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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생각보다 더 빨리 (148/733)

<제149화> 생각보다 더 빨리 2022.05.08.

아리아드네는 그 뒤로도 약 이삼 일 간을 몹시 바쁘게 보냈다. 왕궁에 머물렀던 그간 밀린 집안일이 많았다. 그녀는 상인들에게 생활용품의 대금을 치르고, 내년도를 위한 계약을 하고, 낡은 것들을 허물고 또 고치고, 식솔들에게 급료를 지급했다. 그래서 왕궁에 대한 생각을 할 겨를도 없던 와중에 왕궁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16551003839001.jpg “카를라 부인!”

아리아드네가 집으로 돌아온 지 나흘차 만에 왕비의 측근인 카를라 부인이 직접 데 마레 대저택에 행차한 것이다.

16551003839001.jpg “먼저 기별을 주시고 오셨으면 손님 대접을 좀 더 풍성하게 했을 텐데요.”

아리아드네는 이제는 자신이 쓰고 있는 안주인의 응접실에서 카를라 부인을 맞이하며 인사치레를 건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둘러 내온 가에타 산 장미차는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상품(上品)이었다. 그러나 카를라 부인은 장미차를 입에 대지도 않은 채 딱딱하게 답했다.

16551003839012.jpg “손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전령으로 왔으니 손님 대접은 됐습니다.”

그녀는 품 안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아리아드네에게 건넸다. 아리아드네는 받은 편지를 바로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초대장이었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 양에게, 돌아오는 토요일, 왕비궁에서 소규모 정찬을 주최할 예정입니다.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마르그리트 왕비.」 카를라 부인은 불퉁하게 말했다.

16551003839012.jpg “왕비 폐하의 측근이 되고 싶다고 말했지요? 왕비 폐하께서 신경 좀 쓰셨습니다. 초대받은 사람의 수가 많지 않아요. 자리배정도 아주 가깝습니다. 영광인 줄 아세요.”

막상 아리아드네는 완전히 다른 궁리를 하고 있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궁 내에서 열린 소규모 만찬에서 독살당해 죽었다.

16551003839001.jpg ‘아직 날짜가 안 되었을 텐데, 벌써?’

하지만 라리에사 대공녀가 불측의 사건으로 갈리코 왕국으로 돌아가 버렸고, 약혼도 성사되지 않았다. 상세한 타이밍 같은 것은 충분히 변하고도 남았다.

16551003839001.jpg “혹시, 참석자가 어떻게 되지요?”

카를라 부인은 낄 깜도 안 되는 아이가 설마 다른 참석자의 면면을 살피면서 까다롭게 구는 건가, 라고 생각해 콧김을 뿜었다.

16551003839012.jpg “지금 참석자 구색까지 맞추는 겁니까? 싫은 사람이 나타나면 나는 안 가겠다 뭐 이런 거예요?”

아리아드네는 쓴웃음을 지으며 부인했다.

16551003839001.jpg “아뇨, 설마 그럴 리가요.”

사교계의 꽃인 귀부인들이 찍은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흔히들 하는 행태였지만 아리아드네는 그럴 생각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녀는 대충 둘러댔다.

16551003839001.jpg “제가 특히 조심해야 할 언사나 입지 말아야 할 옷이 있을까 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혹시, 루비나 백작 부인도 오시는 만찬일런지요?”

카를라 부인의 안색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16551003839012.jpg “그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네요.”

마르그리트 왕비는 루비나 백작 부인과 같은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인간적으로 당연한 일이었지만 공무를 주재해야 하는 왕비로서는 부덕하다고 취급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레오 3세가 주재하는 공식 행사나,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대미사 같은 경우에는 마르그리트 왕비도 어쩔 수 없이 루비나 백작 부인과 함께 참석을 하고는 했다. 하지만 왕비가 여는 사적인 모임에서는 루비나 백작 부인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16551003839012.jpg “이번에 레오 3세 폐하와……. 아무래도 좀 그렇게 되어서. 왕비 폐하께서 화해의 제스쳐로 루비나 백작 부인을 초대하셨어요.”

레오 3세와 루비나 백작 부인의 관계도 이제는 20년이 넘었다. 이렇게 장기 집권하는 정부란 나름 대단한 것이기는 했지만, 레오 3세와 루비나 백작 부인 사이는 예전처럼 애틋하고, 눈에서 젖과 꿀이 흐르며, 별도 달도 모두 따다 주고 싶어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그저 루비나 백작 부인의 존재 그 자체가 마르그리트 왕비를 긁었고, 임금은 익숙한데다 자기 사생아의 어머니인 루비나 백작 부인을 내칠 만큼 마르그리트 왕비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마르그리트 왕비가 루비나를 인정해 주는 것이 국왕의 체면을 세워주는 모양새가 되었을 뿐이다.

16551003839012.jpg “별일은 없을 겁니다. 그 여자도 나이를 먹을 대로 먹었는데 이제 와서 미친 짓거리는 안 하겠죠.”

아리아드네는 ‘아니요!’라고 외칠 뻔한 자신의 혀끝을 깨물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흥분해 있었다. 전생의 마르그리트 왕비는 루비나 백작 부인이 합석한 드문 자리에서 죽었다. 루비나 백작 부인이 대번에 암살의 주범으로 지목됐던 이유도 그 때문이고. 암살 시도는 이번 주 토요일이다! - 똑똑. 아리아드네가 카를라 부인에게 맞장구를 춰 주려고 했을 때, 누군가가 방문에 노크를 했다. 우편 수발 하인이었다.

16551003839001.jpg “손님이 계신데 무슨 일이지?”

아리아드네는 조금 엄격해진 목소리로 우편 수발 전담 하인에게 물었다. 중요한 손님이 계신데 하인이 난입하다니, 예에 맞지 않았다.

16551003839012.jpg “중요한 서신이 도착한 것 같아서요, 아가씨.”

하인은 아리아드네에게 편지 한 통을 건넸다. 편지 겉봉에는 별다른 표식이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단숨에 깨달았다. 알폰소가 보낸 편지다. 편지의 두께며, 사용하는 종이의 재질이며, 모두 왕자궁에서 나온 물건이었다.

16551003839001.jpg “나중에, 나중에 확인할게. 지금 손님이 오셨잖아.”

아리아드네는 새로 도착한 편지의 발신인이 누구인지 카를라 부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편지를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옆의 협탁에 밀어 얹었다. 하지만 우편 수발 하인은 끔찍하도록 눈치가 없었다.

16551003839012.jpg “왕자궁 사람이 지금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요. 바로 답장을 쓰시겠습니까?”

‘왕자궁’이라는 이야기에 카를라 부인의 눈썹이 대번에 치켜 올라갔다. 아리아드네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며, 겉으로는 놀란 척을 했다.

16551003839001.jpg “뭐라고? 겉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아서 전혀 몰랐어! 이게 왕자궁에서 온 편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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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연기에는 도통 소질이 없었다. 아리아드네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야속하기 짝이 없게도 하인은 ‘아가씨한테 도착하는 익명의 편지는 죄다 왕자궁 편지지 무슨 소리세요’ 같은 표정으로 아리아드네를 쳐다보았다.

16551003839001.jpg ‘닥쳐, 제발 닥쳐!’

다행히 마음의 소리가 들렸는지 하인은 더 이상 입방정을 떨진 않았다.

16551003839012.jpg “답장은 없다고 할까요?”

아리아드네는 입술을 꽉 깨물며 대답했다.

16551003839001.jpg “그래.”

하지만 카를라 부인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16551003839012.jpg “……데 마레 영애.”

16551003839001.jpg “네?”

16551003839012.jpg “그 편지, 받을 건가요?”

그녀는 꼬장꼬장하게 말했다.

16551003839012.jpg “영애가 우리 왕비 폐하께 약속드린 사실을 잊지 마세요.”

아예 편지의 수신부터 거절해 왕자에게 선명한 메세지를 보내라는 소리였다. 아리아드네는 ‘왕비 폐하께서는 분명히 당분간 연락을 하지 말라고 하셨을 뿐이지, 아드님과 헤어지라고까지는 말씀 안 하셨는데요!’라고 항변할까도 잠시 고민해보았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마르그리트 왕비의 암살 시도는 이번 주 토요일에 있을 예정이다. 나흘 뒤면 어차피 국빈 대접이다. 여기서 버텼다가 혹시나 정찬 초대가 취소되기라도 하면 대형 사고다. 아리아드네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답했다.

16551003839001.jpg “부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녀는 협탁 위에 올려뒀던 편지를 하인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16551003839001.jpg “돌려보내라.”

16551003839012.jpg “예.”

아리아드네는 여전히 도끼눈을 뜨고 있는 카를라 부인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16551003839001.jpg “내가……. 당분간 연락을 원치 않는다고 말씀드려.”

16551003839012.jpg “그리하겠습니다.”

하인은 편지를 받아 들고 응접실을 떠났다.

16551003839001.jpg ‘알폰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아리아드네는 속으로만 안타까움을 삼켰다. * * *

16551003839012.jpg “데 마레 영애께선……. 서신 수령을 거절하셨습니다.”

시종의 전언에 알폰소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16551003927148.jpg “뭐라고? 제대로 전달한 것은 맞고?”

16551003839012.jpg “예. 직접 본인께 전달했지만 거절하셨다고……. 전령이 당장 영애 본인께 전달해 달라고 두 번 세 번 부탁했다고 합니다.”

16551003927148.jpg “내가 보낸 편지라는 사실은 알았고?”

16551003839012.jpg “전달한 자가 왕자궁에서 보낸 편지라고 확실히 이야기했다고 말했습니다.”

16551003927148.jpg “더 남기신 말씀은 없느냐?”

16551003839012.jpg “당분간 연락을 원치 않으신다고…….”

그녀가 연락을 원치 않는다니,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보고를 마친 수하가 나간 뒤 알폰소는 멍하니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16551003927148.jpg “말도 안 돼…….”

인생을 살면서 처음으로 모든 것을 다 걸었다. 의무도, 수하도, 미래도 전부 도외시하고 그녀 한 명만 보았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차가운 거절이었다.

16551003927148.jpg ‘내가 부족한 탓이었을까?’

믿음직하지 못해서? 그녀를 위험에서 완벽하게 보호하지 못해서? 권력 기반이 단단하지 못해서? 알폰소 왕자는 도통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사실 그에게 무언가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굳이 뭔가를 요구했다면 애정 표현이라던가, 라리에사 대공녀에게 거리를 둘 것 정도였을 뿐이다. 이권, 권력, 금전, 하다못해 보석조차도 그녀는 바란 적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가서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고, 바라는 것이 있다면 뭐든지 들어줄 테니 전처럼 내 손을 잡고 사랑을 속삭여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녀의 체온을 느끼고 살냄새를 맡으며 뺨을 맞댈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의사는 명확했다.

16551003839001.jpg ‘내가 당신과의 연락을 원하지 않는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두루뭉술하게 굴었다면 알폰소는 당장 데 마레 저택의 정문으로 쳐들어가서 농성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아드네가, 그의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 알폰소는 세상이 끝나는 듯한 암담함에 책상에 머리를 묻고 눈을 감았다. * * * 결전의 날이 밝았다. 아리아드네는 묘한 흥분감에 새벽같이 눈을 떴다.

16551003839001.jpg ‘아세레토의 사도 전날과 비슷한 느낌이네.’

그때도, 성공을 자신할 수 없어서 손이 떨렸더랬지. 하지만 준비하는 자에게 성공이 있는 법이다. 시간은 촉박했지만,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모두 갖췄다. 전생의 마르그리트 왕비는 루비나 백작 부인이 참석했던 오찬 모임에서 비소 투약으로 암살당했다.

16551003839001.jpg ‘비소가 들어갔던 음식은……. 아마 왕비 폐하께서 드시는 물이었을 거야.’

공식 만찬에서는 모두가 같은 음식을 먹는다. 주인과 다른 음식을 내는 것은 손님에 대한 실례이기 때문이다. 음식 자체에 탔다면 마르그리트 왕비만 콕 집어 중독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정찬에 참여한 초대손님 전원이 당했으리라.

16551003839001.jpg ‘왕비 폐하께서 드시는 물만 손님과 함께 나누지 않고 폐하만 드시지.’

마르그리트 왕비는 추위를 몹시 타서, 시트론 조각을 넣은 미지근한 물을 항시 가지고 다니면서 마셨다. 반쯤은 약으로 마시는 물건이었고, 객관적으로 맛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굳이 손님 대접용으로 내놓지는 않았다. 그 외에 왕비가 사용하는 식기에만 비소를 발라놓는다든가 하는 방법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소는 액체류에 잘 섞어 놓아야 중독이 쉬웠다.

16551003839001.jpg ‘첫번째로 확인할 것은 왕비 폐하께서 드시는 물. 두 번째로 확인할 것은 식사에 섞여 나오는 스튜 류.’

아리아드네는 산차와 주세페를 보내 집시 거주 구역을 전부 다 뒤져 간신히 구한 유황천 농축액을 손에 꽉 쥐었다. 전생에서 체자레를 향한 암살 시도를 몇 번이나 몸으로 막아내며 존재를 알게 되었던, 중앙 대륙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소 검출 방법이었다. 올바르게 제련된 유황천 농축액을 비소가 함유된 물질에 혼합하면, 샛노란색 침전물이 생긴다.

16551003839001.jpg ‘할 수 있어.’

  - 똑똑. 방에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울리고, 산차가 아리아드네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16551003955378.jpg “아가씨, 마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하얀 도자기 병을 품속에 잘 갈무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16551003839001.jpg “그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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