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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사랑의 작대기 (118/733)

<제119화> 사랑의 작대기2022.01.23.

아리아드네는 바로 알폰소에게 새로운 계획을 전달했다. 왕궁 무도회에는 발데사르 후작가의 장남과 함께 가겠다는 아리아드네의 이야기에 알폰소는 전반적으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라파엘이라면 나름 친한 친구야! 최근 몇 년간 못 보긴 했지만, 충분히 에스코트를 잘해줄 거야. 혹시 너만 괜찮다면, 라파엘에게 미리 편지를 보내서 사정 설명을 해 놓을게. 어떻게 생각해?」 알폰소는 라파엘 데 발데사르에게 사정 설명을 하지 않고 아리아드네를 맡기기에는 못내 불안한 듯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라파엘보다는 호위기사단 중 한 명이 알폰소의 선순위 옵션인 듯했으나, 알폰소는 라파엘 데 발데사르를 무도회 파트너로 삼는 것에 굳이 반대까지 하지는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이것이 자신이 댄 이유가 모두 합당해서인지, 아니면 알폰소의 본디 성품이 자기 여자가 원하는 거라면 웬만하면 다 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인지 궁금했다.

16550997631894.jpg‘전생에서도 알폰소 왕세자 전하는 이사벨라 언니가 원하는 거라면 군말 없이 모두 다 하라고 허락하긴 했었어.’

아리아드네는 전생의 이사벨라가 사들였던 호화로운 귀보석과, 드레스와, 그녀가 수도 없이 열었던 찬란한 무도회들을 생각했다. 결코 알폰소 왕자의 취향은 아니었다. 누군가와 연애를 새로 하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알아가는 일이로구나, 라고 아리아드네는 생각했다. 아리아드네의 기준점은 전생의 체자레였는데, 알폰소는 그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여주고는 했다. 전반적으로 더 심심했지만, 더 다정하고 훨씬 온화했다. 물론 알폰소라고 고집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발데사르와는 장갑 끼지 않은 손으로 손잡지 말 것, 무도회 파트너라지만 너무 오래 단둘이 있지 말 것.」  

16550997631894.jpg‘아주 그냥 사람을 붙여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지그래?’

아리아드네는 입으로는 툴툴댔지만 입가에 떠오른 한 줄기 미소를 감추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만반의 준비를 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초대장이 도착했다.

16550997631907.jpg“아리아드네 아가씨, 체자레 백작가에서 온 편지입니다.”

아리아드네는 편지를 펼쳤다. 「나의 데뷔탕트 아가씨에게, 지금쯤이면 왕궁에서 초대장이 모두 돌았을 것으로 보오. 당연히, 데 마레 가문에도 도착했겠지. 제게 또 하나의 무도회에 당신을 에스코트하는 영광을 주시겠소? - 체자레 백작.」 기다리고 있던 연락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미리 준비해뒀던 핑계를 거침없이 편지에 써 내려갔다. 아리아드네의 편지는 평소보다 상냥했다. 길이도 길었을뿐더러, 체자레 백작의 찬양도 들어 있었고, 체자레 백작의 에스코트를 거절하는 것이 결코 체자레의 탓이 아님도 강조했다. 하지만 거절은 거절이었다. 「체자레 백작님과 함께 무도회에 가지 못하니 몹시 아쉽습니다.」 여기까지 쓴 아리아드네는 몸서리를 쳤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려니 글씨체마저 뭉개졌다. 그 뒤로도 구구절절이 체자레 백작과 함께 할 수 없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101가지 이유를 댄 그녀는 책상에 탁, 펜을 내려놓았다.

16550997631894.jpg‘할 만큼 했다. 뭐, 이걸로도 체자레 백작의 기분이 상한다면 어쩔 수 없지.’

남의 비위를 맞춰 주기 위해 내가 무도회에 끌려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리아드네는 길게 늘려 쓴 거절의 편지를 우편물 하인에게 건넸다.

16550997631894.jpg“잘 전달하고 오게. 집주인이 서신을 뜯어보기 전에 빨리 돌아오고.”

체자레의 성질머리가 애먼 데 마레 가문의 하인에게 튈까 봐 걱정한 아리아드네의 고려였다. * * * 과연 아리아드네의 편지를 받아본 체자레는 심기가 좋지 못했다.

16550997631922.jpg“라파엘 데 발데사르? 그놈 때문에 이 체자레 백작의 에스코트 신청을 거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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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자레는 자신의 서재 안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체자레의 비싼 소파 위에 늘어져 있던 오타비오가 낄낄 웃었다.

16550997631932.jpg“아니, 체자레 백작. 자네가 발데사르 소후작한테 밀렸어? 이거이거, 데 마레 영애의 취향은 자네보다도 더 곱상한 남자였나 보이.”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로 여심을 휩쓰는 체자레를 보며 항상 황소같이 우락부락한 스스로의 외모에 은근히 자신감이 떨어져 가던 오타비오였다. 그는 체자레가 다른 남자에 밀린 이 상황이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16550997631922.jpg“시끄러워. 그런 게 아니라고.”

체자레는 아리아드네의 편지를 오타비오에게 던져 주었다. 「저와 절친한 줄리아 데 발데사르 영애의 청으로…….」 편지를 대충 읽은 오타비오는 약간 김이 빠진 얼굴로 편지를 돌려주었다.

16550997631932.jpg“재밌으려다 말았네.”

오타비오가 기대했던 ‘체자레 백작이 너무 싫으니 꺼지’라는 내용이 아니라, 친구의 부탁을 들어줘야 해서 남자는 다음번으로 미루겠다는 이야기였다.

16550997631932.jpg“그런데 말이야.”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생각한다.

16550997631932.jpg“여자의 저런 거절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돼.”

연애경험 자체는 모자라지만 여자에게 차인 횟수만 따지자면 친구보다 월등하게 경험이 많은 오타비오는 체자레에게 진지하게 조언했다.

16550997631932.jpg“거절은 다들 예쁜 말로 하지. 좋은 오라버니 같아서 남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남녀로서 가까워진 이후에 잘 안되면 친구로서도 얼굴 보기 어려울 텐데, 나는 좋은 사람을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다……. 내가 다 들어 봤는데, 그거 다 개소리야.”

오타비오는 체자레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단호하게 말했다.

16550997631932.jpg“그냥 남자로 안 보였을 뿐이라고.”

체자레는 벗어서 만지작거리고 있던 장갑을 오타비오에게 냅다 던졌다.

16550997631922.jpg“시끄러워!”

사슴 가죽 장갑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은 오타비오가 낄낄거렸고, 여기서 화를 더 내자니 지질해 보일 게 뻔해서 체자레는 불편한 심기를 가다듬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16550997631922.jpg“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새 파트너를 어디서 구해.”

16550997631932.jpg“자네야, 언제 그런 걱정을 한 적이 있었나? 아무에게나 가서 물어보면 되는 거 아냐?”

16550997631922.jpg“괜찮은 파트너 감들은 이미 다 시장에서 빠졌을 테니 하는 말이지.”

이미 파트너가 있는 여자의 손목을—혹은 그 남자 파트너의 손목을—비틀어 빼앗아오는 방법도 있었지만 뒷말에 시달릴 것이다. 물론 뒷소문 따위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체자레 백작이었지만 정말로 같이 가고 싶은 여자도 아니고 땜빵 파트너 따위를 위해 구설수에 오를 마음은 없었다.

16550997631922.jpg“자네는 누구랑 가.”

16550997631932.jpg“나야 뭐, 언제나처럼 나의 약혼녀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 양과 함께지.”

오타비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16550997631932.jpg“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해. 이것으로 내 청춘은 끝인가?”

그는 드라마틱하게 양팔을 앞으로 뻗어 보였다.

16550997631932.jpg“이제 영원히 내 사내로서의 가능성을 꽃피울 방도는 없어지고, 카멜리아 양의 치마폭에 휩싸여 그 여자 한 명에 개 목줄 끌려가듯 잡혀서 살아야 하는가?”

체자레는 오타비오의 뒤통수를 갈겼다.

16550997631922.jpg“배가 불러서 헛소리를 찍찍 싸고 있구먼. 그 정도 미인 와이프에, 그렇게 돈이 많은 장인어른은 산 카를로 전체를 털어도 또 없을 걸세.”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는 이사벨라 데 마레가 사교계에 데뷔하기 전까지는 명실상부한 산 카를로 최고의 미인이었다. 게다가 카스틸리오네 남작은 수도의 방직물 산업을 꽉 잡고 있는 신흥 부호였다. 전국을 샅샅이 뒤지면 카멜리아보다 더 예쁜 여자가 있을 수야 있었고, 카스틸리오네 남작보다 더 부자인 장인어른 감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미덕을 한 몸에 갖춘 여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여자가 오타비오를 선택할 가능성 같은 것을 따지지 않아도 그랬다.

16550997631932.jpg“그건 그래.”

오타비오는 입맛을 다셨다.

16550997631932.jpg“하지만 사람이 앉으면 눕고 싶다고, 예비 장인어른이 돈이 있으시니 이젠 또 권세가 없으신 게 아쉽단 말야.”

16550997631922.jpg“뭐, 카스틸리오네 남작의 입지가 좀 불안정하긴 하지. 벼락부자나 마찬가지니.”

16550997631932.jpg“카멜리아에게 추기경 오빠쯤이 있었으면 딱이었을 텐데.”

16550997631922.jpg“오타비오, 정신 차리게. 그랬으면 카멜리아 양이 퍽이나 자네와 약혼을 했겠네.”

16550997631932.jpg“체자레!”

한 방 되먹인 체자레는 낄낄대며 얼음에 탄 증류주 한 잔을 오타비오에게 건넸다. * * * 이폴리토는 산 카를로 사교계에서 애매하기 짝이 없는 위치에 있었다. 추기경들 중에서도 실세인 위세 높은 데 마레 추기경의 장자이기는 했으나, 성직자의 직위는 당대에서 끝나는 것이고 세습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폴리토에게 물려받을 별도의 작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폴리토 개인으로 보자면 제법 덩치가 훤칠했으나 잘생긴 것까지는 아니었고, 잘 나가는 무리에 같이 끼어 다녔으나 본인이 특출난 것은 아니었다. 레이디들이 줄줄 따라다닐 스펙은 어느 모로 봐도 아닌 청년이었다. 그렇다고 본인이 아가씨들과 사교적으로 잘 지내서 친분이 쌓여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딱히 먼저 무도회에 가자고 제의해주는 레이디도 없었고,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먼저 보내자니 판판히 거절만 당했다. 「귀하의 호의에는 감사하오나 저는 이번에 모 백작가의 누구 공자와 함께 금번 왕실 무도회에 참석하게 되어……. 차후 좋은 인연으로 뵙기를 바라옵고…….」 「……급작스러운 제의에 조금 놀라……. 저는 이번 겨울에 가문끼리 약조로 약혼한 약혼자가 있어 이번 무도회는 약혼자와 함께 참여…….」  

16550997668031.jpg“오빤 바보야?”

이사벨라는 이폴리토의 책상 옆에 서서 비아냥댔다.

16550997668031.jpg“상대방이랑 미리 교감도 없이 막무가내로 파트너 하자고 편지부터 뿌렸어?”

그녀는 거절의 편지들을 뒤집어보며 웃었다.

16550997668031.jpg“상대 여자한테 관심도 없이 그냥 파트너가 필요하니까 물어본 티가 너무 나잖아. 약혼자 있는지는 확인했었어야지. 누가 이런 파트너 신청을 받아줘?”

이폴리토는 기분이 무척 저조했다.

16550997682519.jpg“너 처맞기 전에 입 다물어라.”

16550997668031.jpg“이야, 이거 날짜 보니까 1번 영애한테 답장 오기 전에 2번 영애한테 파트너 신청했네. 둘 다 파트너 신청 수락했으면 어쩔 뻔했어? 아, 그럴 리가 없나?”

16550997682519.jpg“……아가리 닥치라고 했다.”

16550997668031.jpg“지금 날 때리면 아버지가 퍽이나 좋아하시겠다. ‘아빠, 집에서 밥이나 축내는 이폴리토가 어여쁘고 착한 이사벨라를 때렸어요! 저, 얼굴에 상처가 나서 시집도 못 가면 어쩌죠?’”

16550997682519.jpg“야!”

이폴리토가 진짜로 으르렁대자 이사벨라는 그제야 도발을 멈췄다. 하는 짓이 너무 한심해서 좀 화풀이를 했을 뿐이지 그녀는 이폴리토와 정말로 싸우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니었다.

16550997668031.jpg“파트너 없지? 내 친구랑 가는 건 어때.”

이폴리토는 조금 전의 도발을 잊지 않았다.

16550997682519.jpg“니가 친구가 남았어?”

16550997668031.jpg“이게……!”

이사벨라는 험한 소리를 하려다 간신히 참았다. 그녀는 들고 온 편지를 툭 던졌다.

16550997668031.jpg“너야말로 같이 갈 여자 먹고 죽으려도 없을 거 아냐.”

‘네 친구들이 여동생이나 사촌도 소개 안 시켜주는 걸 보니 네 서열 참 알만하다’라고 말하려던 이사벨라는 그 말을 삼켰다. 사실 본인 입장도 도긴개긴이었기 때문이다.

16550997668031.jpg“편지 읽어봐.”

그 편지는 이사벨라의 하나 남은 친구라도 해도 과언이 아닌 레티시아 데 레오나티 자작 영애에게서 온 편지였다. 그 내용은 원래 함께 왕궁 무도회에 참석하려고 했던 친분 있는 영식이 지난주에 약혼이 성립되어서, 갑자기 함께 갈 파트너가 없어졌다는 이야기였다.

16550997668031.jpg“얘 착해. 오빠한테는 과분하고.”

콧대 높던 이사벨라도 친구가 하나뿐이 남지 않자 레티시아에 대한 마음속 평가를 슬그머니 올린 모양이었다. 이제까지의 그녀였다면 이폴리토가 파트너 없이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게 내버려 뒀을지언정 절대로 자기 시녀라고 깔아보던 레티시아를 자기 오빠의 무도회 파트너로 추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6550997682519.jpg“얘 그 못생긴 애 아니냐? 얼굴 사각지고 넙데데한?”

편지를 읽은 이폴리토가 인상을 찌푸렸다.

16550997668031.jpg“오빠가 지금 따질 처지야?”

이사벨라는 발끈했다.

16550997668031.jpg“인간 여자는 못 구하고 비스크 인형이라도 들고 갈 셈이야? 아니면 이쁘장한 하녀라도 어디 구해서 자랑스럽게 데리고 갈래?”

이사벨라의 하녀 이야기에 이폴리토는 이사벨라를 노려보았다. 지금 그에게 말레타의 얘기는 역린이었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못된 하녀와 얽히면서부터 모든 게 다 내리막길이었고, 그는 결국 어머니를 잃었다.

16550997682519.jpg“그 입 그만 놀려라.”

이폴리토가 정말로 분노한 기색을 보이자 이사벨라는 입을 다물었다. 기분은 상했으나 지금은 하나 남은 친오빠와 진짜로 싸울 때는 아니었다.

16550997668031.jpg“하여간에. 생각해 봐. 내일까지 답장하면 돼.”

그녀는 새초롬하게 입을 꾹 다물고 방을 나섰다. 그녀가 이폴리토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우편물 수발 하인이 그녀를 찾았다.

16550997631907.jpg“이사벨라 아가씨! 여기 계셨군요. 아가씨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무도회 초대장인가? 이사벨라는 하인이 내민 봉투를 받아서 겉면을 살펴보았다.

16550997668031.jpg“뭐야? 누구한테서 온 거야? 이름이 없는데?”

무지 봉투 겉면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사벨라 데 마레’라고 적혀 있을 뿐, 발신인의 정체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적혀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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