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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화> 미래의 기약 (102/733)

<제103화> 미래의 기약2021.11.28.

알폰소는 양친을 동시에 알현하겠다고 신청하였으나, 그날 레오 3세를 만나지 못했다. 레오 3세는 애첩인 루비나 백작 부인의 생일을 맞아 그녀와 시간을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16550995063933.jpg“제아무리 왕자 전하라고 하더라도 오늘만큼은…….”

레오 3세의 비서관인 델피아노사 경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16550995063933.jpg“송구하옵니다, 전하.”

알폰소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16550995063941.jpg“그게 자네 탓인가. 알았네, 내 일단 모친께 먼저 상의드리고 아바마마께는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지.”

16550995063941.jpg‘오늘이 루비나 백작 부인의 생일이었군.’

체자레는 마르그리트 왕비의 생일을 모를 수 없었지만 알폰소는 루비나 백작 부인의 생일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것이 적자의 여유였다. 그러나 정부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부친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왕자인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알폰소는 대신 어머니를 뵈러 가기로 결심했다. 남편을 정부에게 빼앗긴 어머니 곁에서 함께 시간도 보낼 겸, 겸사겸사한 것이다. 그는 타란토의 겨울 궁전에 마련된 임시 왕비의 거처로 향했다.

16550995063941.jpg“어마마마.”

국왕의 처소와 다르게 알폰소 왕자는 사전 약속이 없이도 얼마든지 왕비궁을 드나들 수 있었다. 그것이 왕자와 그 모친 사이의 유대관계였다. 평범한 모자 관계처럼, 자식이 손을 내밀면 언제나 이를 맞잡아주는 그런 사이.

16550995063959.jpg“우리 알폰소 왔느냐. 몸이 좋지 않다고 해서 이 어미가 많이 걱정하고 있었어.”

16550995063941.jpg“아니에요, 어머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알폰소는 벽난로에서 불을 쬐고 있던 마르그리트 왕비 옆에 털썩 앉았다. 그녀는 목이 타는지 시트론 조각을 넣은 미지근한 물을 계속 들이켰다.

16550995063941.jpg“어머니, 전 아팠던 게 아니라 산 카를로에 다녀왔어요.”

16550995063959.jpg“뭐? 네가?”

마르그리트 왕비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아들이 보이지 않던 날짜를 어림해보더니 물었다.

16550995063959.jpg“그렇게나 빨리 다녀올 수가 있느냐?”

알폰소는 씩 웃었다.

16550995063941.jpg“그럼요, 어머니. 어머니의 아들은 그 지위와 책임에 부끄럽지 않게 산 카를로에서 제일가는 기수라고요.”

16550995063959.jpg“대단하구나, 알폰소.”

아들이 왜 산 카를로에 다녀왔는지에 대해 마르그리트 왕비는 어렴풋한 예감을 느꼈다. 왕자의 비서관인 베르나르디노가 느꼈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먼저 말을 꺼내는 대신에 아들이 이야기를 꺼내기를 기다렸다. 조금이라도 더 아들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힘들기를, 그래서 말을 꺼내기 전에 아들이 그만두기를 바라는 헛된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은 너무나 쉽게, 확실하고도 명료하게 말했다.

16550995063941.jpg“어머니. 갈리코 왕국과의 혼담을 거절하고 싶습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드디어 입을 연 그녀는 물었다.

16550995063959.jpg“그 아이 때문이냐.”

그녀의 아들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16550995063941.jpg“네.”

16550995063959.jpg“알폰소, 우리는 이미 이것에 대해 이야기를 끝냈―.”

16550995063941.jpg“아리아드네를 왕자비로 맞이하고 싶은 건 맞아요. 하지만 갈리코와 혼인동맹을 체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비단 아리아드네 때문만에 든 것이 아닙니다.”

16550995063959.jpg“그렇다면?”

알폰소는 심호흡을 하고 대답했다.

16550995063941.jpg“자비를 구걸해 얻은 평화는 깨지기 마련입니다.”

아들이 라리에사 대공녀의 부덕함을 설파할 줄 알았던 마르그리트 왕비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알폰소 왕자를 바라보았다. 라리에사는 사실 마르그리트 왕비가 보기에도 첫인상과 달리 교만하고 방자했으며 동시에 어리석고 둔했기 때문이다.

16550995063959.jpg“오?”

16550995063941.jpg“갈리코 왕국에 대포와 화약을 구걸해서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들이 내킬 때 베푸는 관대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례로, 화약의 배합식은 여전히 극비사항 아닙니까.”

왕자는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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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95063941.jpg“우리가 그 화포로 갈리코 왕국에 대항하려 든다면 바로 화약의 공급을 끊어버리겠지요. 훈련된 병종이 있다손 치더라도 화약 보급이 불가능하다면 그걸 어디에 쓰겠습니까. 돈이 들어간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그뿐입니까?”

알폰소는 말을 이었다.

16550995063941.jpg“우리가 그 화포로 갈리코 왕국이 아니라 아세레토와 전쟁을 한다고 하더라도 갈리코 왕국이 보기에 그 상황이나 돌아가는 판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은 언제든지 화약의 공급을 끊어 버릴 겁니다. 결국 군대의 힘으로 압박하지 못하고 외교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습니다.”

왕자는 어머니에게 고했다.

16550995063941.jpg“어머니도 아버지도 많은 고민이 있으셨던 것을 믿어 마지않습니다. 하지만 소자가 보기에 이것은 국방력을 남에게 의존하던 지금까지의 관행을 콘돌리에로에서 갈리코 왕국으로 껍질만 바꿔 끼운 것에 불과합니다. 에트루스칸은 자강(自強)의 길로 나아가야 해요.”

16550995063959.jpg“하지만 알폰소. 자강에도 기술력이 필요한 법이다.”

알폰소가 기다리고 있던 말이었다. 왕자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16550995063941.jpg“산 카를로에 들러서 제 사람들에게 그간 지시해두었던 것들의 결과물을 보고 받았습니다.”

알폰소는 품속에서 양피지 뭉치를 꺼내 어머니께 건넸다. 자세히 작성된 보고서였다. 마르그리트 왕비가 돋보기를 꺼내 보고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왕자는 그 옆에서 설명을 덧붙였다.

16550995063941.jpg“갈리코 왕국의 화약 배합물을 역설계* 할 수 있다면 이 모든 문제가 한 번에 풀리지만 어차피 우리나라의 현재 기술력으로는 역설계가 불가능합니다. 장기적으로, 무어 제국 출신 연금술사를 초빙해서 화학 연구에 투자를 할 필요가 있어요.”

보고서의 페이지가 넘어갔다.

16550995063941.jpg“20년 이상을 잡고 보는 장기 과제겠지요. 어차피 지금 당장 할 수 없고 무어 제국 출신 기술자가 필요하다면 화약의 배합식도 무어 제국산에서 시작하면 됩니다. 갈리코도 그렇게 시작했고, 공성전에 사용하는 화약 외에 개인화기에 사용하는 화약으로는 무어 제국의 화약이 갈리코 왕국산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이 중평입니다.”

그는 보고서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16550995063941.jpg“무어 제국의 화약은 소량이라면 암시장에서도 구할 수 있다는 것이 제 부하들의 보고예요.”

마르그리트 왕비가 보고서의 완독을 마칠 때까지 참을성 있게 옆에서 기다린 알폰소 왕자는 모친을 바라보며 간절히 말했다.

16550995063941.jpg“어머니, 어머니 아들에게 힘을 실어 주세요.”

마르그리트 왕비는 미간에 주름을 지은 채 알폰소 왕자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16550995063959.jpg“알폰소. 고민을 많이 했구나. 하지만 네가 조사한 게 모두 참이라고 쳐도, 이건 멀리 돌아가는 길이야.”

마르그리트 왕비는 돋보기를 벗어 옆의 협탁에 내려놓았다. 이야기를 그만하고 싶다는 의사의 표현이었다.

16550995063959.jpg“실무에 대한 이야기는 더 얹지 않겠다. 군사는 어미가 잘 모르는 분야이고 그런 것은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게 옳지. 나는 내가 아는 것만 이야기하겠다. 왕좌를 계승한다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란다. 아무리 네가 유일한 왕위계승자라도 하더라도 왕위 계승에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아.”

알폰소 왕자는 레오 3세의 유일한 적출 자식이었지만 레오 3세는 언제나 감정이 변화무쌍했고, 특이한 아이디어들이 넘쳐나는 위인이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남편이 수틀릴 경우에는 훌륭한 예삽교 세계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짓, 가령 서자를 입적시켜 장자로 인정하는 짓 같은 것을 충분히 하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마르그리트 왕비가 생각하는 우월전략은 최대한 조용히 엎드려 있다가, 아버지의 자연사와 함께 자연스럽게 왕위를 승계하는 것이었다.

16550995063959.jpg“이 어미는 네가 대로로, 안전하게 갔으면 좋겠다. 지금 국방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아버지를 거스르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야.”

알폰소는 어머니를 간절하게 쳐다보았다.

16550995063941.jpg“어머니. 이것은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유일한 바른길입니다. 갈리코 왕국과의 혼약은 지름길이 아니에요. 길이 아니니까요. 아리아드네가 아니더라도 에트루스칸 왕국이 가면 안 되는 길입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아들을 보며 애잔한 미소를 지었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16550995063959.jpg“하지만 아들아, 이 어미는 에트루스칸 왕국의 번영보다는 내 아들의 영예와 안전을 바란단다.”

평소의 알폰소라면 국가에 대한 불경에 해당하는 어머니의 말에 화들짝 놀라 마르그리트 왕비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알폰소는 꿈쩍도 하지 않고 어머니 앞에서 자신의 의사를 피력했다. 그에게 더 중요한 말은 따로 있었다.

16550995063941.jpg“어머니. 저는 아리를 놓치고 라리에사와 함께 살아야 한다면 영영 불행할 거예요. 아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아들을 지지해 주세요.”

16550995063959.jpg“알폰소, 꼭 그 아이와 함께 있고 싶다면 반드시 결혼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니? 추기경의 서출이면 바람직한 것보다는 좀 높기는 하지만 정부로 삼기에 영 안 될 신분도—.”

16550995063941.jpg“어머니!”

알폰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16550995063941.jpg“아버지께서 그 여자를 데리고 오셔서 어머니의 삶에 색채가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알폰소 왕자는 어머니가 마시는 미지근한 시트론 물을 흘깃 바라보았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최근에 추위를 타는 정도가 더 심해져, 마시는 물조차 모두 데운 물로 바꿨다.

16550995063941.jpg“오늘도, 정부와 시간을 보내러 떠나셔서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를 혼자 두셨죠.”

16550995063959.jpg“…….”

16550995063941.jpg“전 한 여자의 인생에 그런 짓은 못 합니다. 그게 제가 사랑하는 여자라면 더더욱요.”

말해버렸다. 어머니 앞에서 말해놓고도 자신이 조금 놀란 소년 알폰소의 시선과 역시, 품 안에 끼고 키웠던 아들의 선언에 놀란 어머니, 마르그리트 왕비의 시선이 교차했다. 왕비는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입안이 바싹 타들어 가기도 했거니와, 주의를 환기시킬 것이 필요했다.

16550995063959.jpg“알폰소. 이 이야기는 너무 급작스럽구나. 어미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다오.”

그녀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16550995063959.jpg“이 어미도 네가 준 보고서를 기반으로 한번 이것저것 알아보겠다. 정말로 이 보고서 내용대로인지, 갈리코 왕국과의 협상이 잘 되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에게 불리하게 결론 날 것 같은지, 교차검증이 끝나면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보자.”

그녀는 노파심에 아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16550995063959.jpg“그리고, 당분간 네 아버지에게 말을 꺼내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 갈리코 왕국의 화약을 도입하는 것은 네 아버지가 추진하고 있는 역점사업이야. 거기에 후계자로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얹는 것은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레오 3세를 설득하려면 그의 실책을 지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라리에사 대공녀가 여성으로서 마음에 안 드니 같은 남자로서 불쌍한 아들을 굽어살펴 달라고 애걸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아니면 차라리 대 에트루스칸 왕국이 언제부터 갈리코 촌구석 무지렁이들에게 미남계로 전략무기를 구걸하는 가난뱅이가 되었느냐며 허영심에 호소하는 편이 백번 나을 거라고 마르그리트 왕비는 생각했다.

16550995063959.jpg“어미와 상의하지 않고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어차피 발로아 대공녀 측에서 까탈스럽게 나와서 협상이 좀 길어지게 생겼어. 게다가, 내일 당장 협상이 타결되더라도 성황청의 인가를 받고 나서 계약서에 서명을 해야 할 테니 최소한 반년의 시간은 있어.”

알폰소는 항상 말 잘 듣는 아들이었다. 하지만 마르그리트 왕비가 느끼기에, 오늘은 고집이 황소보다 더했다.

16550995063941.jpg“한 달. 한 달 안에 어머니께서 말씀을 주세요. 그때까지는 저도 어머니 말씀을 기다리겠지만 그 이후에도 말씀이 없으시면 다른 방도를 강구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16550995063959.jpg“그래.”

  * * * 한 명의 어머니가 품 안을 벗어나려는 아들을 보며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와중에, 다른 한 명의 어머니는 갈등조차 없이 본인의 집착과 불안함을 바깥으로 폭발시켜 버리는 편을 택했다. - 쿵쿵쿵쿵! 1층 계단에서 2층으로 올라오는 거침없는 발소리가 들렸다.

16550995128871.jpg“이폴리토! 우리 아—들!”

음성으로도 경고가 왔다. 옷을 다 벗고 침대 안에 함께 누워 있던 이폴리토와 말레타는 얼굴이 시퍼래졌다.

16550995142073.jpg- “루크레치아 마님인가요?!”

16550995142081.jpg- “빨리, 빨리, 너 옷장 속으로 들어가!”

이폴리토는 허겁지겁 침대에서 뛰쳐나와서 침대 주변에 허물처럼 흐트러진 옷가지들에 팔다리를 꿰었다. - 벌컥!  

16550995128871.jpg“우리 아—들! 좋은 아침!”

16550995142081.jpg“…….”

의복을 덜 걸친 이폴리토가 상당히 많은 양의 피부를 드러낸 채, 애매한 표정으로 문을 박차고 들어온 어머니와 눈을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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