.jpg“말 못 해……! 누설하면 대가를 치르게 된단 말이다!”

아리아드네는 조소를 날리고는 집시 여인의 목에 단검의 날을 힘주어 댔다. 주르륵, 밝은 빨간색의 피가 한 줄기 흘러나왔다.

16550992087211.jpg“무슨 대가를 치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대가가 목숨보다도 큰가?”

그녀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겉 피륙에만 상처를 냈던 칼날이 좀 더 깊이 파고들었다.

16550992087211.jpg“난 널 죽일 수도 있어.”

로브를 뒤집어쓴 소녀의 눈빛에서는 결단력이 엿보였다. 집시 여인은 저 소녀가 정말로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16550992087191.jpg“말할게, 말하면 되잖아……! 컥! 컥!”

근육에 와 닿는 단도의 질감에 집시 여인은 질겁을 했다. 죽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은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줘야 할 때였다.

16550992087191.jpg“심판대는…….”

그녀의 입이 열렸다. 사람의 일을 이야기할 때는 비굴하고 야비했던 그녀의 목소리는 하늘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장중하게 울렸고 톤은 낮아졌다.

16550992087191.jpg“……‘황금률의 심판대’를 말한다. ‘심판대에 오른 자’는 ‘눈뜬 자들’로부터 이능(異能)을 얻게 되지!”

16550992087211.jpg“좋아, 그러면 그 얻게 되는 이능이라는 건 뭐지?”

아리아드네는 사실 이 부분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회귀’일 것이었다. 그녀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과거로 돌아와 모든 것을 원위치할 기회를 손에 쥐었다.

16550992087191.jpg“미래시!”

16550992087211.jpg“뭐?”

당황한 아리아드네에게 집시 여인이 답했다.

16550992087191.jpg“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 아니냐! 기록에 따르면 ‘심판대’에 오른 자는 미래를 본다!”

아리아드네는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게도 보일 수 있을 것이었다. 회귀한 자는 현실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던 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 같을 것이다. 집시 여인이 가지고 있는 기록은, ‘심판대에 오른 자’가 직접 남긴 기록이 아니라 심판대에 오른 자를 다른 누군가가 관찰한 기록이다.

16550992087191.jpg“대신에 그 힘으로 기존에 ‘정해져 있던 미래’의 내용에 변경을 가하면서 네 손으로 죄를 짓는다면, 그 업보에 대해 ‘우주의 섭리’에게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야!”

16550992087211.jpg“‘우주의 섭리’라면 천신인가?”

16550992087191.jpg“그래, 너희들은 그 우습지도 않은 이름으로 지칭하더군. 우주의 섭리에 인격이 어디 있느냐! 어리석은 것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작은 인간들…….”

16550992087211.jpg“잠깐만. 살면서 지은 업보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은 천신을 믿는 자녀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 아닌가? 왜 ‘심판대에 오른 자’만 특별히 업보를 조심해야 하지?”

16550992087191.jpg“‘심판대’에 오르지 않은 자는 잔챙이야. 필부들은 죄를 좀 지어도 ‘인과의 천칭’이 그걸 못 보고 넘어갈 수도 있어. 그분들은 장삼이사를 일일이 뒤질 만큼 한가하지 않아.”

집시 여인의 눈이 기묘하게 빛났다.

16550992087191.jpg“그러나 ‘심판대’에 오르면 그때부터는 이제 ‘인과의 천칭’이 그자를 주시한다! 성공하면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지고한 보상을 받지만 한 걸음만 삐끗해도 바로 실패지!”

성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보상이 욕심이 나는지 집시 여인의 흰자위가 번들거렸다. 그녀는 신들린 듯이 외쳤다.

16550992087191.jpg“그러니 ‘눈 뜬 자들’에 근접하게 다가간 초인만 ‘심판대’에 오르는 거지! 인과를 버틸 영웅만!”

  - 파즈즈즈즈즈즈  

16550992087191.jpg“아아아아악!”

‘대가’라는 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신속하게 따라오는 모양이었다. 집시 여인의 왼쪽 손끝으로부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는 허겁지겁 팔을 잡아먹으며 집시 여인의 왼팔을 타고 올라갔다.

16550992087191.jpg“으아아아악! ‘눈뜬 자들’이시여! 이 자는 이미 아는 자가 아니더이까!? 아는 자에게 이 정도 이야기도 아니 된단 말입니까?”

연기가 휘감은 집시 여인의 왼팔에서 모든 생기가 빨려 나가며 미라처럼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16550992087191.jpg“안 돼!”

집시 여인은 몸을 웅크리고 필사적으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옴 슈바팔가, 아히 아 텀윈. 옴 슈바팔가, 아히 아 텀윈.’ 반복적으로 주문을 외우는 집시 여인에게 아리아드네는 재차 물었다.

16550992087211.jpg“‘눈뜬 자들’이 도대체 누구냐?”

16550992087191.jpg“더는 말 못 해!”

집시 여인은 쪼그라든 왼팔을 눈물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주문을 외우자 왼팔이 더 이상 쪼그라드는 것은 멈췄다. 하지만 집시 여인의 주문은 팔을 원래대로 치료할 정도로 효험이 뛰어나 보이지는 않았다.

16550992087191.jpg“죽여도 더는 말 못 해! 이 꼴을 봐라! 네가 데려온 자를 봐!”

집시 여인의 말에, 아리아드네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지아다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16550992087211.jpg“……!”

지아다는 혀를 빼물고 바닥에 널브러져 죽어 있었다. 지아다의 귀에서 연기가 아롱아롱 피어올랐다. 그러더니, 순간 지아다의 모든 혈과 육이 먼지가 되어 재처럼 파사삭 흩어졌다. 남은 것은 뼈다귀뿐이었다. 지아다의 백골 앞에는 두 쪽으로 깨진 수정구슬이 나동그라져 있었다.

16550992087211.jpg“저게 뭐지?!”

16550992087191.jpg“까막눈 인간아, 알려줄 테니 나를 보내줘.”

집시 여인은 눈물에 엉망이 된 얼굴로 반쯤은 협박을, 반쯤은 애원을 했다.

16550992087191.jpg“네 눈 밑 점이 하나밖에 없는 걸 보고 눈치챘어야 했는데……. 넌 반쪽짜리로구나.”

집시 여인은 숨이 차서 헐떡였다.

16550992087191.jpg“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인데 네가 알아야 할 것 단 한 가지를 알려주마. 이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넌 계속 네가 사랑하는 자들을 다치게 할 거야.”

아리아드네는 집시 여인이 뭐라고 씨부렁대든 그녀를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신비에 닿은 기이한 사건은 지아다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집시 여인이 입을 잘못 나불대면 현실 세계에서 데 마레 추기경 일가의 목이 날아간다.

16550992087211.jpg“여기서 내가 너를 보내주면 넌 다시 루비나 백작 부인 옆에 붙어서 사특한 주술을 사용할 것 아니냐.”

집시 여인은 큰 소리로 비웃었다.

16550992087191.jpg“이 영이 빈한한 자야! 내 수정구슬을 봐. 나는 암하라 땅으로 돌아갈 거야. 구슬도 다시 구해야 하고, 팔을 고치려면 10년은 걸리겠어.”

집시 여인은 왼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16550992087191.jpg“믿기지 않으면 배를 타는 것까지 동행하던지. 난 바로 이 망할 서쪽 오랑캐 땅을 뜰 거다. 보내 줘. 날 여기서 죽이고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면 온전히 네 손해다.”

집시 여인이 바로 에트루스칸 땅을 떠날 것이라면 협상의 여지가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집시 여인은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그녀는 주머니 안에서 황금 가루를 꺼내 사방으로 뿌리며 결계를 치더니, 그제야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50992087191.jpg“영적 세계에 대해 함부로 누설하면 듣는 자는 저 꼴이 된다. 누설하는 자에게도, 자격이 없는데 알게 된 자에게도 ‘눈뜬 자들’이 징벌을 내려!”

집시 여인은 성한 손가락으로 지아다를 가르쳤다.

16550992087191.jpg“네가 알 자격이 없는 자에게 너에게 일어난 비밀을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은 알게 된 비밀의 크기에 비례해서 고통을 겪거나 죽을 거다!”

아리아드네는 짧은 숨을 토해냈다. 산차에게, 아라벨라에게, 알폰소에게 회귀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게 정말로 다행이었다. 집시 여인은 입을 다물려다가, 고개를 저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16550992087191.jpg“착하게 살아라.”

16550992087211.jpg“뭐?”

집시 여인은 혼란스러워하는 아리아드네를 향해 혀를 찼다.

16550992087191.jpg“억울해도, 분해도, 남들보다 다섯 배는 더 착하게 살아라. 다 용서해.”

아리아드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집시 여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16550992087211.jpg“나는 마땅히 받아내야 할 핏값이 있어.”

16550992087191.jpg“지고하신 섭리께서 바라시는 바다.”

16550992087211.jpg“그 잘난 ‘섭리’께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도 모르시는 건가! 피해자의 복수는 당연한 응보(應報)의 일부야!”

아리아드네는 이를 갈았다. 나를 버린 체자레, 내 자리를 앗아간 이사벨라, 나를 이용했던 숱한 사람들! 그냥 고스란히 보내주라고?

16550992087211.jpg“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데! 어떤 피눈물을 흘렸는데! 복수하지 말고 그냥 밥 잘 얻어먹은 개처럼 새로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그렇게 살라고?”

집시 여인은 분노하는 아리아드네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16550992087191.jpg“용서는 너를 위해 하는 거야. 남을 위해 하는 게 아니야.”

지금의 집시 여인은 마치 현자 같았다.

16550992087191.jpg“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서 불쌍해서 해주는 얘기다. 포르토 상인의 고사를 들어보았느냐? 살코기 1파운드의 이야기.”

포르토 상인은 금화를 빌리며 그 돈을 갚지 못하면 사람의 살 1파운드로 대물변제하겠다는 계약서를 썼다. 상인이 제날짜에 돈을 갚지 못하자 고리대금업자는 계약의 이행을 요구했다. 그러나 포르토의 재판관은 살코기를 가져가는 것은 허용하였으나 피를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그에 더해, 1파운드에서 단 1리브라라도 더 가져간다면 그것은 별도의 범죄라고 선언했다. 고리대금업자는 결국 약속받은 인간의 살을 가져가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16550992087211.jpg“그 치사한 이야기 말이지? 이방인을 차별한 불공정한 계약이지. 계약을 했으면 약속을 지켜야지.”

16550992087191.jpg“그래, 지킬 수 없는 약속은 애초에 하지를 말아야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우주의 섭리는 그 포르토 재판관처럼 생각한다오.”

집시 여인은 비틀대며 일어났다.

16550992087191.jpg“네가 복수를 하면서 정밀하게 네 원수들만 공격해 네가 받아야 할 빚만큼만 받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 어차피 계량은 다 달라. 너는 네가 100만큼 당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은 50만큼 잘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어. 너도 상대방에게 잘못했던 것을 제하면 사실 차이는 25만큼만 남아 있을 수도 있지.”

그녀는 하늘을 가리키며 팔을 높이 들었다.

16550992087191.jpg“우주의 섭리는 기계적이야. 네 착각을 봐주지 않아. 네가 실수로라도 무고한 누군가에게 1만큼의 해를 끼친다면, 25만큼만 갚아줘야 했을 상대에게 50만큼 앙갚음한다면 우주의 섭리는 그것을 다 네 업보라고 생각할 거다.”

금가루로 친 결계가 깜박깜박하더니 그 빛을 다하고 꺼졌다. 인과율이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설명을 할 수는 없었다.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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