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제가 바라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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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제가 바라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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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화> 제가 바라는 것은
2022.04.24.
아리아드네는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으나 속내는 복잡했다. 그새, 옷장에 숨은 아리아드네와 알폰소를 마르그리트 왕비가 몸으로 지켜 주었다고 해서, 일말의 기대가 생긴 모양이었다.
“……저는.”
처음에 아리아드네는 분명히 왕자비의, 더 나아가서는 왕비의 자리를 원했다. 코앞에서 이사벨라에게 낚아채진 그 황금의 왕관. 알폰소는 그것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알폰소가 그녀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그의 시종일관 한결같은, 다정한 배려. 그녀를 바라보는 선량한 푸른 눈. 그 어떤 일에도 화내는 법이 없이 온화한 성품.
그리고 마르그리트 왕비의 자애로움이 있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너는 내 아들에게 걸맞은 아이라고. 그리고 돌려주고 싶었다. 받았던 만큼. 알폰소에게, 마르그리트 왕비의 아들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들이 훌륭한 만큼.
아리아드네는 말했다.
“……저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바라는 것이 없다면 거짓말일까. 그녀는 알폰소의 옆자리를 원했다. 영원히 그의 옆에 서서 그의 체온을, 그의 숨결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하는 말들이 진심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올바르게 되돌려 놓으려는 것뿐입니다.”
당신의 목숨을 구하고, 알폰소 왕자의 왕좌를 지키고.
“거짓말을 하진 않겠습니다. 누군가가 내일 당장 왕자비의 관을 내리신다면 저는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가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게 제 제일 목표는 아닙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오묘한 눈빛으로 아리아드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조금 의기소침해졌지만, 마음을 가다듬었다. 사실 이런 뜬구름 같은 이야기만 듣고 그녀의 속내를 다 알아 들어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세상의 타인들은 독심술사가 아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느리게 대답했다.
“내 너를 두고 보겠다.”
아리아드네는 여기에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두고 보아 주십시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 * *
“뭐라고!”
사절단원의 손으로 전달된 르비앵 백작의 비밀 보고서를 받은 외드 대공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좋은 곳에 시집가라고 먼 곳까지 보내놨더니만, 뭐? 이런 사고를 쳐?!”
그는 보고서를 읽고, 또 읽었지만 안타깝게도 거기에 쓰여진 단어들은 확실했다.
- 라리에사 대공녀가 데 마레 추기경의 차녀를 죽여 달라고 미레이유 공작에게 청탁.
- 그 과정에서 미레이유 공작이 사망.
- 라리에사 대공녀가 미레이유 공작에게 살해 청부를 한 증거물이 있음. 편지임.
“이 미친 작자는 왜 자기 손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
외드 대공은 길길이 날뛰었다.
“아니지, 차라리 죽어서 다행이야. 내 딸을 옭아매려고 한 짓이 틀림없으렷다. 죽어버렸으니 이제는 입을 열 수가 없지.”
그는 전령으로 온 사절단원에게 물었다.
“자네, 저 편지가 어떻게 됐는지 아나?”
“합하, 송구하오나 저 편지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사옵니다. 제가 떠나기 전까지의 상황을 보고드리자면, 저희 측에서 미레이유 공작의 소지품을 샅샅이 뒤졌으나 나오지 않았고, 미레이유 공작의 사체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 망할 놈의 편지가 나타나는 날이 그의 딸의 명줄이 끊기는 날이었다.
“이 내용이 당연히 몽펠리에 궁에는 보고되지 않았겠지?”
레오 3세가 저 편지를 발견한다면 라리에사를 에트루스칸 왕궁 감옥에 가둬도 외드 대공과 갈리코 왕국은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 편지의 존재를 필리프 4세가 알게 된다면 레오 3세의 공세를 막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필리프 4세라면 라리에사의 편지가 일반에 공개되어 외교적 불리함을 견디느니 그 전에 사람을 보내 라리에사를 암살해 버리고 그 탓을 에트루스칸 왕국에 씌우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르비엥 백작께서 일처리를 몹시 잘 하셨습니다. 다행히 미레이유 공작 측의 사람들이 본 편지에 대해 알고 있다는 기척이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몽펠리에에 교신하지 못하도록 잘 감시하고 계십니다.”
그때 외드 대공의 비서관이 나타나 외드 대공에게 두꺼운 양피지 꾸러미를 하나 건넸다.
“합하! 보셔야 할 서류가 있습니다. 에트루스칸 왕국에서 비밀리에 보내온 친전서(親展書)입니다.”
외드 대공은 미간을 찌푸리며 편지 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레오 3세 폐하이신가?”
레오 3세가 굳이 외드 대공에게 편지를 쓸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외드 대공이 에트루스칸에서 받을 편지가 있다면 레오 3세가 보낸 것이리라.
“아닙니다, 합하. 6촌이신 마르그리트 왕비 폐하이십니다.”
외드 대공은 의혹에 가득 찬 표정으로 마르그리트 왕비의 편지를 뜯었다. 그들은 딱히 교류를 나누는 6촌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편지를 모두 다 읽은 외드 대공은 경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지금 에트루스칸에서 온 최신 소식이 어떻게 되나!”
“확인된 사실은 아니오나, 교단 쪽에서 나온 첩보에 의하면 에트루스칸 왕국 쪽에서 미레이유 공작의 사망은 갈리코 왕국의 잘못 탓이라고 거세게 공격할 예정이라는 소문이 떠돈다고 합니다.”
외드 대공은 손에 쥔 양피지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갈리코 왕국의 잘못? 무슨 잘못!”
“정확한 내용까지는 아직 잘…….”
그는 설마 딸의 죄상이 벌써 드러난 것이 아닌지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이 편지가 언제 쓰인 거지? 마르그리트 왕비가 참지 못하고 그새 레오 3세에게 편지의 존재를 분 것이 아니냐?!”
몽펠리에 대주교 측이 갈리코 왕국의 잘못으로 알고 있는 내용은 ‘미레이유 공작의 타국 왕궁에서의 허락받지 않은 첩보 행위’였지만 지금의 외드 대공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외드 대공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장 필리프 4세 폐하를 만나 뵈어야 해!”
“마차를 대령하겠습니다, 대공 합하.”
“라리에사를 어서 데리고 돌아와야겠어.”
사고를 치긴 했어도 그의 친혈육이다.
“아랫동네까지 갔다가 결혼 못 하고 돌아왔다고 평판에 흠집이야 나겠지만 외국 감옥에 갇히는 것보다는 백번 나아.”
“여부가 있겠습니까.”
시종 하나가 허겁지겁 들어와 고했다.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가자!”
* * *
라리에사 대공녀는 요사이 자신의 처소에 틀어박혀 옴짝달싹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밥도 거의 먹지 않았고 잠은 전혀 못 잤다.
‘미레이유 공작이 죽은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만천하에 들키면 어떡하지……!’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지옥 같은 상상을 하며 정오가 훨씬 넘은 시간에도 침대 위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라리에사 대공녀님.”
방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르비엥 백작이었다. 라리에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익숙한 일이었는지, 르비엥 백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계속했다.
“본국에서 지령이 왔습니다.”
라리에사는 눈을 크게 떴다. 올 것이 왔구나. 과연, 아버지와 필리프 4세 폐하께서는 어떤 결정을 내렸지? 나를 버리셨을까……?
“귀환 명령입니다.”
라리에사는 침대보 안에서 몸을 떨었다. 그녀는 열흘 만에 처음으로 르비엥 백작에게 목소리를 내어 대답을 했다. 목소리가 엉망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결혼 협상을 일시 중단하고 일단 본국으로 귀국하시라는 필리프 4세 폐하의 왕명이십니다.”
라리에사는 참지 못하고 이불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방문을 벌컥 연 그녀는 눈 밑이 퀭했고 몹시 여위어 있었다.
“나도 말 정도는 알아먹어!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내가……. 내가 알폰소 왕자님과 결혼을 못 하게 됐다는 소리야?!”
르비엥 백작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라리에사 대공녀가 이번에 대형사고를 친 이후로 르비엥 백작은 그녀의 비위를 맞춰 주지 않았다.
“잠정 중단일 뿐입니다. 본국에서는 협상 결렬이라고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라리에사는 르비엥 백작의 답변에 울부짖었다.
“그 말이 그 말이잖아! 나더러 이 먼 타국 땅까지 와서 남의 왕궁에서 반년 가까이 살아 놓고는 갈리코에 빈손으로 돌아가라고?! 난 못 해! 죽어도 못 해!”
“국왕 폐하의 명령입니다.”
르비엥 백작은 라리에사에게 ‘운 좋은 줄 알아라, 이 멍청이 대공녀야’라고 윽박지르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라리에사의 아버지인 외드 대공은 라리에사를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많은 정치적 희생을 했다.
필리프 4세는 에트루스칸 왕국이 미레이유 공작에 대한 죽음을 갈리코 왕국의 탓으로 돌릴 거라는 첩보를 받고도 뭉그적거렸다. 정치적 유불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평소 모습과 달랐다.
외드 대공은 ‘이제껏 왕권에 가장 우호적이던 귀족가’의 명찰을 떼고 갈리코 왕국의 명예를 위해서—사실 자기 딸의 구명을 위해서—절대로 협상을 진행시키면 안 된다고 거품을 물었다.
각종 내치에서 발로아 대공 외드의 협력이 필수 불가결했던 필리프 4세는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서서 협상 일시 중단을 선언하고 사절단을 귀국시켰다.
‘출혈이 컸지, 필리프 4세 폐하 입장에서도.’
필리프 4세는 미레이유 공작이 죽은 판에 사절단을 맨손으로 귀국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에트루스칸 왕국 측에 사정이 어찌 되었건 간에 미레이유 공작의 목숨을 취한 자의 신병은 갈리코 왕국 측이 기필코 인도받아야 하겠다고 우겼다. 자존심 싸움이었다.
지난한 토론 끝에, 에트루스칸 왕국 측이 한 발자국 양보해 미레이유 공작을 죽인 것으로 되어 있는 엘코 경을 갈리코로 넘기기로 했다. 그는 갈리코 사절단과 함께 갈리코로 끌려갈 예정이었다.
미레이유 공작이 범죄를 저질렀다면 엘코 경을 받아갈 명분도 없었을뿐더러, 즉위한 지 얼마 안 되는 왕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절대적으로 받아내야 했던 일인 만큼 갈리코는 협상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 대한 교환으로 갈리코 왕국은 국경 무역의 세율을 기존의 80%에서 65%까지 감면해주기로 했다. 큰 지출이었다.
‘이번에는 외드 대공께서 원하시는 대로 됐어. 하지만 국왕 폐하께선 언제고 반드시 대공께 복수하실 거다.’
르비엥 백작은 주군에게 큰 짐을 안긴, 밀가루 반죽같이 생긴 대공녀를 차가운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수하의 경멸하는 시선을 느낀 라리에사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우리는 내일 당장 출발합니다. 하녀들을 시켜 행장을 꾸리시지요.”
“……내일 당장?”
“오늘 당장이라도 출발하고 싶지만 인원이 많고 대공녀님이 계셔서 내일 아침으로 잡았습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최대한 빨리 국경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라리에사는 르비엥에게 더 매달려 보고 싶었으나 소용없다는 사실을 느끼고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알았네.”
르비엥 백작은 목례만 하고는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방바닥에 주저앉아 잠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수잔느 언니의 죽음. 그녀에게 굴러들어온 기회. 황금의 왕자님. 다 망쳐버렸다. 내 두 손으로.
“아니야!”
라리에사 대공녀는 느닷없이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수군수군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라리에사는 거기까지 신경을 쓰기에는 지금 지나치게 한 가지 일에 몰두해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고!”
황금의 왕자님 본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혹시나 그가 말해 주지 않을까? 그는 사실 그녀를 그렇게까지 싫어하지는 않는다고, 모진 말을 내뱉고 나니 미안했다고. 추기경의 서출 따위 가지고 논 것에 불과하고 진실로 고귀한 신분인 자신의 배필을 맞이할 거라고.
“하녀! 하녀!”
몸치장 하녀들을 부른 라리에사는 거칠게 명령했다.
“당장 내 드레스를 대령해.”
무슨 일을 당할까 두려워 고개를 조아린 그녀들은 신속하게 라리에사에게 드레스 세 벌을 대령해서 고르게 했고, 그중 가장 화려한 것을 고른 라리에사는 눈물에 젖은 눈가를 훔치며 화장품이며 보석 장신구까지 모두 골랐다.
“왕자님을 뵈러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