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욕망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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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욕망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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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화> 욕망의 방향
2022.04.03.
“너도 알고 있지 않니. 네가 말한 대로 모두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네가 순백의 희생자로 아무 상처 입지 않고 빠져나갈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는 것.”
아리아드네는 당황했다. 마르그리트 왕비가 일체의 정치적 유불리를 도외시하고 그녀를 돕는 것은 아리아드네의 계산 밖에 있었다.
“하, 하오나 왕비 폐하. 그 외로는 빠져나갈 길이 없사옵니다.”
왕비는 청회색 눈으로 지그시 모두를 바라볼 뿐이었다. 조급해진 카를라 부인도 말을 보탰다.
“왕비 폐하! 알폰소 왕자님만큼은 추문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보호해야 합니다!”
카를라 부인은 어려서부터 알폰소를 보아왔다. 친자식은 아니지만 주군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주군의 미래를 담보해줄 미래의 왕이었다. 그에게 흠집이 나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리고 그 마음은 알폰소의 기사인 엘코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조용히 무릎을 꿇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엘코 경은 마르그리트 왕비 앞에 나섰다.
“왕비 폐하. 왕자 전하. 소신을 이용하십시오. 소신이 다 뒤집어쓰고 가겠습니다.”
“엘코!”
알폰소 왕자의 당황한 목소리가 ‘왕비의 응접실’ 안을 웅웅 울렸다. 왕자는 자신의 기사를 만류했다.
“내가 한 짓이야. 내가 책임지겠어. 난 하늘 아래 한점 부끄러운 짓 한 적이 없어.”
하지만 아들을 제지하는 것은 역시 마르그리트 왕비의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네가 부끄럽지 않다는 점을 증빙하려면 데 마레 영애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 너에게는 대책이 있느냐?”
알폰소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주먹을 쥐었다. 한참동안이나 단어를 고르던 그는 씹듯이 내뱉었다.
“하지만……. 군주란 무릇 자신의 사람을 보호해야 하는 법입니다. 보호는커녕 나의 흠을 가신에게 떠밀 수는 없습니다.”
결국 대책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 틈을 타 엘코 경이 말했다.
“전하. 원칙적으로 주군은 신하를 보호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주군께서 그러한 힘을 가지게 되실 때까지 주군을 보호하는 것은 그 수하의 역할입니다.”
이것은 엘코 경의 속죄였다.
며칠 전, 알폰소 왕자의 명으로 어떤 성직자의 딸을 호위하러 떠났던 엘코 경은 그녀를 본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우아한 몸가짐, 세련된 매너, 최고급 의복 아래 사슴같이 쭉 뻗은 목덜미와 팔다리. 그리고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생기. 그가 보았던 여인들 중에 가장 귀족적인 여자, 동시에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주군의 여인이었다. 집을 도망쳐 나와 산 카를로 무술 사범 밑에서 급료도 없이 허드렛일을 도우며 간신히 귀동냥으로 검술을 배우던 자신을 쓰레기장에서 건져 준 주군이다.
출신을 문제 삼았던 다른 귀족 자제들의 반대를 뚫고 자신을 왕자 직속 호위기사에 포함해준 바로 그 주군이다.
고귀한 레이디에 대한 당연한 기사도라고 합리화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가 품은 것은 숭배라기보단 도저히 눌리지 않는 욕망에 더 가까웠다.
그는 그날 이후로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더러운 상상에 굴복하는 자신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오늘 이런 일이 생긴 것에 감사했다.
‘주군께 속죄하자. 그녀에게 속죄하자. 속죄로서 동시에 그녀를 보호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엘코 경은 차갑기 그지없는 눈으로 아리아드네를 흘긋 바라보고는 다시 알폰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한 번의 일별을 제외하고는 엘코 경은 단 한 번도 아리아드네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전하께서 저분을 보호하고 싶으시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저를 어떻게 쓰시건 그것은 전하의 뜻이십니다.”
그러나 입에서 나가는 단어는 냉랭하게 나갔다. 엘코는 무릎을 꿇은 채 알폰소에게 계속 고했다.
“제가 왕궁 마부의 복장을 하고 수상하게 구는 미레이유 공작을 저지하다가, 그가 누군지 모르고 죽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저분께서는 입방아에 전혀 오르지 않게 되십니다.”
알폰소는 충격받은 눈초리로 엘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엘코, 너는……!”
“왕자님 대신 제가 미레이유 공작 각하를 죽였다고 주장하면 저는 어차피 죽은 거나 매한가지입니다.”
엘코는 흔들리는 알폰소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분을 구하기 위해 왕자님이 미레이유 공작을 죽였다고 하면 구명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되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일 뿐, 확정적으로 살아남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어차피 살해의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온전히 빠져나가기 어렵습니다. 기왕 한 개의 목숨을 사용할 거면 두 분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낫겠지요.”
알폰소 왕자는 엘코 경을 만류하려고 했다. 하지만 엘코 경은 왕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를 성 외곽의 무술 사범에게서 떼어내 팔라지오 카를로로 데리고 들어오셨던 그날부터 제 목숨은 이미 왕자님의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써 주십시오.”
알폰소 왕자가 기사 엘코의 제의를 한 번 더 거절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밖에서부터 몹시 거칠게 쿵쿵대는 소리와 함께, 중년 남자의 노호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알폰소 이놈의 새끼, 여기 있지?!”
레오 3세의 성난 목소리가 복도를 웅웅 울렸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당황해서 시녀 카를라와 눈빛을 교환했다.
“국왕 폐하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시지?”
“원래 오실 일정은 없으셨지요.”
게다가 콕 짚어 알폰소 왕자를 찾고 있었다.
레오 3세는 이미 지척에 다다라 있었다. ‘왕비의 응접실’은 밖으로 나가는 출구는 하나뿐이었고, 그 출구를 통해 나가려면 레오 3세가 버티고 있는 복도를 지나야 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카를라 부인에게 일렀다.
“빨리, 애들을 숨겨.”
카를라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폰소 왕자와 아리아드네를 ‘왕비의 응접실’ 뒤쪽에 달린 작은 내실로 안내했다. 왕비가 혼자 쉬거나 간단한 책을 읽는 공간이었다.
이미 봄이 완연한데도 벽난로에서는 장작이 타닥타닥 타올랐고, 윙체어 하나와 협탁이 있었다. 카를라 부인은 두 소년소녀를 숨길 자리를 찾다가, 구석에 놓인 장롱을 발견했다.
“전하, 영애, 이 안으로.”
왕비의 내실에 있는 장롱은 진갈색 떡갈나무로 만들고 겉에 반질반질한 도료를 바른, 거대하고 단단한 가구였다. 장 안에는 약간의 쿠션과 덮개 따위가 들어 있을 뿐이어서, 알폰소와 아리아드네가 들어가고도 공간이 남을 정도였다.
“어서.”
알폰소와 아리아드네는 카를라 부인이 시키는 대로 재빨리 장롱 안으로 들어갔다. 알폰소가 먼저 들어갔고, 뒤따라 들어오는 아리아드네를 안아 앉혀 주었다.
카를라 부인은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혹시라도 레오 3세가 장롱문을 열어보려고 들 때를 대비해서 허리춤에 찬 열쇠로 장롱문을 잠갔다.
“기다리고 계시면 국왕 폐하께서 돌아가신 후에 바로 모시러 오겠습니다. 얌전히 계세요.”
그녀는 두 남녀를 옷장 속에 남겨놓고, 서둘러 ‘왕비의 응접실’로 잰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둘은 완전한 암흑 속에 남았다.
* * *
레오 3세는 아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자연히 그는 아들이 거느리고 있는 열 명의 기사들의 얼굴을 모두 외우지도 못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그 점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알폰소와 아리아드네만 내실에 숨겨 놓고, 아들의 기사는 자신의 경호 인력인 척 자연스럽게 카를라 부인과 함께 밖으로 내보낼 작정이었다.
“엘코 경. 알폰소의 휘장을 떼내게.”
왕비의 의중을 파악한 기사는 자신의 팔뚝에 휘감긴 왕자의 푸른 월계수 문장을 떼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 벌컥!
그와 동시에 ‘왕비의 응접실’ 문이 열렸다. 목례를 올린 마르그리트 왕비를 필두로 시녀 카를라, 기사 엘코는 무릎을 꿇어 왕족에 대한 예를 올렸다.
“에트루스칸의 태양, 레오 3세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다 필요 없어!”
그는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알폰소 새끼 어디 있어. 여기 숨었지!”
“국왕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레오 3세를 근 20여 년간 보아왔던 터라 나름 친근하다고 자부했던 카를라 부인이 그를 진정시키려고 들었지만, 레오 3세는 거칠게 팔을 휘둘러 카를라 부인을 밀쳐냈다.
“악!”
그녀는 단숨에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남편의 심기가 심히 불편한 것을 깨닫고는 카를라 부인에게 눈짓했다.
“카를라. 나가 있어.”
카를라 부인은 서둘러 고개를 조아리고 기사 엘코와 함께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때 레오 3세가 음산한 목소리로 그들을 제지했다.
“쥐새끼 같은 놈, 감히 내 눈을 피해서 어딜 가려고 해.”
레오 3세가 지목한 것은 왕자의 기사, 엘코 경이었다. 그는 무뚝뚝한 얼굴에 약간의 당혹한 빛을 띄우며 레오 3세 앞에서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저놈, 왕비궁 인원이 아니라 왕자의 수하지?”
레오 3세는 엘코 경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르비엥 백작이 한 말이 맞았군그래…….”
마르그리트 왕비가 끼어들었다.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찬찬히 말씀해 보시지요.”
“찬찬히? 하! 그래, 내 왕비께서 원하시니 찬찬히 말씀해 드리리다! 다만 내 이야기가 모두 끝난 다음에 왕비께서는 뭐라고 왕자를 비호하실지 생각을 잘 해 두셔야 할 거요!”
왕은 빈정대는 말투로 뾰족하게 찔렀다.
“델피아노사!”
“예, 폐하.”
‘왕비의 응접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델피아노사 경이 바로 답했다.
“이 젊은 놈을 끌고 가라!”
“예, 폐하.”
델피아노사 경이 데리고 온 근위대가 우르르 달려들어 엘코 경을 포박했다.
“폐하! 이게 무슨!”
‘왕비의 응접실’ 안에서 급작스러운 무력 행사를 당하게 된 마르그리트 왕비가 항의했으나, 레오 3세는 눈썹 하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끌고 가!”
“예!”
델피아노사 경과 근위대가 엘코 경을 붙든 채 우르르 자리를 떴다. 레오 3세는 가늘게 눈을 뜨며 마르그리트 왕비를 노려보았다.
“그래, 알폰소 놈은 어디에 있소?”
* * *
르비엥 백작은 대공녀의 방에서 눈을 떴다. 바닥에 쓰러져서, 방의 한쪽 구석에 처박힌 채였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대공녀의 구둣발에 머리를 차인 게 희미하게 기억났다.
“대공녀님……?”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 안은 난장판이었다. 깨진 화병, 넘어진 의자, 화병 안의 물이 넘쳐 축축해진 카펫 등등 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한가운데에 라리에사 대공녀가 몸을 웅크리고는 덜덜 떨고 있었다.
“미레이유 공작이 다 잘 해결해 주겠지? 그 꼴 보기 싫은 여자를 없애 줬겠지?”
그녀는 방 안에서 유일하게 무사한 소파 위에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채 혼자 독백하듯 웅얼거렸다.
“있잖아, 르비엥. 미레이유 공작이 돌아오질 않아. 돌아오지를 않는다고! 그 사악한 계집이 미레이유 공작마저 잡아먹어 버렸으면 어떡하지?”
르비엥 백작은 불길한 예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시계를 찾았다.
“대공녀님, 지금이 몇 시입니까?”
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시계가 보이지 않았다. 라리에사 대공녀의 방에는 원래 커다란 벽시계가 하나 걸려 있었다.
“대공녀님?”
르비엥 백작의 재촉에, 라리에사는 웅크리고 있던 자세를 조금 폈다. 벽시계가 사라진 이유가 비로소 드러났다. 그녀는 벽시계를 떼어내서 자기 품 안에 안고 있었다. 라리에사는 눈물 어린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열한 시가 넘은 지 삼십 분이 지났네.”
“……안 좋아.”
미레이유 공작이 데 마레 추기경의 차녀를 자기 마음대로 손봐 주겠다고 하고 라리에사 대공녀의 처소를 나간 것은 여덟 시 반이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거의 세 시간이 지났다. 왕궁 안에서 뭔가를 벌일 작정이었다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슬슬 돌아와 있었어야 했다.
“거기 누구 없느냐!”
르비엥 백작은 밖으로 뛰쳐나가 사람을 찾았다. 정확히는, 미레이유 공작의 수하들을 찾았다.
잠시간의 수소문 끝에 미레이유 공작의 심복을 찾은 르비엥 백작은 미레이유 공작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공작의 심복 또한 공작의 귀환이 늦어져 불안해하기 시작한 차였다.
“안 되겠다, 찾으러 나가자.”
르비엥 백작은 미레이유 공작의 심복을 통해 공작이 어떤 수단을 통해 데 마레 추기경의 차녀를 납치해 어디서 거사를 치르려 했는지 대충 전해 듣고 그 길을 역으로 추적해갔다.
그리고 찾으면 찾을수록 점점 더 사건은 심상치 않아졌다. 맨 처음 발견했던 것은 푸른 쿠션, 두 번째로 발견한 것은 완파된 왕궁 마차였다.
그리고 세 번째로 발견한 것은…….
“피잖아.”
왕궁 마차가 전복된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흙바닥 위에서 사람이 죽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모래로 덮어 놓았지만 완벽하게 꾸며진 왕궁 정원에 흐른 대량의 핏자국은 숨길 수가 없었다.
르비엥 백작은 머리를 굴렸다. 저건, 데 마레 영애의 피가 아니라 십중팔구 미레이유 공작의 피다.
미레이유 공작이 데 마레 영애를 죽이러 간 것은 아니었지만, 혹여나 그녀를 죽이게 되었더라도 공작에게는 소녀의 시체를 굳이 숨길 유인이 없다. 그의 목적은 일을 크게 만드는 것이었다. 시체가 정원에 널브러져 있는 편이 감쪽같이 없어지는 편보다 미레이유 공작의 목적에 훨씬 잘 부합한다.
“……여기서부터는 우리의 손에서 벗어났어. 당장 레오 3세 폐하께 기별을 드려야겠다. 미레이유 공작이 실종되었으며, 황급히 수색이 필요하다고.”
- 다그닥!
르비엥 백작은 레오 3세가 쉬고 있을 국왕의 처소로 말머리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