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대형 사고2022.03.23.
그녀는 유령을 본 듯한 표정으로 알폰소 왕자를 올려다보았다.
“알폰소……?”
“그래, 나야. 아리아드네. 내가 왔어.”
알폰소는 허겁지겁 아리아드네를 고이 품에 안았다. 그는 바닥에 꿇어앉아 자신의 허벅지 위에 그녀의 머리를 눕히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별일 없었어?”
아리아드네의 얼굴에선 이제야 슬슬 신원불명의 남자에게 두들겨 맞은 멍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목덜미에도, 어깨에도 시뻘겋게 붉은 기가 슬슬 푸르딩딩한 색과 섞였다. 그녀의 상의는 어깻죽지까지 쭉 찢겨 있어 목덜미와 등 위쪽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게 무슨……!”
“……알폰소, 큰일 났어.”
그는 아리아드네가 경황이 없어서 뒤늦게 횡설수설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야, 걱정 마, 내가 왔잖아.”
알폰소 왕자도 지금 이 상황이 세간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알고 있었다. 젊은 처녀가, 모르는 남자에게 끌려가서 옷이 찢어지고 온통 멍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왔다. 분명히 산 카를로 사교계는 어떤 몹쓸 일이 있었다고 입방아를 찧어댈 것이다. 그 처녀를 며느릿감으로 데려갈 시댁은 아무 곳에도 없을 것이고, 처녀의 부모님은 아마 그녀를 수도원으로 보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들에게 들켰을 때의 이야기였다.
“저 남자는 내가 죽였어. 이제는 뭐라고 떠들고 다닐 수도 없어. 아무도 못 봤어. 소문 안 날 거야. 괜찮아. 조용히 자택으로 돌아가서 한 달쯤 요양하자.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거야.”
“……알폰소. 저 사람, 알아?”
“아니?”
알폰소 왕자는 그제야 쓰러진 남자를 돌아보았다. 유독 비대한 체구를 가진 중키의 남자는 왕궁 마부의 제복을 입은 채 얼굴부터 바닥에 고꾸라져 있었다.
“저 사람……. 미레이유 공작 같아…….”
알폰소 왕자의 눈이 크게 홉떠졌다. 알폰소 왕자는 원래 이 사건을 묻어버릴 작정이었다. 왕궁 내에서 엄중한 치안을 뚫고 일어난 중범죄는 요인의 암살 시도에 준해서 다루게 된다. 그 배후를 제대로 추적하고, 일의 사정을 앞뒤로 명명백백히 밝혀 엄중하게 처벌한다. 운이 좋아 대상이 달랐을 뿐, 범인이 만일 군주의 생명을 노렸다면 국가의 안위가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암살 사건은 십중팔구 크게 사건화되고, 궁전은 물론 산 카를로 도시 자체의 성문을 닫고, 범인들과 더 있을지도 모르는 그 공범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저인망식으로 빠른 시간 안에 도시를 훑는다. 그게 암살자를 색출해내는 방법의 정석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커진다면 아리아드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필연적으로 소문이 나게 된다. 비록 아무 일이 없었더라도, 산 카를로 사교계는 그 사실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아가씨를 납치해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간 중년의 이웃 나라 배불뚝이 공작과 그에게 두들겨 맞아 멍투성이가 된 젊은 영애, 그리고 왕자, 그러니까 영애의 남자 친구의 칼에 맞아 죽은 공작. 그들이 써댈 드라마는 명약관화했다.
“설마…….”
정절을 잃은 영애의 앞날은 뻔했다. 가족의 반강요로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다면, 수도원. 아리아드네의 아버지는 결코 세평에 맞서서 딸을 지켜줄 사람이 아니었다. 알폰소는 설령 정치범인 암살자 추적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아리아드네의 사회적, 어쩌면 물리적인 생명까지 끊어놓을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갈리코 사절단의 대표, 미레이유 공작이라면 사건을 묻어버릴 수가 없다.
“진짜로 죽었어……?”
아리아드네는 아픈 발을 질질 끌면서도 바닥에 쓰러진 갈리코인에게 다가가 그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 보았다. 알폰소 역시 아리아드네 옆에 서서 죽은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 남자, 갈리코어로 말했어.”
아리아드네는 찬찬히 설명했다.
“에트루스칸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는데, 알아듣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어. 마치……. 외교관처럼.”
“……미레이유 공작이 정말로 맞는지 한번 확인해 보자.”
알폰소는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느다란 초승달은 이미 저물어서 없어진 지 오래였다. 눈부시게 밝은 별빛만이 야속하게 두 젊은 연인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저 닮은 사람일 수도 있어. 일단 소지품을 한 번 뒤져보자.”
자기가 하는 말이 헛된 희망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알폰소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죽은 남자의 품속을 뒤지면서도 제발 이 사람이 미레이유 공작이 아니기를, 티베리 강에 던져버려도 정치적으로 후환이 남지 않을 진짜 마부이기를 빌었다.
‘제발, 제발……!’
죽은 남자의 가슴팍을 뒤지던 알폰소 왕자의 손끝에 종이 같은 것이 걸렸다. 그는 다급히 죽은 남자의 옷을 헤집어 그가 품속에 소중히 가지고 있던 종이를 꺼냈다. 알폰소 왕자는 세 번 접힌 종이를 펼쳤다. 갈리코어로 쓰여 있는 일종의 계약서였다. 「에트루스칸 국, 산 카를로 교구의 데 마레 추기경의 사생아인 아리아드네 데 마레를 죽이거나 그에 준하게 해쳐 주십시오. 1123년 3월 18일, 라리에사 드 발로아.」
“뭐라고?”
알폰소 왕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라리에사가 괴팍하다고는 생각했다. 성품이 훌륭한 사람은 아니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런 짓까지 할 사람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 무슨……!”
알폰소의 신음에 바로 옆에 있던 아리아드네가 종이를 잡아당겼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가 이 내용을 알게 된다면 매우 놀랄 것 같아 손에 힘을 주었지만, 아리아드네는 알고 싶었다. 기어코 종이를 받아든 그녀는 내용을 읽었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를 죽이거나 해쳐 주십시오……. 라리에사 드 발로아…….”
알폰소처럼, 아리아드네의 눈 역시 충격으로 커다래졌다. 단 세 줄의 글에서 자신을 향한 이런 강렬한 악의를 읽어낼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라리에사 대공녀의 편지가 나온 미레이유 공작의 품 안에서는 미레이유 공작의 인장도 나왔다. 정체를 숨기느라 잠시 손가락에서 빼서 품 안에 넣어두었던, 미레이유 공작가의 문장인 곰과 십자가가 선명한 황금 반지였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 쓰러져 있는 시체는 반박의 여지 없이 미레이유 공작이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를 울컥, 끌어안았다.
“……아리, 미안해.”
그는 그녀를 품 안에 안은 채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네가…….”
라리에사 대공녀는 알폰소 왕자에 대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폭주해 아리아드네를 대상으로 결코 용서받지 못할 짓을 시도했다. 결국엔, 다 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애달프게 감은 알폰소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여자 하나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고……. 이 무슨…….”
그는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갈리코 대공녀가 이렇게 악독할 줄 몰랐어. 이렇게 빨리 행동할 줄도 몰랐고 갈리코 사절단이 이런 도를 넘는 짓을 저지를 줄은 진짜 꿈에도 몰랐어. 내가…….”
그는 ‘방심했다’라고 하려다가 말을 다시 골랐다. 방심이란 평소라면 대비를 했음직했던 사람이 안이하게 굴었을 때를 일컫는 말이었다. 알폰소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제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라리에사 대공녀가 이런 짓거리까지 저지를 수 있을 것이라고는 그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무능했다. 다 내 잘못이야.”
알폰소는 아리아드네를 껴안은 채, 연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막상 아리아드네 본인은, 이 모든 것이 와닿지 않았다. 그녀는 슬프다기보다는 멍한 상태로, 정확하게 말하면 감정이 두들겨 맞아 정지된 상태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미레이유 공작이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레오 3세 폐하께서는 성문을 닫고 일당을 색출하려 들겠네.’
라리에사 대공녀의 쪽지는 그 과정에서 밝혀질 것이다.
‘아니야, 레오 3세 폐하라면 라리에사 대공녀의 쪽지는 조용히 묻으려고 들지도 몰라. 어쨌건, 갈리코의 화약은 건재하니까. 대공녀의 쪽지에 대한 보안을 지켜주는 것을 대가로 해서 미레이유 공작이 에트루스칸 영내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퉁쳐버리려고 들 수도 있겠군. 큰일 난 건 나지, 라리에사가 아니야.’
미레이유 공작은 알폰소 왕자의 손에 죽었다. 그가 ‘왜’ 죽었는지 밝히려고 든다면, 그러니까 시시비비를 제대로 가리는 과정에서 알폰소 왕자가 옆 나라 사절단을 도륙하는 미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필연코 미레이유 공작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가 나와야 한다. 그가 나쁜 짓을 하려고 해서, 알폰소 왕자가 어쩔 수 없이 불쌍한 처녀를 구하기 위해 정의의 철퇴를 휘둘렀다.
‘거기서 내 이름이 나오겠지.’
지나가던 왕궁 하녀 1에게 못된 짓을 하려 하던 미레이유 공작을 지나가던 알폰소 왕자가 우연히 발견했다, 라고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어물쩍 넘어가기에는 이 사건의 관심도가 지나치게 높았다. 논의는 첨예할 것이고, 조금의 개연성 오류라도 발견된다면 갈리코 왕국은 절대로 에트루스칸 왕국의 해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레오 3세 입장에서는 모든 사실관계를 거짓 없이 밝히는 것이 가장 좋은 전략이다. 가짜 하녀를 세워 무너지지 않을 가짜 진술을 받아낼 수 있다면 또 모르지만, 레오 3세는 아리아드네를 향한 동정심으로 위험부담을 져 줄 위인은 절대 아니었다.
‘아버지는 도움이 안 될 거야.’
데 마레 추기경이 힘을 쓴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캄파 후작 사건에서 이사벨라의 평판조차 구제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과연 그보다 덜 아끼는 아리아드네를 위해서는 전력을 다해 딸을 도울까? 게다가 이건 데 마레 추기경의 의지가 있더라도 역량이 안 된다. 레오 3세는 갈리코 왕국의 화약에 눈이 돌아 있는 상태다. 지금 데 마레 추기경이 무슨 재주를 넘어 보았자 갈리코의 화약, 혹은 전쟁 선포 위협을 넘어설 수는 없다.
‘아예 티베리 강에 던져 버리면 안 되나……?’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가문의 가훈, ‘아무도 모르는 일은 없었던 일이다’을 본받아 잠시 고민해 보았다.
‘산 카를로 전체가 뒤집어지겠지.’
미레이유 공작이 실종된다면 갈리코 왕국은 엄중히 항의할 것이고, 레오 3세는 기겁해서 왕궁은 물론이요 성도 전체를 탈탈 털 것이다. 티베리 강에서 퉁퉁 부은 시체라도 떠오른다면 한 번 더 뒤집어진다. 왕자의 세력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의 눈으로 봤을 때도 그 아비의 눈을 피해 요인을 죽이고 그 뒤처리까지 깨끗하게 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최소한 라리에사 대공녀는 미레이유 공작이 아리아드네를 잡으러 갔다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만에 하나 라리에사 대공녀가 입을 연다면? 합리적이고 똑똑한 사람이라면 입을 다물고 있겠지만, 라리에사 대공녀는 빈말로라도 머리가 좋다고 말해주기 힘들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이었다.
‘백 프로 들켜.’
아리아드네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간에 완벽하게 숨길 재간이 없었다. 죽음에서 부활해 돌아왔다. 지난 일 년여 간, 모든 변수를 계산해 가며 정말 죽을힘을 다해 살았다. 사교계에서 명성을 떨쳤고, 집안에서도 자리를 잡았으며, 드디어 계모를 제거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질투에 미쳐 돌아버린 멍청이의 사주 탓에 수도원 행이 코앞이라니. 헛웃음뿐이 나오지 않았다. 쿡쿡 웃는 그녀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아리아드네가 울고 있다고 오인한 알폰소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어마마마께 가자.”
알폰소 왕자는 아리아드네에게 속삭였다.
“어마마마라면 좋은 방도가 있으실 거야.”
마르그리트 왕비에겐 확실히 국왕의 눈을 피해 움직일 수 있는 약간의 세력이 있었다. 그녀가 피해를 감수하겠다고 결심하고 총력을 다한다면 이 사건의 돌파구 정도는 마련해 줄 수 있을 법했다. 마르그리트 왕비가 전적으로 협조해 주기만 한다면 가능했다. 그들에게 하나 남은 희망은 마르그리트 왕비였다.
‘하지만 과연 왕비 폐하께서 날 위해 희생을 감수해주실까?’
진실을 낱낱이 밝히게 된다면 피해를 보는 것은 아리아드네 데 마레, 하나뿐이다. 그녀의 아들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충성심과 능력을 겸비한 수하는 얻기 어려운 법이다. 왕비에겐 굳이 수하와 세력을 희생시켜 아리아드네를 도울 이유가 없다.
‘내가 왕비 폐하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텐데.’
합리적인 자의 당연한 선택이었다. 게다가, 아리아드네는 모르고 있었지만 마르그리트 왕비는 아리아드네를 며느리로 맞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호의적인 상태 또한 아니었다. 하지만 알폰소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어마마마는, 잘못 없이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으셔.”
“그래?”
아리아드네는 그것이 알폰소 왕자의 제 어미에 대한 지나치게 낭만적인 평가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그런 정치인이 어디 있는가. 중앙 대륙의 모든 왕족은 숙련된 정치인이었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모두 죽었다.
“어떻게든 방도를 찾아 주실 거야.”
전혀 동의하지 않았지만,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가보자.”
기대는 없었다. 그저, 그녀는 외통수에 걸려 있는 상태였고 스스로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 있다면 거기라도 가보는 것이 옳았다. 그들은 미레이유 공작의 시체를 풀숲으로 질질 끌고 가 대충 흙과 풀 부스러기로 덮어 두었다. 누구에게 발견되기 전에 빨리 수하를 보내 다시 찾아야 할 것이다. - 부스럭. 나뭇잎이 밟히는 소리를 들은 알폰소가 기민하게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리아드네 역시 알폰소의 경계에 뒤늦게 이상함을 깨닫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슨 소리 안 들렸나?”
“……나는 못 들었어.”
하지만 이 주위는 모두 아주 낮은 관목숲이었다. 무릎 높이까지 오는 조그만 수풀들이 예쁘고 동그랗게 관리되어 근처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이라면 모를까 어른의 체구로는 도저히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고양이 같은 거였나.”
아리아드네가 알폰소를 재촉했다.
“여기서 지체하면 위험해. 서둘러서 떠나자. 목격당하면 좋을 일이 하나도 없어.”
알폰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번 맞는 말이었다. 그는 아리아드네를 부축한 채 왕궁의 뒷길을 통해 왕비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