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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데 마레 가문의 장남 (85/733)

<제86화> 데 마레 가문의 장남2021.09.29.

이폴리토는 친구를 올려다보더니, 곰방대의 연기를 한 번 더 내뿜었다. 그는 요새 담배에 푹 빠져 있었다. 무어 제국에서 수입되는 이 약초는 요새 파두아 대학에서 공부하는 부유한 유학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처음에는 정신이 바짝 들며 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유행했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주객전도가 되어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손이 떨려서 공부에 집중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16550992387925.jpg“야, 나도 한 모금만 주라.”

이폴리토는 한마디에 1 두카토(약 100만 원)은 족히 하는 담배를 가득 채운 곰방대를 주저 없이 옆에 있는 친구에게 내밀었다. 공짜 연초를 피우게 된 친구는 반색하며 곰방대를 빨았다.

16550992387925.jpg“너 왜 죽상이야. 무슨 일 있어?”

맨입으로 연초를 얻어 태울 수는 없는 법이다. 친구의 립서비스를 이폴리토는 찰떡같이 받아 한숨을 쉬었다.

16550992387935.jpg“나 집에 큰일이 있어서 졸업을 못 하고 산 카를로로 돌아가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16550992387925.jpg“응? 너희 집 망했대?”

친구는 화들짝 놀라 물었다. 내 공짜 연초 끊기나? 아니, 망한 놈치고는 씀씀이가 너무 큰데. 이폴리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16550992387935.jpg“우리 어머니께서 큰일 나셨대. 집에서 쫓겨나셨다나 봐. 내가 산 카를로로 돌아가 봐야겠어.”

친구는 몹시 합리적인 지적을 했다.

16550992387925.jpg“니가 돌아가는 거랑 어머니가 쫓겨나신 거랑 무슨 상관이야? 졸업 안 하면 어머니가 돌아오신대?”

그들에게는 지금 당면 과제가 있었다. 기말고사가 코앞이었다.

16550992387925.jpg“너 지금 막 학기 기말고사야. 딱 한 학기 남았어.”

이폴리토는 친구의 맞는 말에 화를 벌컥 냈다.

16550992387935.jpg“이 새끼가, 날 완전 불효자식으로 만드네. 우리 어머니가 집에서 쫓겨나셨다는데 내가 어떻게 공부가 손에 잡히냐?”

그는 친구를 노려보았다.

16550992387935.jpg“지금 그깟 대학교 졸업장이 문제가 아니야.”

친구는 갑자기 효자행세를 하는 이폴리토를 보자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놈의 평소 행실은 효자와는 중앙대륙 최북단인 슈테른하임성에서 최남단인 타란토 항구까지 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그렇지만 친구는 받아먹은 것이 있는 만큼 치밀어올라오는 반박을 꾹 눌렀다. 이폴리토는 학점이 모자랐다. 열리는 특별수업이란 특별수업은 금화를 아끼지 않고 모두 등록해서 들었지만 매번 출석 일수를 못 채우는 바람에 졸업을 할 수 있을지 여부가 불투명했다.

16550992387935.jpg“집에 돌아가 봐야겠어. 어머니 때문에 대학교 졸업장을 못 따는 건 아쉽지만 나중에 기회가 또 있겠지.”

16550992387925.jpg“그래. 참 효자네.”

친구의 대꾸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이폴리토는 자신이 효자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16550992387935.jpg“아버지도 참 너무하시지, 아니, 아무리 어머니가 잘못하셨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어머니를 농장으로 내보내? 내가 집에 가서 이야기를 해 봐야지 안 되겠어.”

16550992387925.jpg“너 진짜 갈 거냐? 기말시험을 안 치더라도 그다음 주까지 리포트 제출하면 너 졸업할 수 있을지도 몰라.”

16550992387935.jpg“너 진짜 그러지 마라. 사람이 돼서 어머니 버리는 거 아니다.”

이폴리토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교수한테 매달려서 시험을 리포트로 대체해 달라느니 아양을 떨 생각을 하니 지긋지긋했다. 이미 교수한테는 면을 너무 많이 구겼다. 그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친구는 이 새끼, 진심인가, 라는 표정으로 이폴리토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막상 이폴리토 본인은 매우 진지했다.

16550992387935.jpg“간다, 산 카를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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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옛말에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고 권세는 십 년을 가지 못한다더니(花無十日紅 權不十年), 빨강 머리 말레타는 그 말을 실감하고 있는 차였다. 분명히 아리아드네 아가씨는 썩은 동아줄이었고 그녀가 잡은 이사벨라 아가씨야말로 탄탄대로 중의 탄탄대로였다. 말레타는 이사벨라 아가씨가 고관대작, 아니, 왕자님의 배우자가 되어 그녀를 친정 시녀로 왕궁에 데려가 주실 것이라 믿어 마지않았다. 하녀를 왕궁 시녀 삼으려면 단승 준남작 작위라도 하나 내리셔야 할 것이었다. 랑부예 구휼원 출신의 하녀 말레타가 준남작이 되다니!

16550992403747.jpg‘어머, 이런 영광, 꿈에서도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가증을 떨며 작위 서임식에서 무릎을 꿇고 임금님이 그녀의 어깨에 검집에 든 검을 살짝 대는 것을 받아들이는 그런 상상. 말레타가 3층 하녀들의 침실에서 밀짚 매트리스 위에서 잠들기 전 매일 하는 공상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제 정말로 공상으로 끝나게 생겼다.

16550992387925.jpg“말레타! 이사벨라 아가씨는 어차피 온종일 갇혀 있으니 세 끼 식사 넣는 것 말고 네가 하는 게 뭐가 있어! 팽팽 놀지 말고 이리 와서 바닥이라도 닦아! 밥값 해야지!”

데레사 아주머니가 큰 소리로 윽박지르며 말레타에게 걸레를 던져주었다. 데레사 아주머니는 사라진 하녀장 지아다의 빈자리를 노리는 3층 허드렛일 하녀들의 관리인이자 청소 책임자였다. - 홱! 구린내 나는 걸레가 허공을 날아왔다. 젖은 걸레는 말레타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어깨에 척 걸렸다. 기분이 급격히 더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말레타는 데레사 아주머니를 노려보았다. 데레사 아주머니로부터 5 피에디(약 1.5 미터) 뒤에는 산차가 팔짱을 끼고 의기양양—말레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하게 서 있었다.

16550992403747.jpg‘하녀장 직위에 눈이 돌아버린 데레사 아주머니가 산차 계집애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말레타는 이를 갈면서 날아온 걸레 쪼가리를 집어 들었다.

16550992387925.jpg“반짝반짝하게 닦아! 다른 애들 다 바빠! 3층에 하녀들 방도 네가 치워!”

이건 명백하게 부당한 대우였다.

16550992403747.jpg‘이걸 뒤집어엎을 수도 없고!’

3층 하녀들의 방을 치우는 건 새로 들어온 풋내기한테나 시키는 일이었다. 해 봤자 티도 안 나고 물건이 없어지면 욕이나 먹었다. 말레타는 4년 차 베테랑 이자 아가씨의 측근 하녀였다. 이런 허드렛일을 할 짬이 아니다.

16550992387925.jpg“어이구, 눈을 부라려? 명령 불복종으로 두들겨 맞고 쫓겨나고 싶어?”

데레사 아주머니가 을렀다. 데레사 아주머니가 말레타가 명령 불복종을 한다고 이르러 갈 상대는 아리아드네 아가씨다. 거기에 끌려가면 어떻게 될지 뻔했다. 말레타는 끓어오르는 치욕감을 누르며 걸레를 받아 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을 박박 닦기 시작했다.

16550992403747.jpg‘산차 계집애는 지금 내가 이렇게 굴욕당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겠지?’

산차는 데레사 아주머니를 관리·감독하는데 자기는 그 와중에 바닥에 엎드려 마룻바닥을 닦는다니. 내가 언니고 또 고참인데! 억울하고 분했다.

16550992403747.jpg‘언젠가 되갚아 주고 말겠어!’

  * * * 말레타의 서러움을 즐기고 있을 거라는 오해를 산 산차는 막상 바닥을 닦는 말레타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산차는 남의 불행에 키득대는 성미도 못 되었을뿐더러, 그거보다 훨씬 거슬리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6550992387925.jpg“⋯⋯어, 산차, 우연히 만났네.”

16550992418882.jpg‘우연은 무슨 우연이야! 세 시간은 서서 기다린 몰골을 하고!’

산차는 아리아드네 아가씨가 새로 만든 경비대의 장이 된 마부 주세페를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눈빛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주세페는 키가 훌쩍 컸고, 산차와 비슷하게 얼굴에 약간의 주근깨가 있었으며 밀짚 같은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다들 주세페가 일을 잘한다, 잘한다 하는데, 지금처럼 한창 바쁠 때 이렇게 시간을 죽이는 모양을 보면 영 미덥지 못했다.

16550992418882.jpg“할 일이 없나 보죠? 아가씨께 말씀드려서 경비대 인원수는 줄이고 일거리는 늘리라고 할까요?”

뾰족한 산차의 말에 주세페는 화들짝 놀랐다.

16550992387925.jpg“그, 그게 아니고.”

그는 주머니 안에서 보자기로 싼 물건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16550992387925.jpg“자, 이거.”

산차는 물건을 건네받아 보자기를 열어보았다. 설탕으로 겉을 씌운 쿠키였다. 설탕은 비싼 물건이었고, 웬만한 귀족 집안에서도 이런 디저트는 손님이나 오셔야 내놓는 물건이었다. 쿠키는 주세페의 손안에 한참을 들어가 있었는지 겉이 녹아서 조금 찐득했다.

16550992387925.jpg“어쩌다가 생겼는데 나 혼자 먹기 그래서 말이야. 마침 우연히 마주쳤는데 잘 됐다. 너 먹어.”

어쩌다가 생기긴 무슨. 보자기 끝에는 ‘라 몽탕 제과점’의 상호가 찍혀 있었다. 시내에 새로 생긴 과자점이었다. 줄도 길고 가격도 비싸고 인기 상품은 구할 수도 없었다. 이런 물건은 주세페 같은 친구에게 선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세페 같은 친구가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구한 다음 좋아하는 여자한테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산차는 열네 살이고, 제아무리 영악하다고는 하지만 제 주인처럼 회귀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구애와 사랑에 대해서는 신참내기였다. 그리고 주는 먹을거리를 사양하는 법이 없는 여자였다.

16550992418882.jpg“흠. 뭐, 좋아요. 잘 먹을게요.”

주세페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산차는 저놈이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라며 고개를 미심쩍게 갸웃거리며 쿠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 * * 집이 불온하게 어수선했다. 아리아드네는 집사 니콜로에게 턱짓했다.

16550992441792.jpg“무슨 일이지?”

16550992387925.jpg“아가씨……. 이폴리토 도련님이 돌아오신답니다.”

집사 니콜로는 양피지 편지를 아리아드네에게 건넸다. 데 마레 추기경이 수신인으로, 봉투만 보아도 악필로 휘갈겨 쓴 태가 역력했다. 아리아드네는 기계적으로 미소지었다. 올 것이 오는구나.

16550992441792.jpg“언제쯤 돌아온다고 하시더냐?”

16550992387925.jpg“다음 달 초순, 그러니까 신년제 언저리에는 도착하실 거라고 합니다.”

16550992441792.jpg“알겠다. 적당한 방을 비워 준비해 놓고 오라버니를 맞이할 채비를 해야겠구나.”

그녀는 편지봉투를 집사 니콜로에게 돌려주고 2층의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원래는 이폴리토가 쓰던, 2층 서쪽 날개에서 가장 좋은 방이었다. 산차가 아리아드네를 따라 들어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16550992418882.jpg“아가씨, 역시……. 이폴리토 도련님이 돌아오시면 ‘미스 로시’도 돌아오고 이사벨라 아가씨도 풀려나시겠지요?”

16550992441792.jpg“음. 역시 그렇겠지.”

16550992418882.jpg“우리 이러고 있어도 되나요?”

산차는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산차를 보며 여유작작하게 미소지었다.

16550992441792.jpg“우리 쓸모없는 걱정은 말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자꾸나. 그래, 넌 말레타가 얼마나 싫니?”

산차는 갑자기 말레타의 이야기가 나오자 놀랬다.

16550992418882.jpg“말레타는 왜요, 갑자기?”

16550992441792.jpg“말레타에게 기필코 복수하고 말겠다는 대답도 좋고, 아니면 하나 남은 혈육이고 친언니이니 용서해 주고 싶다는 대답도 좋고.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말레타는 일전에 아리아드네를 루크레치아에게 팔아넘긴 전적이 있었다. 아리아드네에게 빚을 하나 지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말레타는 산차를 랑부예 구휼원에 버려두고 굶어 죽도록 방치했었다. 어떻게 셈해 보아도 아리아드네의 말레타에 대한 원한은 산차가 가진 원한에 비해 작았다. 그래서 아리아드네는 복수를 할지 말지에 대한 결정을 산차에게 양보할 생각이었다.

16550992418882.jpg“으……!”

산차의 연녹색 눈에서 불꽃이 튀겼다.

16550992418882.jpg“말레타는 자기가 한 짓에 대한 대가를 돌려받아야 해요!”

16550992441792.jpg“그래?”

16550992418882.jpg“걔 때문에 엄마가……. 엄마가 돌아가셨다고요. 그리고 말레타는 과거로 돌아가면 똑같은 짓을 또 저지를 인간이에요. 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산차의 얼굴에선 결의가 흘렀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산차가 저렇게 결정했으니, 그대로 이루어 줄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설렁줄을 흔들어 하녀를 불렀다. 하녀에게 집사 니콜로를 불러오라고 이른 그녀는 집사 니콜로가 들어오자 일련의 지시를 내렸다.

16550992441792.jpg“이폴리토 오라버니의 방은 루크레치아 마님이 원래 쓰시던 방 옆 방으로 하자. 그리고 오라버니를 전담으로 모실 하인이 필요하겠지?”

16550992387925.jpg“그렇지요.”

16550992441792.jpg“이사벨라 언니의 측근 하녀였던 말레타가 요새 일이 없는 거로 알고 있네. 말레타를 이폴리토 오라버니의 전담 하녀로 지정하겠어.”

집사 니콜로와 산차 모두 놀라서 아리아드네를 쳐다보았다.

16550992441792.jpg“왜, 이의가 있는가?”

16550992387925.jpg“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집사 니콜로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전과 또 다른 태도였다. 안주인을 나타내는 황금 인장의 위세가 대단했다.

16550992387925.jpg“분부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좋은 오후 되십시오.”

집사 니콜로가 떠난 후 산차는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아리아드네에게 질문했다.

16550992418882.jpg“아가씨! 그건 복수가 아니라 도리어 포상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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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차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혀가 엉켰다.

16550992418882.jpg“지, 지금 3층 하녀들 사이에서 실컷 고생하고 있는데요! 실질적으로 승진이잖아요! 게다가 이폴리토 도련님을 모시는 자리는…….”

말레타가 꼭 원할만한 자리였다. 전생에서도 말레타는 유부남 궁정 관리를 꾀어서 첩으로 들어앉아 팔자를 고쳤었다. 아리아드네는 빙긋이 웃었다.

16550992441792.jpg“말레타가 좋아할 만한 자리라서 주는 거란다.”

16550992418882.jpg“왜요?!”

16550992441792.jpg“말레타는 악당이지?”

16550992418882.jpg“당연하지요!”

16550992441792.jpg“이폴리토는 말레타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어마어마한 악당이란다. 큰 악당 옆에 있으면 작은 악당은 잡아먹히기 마련이지.”

아리아드네는 산차를 위해 찬찬히 설명을 해주었다.

16550992441792.jpg“말레타의 입장에서, 이폴리토는 독이 든 성배야. 손을 대면 무조건 죽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

산차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했고, 아리아드네는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16550992441792.jpg“물론 강단 있는 사람이라면 이폴리토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겠지만……. 우리 친애하는 말레타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 * * 이폴리토가 데 마레 저택으로 돌아온 것은 1122년의 마지막 날, 신년제 준비로 집안이 한창 부산할 때였다. 새해 첫날에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집안 식구들 전원이 대성황당에서 신년 기도를 올리고, 돌아오자마자 집에서 거창한 점심을 먹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도 하인들은 잠들지 못하고 축제 준비를 했다.

16550992387935.jpg“어이, 거기!”

에트루스칸 왕국의 신년제에는 미신이 하나 있었다. 새해에 처음으로 집 안에 발을 디딘 사람이 누군지에 따라 그 집안의 한해 운이 좌우된다는 믿음이었다. 일종의 마수걸이 징크스였다. 기운찬 젊은 남자가 들어오면 한 해의 운이 좋고, 나이 든 사람이나 여자, 아니면 아예 어린아이가 들어오면 한 해의 운이 나쁘다. 들어온 사람이 짙은 흑발이거나 밝은 금발이면 운이 좋고, 빨간 머리거나 물 빠진 갈색이라면 운이 나쁘다. 이폴리토를 처음 발견한 하인은 그래서 올해 데 마레 가문의 운이 좋을지 나쁠지에 대해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잠시 멀거니 서 있었다. 이폴리토는 분명히 젊은 남자였지만, 기운차다기보다는 한 달 굶은 늑대 같은 음험함이 있었고 물 빠진 잿빛 머리에 노르스름한 피부가 합쳐져 생기라고는 없어 보였다. 이건 젊은 남자니 한해의 집안 운세가 좋다고 봐야 하는가, 아니면 말라비틀어진 회색 비스킷 같은 위인이니 운이 나쁘다고 봐야 하는가?

16550992387935.jpg“느려 빠진 쓰레기 같은 놈!”

하인이 빠릿빠릿하게 대답을 하지 못하자 이폴리토는 크게 화를 내며 들고 있던 가방을 현관에 패대기쳤다. 현관문에 달고 있던 각종 장식이 가방에 부딪혀서 우그러지고 떨어졌다. 아. 이건 운수가 나쁜 쪽이다. 운수가 몹시 나쁠 것이 틀림없다. 하인은 도련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집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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