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날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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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날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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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화> 날벼락
2022.04.06.
레오 3세의 인력 지원을 받게 된 르비엥은 피웅덩이 근처의 모든 으슥한 곳을 샅샅이 뒤졌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이제 살펴볼 곳이라고는 가건물 뿐이었다.
“이걸 열 허가가…….”
국왕의 수하가 난색을 표했다. 르비엥 백작은 펄펄 뛰었다.
“책임은 내가 질 테니 당장 열어요!”
- 쾅!
쇠지렛대로 강제로 뜯어 연 첫 번째 농막은 허탕이었다.
“망할!”
르비엥은 짜증을 내며 다음 헛간을 가리켰다.
“저기!”
- 쾅!
내부를 둘러본 르비엥 백작의 수하가 외쳤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두 번째 헛간도 허탕이었다. 하지만 르비엥 백작은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르비엥이 세 번째 헛간을 뜯으려 들자, 왕의 수하가 다시 한번 르비엥을 제지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마구 뜯어보시다가 문제 생깁니다!”
“말했잖아요! 내가 책임진다고!
뜯어!
”
갈리코 측의 인원이 달려들어 세 번째 헛간 문을 잡아 뜯었다.
- 콰지직!
강제로 뜯겨나간 헛간 문 뒤에, 비대한 체격의 중년 남자가 엎어져 있었다.
“헉!”
모두 긴장했고, 르비엥 백작은 긴장감에 숨을 들이켰다.
갈리코 수하 하나가 헛간으로 뛰어들어가 중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미레이유 공작 각하 맞으십니다! ……돌아가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경악했다.
* * *
야심한 시각에 미레이유 공작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은 레오 3세는 처음에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다가,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내 궁 안에서 어찌 이런 일이……!”
세상이 빙글 도는 것 같았다.
분명히 갈리코 왕국과의 결혼 동맹은 쾌조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그의 숙원사업인 화약의 배합식까지도 나올 기세였다. 레오 3세는 협상이 성공하리라고 믿어 마지않았다. 그렇게 되도록 만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대방 사절단의 대표가 그의 왕궁 안에서 차갑게 식은 시체로 발견됐다.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살려 두지 않으리라! 사지를 찢어 성벽에 걸리라!
레오 3세는 노기를 참지 못하고 왕좌의 손잡이를 손으로 쿵쿵쿵 쳤다.
“내 발본색원해서 이 일을 명백히 밝히고야 말 것이오!”
제발, 억울한 자가 없게 할 테니 협상에는 지장이 가지 않게 하자는 염원이 가득 담긴 제스처였다. 하지만 미레이유 공작의 사망은 이렇게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덮기에는 지나치게 일의 규모가 컸다.
미레이유 공작의 사망 소식을 직접 전한 르비엥 백작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떨궜다.
발본색원이라니, 반갑지 않다. 캐내다 보면 라리에사 대공녀에게까지 되짚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수는 없지.’
르비엥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천만다행으로 라리에사 대공녀가 알폰소 왕자와 데 마레 추기경의 차녀가 비밀 연애 중인 것을 알고 패악을 부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 패악을 부린 것까지는 알려져도 무방하다.
데 마레 추기경 차녀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미 죽은 미레이유 공작을 제외하면 르비엥 백작과 라리에사 대공녀 본인, 그리고 미레이유 공작의 심복 정도뿐이었다.
입단속이 충분히 가능한 인원이었다. 우리만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된다.
하지만 미레이유 공작의 사인이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면?
‘에트루스칸 왕궁은 큰 곤경에 처하고 말겠지.’
갈리코 왕국은 길길이 날뛸 것이다. 협상 사절단의 대표가 왕궁 안에서 죽는다는 건, 치안이 엉망이거나, 협상 타결을 바라지 않는 세력이 있다거나, 둘 다라는 뜻이다.
‘라리에사 대공녀가 살인 청부자가 되고 미레이유 공작이 파렴치범이 되는 것보다는 에트루스칸 왕실이 무능한 편으로 남는 것이 우리에게는 백번 낫다.’
다만 르비엥은 이 결혼 협상을 성사시켜야 하는 과업이 있었다.
‘미레이유 공작이 사망했다고 해서 필리프 4세 폐하께서 협상을 결렬시키고 복귀를 명하실까?’
그렇게 하는 것이 상식적이었다. 그러나 르비엥 백작은 회의적이었다.
‘이번 협상은 처음부터 어딘가 이상했어.’
라리에사 대공녀가 현지에 동행한 것부터가 이상했다. 하지만 협상의 진행방식 역시 괴이했다.
갈리코 왕국은 처음에는 합리적으로 굴었다. 반대로 에트루스칸 왕국 입장에서 보자면 양심 없는 도둑놈 같았을 것이다.
하여간에 갈리코 왕국은 국익에 도움되는 요구들을 했고 실무진 레벨에서는 상당 부분 관철시키는 데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보고가 윗전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갈리코 왕국은 중요하지 않은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한 양보를 받아내기 위해 아주 중요한 사항들에서 물러서고는 했다.
예를 들어, 대포를 제공한 후 갈리코의 군사교관 몇 명이 파견되어 에트루스칸 군대의 훈련을 도울 것인지는 매우 첨예한 문제였다.
하지만 협상 진행 상황 보고를 올리면 미레이유 공작은 결혼식을 올리는 시점이나 결혼식의 위치, 규모, 결혼식장 같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문제들을 바꾸기 위해 더 예민한 사항들을 양보하도록 지시했다.
르비엥은 이에 반발해 갈리코 본국에 몇 번 파발을 올렸으나, 필리프 4세는 ‘짐은 미레이유 공작에게 전권을 위임했으니 그의 지시를 따르라’라는 내용의 전서를 보낼 뿐이었다.
‘이 결혼 협상은 무조건 체결돼. 에트루스칸 왕실이 백배사죄,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유감의 표명만 하더라도 본국에서는 모르는 척하고 넘어갈 거야.’
르비엥 백작만 입을 다물고 있는다면, 미레이유 공작과 라리에사 대공녀의 궁리는 밖에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멍청한 라리에사가 사인해 버린 미레이유 공작의 서류는 미레이유 공작의 시체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갈리코 측 협상단 인원의 숙소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빨리 찾아서 태우기만 하면 된다.
에트루스칸 왕국이 궁내 치안을 유지하지 못한 데에 대해 갈리코 왕국에 백배사죄하고, 갈리코 왕국은 이 사과를 받아들인 후에 좀 더 유리한 형태로 결혼 협상이 체결되며, 알폰소 왕자와 라리에사 대공녀는 올해 약혼 후 내후년쯤 결혼한다.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세상은 르비엥 백작의 바람대로 호락호락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국왕 폐하!”
레오 3세의 근위대장이 다가와 예를 올렸다.
“폐하, 목격자가 있습니다!”
“오?”
레오 3세는 반색을 하며 옥좌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하지만 근위대장은 국왕의 기꺼운 반응에도 불구하고 몸을 사렸다.
“그런데 그것이……. 좀 온전한 증인이 아니라서…….”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판에 증인이 누구인지 가릴 땐가! 어서 데려와!”
국왕은 증인의 친전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이 상례지만 레오 3세는 지금 갈리코 측의 인원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본인이 사태 수습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필하고 싶었다.
“존명! 여봐라, 어서 증인을 데려와라!”
근위대장의 지시에 따라 국왕의 접견실로 곱사등이 난쟁이 하나가 끌려들어 오다시피 굴러들어왔다. 성인 남성 허벅지까지밖에 오지 않는 키였다. 국왕 앞에까지 도달한 남자는 국왕에게 예를 올리는 대신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이 사람은…….”
“궁정 광대입니다. 아니, 궁정 광대였었습니다. 지난가을에 버섯을 잘못 먹고 미쳐서…….”
근위대장은 최대한 생략해서 보고했지만 사람들은 대번에 왕궁에 퍼졌던 유명한 이야기를 생각해냈다.
광대가 어떤 후작 부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귀부인의 남편이 쳐들어와 죽기 직전까지 몹시 두들겨 맞았다는 이야기였다.
왕실의 사용인이 폭행당한 사건이었지만 왕실은 광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후작에게 경징계를 내린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이 사건을 묵인했다.
광대는 미치광이 독버섯을 먹고 아예 돌아 버렸고, 타란토로 내려갈 날짜가 다 된 왕궁에서는 혹여나 광대가 낫기를 바라며 방치해 두었던 모양이었다.
“궁정이 타란토로 내려가 있는 동안 팔라지오 카를로 안에서 요양을 시켰는데 미처 궁정 복귀 시에 맞춰서 내쫓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온전치 못한 사람은 궁전에 있을 수 없는 것이 규칙이었다. 다만 꼼꼼하게 행정을 챙긴 사람이 없다 보니 여태껏 왕궁 안에 머물러 있었던 상황이었다.
남자는 자기가 어느 안전에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양 히죽히죽 웃었다.
“난 봤지, 살인자.”
전혀 입을 열 상황이 아닌 분위기에서 광대는 제멋대로 말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 내용은 사람의 주의를 확 잡아챌 만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시선이 모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광대는 여전히 비죽비죽 웃으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금발의 살인자. 황금을 녹여 만든, 아름다운 금발.”
광대의 폭탄 발언에 일동은 일제히 경악했다.
하지만 레오 3세가 제지하지 않는 이상 감히 왕의 안전에서 먼저 나설 수는 없어 다들 서로 눈치만 보았다. 그 짧게 생성된 침묵의 공백에 광대는 무서운 줄 모르고 이죽거렸다.
“여자에 미쳐서 앞뒤 안 가리고 칼질이나 하고. 여자는 둘 중 하나야. 남자를 미치게 하거나, 자기가 미쳐 있어.”
광대는 혼자서 낄낄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금은보화도 싫고, 왕국도 싫고, 여자 하나면 있으면 다 된다니. 꼭 나 같은 머저리잖아! 그 끝은 나처럼 된다!”
그는 숫제 깔깔대며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황금을 녹여 만든 금발, 왕국을 가지게 될 사람, 누가 들어도 알폰소 왕자를 지칭하는 이야기였다.
침묵을 지키던 사람들도 참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수군대기 시작했다.
- “지금 제가 똑바로 들은 것이 맞지요?”
- “쉿! 입 다무세요. 지금 말 보태봤자 좋을 것이 하나도 없소.”
- “국왕 폐하 심기를 봐요.”
레오 3세는 옥좌에 앉아 손잡이를 꾹 눌러 잡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근위대장!”
“예, 폐하.”
“저 헛소리나 찍찍해대는 광인을 당장 끌고 가서 국왕 모독죄로 목을 잘라라!”
근위대가 달려들어 곱사등이 광대의 팔다리를 붙들고 질질 끌어내기 시작했다. 광대는 끌려나가면서도 깔깔 웃으며 레오 3세에게 삿대질을 했다.
“무엇이 중한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깔깔! 임금님, 당신은 지금 행복하세요? 깔깔깔!”
“무엄한 놈!”
혹 떼려다 혹을 붙인 레오 3세는 부들부들 떨며 호통을 쳤다.
“모두! 미치광이 광대가 한 쓸데없는 소리는 마음에 담지 말아라. 바깥에 나가서 쓸데없는 소리를 옮기는 자는 참형에 처할 것이다!”
- “예, 폐하!”
방 안의 신하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르비엥 백작도 포함이었다.
그때 근위대 장교가 달려 들어와 근위대장에게 귓속말을 했다. 근위대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레오 3세에게 고했다.
“폐하……. 보고가 들어왔는데, 따로 들으시겠습니까?”
좋지 못한 내용임이 틀림없었다. 레오 3세는 고개를 끄덕여 근위대장을 가까이 불러 귀엣말로 이야기를 들었다.
- “살인 현장을 보지는 못했는데, 시신을 유기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정원사로, 온전한 사람입니다.”
“누가 그런 끔찍한 짓을 한 겐가!”
근위대장은 당혹스럽게 주변을 살피고는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 속삭였다.
-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지만 알폰소 왕자 전하의 기사 중 하나였다고…….”
“뭐라고!”
- “푸른 서코트*를 입고 팔에 알폰소 전하의 월계수 문장을 두르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국왕의 직속 근위대는 붉은 서코트를 입었고, 그 외의 기사들은 푸른 서코트를 입었다. 왕비궁 소속이거나 왕자궁 소속이라는 이야기였다.
- “게다가……. 미레이유 공작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왕자궁의 관리 하에 있는 농막입니다.”
레오 3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어디로 모실까요.”
“어디긴 어디야!”
‘왕자궁!’이라고 외치려던 레오 3세는 갈리코 측 인원들의 눈치를 보며 마지막 단어를 삼켰다. 두 배로 분노한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방 안에 있던 근위대를 전부 이끌고 폭풍처럼 방을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