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우리의 육신에 대한 예의2021.11.14.
알폰소 왕자가 데 마레 추기경이 보낸 부고의 당사자는 아리아드네가 아니라 그 여동생인 아라벨라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타란토를 출발해 산 카를로까지 약 1/3쯤 왔을 때였다. 수도원 부설인 역참에서 그 장례식의 부고를 정식으로 전달받은 수사를 만난 것이다. 「시몬 데 마레 추기경 예하 아래의 아라벨라 데 마레 양이 1123년 2월 1일 오후에 천신님의 인도로 먼 여정을 떠났습니다. 이에 삼가 알려드립니다. 빈소: 데 마레 추기경 관저 추도 미사: 1123년 2월 15일 해 뜰 녘,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 베네딕토 홀.」
‘아라벨라, 아라벨라 데 마레.’
알폰소는 행여나 부고장에 적힌 고인의 이름을 자기가 잘못 읽었을까 봐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눈으로 훑었다.
“형제, 아는 분의 부고입니까?”
알폰소 왕자가 한참이나 부고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그에게 양피지로 쓰인 부고장을 보여준 수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알폰소는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수사에게 부고장을 돌려주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죽은 게 다른 사람이라서 정말 다행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입 밖으로 지껄이지는 않았으나 알폰소는 지금 속으로 천신님께 감사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본인의 이기심에 자책했다.
“서둘러 올라가야 추도 미사 전에 빈소에서 고인에 대한 우리 교구의 예를 올릴 수 있겠어요.”
수사가 눈비가 휘몰아치는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며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수사는 남쪽의 살비텔레 교구를 대표하여 중부의 산 카를로 교구에 조의를 표하러 출발하던 길이었다.
“형제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타란토?”
아리아드네의 부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알폰소 왕자는 이제 마땅히 타란토로 돌아가야 옳았다.
“아뇨. 산 카를로로 갑니다.”
알폰소는 말고삐를 꾹 잡았다. * * *
“알폰소……! 어떻게 여길……!”
거의 100일 만에 보는 알폰소의 얼굴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눈물이 터질 뻔했다. 초췌해진 그녀의 낯빛과 슬픔이 가득한 얼굴을 보자 알폰소의 눈가에도 약간의 눈물이 맺혔다. 그는 울 것만 같은 그녀의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쓸어 주었다. 차가운 겨울의 온도를 뚫고 몹시 따듯한 체온이 피부에 닿았다. 알폰소의 차가운 손가락을 느낀 아리아드네는 정신을 다잡았다.
‘이럴 때가 아니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리는 추태를 가까스로 제어한 그녀는 주변을 살폈다. 아리아드네도 알폰소 데 카를로, 중앙 대륙의 소위 ‘황금의 왕자님’이 그녀와 연락을 끊은 이유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갈리코 왕국과 갈리코의 대공녀 때문이겠지. 그는 지금 여기에 올 처지가 안 됐다. 아리아드네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대회랑 옆에 마련된 작은 홀로 알폰소를 재빠르게 이끌었다. 원래는 주방에 이어진 가족 식당으로 사용되는 방이었다.
“이쪽으로 들어가자. 대회랑에는 보는 눈이 많아.”
알폰소는 순순히 아리아드네를 따라 들어왔다.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오르는 좁은 공간에는 그들, 단둘뿐이었다.
“여기엔 어떻게 온 거야!”
“동생의 부고를 들었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리아드네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아라벨라는 이 집에서 아리아드네가 그나마 마음을 붙이고 살던 가족이었다. 그녀와의 편지 교환을 통해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알폰소는 성호를 그었다. 지난 8일간 수도 없이 많은 조문객을 맞이했지만 그녀를 위한다는 느낌이 드는 조문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아리아드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흐느끼며 동생을 위한 묵념을 했다. 식당의 의자에 걸터앉은 그들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알폰소였다. 그들 사이에서 먼저 말을 걸어주는 것은 항상 알폰소였다.
“기분은 좀 어때.”
아리아드네는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죄 없는 아이가 죽었어.”
아리아드네는 상복의 소맷자락을 그러쥐었다.
“정말로 아무 죄를 짓지 않은 아이. 천신께선 죄인은 데려가지 않고, 죄짓지 않은 자만 데려가. 선행은 보답 받지 못하고 악행은 징벌받지 않아.”
그녀는 ‘카르마가 따라오지 않은 악행은 내가 징벌할 것’이라는 뒷말은 삼켰다. 벽난로에서는 장작이 타닥타닥 타고 있었다. 창밖으로 겨울 눈보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라벨라가 죽었어도 동은 트고 해가 진다. 죽은 자는 더 이상의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산 자는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우리는 도대체 왜 살아가야 하는 걸까. 알폰소, 사람은 왜 살까.”
깊은 회한에 탈력감이 더해진 목소리였다. 알폰소 왕자는 그녀의 거조에 스며든 메마름에 놀라서 초록 눈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장작처럼 마른 그녀의 볼이 퀭했다. 그가 작년에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아리아드네는 소녀답게 살이 오른 볼이 보기 좋게 통통했었다. 지금, 두껍고 무거운 검은 상복 아래 드러낸 그녀의 손목은 부러질 것 같이 가늘었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에게 간격을 좁혀 당겨 앉았다.
“아리, 많이 힘들지.”
한 번 울음이 터진 이후로는 제어가 되지 않았다. 간신히 참고 있던 눈물이 이번에야말로 샘솟듯이 차올랐다. 아리아드네의 눈에서 맑은 샘물처럼,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아라벨라의 사망을 알게 된 직후를 빼고는 일주일간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각종 일 처리에 치여 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알폰소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자 쌓여 있던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그게…….”
그녀는 눈물 사이로 속삭였다. 한숨과, 울음과, 단어가 섞여서 나왔다.
“그냥,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어. 눈을 감으면 다시는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가냘프게 흐느끼는 아리아드네의 목소리에 알폰소 왕자는 그만 참지 못하고 그녀를 품에 껴안고 말았다. 낯선 겨울바람이 스며든 후드의 냄새와 반대로 따듯한 체온이 동시에 훅 끼쳐왔다. 안쪽에 담비 모피를 댄 망토가 아리아드네의 눈 위를 덮었다. 그녀는 따스한 체온과 달콤쌉싸름한 체취에 취해 그만 통곡했다. 일말의 자제력까지도 모두 날아갔다. 모피 망토와 알폰소의 품이라는 이중 보호구를 두른 그녀는 소리도 표정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숨이 막힐 때까지 양껏 울었다. 알폰소는 그저 그런 아리아드네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을 뿐이었다. 흐느끼는 소리에 박자를 맞추어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쓸었다. 따스한 체온, 편안한 무게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 아리아드네의 울음이 잦아들 무렵, 알폰소는 나직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우리는 왜 살고 있는지.”
누군가가 죽어도 세월은 흘러간다. 세월이 흘러가면 사람은 종국에는 죽는다. 끝은 결국 정해져 있다. 그 사이의 세월을 꾸역꾸역 기계적으로 메우는 일이 도대체 어떤 효용이 있는가?
“결국엔 사람은 영원히 살지 못하고 죽어. 죽음에 대해 선택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죽고 싶지 않은 자에게도 끝은 온다는 점에서는 죽음이란 결국엔 피할 수 없어. 선택권이란 죽는 시점을 당길 수 있다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아.”
그는 그녀가 죽음에 대해 선택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부류의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웠다.
“태어났으니 열심히 살고,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그 시간 동안 최대한 행복하게 즐기자. 삶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실망할 기력을 아껴서 어디로든 가서 최대한의 행복을 찾을 노력을 하자.”
한참을 울다 눈물이 그친 아리아드네가 망토 속에서 머리를 빼내자, 알폰소는 망토 자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도톰한 입술 사이로 살짝 드러난 앞니가 토끼 같았다. 하면 안 되는 것은 알았다. 세상에는 한 번 건너가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선 같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먼 훗날 과거를 돌이켜 보아도 그땐 그 외로는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을 때가 있는 법이다. 세상의 선택지가 하나로 좁혀드는 순간.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알폰소는 그만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아리아드네의 벌린 두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개버리고 말았다.
“……!”
말캉한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생경한 열기가 접촉면으로부터 뺨으로, 뺨에서 목덜미로, 거기에서 또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아리아드네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고, 알폰소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알폰소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귀여운 토끼 이빨이었다. 아리아드네의 하얀 앞니는 차가울 것 같다는 선입견과 다르게 사탕처럼 매끄러웠고 사탕만큼이나 달았다.
“으읍……!”
산소가 부족했던 여자가 낮게 신음을 냈다. 남자는 입술을 반쯤 떼어내 그녀가 숨을 들이켤 시간을 내어준 이후 곧장 다시 벌린 입술 사이를 삼켜 들어갔다. 언젠가 그녀의 방에 들어갔던 때 뇌리에 깊게 남았던 체향이 달콤하게 알폰소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는 갈구했지만 가질 수 없었던 그 향기를 몇 번이고 깊숙이 빨아들였다. 그녀를 보기 위해 눈길을 뚫고 전 국토의 절반을 종단한 남자의 키스는 집요하고 맹렬했다. 그녀도 피하지 않았다. 알폰소는 그녀의 뒷덜미 위 머리카락에 손을 깊숙이 묻어 헤집었고,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목덜미에 매달려 남자의 애정 공세를 받아냈다. 품에 안기고 안은 자세가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보라색 제식용 망토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을 때와 꼭 같은 구도였지만 그때와는 많은 것들이 달랐다. 열기가 달랐고, 간절함이 달랐고, 닿을 수 없는 사랑의 허망함이 넘쳐났다. 마냥 예쁘고 고왔던 그날 알폰소의 망토와 달리 오늘 그가 걸친 망토에는 얼음 조각이 달라붙어 있다가 녹아서 물이 되어버린 흔적이라던가, 겨울에 얼어붙은 풀 쪼가리가 매달려 있던 흔적 따위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차가운 실내에서 수프가 식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폰소가 느릿느릿 입술을 떼어냈다.
“……하아…….”
“으응…….”
접촉은 꿈 같았고 끝난 이후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길게 늘어진 타액 한 가닥과 빨갛게 부푼 입술, 훅 올라간 체온만이 지금 있었던 일을 증빙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깊은 진녹색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절망 안에서 희망이 피어났으면 했다.
“죽을 생각 같은 거 하지도 마.”
알폰소는 손을 들어 헝클어진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언젠가 왕비궁의 분수대에서 아리아드네가 알폰소의 귀밑머리를 넘겨주었던 것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더욱 힘 있고 깊숙한 손놀림이었다. 성글게 묶여 있던 소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흘러내렸다.
“삶에 대한 예의야. 심장과, 혈액과, 내가 살아 숨 쉬는 육신에 대한 예의.”
그리고 나를 위한, 너를 사랑하는 남자를 위한 노력. 알폰소는 속으로만 속삭였다. 죽지 마. 이번에 깨달았어. 네가 없는 세상에서 나는 살아갈 수가 없어.
“살아 있으면 좋은 날은 반드시 온다.”
알폰소도 280 미글리오(약 500km)의 눈 쌓인 길을 겨울 칼바람을 뚫고 오는 고생을 하면서도 지금 아리아드네의 향기를 맡으며 위로받고 있었다. 갈리코 왕국이 분쟁으로 위협해도, 사랑하지 않는 여자에게 팔려갈 위기에 처해 있어도, 인생의 좋은 부분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단어들을 더했다.
“너를 잃을까 봐 정말 무서웠어.”
아리아드네는 속절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를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그녀를 품에 안은 팔에 다시금 힘을 꽉 줘서 힘주어 껴안았다.
“난 네가 죽은 줄 알았어.”
알폰소는 타란토에서 출발해 눈길을 달리며 느꼈던 감정들을 헤아렸다. 처음 왔던 것은 후회였다.
‘나는 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조차 꺼내지 못했는가.’
이유는 무수히 많았다. 국가를 위해, 백성을 위해, 왕권의 보위를 위해.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리아드네가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느꼈던 것은 끔찍하게 무거운 상실이었다. 그는 그녀 없이 괜찮지 않았다. 알폰소는 국가와 백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야 한다고 배우며 자라왔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에 경배하며 깨달았다. 이 소녀 없이는 자신은 껍데기뿐이 남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버리고 떠날 수는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녀의 손을 잡고 벌판으로 달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에 그에게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젊은이 특유의 낙관주의와 투지가 있었다. 알폰소는 고개를 숙여 여전히 자신의 품 안에 꼭 안고 있는 그녀의 볼에 코를 쓸었다.
“내가 다 해결하고 돌아올게.”
라리에사 대공녀의 국혼 상대로서 적절치 못한 처신은 열 가지도 넘었다. 에트루스칸 왕국의 정규군은 엉망진창으로 해체된 상태였지만 그들에게는 풍부한 황금과, 풍요로운 국토와, 넘쳐나는 국민들이 있었다. 갈리코의 도움이 없더라도 괜찮을 것이었다.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다. 알폰소 왕자는, 미래의 젊은 왕은 속으로 눈앞에 있는 그의 장래의 왕비에게 맹세했다.
“조금만 기다려 줘, 아리.”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아리아드네는 왕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곧바로 알아들었다. 그녀는 이후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었다. 그가 과연 그 사태를 모두 감당할 수 있을까?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에게 미래를 누설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순간 재처럼 타오르던 지아다의 양손이 생각나서 아리아드네는 몸서리를 쳤다. 지금은 일단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알폰소의 확언을, 저 달콤하기 짝이 없는 약속을 믿고 싶었다. 그녀는 알폰소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그녀의 입술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다시 맞춘 입술은 거칠 것이 없었다. 두 젊은이는 가쁜 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열기를 나눴고, 아리아드네를 품에 안고 있던 알폰소의 손길이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점차 올라와 그녀의 드레스 앞섶 언저리에 닿았다.
“알폰소!”
실수로 닿은 것인지 그가 의도를 가지고 움직인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전 약혼자의 행동들이었다. 실수일 거라는 가능성 자체를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채 그녀는 반사적으로 화들짝 놀라 자세를 똑바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