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뜻밖의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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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뜻밖의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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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화> 뜻밖의 손길
2022.03.30.
카를라 부인은 기가 살아서 대답했다.
“좋은 방안이 맞지요, 왕비 폐하?”
그녀의 논리는 사실 아주 합리적이었다.
“미레이유 공작이 죽었으니 갈리코 왕국에서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알폰소 왕자님이 아닌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내세운다고 해도 마찬가지예요. 미레이유 공작을 죽인 합당한 이유를 댈 수 없다면 이건 필연코 외교 문제로 비화됩니다!.”
“음.”
“미레이유 공작이 어떤 못된 짓을 저지르려고 했는지 만방에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피해자가 데 마레 영애처럼 좋은 집에서 잘 자란 명성 높은 영애라면 더더욱 여론은 갈리코 왕국과 미레이유 공작을 성토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겁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눈을 감고 있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왕비 폐하.”
그때였다.
“카를라.”
노기 서린 알폰소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지금 그대의 제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고 있는 건가?”
꽉 쥔 알폰소의 주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교계 생리에 밝은 자네가?”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알폰소는 말을 이었다.
“그건 아리아드네를 방패막이로 내세우는 거나 마찬가지야. 온 산 카를로, 아니 몽펠리에까지 전 중앙대륙이 그녀를 씹고 뜯고 맛볼 테고 우리는 그동안 아리아드네의 명성 뒤에 숨어 있는 거라고!”
카를라 부인은 눈을 똑바로 뜨고 알폰소를 바라보았다.
“제가 어디 미레이유 공작이 천하에 둘도 없는 파렴치범이라고 발표하자고 했습니까?”
그녀는 아리아드네를 흘긋 바라보았다.
“저는 있는 사실 그 자체만을 발표하자고 말하는 겁니다.”
카를라 부인은 알폰소 왕자에게 의기양양하게 외치며 찢어진 파틀렛 사이로 드러난 어깨를 왕자의 망토만으로 가린 아리아드네를 의미심장하게 곁눈 짓 했다.
“있었던 일 그대로도 발표되는 것조차도 저어된다면 저 아가씨가 몸가짐을 애초에 더 단정히 했었어야죠!”
“카를라!”
알폰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어머니와 카를라 부인을 상대로 품에서 꺼낸 라리에사의 계약서를 내보였다.
“카를라! 이걸 봐. 라리에사 대공녀의 편지야. 그대는 이걸 보고도 이게 아리아드네의 행실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가?”
알폰소 왕자는 라리에사 대공녀의 쪽지를 어머니에게 건넸다.
아들의 손에서 양피지 쪽지를 넘겨받은 마르그리트 왕비는 그것을 펼쳐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노안이 오기 시작했는지 잠시 미간을 찡그렸던 마르그리트 왕비는 눈을 두 번 깜박였다. 이내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왕비는 가타부타 더하지 않고 말없이 그 쪽지를 카를라 부인에게 건넸다. 두 손으로 쪽지를 받아 내용을 읽은 카를라 부인 역시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세상에…….”
관자놀이에 송골송골 올라온 식은땀을 닦아내는 카를라 부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알폰소는 호통쳤다.
“라리에사 대공녀가 목적을 가지고 노린 거야! 늦은 시간에 돌아다녔다던가, 단정하지 못한 의복을 입었다든가 하는 개인적인 몸가짐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카를라 부인의 말에 속이 답답해진 알폰소는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쳤다.
“아리아드네는 피할 길도 없이 희생당한 거라고!”
서늘한 목소리가 알폰소 왕자의 토로를 끊었다.
“그것은, 네 탓이로구나.”
침묵을 지키고 있던 마르그리트 왕비의 한마디였다. 알폰소는 놀라서 마르그리트 왕비를 돌아보았다.
“네가 경솔하게 하나의 혼담을 매듭짓지 않고 네 사랑을 찾으러 떠나서 일어난 일이로구나.”
그때까지 열변을 토하던 알폰소는 갑자기 할 말을 잃어버렸다.
라리에사는 정상적이지 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멀쩡한 사람과만 엮일 수는 없는 법이다. 상대가 비정상적이더라도 그에게는 아리아드네를 지킬 책임이 있었다.
……어머니의 말이 맞았다.
알폰소 왕자의 눈에 다시 한번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어마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다 제 책임입니다.”
그는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보고 있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 섬세한 양탄자에 뚝, 떨어져서 얼룩을 졌다.
감정을 추스른 왕자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저는 더더욱 아리아드네를 앞에 내세워 여론의 채찍질을 견디도록 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양 주먹을 꾹 그러쥐고 외쳤다.
“……있는 사실 그 자체를 발표할 거라면 미레이유 공작의 목을 친 사람은 알폰소 왕자라고 함께 발표하십시오.”
방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흉흉했다. 격앙된 알폰소와 카를라 부인이 있는 와중에, 마르그리트 왕비는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리아드네 입장에서 그 침묵은 지옥불만큼 무서웠다.
그러나 아리아드네는 마르그리트 왕비에게도, 카를라 부인에게도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애초에 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카를라 부인의 말이 맞지. 나라도 저렇게 했을 거야.’
그녀를 이 상황에서 꺼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알폰소 왕자가 미레이유 공작을 죽인 것은 자신이라고 온 천하에 폭탄선언을 한다면 그녀와 함께 터져 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같이 죽는 길이지, 같이 사는 길이 아니었다.
드디어 결심한 아리아드네는 입을 열었다.
“……카를라 부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음인 아리아드네의 목소리가 ‘왕비의 응접실’ 내를 울렸다. 낮게 잠긴 그녀의 목소리는 칼칼했고 쇳소리와 쇠 맛이 났다.
“알폰소 왕자님 본인은 전면에 드러나시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저를 미레이유 공작의 손아귀에서 구해준 것은 왕자님의 심복으로 해요.”
카를라 부인은 ‘네가 웬일이냐’라는 듯한 표정으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라리에사 대공녀의 쪽지도 함께 제출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누구에게 제출한단 말이냐?”
카를라 부인이 호기심에 못 이겨, 그러나 여전히 쌀쌀맞은 어투로 말했다.
“당연히 레오 3세 폐하이지요.”
아리아드네는 눈을 내리깐 채 답했다.
“오늘 일어난 일이 공론화된다면 혼인 동맹은 십중팔구 없었던 일이 될 겁니다. 하지만 그건 국왕 폐하의 복심이 아녜요.”
레오 3세는 그 누구보다도 갈리코 왕국과의 결혼 동맹, 아니 정확히는 화약의 배합식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라리에사 대공녀의 쪽지를 공개적으로 발표하면 국왕 폐하의 그림은 모두 어그러지게 됩니다. 하지만 비밀리에 폐하께 전달드리면 폐하께서는 도리어 갈리코 왕국과의 협상에서 사용하실 패 하나를 더 얻으시는 셈이 되지요.”
자신을 희생해서 에트루스칸의 입지를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말이었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깨달은 알폰소가 절절하게 외쳤다.
“아리아드네!”
그는 감정에 북받쳐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럼 너는!”
왕비의 눈썹 끝이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왕자는 어머니의 표정을 살피지 않았다. 뒷말을 삼키느라 힘겨웠기 때문이다.
‘너는! ……그리고 우리의 미래는!’
갈리코 왕국과의 혼담이 지속된다면, 그래서 결국에는 협상이 체결된다면 왕자비의 자리는 라리에사의 것이 되고 만다.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뒷말을 못 알아들은 척 미소를 지었다.
“왕자 전하, 도리어 이것이 제 유일한 살길입니다.”
존대에 흠칫 놀란 알폰소를 보았으나 아리아드네는 모른 척했다.
“이렇게 해야지만 제 이름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화약식이 몹시 가지고 싶으시며 그러기 위해서는 결혼 동맹이 반드시 성사되어야만 하는 우리 국왕 폐하께서는, 갈리코 측에서 미레이유 공작의 죽음을 문제 삼지 않도록 요구하실 겁니다. 어떻게?”
아리아드네는 마르그리트 왕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라리에사 대공녀의 쪽지로 협박을 하면 그거야 바로 달성될 겁니다. 하지만 그 큰 미끼를 그런 사소한 데다가 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르그리트 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동의하는 바였다.
“아마, 미레이유 공작의 성 비위를 덮어주는 대신에 죽음도 사고사로 처리하자는 종류의 제의를 하시지 않을까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미레이유 공작의 파벌이 강성하지 않다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그녀는 덧붙였다.
“라리에사 대공녀의 편지는 조금 더 큰 꿈을 위해 써야죠. 그녀의 수작질을 비밀로 유지 시켜 주고, 그런 흠이 있는 여자를 며느리로 맞겠다고까지 한다면요? 그건 아주 큰 이득입니다. 특히, 발로아의 외드 대공에게요. ……공작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화약의 배합식까지 요구해 볼 수 있을 만큼 큰 당근입니다.”
아리아드네는 마르그리트 왕비와 카를라 부인을 차례대로 돌아보았다.
“국왕 폐하의 저러한 제안이 갈리코 왕국에서 받아들여질지는 전적으로 미레이유 공작의 세력이 더 강하냐, 아니면 외드 대공의 세력이 더 강하냐에 달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르그리트 왕비와 카를라 부인은 예리한 지적에 침음성을 흘렸다.
외드 대공의 세력이 더 강하다면 딸의 추문을 덮기 위해 미레이유 공작의 죽음을 무마하려고 들 것이고, 미레이유의 파벌이 더 강하다면 반대급부가 무엇이 됐건 피의 대가를 바랄 것이다.
“미레이유 공작은 죽었습니다. 미레이유 공작의 파벌은 어찌 되었건 수장을 잃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단합된 대처를 할 기량이 떨어져 있는 상태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왕비 폐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아리아드네의 일리 있는 지적에 마르그리트 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다. 미레이유 공작의 후계자는 열한 살 난 늦둥이 외동아들이야. 혼자서는 대처할 능력이 안 돼. 사람을 키우거나 믿는 성격도 아니라서 파벌 내에 두각을 나타내는 이인자도 따로 없을 거다.”
“그렇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겠군요. 제가 상상하는 레오 3세 폐하의 제안은.”
아리아드네는 짐짓 여유롭게 빙긋 웃어 보였다.
“그렇다면 저대로만 한다면 제 이름도 전면에 드러나지 않겠어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레오 3세 폐하께 이실직고한다면, 알폰소 왕자님도 무사하고 저도 무사할 거예요.”
반쯤만 사실이다. 사실, 엄밀하게 따지자면 거짓말이다.
아리아드네의 계획은 구조는 복잡하게 짜여 있었으나 너무나 많은 가정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레오 3세는 이렇게 행동할 것이다’, ‘갈리코 내부의 정세는 이럴 것이다’, 등등. 개중 하나만 삐끗한다면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릴 것이 틀림없다.
게다가 어떤 일들은 제아무리 비밀로 한다손 치더라도 결국에는 알음알음 새어나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게 되는 법이다. 살인사건에 성추문이다. 모두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 아리아드네도 비밀이 유지될 수 없으리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아리아드네, 그러면 우리는……!”
알폰소가 아리아드네를 바라보며 간절하게 외쳤다.
아리아드네가 지금 낸 계책이 성공한다면 알폰소 왕자와 라리에사 대공녀는 성혼하게 될 것이다.
알폰소 왕자와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영원히 이어질 수 없다.
아리아드네는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계획의 뒷부분을 알폰소에게 절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이 결혼 동맹은 성사가 되든 안 되든 다음 달, 늦어도 초여름 전에 일어날 왕비 폐하 암살 사건으로 깨져.’
자신을 희생양으로 던져 레오 3세에게 점수를 벌어 놓고, 마르그리트 왕비의 사망으로 인해 왕자의 혼담이 깨졌을 때 왕자비 후보로 선출된다. 산 카를로 경내에 추문이야 돌고 있겠지만 그녀에게는 당일의 진실을 아는 왕자 본인의 강력한 지지가 있을 것이다.
‘이 나라의 왕자비 자리는 결국 캄파 후작의 내연녀라는 악명이 붙은 큰딸과 미레이유 공작에게 욕보였다는 소문이 도는 둘째의 대결로 결정나겠군.’
아리아드네는 헛웃음을 지었다. 의외로 이번 생에서는 줄리아가 왕자비가 되는 것 아냐?
아리아드네는 이 모든 계책을 ‘왕비의 응접실’에 들어온 이후에 생각해냈다. 자신이 살길은 하나뿐이었다.
자리에 앉고, 카를라 부인이 강퍅한 목소리로 설파하는 ‘합리적인 방도’를 남의 목소리로 갑자기 깨달음이 온 것처럼, 퍼즐이 맞춰지듯 모든 그림이 맞아 들어갔다.
그녀가 예측하지 못한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아이야.”
마르그리트 왕비는 짙은 청회색 눈으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네 마음은 갸륵하구나. 하지만 나는 알폰소의 어미인 것처럼 이 나라 온 백성의 어머니이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말을 이었다.
“난 너를 국왕 폐하께 희생양으로 던져주지 않을 거야.”
마르그리트 왕비가,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당황해서 왕비를 마주 바라보았다.
‘설마, 저 눈빛은……. 동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