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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뒤늦게 생각난 효심 (87/733)

<제88화> 뒤늦게 생각난 효심2021.10.06.

이폴리토는 상대방의 목소리에 비웃는 기색이 끼어 있다고 생각했다. 울컥, 분노가 올라왔다. 하지만 이폴리토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성질머리를 꾹 눌러 참았다.

16550992678127.jpg‘참자, 이폴리토. 하찮은 어린 여자애랑 싸워서 무슨 이득을 보겠어.’

모처럼 한번 참았으니 일이 잘돼야 했다. 이폴리토는 본인이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리아드네에게 종용했다.

16550992678127.jpg“어머니께서 15 두카토 외에 별도로 23 두카토(약 2300만 원)를 보내주시던 게 있었잖느냐.”

16550992678136.jpg“아, 그것 말입니까.”

아리아드네는 오래된 장부를 펼쳐 한 장의 기재를 찾은 후 붉은 잉크로 밑줄을 쭉 그었다.

16550992678136.jpg“어머니께서 작성해두신 장부로군요. 15 두카토 – 이폴리토의 용돈. 23 두카토 – 이폴리토의 유학 비용.”

그녀는 이폴리토가 루크레치아의 손글씨를 읽을 정도의 시간을 기다려주고는 장부를 덮었다. 탁, 소리가 유독 크게 났다.

16550992678136.jpg“유학이 끝났으니 유학 비용은 더는 지급하지 않습니다. 이제 월세도 나가지 않고, 집에서 드시니 식비도 별도로 안 나가니까요. 그걸 제외하면 오라버님께 배정된 예산은 월 15 두카토예요.”

아리아드네는 자기가 이폴리토에게 장남 대접을 해주었다고 생각했다. 이 장부는 원칙적으로 이폴리토가 들여다볼 수 없는 것이었다. 미래에 이 집안을 물려받을 장남이니까 안주인의 살림 장부를 특별히 들여다보게 해준 것이다. 하지만 이폴리토는 자기가 장남으로서 당연히 검사할 권리가 있는 장부의 열람을 아리아드네가 부당하게 막는다고 느꼈다. 그러나 황금 앞에 장사 없었다. 그는 오늘 돈을 타러 온 것이었으므로, 심호흡을 한 번 더 하고 한 번 더 참았다.

16550992678127.jpg“이거 봐, 그 안을 자세히 보면 어머니께서 나한테 가욋돈으로 지출하신 것들이 있을 거라고. 생일 축하 용돈이라던가.”

16550992678136.jpg“오라버님의 생신이 이번 달이었나요?”

지금은 1월이었고, 이폴리토의 생일은 여름이었다. 이폴리토는 얼굴을 붉혔다.

16550992678127.jpg“아 거, 대충 좀 살자!”

16550992678136.jpg“지출 품목이 없는데 지출 내역이 증가하려면 이유라도 있어야죠.”

새로 나타난 사생아 여동생과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단호하게 안내했다.

16550992678136.jpg“평소에 쓰시는 돈보다 더 필요한 사정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합당하다면 당연히 지급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아리아드네는 잠시 말을 끊었다.

16550992678136.jpg“용돈 인상이 필요한 근거를 가져오세요. 수도 전체에 월 38 두카토(약 3800만 원)을 순전히 용돈으로만 쓰는 사람은 왕가를 포함해도 거의 없을 겁니다.”

이폴리토는 분노가 폭발했다.

16550992678127.jpg“지금 나더러 푼돈을 타려면 너한테 허락을 맡으라는 거야?!”

16550992678136.jpg“23 두카토(약 2300만 원)가 푼돈인가요?”

아리아드네는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그녀의 책상을 부술 듯한 자세로 딱 붙어 서 있는 이폴리토를 올려다보았다.

16550992678136.jpg“용건이 끝났으면 나가 주시죠.”

아리아드네는 의자를 빙글 돌려서 서재 밖의 창문을 내다보았다.

16550992678136.jpg“그리고 다음부터는 들어오시기 전에 노크부터 해주세요.”

축객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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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0992678136.jpg‘어휴, 벌써부터 지긋지긋해.’

아리아드네는 자신이 이폴리토의 사정을 많이 봐줬다고 생각했다. 그가 돈이 필요한 사유는 뻔했다. 말레타에게 사치품을 사주기 위함이었다.

16550992678136.jpg‘인심도 작작 쓰셨어야지.’

못난이 진주 귀걸이라던가, 비단 한 필 같은 거로 시작하면 용돈 안에서 충분히 분수에 맞게 하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처음부터 남양 진주 목걸이나 밍크 모피 숄과 같이 루크레치아조차도 손을 떨며 살 만한 물건들을 사재꼈으니 이폴리토의 조그만 주머니가 버티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아버지 돈이나 타서 쓰는 새끼가 하녀 나부랭이에게 빠져서 사치나 일삼는 바보 같은 상황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구명을 도외시하고 산 카를로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모양새가 천하의 불효자라며 지적 역시 하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심지어 친절하기 그지없게, 23 두카토가 삭감된 사유를 이폴리토가 원래 들여다볼 권한이 없는 안주인의 장부까지 열람시켜주면서까지 설명해 주었다. 아리아드네는 정말로 이폴리토에게 큰 호의를 베풀었다. 최소한 아리아드네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반면 이폴리토는 푸대접을 받았다는 생각에 끓어오르는 분을 이길 수가 없었다.

16550992678127.jpg‘결국엔 다 내 것이 될 돈을 대신 관리하는 주제에……. 건방진 계집애가 감히 어딜!’

그는 어두침침한 방에 홀로 앉아 주먹을 꾹 쥐었다. 말레타도 내보내 놓은 차였다. 아리아드네에게 괄시당한 자신의 몰골과 허전한 주머니를 말레타에게는 차마 보여줄 수가 없었다. 혼자 구시렁거리던 이폴리토에게 아까 아리아드네의 손에서 빛나던 안주인의 황금 인장 반지가 뒤늦게 생각났다.

16550992678127.jpg‘그래, 그것만 어머니의 손에 있었어도……!’

그의 어머니는 언제나 아들에게 헌신적이었다. 이폴리토가 필요하다는 것은 황금이건 시간이건 사람이건 아낀 적이 없었다. 저 사생아는 어머니의 정당한 자리를 잠탈해 앉아 있는 악당이었다. 그는 갑자기 산 카를로에 돌아와서도 어머니를 들여다보지 않았던 자신에 대한 혐오가 밀려 들어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똑똑.  

16550992708177.jpg“도련님?”

눈치 없는 말레타가 이폴리토의 방문을 열고 고개를 안으로 빼꼼 디밀었다. 귀여워 보이려고 노력한 깜찍한 표정이었다.

16550992708177.jpg“도오련니임. 저한테 사주시기로 한 흰담비 목도리는 도착했나요? 날씨가 추워지니까 목덜미가 너어무 차가워요.”

말레타는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이폴리토에게 내보였다. 흰 목덜미에는 닭살이 오소소 돋아 있었다. 원래 이러면 이폴리토는 ‘달덩이 같은 것이 귀엽기도 하구나’라며 말레타를 번쩍 안아 들고 내실로 향하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 이폴리토는 기분이 몹시 안 좋은 듯했다.

16550992708177.jpg“도련님?”

16550992678127.jpg“……나가.”

16550992708177.jpg“네?”

16550992678127.jpg“내 눈앞에서 사라져. 이제 너 같은 것까지 내 말이 우스워?”

이폴리토는 냉정하기 짝이 없는 보라색 눈으로 말레타를 노려보았다. 도련님의 저런 모습을 처음 보고 깜짝 놀란 말레타는 방문을 바로 닫고 물러서서 나갔다. 이폴리토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어머니를 잠시 잊은 건 다 저 요물이 그를 유혹했기 때문이다. 하녀가 잘못한 거였다. 자신은 분내에 유혹당한 희생자에 불과했다.

16550992678127.jpg‘어머니……!’

이미 거스름이 지고 있을 시간이라 지금 베르가모 영지로 말을 타고 떠나기엔 너무 늦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어머니를 뵈러 가기로 결심했다. 귀가한 지 장장 18일 만이었다. * * * 요사이 아라벨라는 살판이 났다. 혼내는 엄마도 없었고 아버지과 큰오빠는 아라벨라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대신 집안의 전권을 쥐게 된 작은 언니는 아라벨라에게 항상 너그러웠다. 게다가 아리아드네는 늘 바빴다. 그녀는 하루 종일 집 안을 돌아다니거나 바깥에서 외부 업체를 만나며 업무를 보았다. 덕분에 작은 언니의 방은 항상 비어 있었다. 이사벨라의 방이 잠겨 더 이상 이사벨라의 물건들을 가지고 놀 수 없게 된 대신에 아라벨라는 아리아드네의 물건들을 뒤지며 놀았다.

16550992708207.jpg“진짜 예쁘다!”

금실로 자수가 놓인 자주색 비단을 손에 들고 아라벨라는 경탄의 비명을 질렀다. 이것은 언젠가 아름다운 드레스로 변신할 것이 틀림없었다. 아라벨라는 아리아드네의 옷방 구석의 잘 정리된 궤짝을 하나하나 뒤지는 중이었다.

16550992708207.jpg“반짝이는 것 좀 봐!”

은사로 직조한 하늘하늘한 레이스 역시 아라벨라의 감탄을 자아냈다. 처음 볼 정도로 훌륭한 퀄리티의 상품(上品)이었다. 그 옆에는 보낸 사람의 편지가 같이 들어 있었다.

16550992708207.jpg‘이렇게 좋은 물건을 누가 보냈지?’

아라벨라는 두근대는 마음을 누르고 이미 밀봉이 뜯긴 편지봉투 안에서 내용물을 꺼냈다. 「나의 데뷔탕트 아가씨에게, 날씨가 추워지는 와중에 이런 다 비치는 레이스라니 계절감에 안 맞기는 합니다. 하지만 물건은 두면 다 쓸데가 있는 법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오. 타란토로 옮겨온 궁정(Court)이 산 카를로로 돌아갈 때 즈음에 콜레지오니에 가봉을 맡기면 멋들어진 여름 드레스가 나오지 않겠소? 그대의 아름다운 자태를 기대합니다. - 체자레 데 코모 백작.」  

16550992708207.jpg“미쳤다……!”

아라벨라는 입을 막고 흥분에 찬 돌고래 비명을 간신히 참았다. 우리 작은 언니는 사교계에 나가서 이런 남자들의 구애를 받는단 말이지! 체자레 데 코모 백작이라면 아라벨라도 들은 바가 있었다. 산 카를로 최고의 미남이라고 이름이 자자한 바람둥이 백작님이었다. ‘바람둥이면 어때, 잘생겼으면 장땡이지’, 라고 중얼거리며 아라벨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 옆에 있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바스슥, 소리가 나며 진녹색 공단 리본 하나가 떨어졌다. 작은 보석이 공단에 수놓아져 반짝이는 모양새가 몹시 값진 물건 같아 보였다. 하지만 언니의 옷장에 들어있기엔 이상했다. 애초에 여성용으로 만들어진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앞의 은사로 만든 레이스처럼 새것의 빳빳한 화려함이 없었고 은은하게 수수하며 약간의 사용감이 있었다.

16550992708207.jpg“흠, 이건 뭐지?”

아라벨라는 진녹색 리본이 나온 봉투 안을 들여다보았다. 편지라도 있을지 기대해 본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굴러나온 것은 종이가 아니라 은색 철제 고정쇠였다. 아라벨라는 철제 고정쇠를 손에 올려놓고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보통 이 정도 사이즈의 철이나 은보다 묘하게 무거운 듯한 느낌이었다.

16550992708207.jpg‘나 이거 어디서 봤는데…….’

고심하던 아라벨라의 등 뒤에 그림자가 하나 드리워졌다.

16550992708207.jpg“힉!”

아라벨라는 이사벨라와 엄마에게 혼나던 시절의 감이 아직도 몸에 배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라벨라는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는 그제야 안도했다.

16550992708207.jpg“아리잖아.”

세련된 실내복을 차려입은 아리아드네가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은 채 옷장 앞에 서 있었다. 아라벨라는 속없이 웃으며 아리아드네에게 치대려고 했다.

16550992708207.jpg“괜히 놀랐잖…….”

16550992678136.jpg“아라벨라. 그것들 가지고 놀면 안 돼.”

거의 처음으로 들어보는 작은 언니의 무서운 표정과 단호한 목소리였다.

16550992708207.jpg“응?”

아라벨라는 아리아드네의 눈치를 보면서 바닥에 널브러진 은사 레이스 뭉치를 주워서 앞으로 내밀었다.

16550992708207.jpg“역시 내가 가지고 놀기엔 좀 비싼 물건이지…….”

언니가 남자한테서 받은 편지를 훔쳐본 것이 들키면 경을 칠지도 모른다. 아라벨라는 제발 편지가 알아서 날아서 편지봉투 속으로 들어가 줬으면 좋겠다고 천신님께 빌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가 주목한 물건은 은사 레이스와 체자레의 편지가 아니었다.

16550992678136.jpg“이리 내놔.”

아리아드네가 손을 내민 물건은 은과 납으로 만든 철제 죔쇠였다.

16550992678136.jpg“중요한 거야. 가지고 놀다가 잃어버리면 안 돼.”

16550992708207.jpg“이게……?”

은사 레이스와 보석이 아로새겨진 공단 리본 사이에서 이 철제 죔쇠는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아라벨라는 머뭇거리며 철제 죔쇠를 언니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아라벨라가 손아귀에 슬쩍 힘을 주자 죔쇠는 단단해 보이던 겉모습과 달리 쉽게 구부러졌다.

16550992678136.jpg“그거 구부리면 안 돼!”

  - 히끅! 아라벨라는 깜짝 놀라 딸꾹질에 걸렸다. 아라벨라의 딸꾹질을 본 아리아드네는 미안한 기색을 띠었다. 본인이 너무 엄했나 싶었던지 그녀는 아라벨라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16550992678136.jpg“너 얼른 물 마시러 내려가야겠다. 이건 언니한테 중요한 거야. 나중에 크게 쓰일 거야.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리면 절대로 안 돼서 그래. 다른 물건은 얼마든지 가지고 놀렴.”

16550992708207.jpg“이게- 히끕! 도대체 왜 중요해?”

아라벨라가 가지고 놀던 철제 죔쇠는 아리아드네의 데뷔탕트 무도회 때 이사벨라가 아리아드네의 옷 앞섶을 뜯어놓으려고 술수를 부렸던 증거였다. 이사벨라는 지금은 갇혀 있지만 이폴리토가 돌아와서 루크레치아가 복권된다면 당연한 수순으로 함께 근신에서 풀려날 것이다. 그 이후에 이사벨라를 결정적으로 실각시킬 한 방이 필요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식구들끼리 서로의 ‘상품 가치’를 훼손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협동을 높은 가치로 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재산을 그의 수하가 마음대로 망가뜨리는 짓이기 때문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의 머릿속에 그것은 배신이자 월권이었다. 권위의 문제다. 권위의 문제 앞에서 가부장은 타협하지 않는다. 지금 이사벨라는 자기 손으로 자기 명성을 망가뜨렸으며 위험에 처한 동생을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금되어 있었다.

16550992678136.jpg‘그런 데 마레 추기경이, 이사벨라가 멀쩡한 자기 여동생을 해코지하려고 했다는 증거를 손에 쥐면 어떻게 될까?’

데뷔탕트 무도회에서의 의상 훼손 사건이 이사벨라의 짓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만 있으면 데 마레 추기경은 이사벨라에게 감금보다 더한 징계도 내리고도 남았다. 설사 그러지 않더라도, 좋은 혼처가 나타났을 때 그 후보로 컨트롤이 불가능한 이사벨라를 내밀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16550992678136.jpg‘조만간 데 마레 가문에 아주 좋은 혼처가 나타난다.’

다름 아닌 알폰소 왕자의 배우자 자리다. 그 전에 이사벨라의 악행을 아버지에게 터트려야 했다. 이게 아리아드네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이야기를 어린 아라벨라에게 어디까지 해줘야 할지 가늠이 잘되지 않았다. 아라벨라는 이미 어머니와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좋은 어미는 아니었지만 아이에겐 그런 것은 크게 상관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아직 어린아이에게 굳이 그녀의 친언니 험담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리아드네는 진실을 적당히 뭉개기로 했다.

16550992678136.jpg“신기한 물건이라서. 나중에 직접 만들어 보고 싶었어.”

16550992708207.jpg“아리, 이런 철제 죔쇠 좋아해?”

16550992678136.jpg“그렇고말고.”

아라벨라는 눈을 반짝였다. 저 아리아드네 언니가 이렇게까지 집착할 정도의 물건이라면 아주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아라벨라는 나중에 이것과 똑같은 물건을 발견하면 반드시 아리아드네 언니에게 가져다주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물을 마시러 아리아드네의 드레스룸을 나가려던 아라벨라는 언니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용건이 문득 생각났다.

16550992708207.jpg“맞다, 아리.”

16550992678136.jpg“응?”

아리아드네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녹색 리본을 소중하게 집어 들다가 아라벨라의 부름에 앞을 바라보았다.

16550992708207.jpg“있잖아, 내 음악대학 원서 결과 아직 안 왔지?”

아리아드네가 음악대학에 원서를 쓰자고 제의했을 때, 아라벨라는 우선 센 척을 했다. ‘뭐 굳이 그런 것을 넣느냐’, ‘나는 어리니까 떨어질 것이 뻔하다’ 같은 이야기를 하며 너스레를 떤 것이다.

16550992708207.jpg“그거……. 혹시 언제쯤 올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감감무소식인 파두아의 음악대학 때문에 속이 몹시 탄 모양이었다.

16550992678136.jpg“아직 원서를 검토 중일 거야.”

아리아드네는 살포시 웃었다.

16550992678136.jpg“이번 달 말까지도 답신이 오지 않으면 내가 한번 수녀님을 통해서 알아볼게.”

아라벨라의 얼굴에 대번에 화색이 돌았다. 조그만 얼굴에 빛이 나는 모양새가 너무 귀여워서 아리아드네는 그만 아라벨라의 앞이마에 뽀뽀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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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벨라는 내가 아기인 줄 아냐고 노발대발했지만 아리아드네는 아기도 아닌데 언니의 옷장을 뒤지며 노는 동생은 혼이 나야 한다며, 아기라면 봐줄 테니 하나를 택일하라고 을렀다. 둘 중 아무것도 고를 수 없었던 아라벨라는 급기야 울먹이기 직전까지 몰렸다. 신나게 동생을 놀리던 아리아드네는 허겁지겁 막내 여동생을 달래 주어야만 했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 * * 새벽 일찍 말을 달려 베르가모 영지에 들렀다가 저녁 식사 직전에야 돌아온 이폴리토는 간신히 아버지와 함께 하는 저녁 식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데 마레 가문의 저녁 식탁에서 운을 띄웠다.

16550992678127.jpg“아버지. 이제 새해이기도 하고, 조만간 아버지 생신이신데요.”

겉은 바삭하게 구웠지만 안에서는 육즙이 배어 나오는 필레미뇽 스테이크를 칼로 썰며 데 마레 추기경은 아들을 쳐다보았다. 오래 살다 보니 자식놈이 먼저 생일 이야기를 꺼내는 날도 왔다. 아들놈이 어떤 기특한 이야기를 꺼내려나.

16550992678127.jpg“가족이 한번 다 같이 모여 저녁 식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머니와 이사벨라까지, 아버지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까투리 구이로 생신 만찬 한번 하시죠.”

  - 달칵. 데 마레 추기경이 나이프를 내려놓는 소리가 데 마레 저택의 메인 식당을 요란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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