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고독2021.09.26.
아리아드네는 뼈다귀만 남은 사체를 꼼꼼히 살폈다. 그녀는 뼈다귀에서 지아다의 신원을 알아낼 수 있을 만한 물건을 모두 벗겨냈다. 결정적인 것은 없었고, 기껏해야 옷가지와 약간의 장식품 정도였다. 그녀는 그것을 둘둘 말아 삯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귀갓길에 티베리 강에 던져 버렸다. 아리아드네는 주세페를 집시 여인에게 붙여 집시 여인을 바로 항구로 보냈다. 아리아드네가 주세페에게 내린 임무는 집시 여인 감시하기였다. 집시 여인을 배에 태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녀를 태운 배가 출항하기 전까지 옆에 딱 붙어서 다른 곳으로 새는지 여부를 감시하도록 했다. 그녀는 주세페가 사나흘 정도 집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그날 오후에 ‘검은 소금 바다’의 항구로 떠나는 배가 있었다. 주세페는 반나절이 지나기 전에 집시 여인의 출항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산차는 크게 충격을 받은 그녀의 아가씨를 옆에 착 붙어서 보필했다. 삯마차에 올라탄 아리아드네는 산차를 껴안고 중얼거렸다.
“널 저 안으로 데려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산차는 이것이 하녀장 지아다가 없어진 것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짐작했다. 안에서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졌던 게 틀림없었다.
“아가씨, 못 볼 꼴은 아가씨가 보지 마시고 저한테 보이세요. 지아다든 집시 점성술사든 제가 다 처리할게요! 아가씨가 직접 손을 더럽히실 필요 없어요!”
아리아드네는 산차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희미하게 웃어 보였을 뿐이다. 사람은 각자 져야 할 책임이 다른 법이었다. 이 황금률의 심판대이니 신비한 미래시이니 하는 것은 오롯이 아리아드네가 혼자 져야 할 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리아드네는 집사 니콜로를 불렀다.
“니콜로. 하녀장 지아다는 도망을 쳤네. 멀리 떠났으니 더 이상 찾지 말라고 그 가족에게 전해 줘.”
이를 이미 가늠하고 있던 니콜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하녀장 지아다는 그에게 아내의 언니, 즉 처형이었다. 하지만 가족이라고 모두 다 감싸 안을 수는 없었다. 솔직히 이번 사건은 처형이 제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간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단심판관이 데 마레 추기경 관저에 들어와 흑마술을 부린 식솔들을 모두 종교재판에 회부하겠다고 날뛴다면 화형대에 올라갈 것은 루크레치아나 지아다 뿐이 아니라 이 집의 일가친척 전원과 많은 수의 하인들이다. 그 안에는 높은 확률로 집사 니콜로 본인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애초에 그렇게 의리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처형보다는 자기 목숨이 훨씬 더 중요했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일신의 안위 앞에서는 기꺼이 부조리에 눈감을 수 있었다.
“아가씨, 목욕물을 데워 놨어요.”
산차의 말에 아리아드네는 옆을 돌아보았다.
“고마워.”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는 몰라도, 기운 차리세요.”
아리아드네는 산차에게 웃어 보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인간에게는 필연적으로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비밀이 있다. 아리아드네는 이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닫고 있었다. 지난 생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발버둥을 쳤다. 전생에는 체자레가 그 단 한 사람이 되어 줄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매달렸고 그래서 놓지 못했다. 이사벨라도 무시할 수 없었다. 예쁘고 인기 많은 언니에게 인정받는 것은 마치 그 존재 자체를 긍정 받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모두 신기루일 뿐이었다. 체자레와 이사벨라라니, 대상을 제대로 잘못 고르긴 했다. 하지만 대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은 그 존재 자체로 고독하고 외롭다. 아리아드네는 두 번째 생애에 다다라서야, 이렇게 아무에게도 누설할 수 없는 이상한 비밀이 생기고서야 이 사실을 깨닫는 중이었다.
“괜찮아. 고마워.”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저었다. 고독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익숙했다. 인간은 결국에는 혼자였다. 그래도 살아갈 수 있었다. 모든 희로애락을 시시콜콜하게 타인과 나누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든 인간에게는 결국에는 스스로 져야 할 자신의 짐이 있기 마련이었다.
“씻고, 아라벨라에게 가볼게.”
“예.”
산차에게도 솔직할 수 없다는 부분은 괴로웠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그래도 여전히 산차와 일상과, 웃음과, 따듯한 목욕물을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지켜야 할 일상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에게는 어린 아라벨라가 있었다. - 똑똑.
“들어와.”
잠긴 듯한 목소리가 출입을 승낙했다. 아리아드네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라벨라의 방이었다. 아라벨라는 운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아 보였다. 아리아드네는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는 아라벨라에게 다가가서 여동생을 품에 안아 주었다.
“오늘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어.”
“……!”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부터 꺼낸 아리아드네는 아라벨라의 아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잔잔한 목소리로 노래 부르듯이 말을 건넸다.
“어머니는 어머니 행동의 죗값을 받으셨을 뿐이야. 거기서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
“네가 나서지 않았어도 괜찮아.”
하루종일 죄책감에 굳어 있던 아라벨라의 눈에 그제야 눈물이 차올랐다. 아라벨라는 오늘 있었던 일에 관해 생각조차 하기가 싫어서 석상처럼 스스로를 얼려 놓았던 참이었다. 시간이 느리게 갔고 머리가 멍했으며 계속해서 기분이 나빴다. 드디어, 하루의 끝에서 타인의 따듯한 손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사람의 체온이 전해져오자 아라벨라는 눈물을 한두 방울씩 뚝뚝 흘리더니, 이윽고 참지 못하고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아리……! 아리 언니……! 나는……!”
“쉿, 괜찮아. 실컷 울어. 그래도 돼.”
목놓아 우는 아라벨라를 품에 안은 채로 쓰다듬으며 아리아드네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해 걱정하지 않기로 하자. 각자의 책임은 각자가 지자. 어머니는 자기의 죗값을 치르셨을 뿐이야. 어머니를 안타까워할 수는 있지만 그게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그리고 그 뒤로 아리아드네는 한마디를 아라벨라에게 더 하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삼켰다.
‘언니가, 네가 부담해야 할 몫까지 다 대신 져 줄게. 네가 건강하고 튼튼하게 어른이 될 때까지는 언니가 보호해 줄게. 우리는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하자.’
집시 점성술사의 말대로 그녀에게 ‘미래시’가 있다면, 그녀는 이것을 가까운 자들, 죄 없는 자들,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사용할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업보를 지게 되더라도 아리아드네는 그녀가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하는 희생이라면 기꺼이 할 수 있었다. 이번 생은 이들을 지키면 족할 것이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 * * 루크레치아가 사라진 데 마레 가문의 저택은 의외로 큰 불협화음 없이 돌아갔다. 이는 첫째로는 집안 살림의 조타를 쥐게 된 아리아드네가 유능했기 때문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루크레치아가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 상관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녀장 지아다의 빈자리 역시 약간의 시행착오 끝에 산차가 빠르게 메웠다.
“너는 정말로 고속 승진을 하는구나.”
아리아드네가 산차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산차는 랑부예 구휼원을 탈출해 아리아드네의 측근 하녀가 된 지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실질적인 하녀장 대행을 맡게 되었다.
“헤헤, 다 줄을 잘 선 덕이죠! 제가 모시는 아가씨가 이렇게나 빨리 집안의 실세가 되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산차가 주방 메인 창고의 열쇠를 빙글빙글 돌리며 일부러 간신배의 말투를 흉내 내어 자랑스럽게 말했다. 흐뭇하게 그녀를 바라보는 아리아드네에게, 산차는 살짝 주변을 돌아보고는 귓속말했다.
“그런데 아가씨, 우리 정말로 이렇게 루크레치아 마님을 이긴 걸까요……?”
아리아드네는 피식 웃었다.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작았다. 그녀는 금화가 실제로 금고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적의 숨통이 끊기기 전에는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랜 궁정 생활에서 배운 지혜였다.
“루크레치아에게는 이폴리토가 있지 않으냐. 조만간 돌아올 거다.”
눈에 띄게 낙담하는 산차를 아리아드네는 싱긋 웃으며 격려했다. 주방이 아니었더라면 간지럽혔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우리가 얻은 귀중한 시간이야. 단단하게 이길 준비를 해 놓자꾸나. 나는 지는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 내년 이맘때에는 데 마레 추기경 예하를 포함해 그 누구도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거다.”
루크레치아가 없는 무주공산의 상태. 손에 들어온 데 마레 가문 전체의 금력. 내년에 올 역병. 투자를 할 시간이었다. 투자는 단순히 역병 이후에 비싸게 팔릴 물건들을 쟁여 놓는 것이 아니었다. 인적 구성도 다시 해야 했다. 집안의 권한을 모두 받은 아리아드네는 온갖 핑계를 대서 루크레치아의 심복들을 대부분 다 잘라 버렸다. 여자 하인들뿐만이 아니라 남자 하인 중에서도 상당수가 쫓겨났다.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남은 하인들을 모두 소집했다. 그녀는 집안의 하인을 전부 다 일 층의 대강당에 모아서 세워 놓고 그들을 쭉 둘러보았다.
“집안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 당분간 내가 전권을 잡게 되었네.”
충분히 ‘건강 문제’로 에두를 수도 있는 사안이었지만 아리아드네는 대놓고 루크레치아에게 허물이 있음을 언급했다. 루크레치아가 흑마술에 손을 댔다는 이야기는 절대 비밀이었다. 대신 아리아드네는 사람들이 가장 편하게 믿을 만한 스토리를 암시했다.
“최근에 부쩍 집 안팎을 드나든 낯선 젊은 남자를 본 사람은 반드시 나에게 직보하도록 해라.”
안 그래도 사용인들은 루크레치아가 대체 왜 갑자기 쫓겨난 것인지에 대해 설왕설래하던 중이었다. 딱 이 정도 떡밥만 던져 놓으면 집안 사용인들은 루크레치아가 바람을 피우다 걸린 게 아니냐는 추측을 하게 될 것이었다.
“기강을 엄하게 잡을 것이다.”
사용인들이 벌써부터 자기들끼리 소곤대기 시작하자 아리아드네는 짐짓 눈을 부라리며 좌중을 훑었다. 사실, 루크레치아쯤 되는 입지의 추기경의 정부가 집에서 갑자기 쫓겨날 만한 일은 불륜 외에는 없었다. 그 누가 추기경의 정부가 저택 안에서 흑마술을 부렸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러기 위해 수상한 사람을 단속하기 위해 집 내외를 경비할 인력을 뽑겠다.”
이는 자신의 사람을 심기 위함이었다. 저택 외부의 경비를 서는 인력은 이미 있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그녀 전용의 부대였다. 필요한 것은 핑계였다.
“외부 경비 인원이 저택 내부에 들어오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니 내부 인력중에서 인원을 일부 차출해서 새로운 경비 인력을 뽑을 거야.”
아리아드네는 턱짓을 했다. 마부 주세페가 자세를 바로 했다.
“주세페.”
“예, 아가씨!”
“자네가 새 경비 인력 담당을 맡게.”
아직 어린 친구들은 목적이 생기면 열정이 불타오르고는 한다. 주세페는 아리아드네의 ‘성의’를 거절함으로써 도리어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돈만 쥐여주면 모든 것을 다 허용하는 종류의 인간들은 단기적으로 이용하기에는 좋았지만 내 사람으로 삼기에는 부적합했다. 그래서 그녀는 시간을 들여 그를 설득해 자기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충! 성!”
사전에 이미 교감을 나눈 상태였지만 임명 소식을 들은 주세페의 새삼 빛나는 눈과 얼굴에서 나는 광채가 마치 기사 서임이라도 받은 듯했다. 아리아드네는 주세페에게 싱긋 웃어주고는 나머지 남자 하인들을 쓱 훑었다.
“새 경비 인력에게는 70 플로린(약 70만 원)의 월급을 지급할 거다.”
3층 하녀들은 경력이 아무리 오래되어도 20 플로린을 채 받지 못했다. 아가씨의 측근 하녀라고 해 봤자 40 플로린이 고작이었다. 산 카를로 같은 대도시에는 사람이 몹시 쌌다. 남자 하인들도 급여 면에서는 별다를 것이 없었다. 마부나 정원사 같은 자들은 25 플로린에서 30 플로린을 받았다. 월급의 단위가 두카토인 자는 이 저택 전체에서 집사 니콜로 정도가 끝일 것이다. 생전의 하녀장 지아다도 뒷돈이나 소소한 횡령으로 주머니를 채웠지, 월급은 그만 못했다. 그런데 70 플로린이라니, 이는 파격적인 대우였다. 단숨에 하인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퍼졌다.
“지원하고 싶은 자는 주세페에게 이야기를 하게. 지원한다고 다 뽑아주진 않을 거야. 적합한 사람이 없다면 바깥에서 새로 고용해야 하겠지만, 그간 보아온 정이 있으니 자네들에게 먼저 묻는 것이네. 능력 있고 충성심 있는 자를 찾고 있어. 잘 생각들 해 봐.”
대놓고 하는, 나에게 줄을 서라는 얘기였다. 아리아드네는 이번에는 하녀들을 바라보았다. 루크레치아 밑에서 오래도록 꿀을 빨던 자들이 움찔하며 아리아드네의 눈초리를 피했다.
“하녀장 자리는 당분간 공석으로 둘 거야.”
경력이 긴 하녀 중에는 하녀장의 감투를 기대하고 있던 자들이 몇 있었다. 그들이 실망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표정 관리를 하는 것이 보였다.
“당분간은 산차가 일을 볼 거다. 아직 어리니 자네들이 많이 도와주게.”
그 이야기를 하며, 아리아드네는 하녀들 중 몇몇을 유독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언제까지고 비워둘 수는 없겠지. 산차는 내 측근 하녀라 일이 많아. 결국에는 하녀장 자리를 볼 사람이 필요하긴 할 거야. 누가 적합할지 잘 보고 있겠네. 산차가 나에게 전달해주겠지.”
결국 산차가 다음 하녀장을 뽑을 평가관이니 괴롭힐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말고 잘 보이라는 얘기였다.
“예! 아가씨!”
경력이 긴 하녀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경쟁이 격화된 뒤에는 어떻게 될지는 모르나, 일단 지금으로서는 충성을 바칠 마음이 가득한 상태로 보였다. 이폴리토가 루크레치아를 데리고 돌아올 때 즈음에는 데 마레 추기경의 저택은 아리아드네의 사람들로 득실대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아리아드네의 손에 일단 들어간 장부를 다시 뺏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어디 한번 붙어 보자고. 이번 생엔 이 집안은 내 거야, 이폴리토 오빠.’
* * * - 후우우욱. 산 카를로에서 자신에 대한 대비가 이렇게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이폴리토 데 마레는 피우던 담배를 꽉 채운 곰방대를 가득 빨아들이고는 입에서 뺐다.
큰 키에, 어머니를 꼭 닮은 높은 광대뼈와 냉막한 인상을 가진 청년이었다. 짧게 친 머리카락은 부모 중 누구도 닮지 않은 거친 잿빛이었고 눈은 어머니와, 여동생과 똑같은 자안(紫眼)이었다.
“이폴리토! 무슨 일이야?”
활기찬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이폴리토는 소파에 누워 있다가 목소리의 주인 방향으로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