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라리에사 대공녀의 절망
(145/733)
146화 라리에사 대공녀의 절망
(145/733)
<제146화> 라리에사 대공녀의 절망
2022.04.27.
라리에사 대공녀는 왕자궁까지 한달음에 도달했지만, 왕자궁의 출입을 담당하는 시종에게 단호하게 제지당했다.
“대공녀님, 왕자 전하께서는 현재 외부인과 접견을 하실 수 없습니다.”
“말, 라리에사 대공녀라고…….”
“대공녀님, 여기에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현재 왕자님께서는 왕자궁에 계시지 않아 보고도 올릴 수가 없습니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 왕자님, 만나야!”
갈리코 억양이 짙은 에트루스칸어로 더듬더듬 따지는 라리에사 대공녀에게 시달리는 시종을 구원하러 나타난 것은 왕자의 보좌관인 베르나르디노 경이었다.
“대공녀님. 왕자 전하께서는 왕비궁에서 요양 중이십니다. 기별을 원하신다면 넣어 드리겠으나 답장을 기다리시지는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다! 라리에사는 간절한 표정으로 매달렸다.
“잠깐이면 돼요……!”
하지만 언어가 통한다는 뜻이 상대방이 라리에사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뜻은 아니었다. 베르나르디노 경은 단호했다.
“왕자님께서는 모친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중이라 일체의 외부 면회는 받지 않고 계십니다. 모자간의 시간을 존중해 주십시오.”
“반드시 물어봐야 할 일이 있어요!”
절박한 라리에사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르디노는 사무적으로 답했다.
“안타깝게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공녀님.”
더 매달리려는 라리에사 앞에서 베르나르디노 경은 매몰차게 뒤로 돌았다.
“좋은 저녁 보내시길.”
“!”
소름 끼치는 냉대였다. 라리에사는 산 카를로에 도착한 이후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저절로 과호흡이 오는 것 같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알폰소 왕자에게 참혹하게 오해받은 상태로 마무리 지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그녀를 버티게 했다.
여기에서 무너져 내릴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평생 알폰소 왕자의 기억 속에 끔찍한 여자로 남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쁘게 여겨지는 것은 라리에사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일이었다.
‘왕비궁에 계신다고……?’
왕비궁에는 언제나 라리에사 대공녀를 지지해 주었던 카를라 부인이 있다. 그녀가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고 거의 달리다시피 해서 왕비궁 방향으로 향했다.
‘카를라 부인만 만나면, 부인이 왕자님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실 거야……!’
내일 아침이면 그녀는 이곳을 떠나게 된다. 빨리 만나야 한다.
왕비궁의 초입을 알리는 화사한 대리석 아치가 보였다. 봄을 알리는 넝쿨이 아치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왕비궁에 도착한 라리에사 대공녀는 운이 좋았다. 얼굴이 익숙한 마르그리트 왕비의 하녀를 만난 것이다.
“데려와, 카를라 부인!”
왕비의 하녀는 다짜고짜로 명령을 내리는 라리에사 대공녀에게 깜짝 놀라, 무릎으로 예를 취해 보이고 종종거리며 뛰어들어가서 카를라 부인을 모시고 나왔다.
자기편이라고 여겨지는 대상을 본 라리에사 대공녀의 흰 밀가루 반죽 같은 얼굴이 안도와 안심으로 흐물대며 무너졌다.
“카를라 부인……! 알폰소 왕자님이 여기에 계신다면서요.”
라리에사는 다급하게 외쳤다.
“저 왕자님을 만나 뵈어야 해요. 만나게 해주실 거죠!”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냉큼 나오던 상냥한 긍정이 나오지 않았다. 라리에사는 불안함에 잠식되어 카를라 부인의 표정을 살폈다. 언제나 다정했고 이웃이나 이모 같았던 카를라 부인의 얼굴이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배척……?’
“왕자님께서는……. 현재 일체의 외부인을 만나지 않고 계십니다.”
- 쿵.
라리에사 대공녀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처음에 느꼈던 ‘표정’은 그녀 혼자만의 예감일 뿐이었지만 카를라 부인의 말 내용은 확실한 거절이었다.
카를라 부인은 항상 라리에사를 ‘곧 우리 식구가 되실 분’이라고 했지 절대 외부인이라고 부르는 적이 없었다.
라리에사는 자존심도 잊고 비굴하게 매달렸다. 그녀는 본디 아랫사람을 거만하기 짝이 없게 다루었지만 가지고 있었던 호의를 잃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너무나 비참하게 했다.
“제발, 제발 말이라도 전달해 주세요. 라리에사 대공녀가 꼭, 마지막……. 아니, 마지막은 아니지만. 알폰소 왕자님을 뵈어야 한다고요.”
곤란해 보이는 카를라 부인은 단박에 거절하지를 못했다. 그녀는 라리에사 대공녀가 매달린 자신의 드레스 소매를 갈무리해 넣고는 마지못해 이야기했다.
“……왕자님께 전갈은 넣어보겠습니다만…….”
“그거면 충분해요.”
라리에사는 알폰소가 자신을 만나주리라 생각했다. 논리적인 이유는 없었다. 그저 기이한 열망이었다.
카를라 부인은 왕자에게 기별을 전달하기 위해 왕비궁 안쪽으로 모습을 감췄고, 혼자 남은 라리에사 대공녀는 체통도 없이 궁전 회랑 복도에 서서 빙글빙글 돌며 하염없이 기다렸다. 20여 분이 흘렀고, 기다리기도 지친 그녀는 아치 모양으로 트여 있는 회랑의 바깥쪽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마르그리트 왕비의 내실이 있는 구획과, 그 위로 세워진 첨탑이 보였다.
‘!’
저 첨탑 꼭대기에, 황금을 녹여 만든 것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 색을 가진 깨끗한 피부의 젊은 남자가 창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는 턱을 괴고 먼 산을 바라보듯 산 카를로 전체를 조망하고 있었다.
알폰소 왕자다.
라리에사는 저도 모르게 양팔을 힘껏 들어 흔들었다. 하지만 황금빛 머리카락의 청년은 이쪽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다급해진 라리에사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
“왕자님―!”
바람이 살랑, 불어와 남자의 머리카락이 공중에 휘날렸다. 아, 저 바람은 왜 그에게만 가서 닿고 나에게는 불어오지 않는가. 조급해진 라리에사는 한 번 더 외쳤다.
“알폰소 왕자님―!!”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아니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려고 고개를 돌리다가 우연히 이 방향을 본 것인지, 알폰소 왕자는 라리에사 대공녀가 서 있던 열린 회랑 방향으로 정확하게 상체를 돌렸다.
기뻐진 라리에사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오른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밀가루 반죽 같은 검박한 얼굴에 아주 큰 미소가 떠올랐다.
‘분명히 나를 보셨어. 우리는 눈이 마주쳤어.’
라리에사의 착각은 아니었다. 알폰소 왕자는 분명히 라리에사 대공녀를 보았다.
하지만 그는 알폰소 왕자가 지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차갑다 못해 잔인하도록 냉혹한 표정으로 휙 상체를 돌렸다. 첨탑의 창가에서 젊은이의 실루엣은 사라져 버렸다.
“아아…….”
알폰소 왕자의 표정까지는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 거리였지만 라리에사 대공녀는 그에게서 본능적으로 ‘경멸’을 넘어선 ‘혐오’를 느꼈다.
‘설마, 설마.’
라리에사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무너질 것 같은 몸을 간신히 지탱했다.
“흠, 흠. 대공녀님.”
그때 복도 안쪽에서 나타난 카를라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에 이미 도착했지만 라리에사 대공녀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자신의 도착을 알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라리에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카를라 부인…….”
라리에사는 정신없이 몸가짐을 추슬렀다. 설마 카를라 부인이 내가 소리 지르는 꼴을 보셨을까?
카를라 부인은 단정하게 딱 한마디를 했다.
“왕자님께서는 면회를 거절하셨습니다.”
다리에 힘이 빠진 라리에사는 그 자리에서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평소 같았다면 카를라 부인이 분명히 라리에사를 부축해 주었을 것이다. 호들갑을 떨며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무슨 일인지 다정하게 물어보고, 기분을 북돋워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를라 부인은 안부 인사조차도 없이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대신 일반 하녀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은 너나할 것 없이 라리에사를 일으키려고 들었다.
라리에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공녀를 추슬러서 그녀의 처소로 돌려보내기 위함이었다.
“꺼져! 나한테 손대지 마!”
하녀들은 갈리코 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지장이 되지 않는 듯했다. 어차피 대공녀의 지시에 따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녀들은 라리에사 대공녀를 차마 강제로 끌고 가지는 못하고, 대공녀를 몸으로 둘러싸 다른 사람들에게 이 추태가 보이지 않도록 했다.
라리에사는 그들을 물리치지도 못하고 명이 통하지 않는 채로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눈물이 바닥날 때까지 엉엉 울었다. 몸부림을 쳐도 인의 장막은 굳건하게 그녀를 내보내주지 않았다. 알폰소 왕자는 이제 영영 볼 수 없다. 그녀의 세상이 끝났다.
* * *
다음 날, 라리에사 드 발로아 대공녀는 창백한 얼굴로 감금되다시피 마차에 태워져 도망치듯 산 카를로를 떠났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싫어!”
“대공녀님께 궁의가 처방한 진정제를 드려라.”
그녀가 파리한 안색으로나마 난동을 부리지 않고 순순히 마차에 앉은 채로 떠난 것은 순전히 의사가 처방한 약초 덕이었다.
팔라지오 카를로는 떠나는 갈리코 왕국의 사절단에게 예우 자체는 모두 베풀어 주었으나, 공식적으로 잡히는 국왕이나 왕비의 환송 행사는 일체 생략했다.
게다가 팔라지오 카를로는 압송되는 엘코 경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대했다. 죄수를 대하는 취급도 아니고, 그렇다고 타국으로 떠나는 자국의 기사에 대한 취급도 아니었다.
모든 면에서 환대인 듯 환대가 아닌 듯 애매모호한 이송이었다.
“…….”
아리아드네는 마르그리트 왕비의 옆에 서서 왕비의 거소에 있는 가장 높은 탑에서 떠나는 갈리코 사절단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제저녁 알폰소 왕자가 서 있었던 바로 그 첨탑이었다. 하지만 알폰소는 이 자리에 없었다. 마르그리트 왕비와 그녀의 그림자 같은 카를라 부인, 그리고 아리아드네가 전부였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
마르그리트 왕비가 차분한 목소리로 아리아드네를 불렀다.
“예, 왕비 폐하.”
“네 가장 큰 목적이 달성되었구나.”
떠나는 갈리코의 대공녀를 바라보며 왕비가 한 말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약간의 마음 아픔은 숨긴 채 담담히 대답했다.
“제 가장 큰 목표는 왕자 전하와 왕비 폐하의 안위입니다.”
왕비는 아리아드네의 말에는 가타부타 답변하지 않은 채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아이야.”
“예, 폐하.”
“나는 네가 당분간 내 아들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리아드네는 얕은 숨을 들이쉬었다. 왕비의 의중은 지난 십여 일간 왕비궁에서 지내면서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는 왕비궁 깊은 곳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며 지냈지만 절대로, 실수로라도 같은 왕비궁 안에서 지내고 있을 알폰소 왕자와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그녀 역시 눈치껏 알폰소를 만나게 해 달라고 굳이 부탁하지 않았다. 더부살이하는 중인 집주인을 화나게 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아리아드네는 앞으로 한 달간은 마르그리트 왕비와 긴밀히 지낼 필요가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왕비 폐하의 말씀은 알아들었습니다.”
“아주 오래는 아니에요.”
카를라 부인이 변명하듯 끼어들었다. 사람인지라, 공을 세운 아리아드네를 배제하는 것이 미안한 어투였다.
“두세 달? 이 사건이 가라앉을 때까지만요.”
아리아드네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마음이실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가 왕비 폐하라도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사실 두세 달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최대 한 달 뒤면 아리아드네는 왕비의 목숨을 구한 소녀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 공으로도 왕자와 연락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하면 이번 생에는 글렀다고 봐야지.
“대신, 저를 자주 궁에 불러 주시겠어요?”
카를라 부인이 ‘요것 봐라’라는 눈빛으로 아리아드네를 쏘아보았다. 너그럽게 대해 주었더니, 바로 기어올라?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왕비 폐하의 곁에서 왕비 폐하께 증명하고 싶습니다. 제가 왕자 전하께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요.”
그녀는 마르그리트 왕비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이번 계책이 성공할 경우에 대한 상을 미리 내려주신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마르그리트 왕비는 아리아드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표정한 상태로 한참 자기보다 반 뼘 정도 키가 작은 검은 머리칼의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심줄 굵은 아리아드네조차 조금 긴장하기 시작할 때쯤, 마르그리트 왕비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좋아.”
그녀는 손끝으로 아리아드네의 이마를 톡 쳤다.
“네가 맹랑하단 사실은 처음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너는 도통 숨길 줄을 모르는구나!”
아리아드네도 방긋 웃으며 답했다.
“솔직한 것이 제 장점이랍니다.”
“어이없는 녀석.”
첨탑 위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유쾌하고 화기애애해졌다.
“내 너를 앞으로 자주 부르마. 약속하지.”
아리아드네는 빙긋이 웃었다. 시작이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