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16화> 돌아온 산 카를로 궁정 (115/733)

<제116화> 돌아온 산 카를로 궁정202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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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카를로로 올라가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라리에사 대공녀는 마차의 흔들림만큼이나 불안한 눈빛으로 알폰소 왕자의 마차 행렬을 지켜보았다. 본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16550997216348.jpg- “당신이 뭐라도 된 듯이 굴지 마.”

16550997216348.jpg- “너는 군주의 딸이 아니라 협상장에 올라온 카드에 불과해.”

16550997216348.jpg- “내 약혼녀가 아닌 라리에사 드 발로아.”

  라리에사는 그날 숙소로 돌아와서 맹렬하게 울었다.

16550997216395.jpg‘이 내가 알폰소 왕자님의 심기를 거슬러 버리다니!’

이 결혼, 성사될 수 있을까? 여부부터 고민하는 것이 정략결혼에 처한 사람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일 것이다. 어쨌거나 그들 사이의 관계는 거래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라리에사는 그보다도 알폰소가 자신을 싫어할 거라는 점에 더 큰 고통을 느꼈다.

16550997216395.jpg‘알폰소 왕자님이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나를 혐오스럽게 쳐다보지 않을까? 못됐다고, 못생겼다고, 언니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도 아쉬워하겠지? ‘아, 수잔느 대공녀가 왔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후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르비엥 백작을 불러서 그를 죽기 직전까지 괴롭혔다.  

16550997216395.jpg“르비엥 백작! 이제 이 결혼은 어떻게 되는 거야!”

16550997216407.jpg“대공녀님, 대공녀님, 이게 그렇게 생각하실 일이 아니라…….”

16550997216395.jpg“왕자님께서 나한테 정떨어지셨으면 어떡하지?!”

  고통스러워하는 말처럼 울먹이는 라리에사를 보며 르비엥 백작은 뱃속부터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주군의 따님을 달래기 시작했다.  

16550997216407.jpg“대공녀님, 이 결혼은 어차피 정략결혼입니다. 당사자의 의사는 중요치 않아요. 대공녀께서 비위를 맞추셔야 할 상대는 레오 3세 폐하이시지 알폰소 왕자님이 아닙니다.”

16550997216395.jpg“하지만 결혼하게 되면 같이 살 사람은 알폰소 왕자님이잖아! 날 박대하시면 어떡해? 결혼하자마자 정부를 들이고 나를 안 찾아오시면 어떻게 하지?”

  알폰소 왕자의 아버지인 레오 3세가 하는 짓거리를 고려해보았을 때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르비엥 백작은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달변가인 그는 라리에사 대공녀의 가혹한 훈련을 받으며 사람을 달래는 법에 대해 도가 터 가는 중이었다. 불안에 먹이를 주면 안 된다.  

16550997216407.jpg“갈리코 왕국이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 무슨 말씀 하실지 압니다. 그렇지만 20년 전의 갈리코 왕국과 지금의 갈리코 왕국은 달라요.”

  자식에게 끔찍한 외드 대공이 딸자식이 독수공방하는 꼴을 두고 볼 리도 없을 것이다.  

16550997216395.jpg“왕자님이 따로 마음에 둔 여자가 있으셔서 나한테 이러시는 건 아닌지?”

  라리에사는 가면무도회에서 봤던 검은 머리의 여자를 일부러 마음 저 멀리 밀어둔 상태였다. 당연히, 라리에사도 아주 바보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아무리 바보 같은 여자라도 여자의 촉은 예리한 법이다. 가슴 속 깊숙이 느껴지는 불길함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만나는 사람한테마다 ‘체자레 백작의 결혼 상대는 참으로 운이 좋다’, ‘그 커플은 보기 좋지 않으냐’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의 대화 상대가 레오 3세일지라도 입 밖으로 데 마레 추기경의 차녀와 체자레의 이야기를 마구 꺼내서 기정사실로 믿고 싶은 충동을 멈출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했다.  

16550997216407.jpg“라리에사 대공녀님! 그런 생각은 하지를 마세요!”

  르비엥 백작은 강력하게 부정했다. 라리에사가 안 좋은 생각을 반복하며 슬픔으로 침잠하는 사이클을 끊어 줘야 했다. 게다가 그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알폰소 왕자는 외교가에서 신중하고 사려 깊기로 평판이 높았다. 그런 사람이, 그것도 정략혼을 앞둔 왕위계승권자가 그렇게까지 무모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면 정부로 들이면 될 일 아닌가.  

16550997216407.jpg“알폰소 왕자님이 그렇게까지 경우가 없으신 분은 아니실 겁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대공녀님이 선을 넘으시긴 했어요. 남자라면 누구라도 화가 났을 겁니다. 남자에게 아내가 능력이나 형편 가지고 핀잔을 주는 일은 최악입니다. 아내 쪽이 더 부유하거나 강대하면 더더욱이요.”

  라리에사는 자기를 탓하는 말에 더욱 움츠러들었다. 라리에사 대공녀가 화를 내는 대신 더 깊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자 르비엥 백작은 자신이 실수한 것을 깨닫고 허겁지겁 그녀를 위로했다.  

16550997216407.jpg“불쌍한 대공녀님,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세상에 만회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답니까?”

  르비엥 백작은 필사적으로 라리에사 대공녀의 장점을 떠올렸다.  

16550997216407.jpg“대공녀님은 상냥하신 분이 아닙니까.”

  결혼 적령기 처녀의 덕성을 칭찬하며 할 수 있는 말이 ‘상냥하다’ 밖에 없는 것은 다소 우울한 현실이었으나 실제로 그녀는 좋게 말해서 정이 많았고, 최소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너그러웠다.  

16550997216407.jpg“알폰소 왕자님의 칭찬을 많이 하고, 살뜰하게 보살펴 드리는 것이 어때요.”

  남자에게 이성적으로 호감을 사지 못하는 여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전략은 헌신이다. 남자의 인성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그 전략은 잘 먹혔다. 미안함이 가여움으로 변하는 순간 이성적 매력이 없는 여자라도 남자의 가슴 안에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이다.  

16550997216407.jpg“어차피 결혼은 기정사실이에요. 옆에 자리를 잡고, 오래오래 잘해드리세요. 그러면 남편은 보통 조강지처에게 마음을 여는 법입니다. 알폰소 왕자님은 좋은 분이에요. 분명히 사이좋은 부부가 되실 수 있을 겁니다.”

  여기까지 설파한 뒤에도 묘하게 불안했던 르비엥 백작은 모두의 안위를 위해 한마디 덧붙였다.  

16550997216407.jpg“그리고 앞으로는 근거 없는 의심이나 밑도 끝도 없는 질투는 안 됩니다. 그런 건 관계에 먹이는 독약이에요.”

  이렇게 르비엥 백작을 탈탈 털어 기계처럼 답이 정해진 위안을 얻어낸 라리에사 대공녀는 르비엥 백작의 조언을 충실하게 따랐다. 그녀는 원래 남의 말을 잘 듣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날 알폰소 왕자와의 충돌은 라리에사로서는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다니, 그것은 그녀의 세계가 끝나는 것과 다름없었다. 흑백의 세계에서 사는 라리에사는 성심성의껏, 젖먹던 힘을 모두 끌어모아 알폰소 왕자를 대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알폰소 왕자는 절대로 사회상규상 필요한 최소한의 예의 이상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마차에 앉아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가 만든 불지옥에 들어앉아 있는 라리에사 대공녀를 보며, 르비엥 백작이 조심스레 그녀의 기운을 북돋워 줄 이야기를 꺼냈다.  

16550997216407.jpg“대공녀님, 산 카를로에 올라가시면 봄의 축제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는 들으셨나요?”

16550997216395.jpg“봄의 축제?”

16550997216407.jpg“예, 무도회도 열리고, 거리 축제도 열립니다. 젊은 남녀가 수선화의 정령과 샘물의 요정이 되어 축제의 마스코트가 되죠.”

  그는 솔깃한 표정의 라리에사 대공녀에게 귀띔했다.  

16550997216407.jpg“에트루스칸 측 실무진에게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무도회에 알폰소 왕자님의 파트너로 서시게 될 테니 준비하시라고요.”

  3월 25일은 예사크의 곤이 잉태된 것을 기념하는 예삽교의 축일이었다. 산 카를로는 종교적 축일인 3월 25일의 수태고지 축일에 더해서, 수태고지 축일 7일 전부터 일주일 동안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봄의 축제를 성대하게 열었다. 산 카를로는 지역 단위로 광장마다 튤립과 수선화를 심어서 봄꽃 축제를 준비했다. 산 카를로에는 무수히 많은 광장이 있었는데, 각 광장은 우물을 중심에 두고 지역사회의 구심점을 담당했다. 지역 주민들은 각 광장마다 각기 젊은 청년인 ‘수선화의 정령’과 아름다운 처녀인 ‘샘물의 요정’을 뽑아 월계수 왕관과 튤립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귀족들은 매해 4월에 치르는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자신의 여식이 ‘올해의 데뷔탕트’가 되는 것을 영광으로 쳤지만, 평민 아가씨들에게는 봄의 축제에서 샘물의 요정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영예였다. 올해의 어느 광장 요정은 누구다, 라며 거리가 떠들썩해지는 즐거운 축제였다. 꼭 정령이나 요정 후보에 올라갈 만한 선남선녀가 아니더라도 ‘봄의 축제’에 즐길 거리는 많았다. 광장과 그에 이어진 골목길 가득 포차와 노점들이 들어차 먹거리나 기념품을 팔았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간식거리와 꽃다발을 즐기며 축제를 즐기고는 했다.  

16550997216395.jpg“샘물의 요정, 샘물의 요정도 내가 된다고 했나요?”

  라리에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르비엥 백작에게 물어보았다.  

16550997216407.jpg“샘물의 요정은 평민들이 뽑는 것이라 축제 첫날 열리는 왕궁 무도회에서는 따로 선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차피 봄의 축제의 핵심은 귀족들이 치르는 왕궁 무도회 아니겠습니까?”

  그는 능숙하게 라리에사 대공녀를 달랬다.  

16550997216407.jpg“대공녀님께서 알폰소 왕자님과 커플로 무도회의 첫 왈츠를 추시는 것은 확정이니 실질적으로 대공녀님께서 봄의 축제의 주인공이신 것이지요.”

  샘물의 요정이 되어볼 기회가 없을 거라는 이야기에 라리에사는 잠시 실망했지만, 알폰소 왕자의 파트너가 되는 것이 확정되었다는 말에 이내 안색이 밝아졌다.  

16550997216395.jpg“그래, 중요한 건 호칭 따위가 아니니까.”

  알폰소 왕자와 붙어 있을 기회, 그의 마음을 돌릴 기회가 중요했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아름다운 무도회의 파트너가 되어 알폰소 왕자의 옆자리를 확고히 하리라고 다짐했다. * * * 왕궁이 타란토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에, 아리아드네는 모처럼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수선화를 담은 꽃병을 아리아드네 방의 협탁에 올려놓은 산차는 웃으며 자신의 주인에게 칭찬을 건넸다.

16550997247621.jpg“아가씨, 그렇게 웃으시니까 수선화처럼 화사하세요.”

16550997247626.jpg“산차는, 농담도. 그렇게 말하면 내가 믿어 버리잖아.”

16550997247621.jpg“진실이니까 믿으셔도 돼요.”

16550997247626.jpg“아부가 날로 늘어만 가는구나. 아 참, 콜레지오니 의상실은 언제쯤 방문한다고 했어?”

봄 사교 시즌의 드레스를 맞출 때가 왔다.

16550997247621.jpg“바로 오늘 오후에요. 오늘 일정은……. 다음 주 대미사에 입으실 드레스는 이미 맞춰 두었으니 사이즈만 확인하시고, 다다음주 ‘봄의 축제’ 무도회에 입으실 드레스를 고르셔야 해요.”

아리아드네는 이미 다음 주 대미사에 입을 드레스를 결정해놓았다. 다음 주 대미사는 왕궁 사람들이 무사히 산 카를로로 돌아오는 것을 경축하는 미사였다. 왕궁 사람들과 산 카를로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올해 들어 처음으로 마주하는 행사다. 즉, 알폰소와 저번 입맞춤 이후 최초로 만나게 되는 날이다.

16550997247626.jpg‘알폰소에게 예뻐 보이고 싶다.’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각한 아리아드네는 혼자서도 얼굴이 홧홧해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16550997247621.jpg“아가씨! 그냥 두세요! 제가 열게요!”

16550997247626.jpg“아니야.”

아리아드네는 인상을 약간 찌푸린 채 물었다.

16550997247626.jpg“나, 사이즈를 하나 올려야 되겠지?”

그녀는 요새 이전보다는 잘 먹으려고 노력하는 참이었다. 하지만 산차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아리아드네를 노려보았다.

16550997247621.jpg“새 모이만큼 드시면서 뭘 사이즈를 올려요!”

16550997247626.jpg“……전보다는 많이 먹는다고.”

16550997247621.jpg“오십보백보예요.”

산차의 단언에 아리아드네는 입술을 삐죽였다. 노력했는데. 알폰소는 내 노력을 알아줄까? 그는 다정하니까, 아리아드네가 그간 식사량을 늘리려고 했던 이런저런 궁리들을 들으면 분명히 고생했다고, 수고했다고, 잘했다고 이야기해줄 것이다. 하지만 알폰소가 그래도 모자라다고 하면 어쩌지? 그러면 그는 전처럼 입술과 입술을 맞대고 직접 먹여……. 여기까지 생각한 아리아드네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손부채로 얼굴을 부쳤다. 요사이 아리아드네는 무엇을 하건 무슨 생각을 하건 생각의 꼬리는 꼭 알폰소에서 끝났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사랑에 빠졌다. * * *

16550997285083.jpg“성 에라스무스의 인도하심으로 우리의 지상의 왕이신 레오 3세 폐하와 데 카를로 왕가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그간 우리의 고리기도가…….”

데 마레 추기경의 집전으로 성대한 귀환 미사가 열렸다. 겨울 동안 타란토에 내려가 있던 카를로 왕가와 궁정 귀족들은 산 카를로의 아름다운 봄 날씨를 즐기며 봄꽃처럼 차려입고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을 가득 메웠다. 오늘은 미사의 탈을 쓰기는 했지만 주로 남들을 관찰하고 자기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날이었다. 그 기회를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사벨라 데 마레였다. 대미사에서 이사벨라를 발견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웅성거렸다.

16550997216407.jpg- “이사벨라 데 마레를 봐요! 분위기가 완전히 변했네.”

16550997216407.jpg- “정신 차렸나?”

16550997216407.jpg- “그럴 리가요. 본성이 어디 가요?”

16550997216407.jpg- “그래도, 최근에 모친상을 치렀다면서요. 아직 나이도 어린데, 충격이 심하면 충분히 달라질 수 있죠.”

이사벨라는 본디 밝은색의 드레스를 즐겨 입는 편이었다. 그녀는 형형색색의 파스텔 색조 드레스를 얇고 가벼운 재질로 지어 매일 바꾸어 입는, 산 카를로의 명실상부한 패션 리더였다. 그랬던 이사벨라가 오늘은 얇은 검은색 공단으로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치마폭도 원래 선호하던, 화려하고 넓은 후프형에서 폭이 좁고 허리선 근처만 띄운 검소하고 소박한 스타일로 확 변신했다. 민망하기 직전까지 깊게 파던 목둘레선은 순백의 베일로 모두 덮었다. 머리 위를 덮은 미사포와 합쳐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경건하고 성실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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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97216407.jpg- “참, 가여워라.”

16550997216407.jpg- “근데 타고난 미모는 어디 가지를 않네요. 상복을 입고 저렇게 수수하게 꾸몄는데도 저렇게 눈에 띄니!”

16550997216407.jpg- “도리어 지금이 더 예쁘지 않아요?”

16550997216407.jpg- “전에는 확실히 좀 과하기는 했죠.”

이사벨라는 사실 지금이 더 산 카를로가 추구하는 전형적인 미인에 더 가까웠다. 산 카를로는 전통적으로 꾸밈이 과한 사람을 미인으로 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조용히 불쌍한 기색을 풍기자 원체 그녀를 안 좋게 생각하던 사람도 안쓰러운 마음에 미움이 누그러졌고, 기존의 이사벨라가 취향이 아니었던 사람들도 그녀에게 새로 한 번씩 눈길을 던졌다. 동정적인 시선을 받으며 이사벨라는 베일 아래에서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16550997298738.jpg‘당분간은 납작 엎드려 있어야 한다.’

근신이 풀리자마자 산 카를로 사교계에 ‘캄파 후작의 내연녀는 사실 바톨리니 백작 부인’이라고 소문을 내려고 했던 이사벨라는 모친상을 당하면서 노선을 변경했다. 모처럼 동정적인 여론이 생긴 상태였다. 굳이 이 시점에 한 차례 지나간 구설수를 굳이 다시 소환할 필요는 없었다.

16550997298738.jpg‘언제든 원상회복하고 말 거야. 진짜 내연녀가 내연녀 소리를 들어야지.’

그녀는 주변에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더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 * * 이사벨라의 노선 변경에 피해를 본 것은 애꿎은 아리아드네였다. 아리아드네는 아라벨라를 추모한다면 모를까,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로 그녀를 위한 상복을 입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루크레치아는 추기경의 애인이었지 정식 부인이 아니었다. 그녀가 집에서 얼마나 ‘모친’이나 ‘부인’ 호칭에 집착했건, 사람들이 그녀를 정실부인이나 마찬가지로 떠받들었건 간에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과 루크레치아 데 로시는 가족을 흉내 냈을 뿐이지 법적 가족이 아니었다. 법적 가족이 아니라면 상복도 입을 필요가 없다. 아리아드네의 태도는 합리적인 것이었다. 자기 혼자만의 독단도 아니었다. 데 마레 추기경이야 당연히 상을 당했다는 티를 전혀 내지 않았고, 이폴리토조차도 오늘 자주색 자수가 멋들어진 귀족의 연회복을 입고 나타났다. 루크레치아를 드러내놓고 애도하지 않는 것, 그것이 데 마레 대저택 전체의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이사벨라가 선수를 쳤다. 그녀는 가련하고 청순한, 모친을 잃은 검은 상복의 아가씨였다. 장미꽃처럼 화려한 다홍색의 실크 드레스를 입고 현관에 발을 디딘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를 보자마자 직감했다. 이대로 외출한다면 이사벨라와 직통으로 비교되어 효심이 없다느니, 서출이라 그렇다느니, 사생아는 어쩔 수 없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듣겠다는 것을. 결국 아리아드네는 울며 겨자 먹기로 위층으로 올라가 단정한 검은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알폰소와 다시 만나게 될 것을 기대하며 골랐던 꽃 같은 장미 드레스는 다시 옷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행히 산 카를로는 국왕의 칙령으로 상복 착용 기간을 최대 1개월 미만으로 제한했다. 왕족 한 명이 죽으면 전 국민이 상복을 입어야 했는데, 산 카를로는 전 중앙대륙의 패션을 선도하는 도시였다. 몇 년씩 직물의 판매가 검은색으로 제한되면 경제의 큰 축을 담당하는 패션 산업에 타격이 극심했기 때문에 취해진 정책이었다.

16550997247626.jpg‘왕실 무도회 즈음에는 다시 색 있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겠네.’

그녀는 건성으로 날짜를 셈해 보며 얼굴을 가린 성긴 망사를 당겨 내렸다. 옷 따위가 중요하지는 않았다. 아리아드네의 생각은 어느새 며칠 전 알폰소로부터 도착한 편지로 흘러가고 있었다. 「애정하는 아리에게, 드디어 산 카를로로 돌아간다니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기뻐. 타란토에서의 일상은, 객관적으로 보자면 몹시 스펙터클한 날에도 무미건조하고 일각이 여삼추 같아. 널 향해 다가가는 매 발걸음이 가볍고 즐거워. 돌아가면 귀환 대미사에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을 거고, 그 이후로는 왕실 무도회와 ‘봄의 축제’가 있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위치와 장소를 물색해 볼게. 일단 산 카를로로 돌아가면 편지 교환에 드는 시간이 훨씬 짧아질 테니 몹시 기대가 된다! ……(후략).」 알폰소와 아리아드네는 일단 대미사에서는 서로 아는 척을 하지 말자고 합의했다. 라리에사가 아직 산 카를로에 버티고 있었다. 그 외로도 아직 아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은 마르그리트 왕비라던가, 질투심에 불탈 것이 뻔한 이사벨라 역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아리아드네를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조용히,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비밀로 연애하기. 그게 그들의 약속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느릿한 걸음걸이로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의 정문을 지나 우아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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