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다툼
(154/733)
154화 다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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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화> 다툼
2022.05.25.
체자레 백작은 왕궁 시종을 추궁했다.
“어머니가 지하 감옥에 들어가실 일이 도대체 뭐가 있어!”
루비나 백작 부인은 거의 30여 년에 가깝도록 명실상부하게 레오 3세가 가장 총애하는 여자였다. 이런 장기집권 정부는 역사에도 몇 없었다. 이는 그들의 관계가 상당히 안정적이고 끈끈하며, 사소한 일로 루비나 백작 부인이 투옥될 리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루비나 백작 부인의 시종은 쩔쩔매며 겨우 소식을 전했다.
“마르그리트 왕비 폐하를 독살하시려 한 혐의로 조사를 위해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셨습니다…….”
“왕비 독살?!”
체자레는 어이가 없는 와중에도 내심 수긍했다. 왕비 독살이라니, 상상도 못 해본 일이기는 했으나 자기 모친이 충분히 하고도 남을 짓 같기는 했기 때문이었다.
- “너는 왕이 되어야 해!”
루비나 백작 부인의 터무니없는 집착이 실행에 옮겨지면 그런 꼴도 충분히 가능해 보이기는 했다.
‘진짜, 저지르기 전에 물어나 보고 지르지!’
그랬다면 체자레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매달려 못 하게 했을 것이다.
‘배부르고 등 따스운데 뭐 하러 그런 짓을!’
왕위를 준다면야 사양하지 않고 받겠지만 이런 무리수까지 두면서 시도할 일은 결코 아니었다. 시기도 틀렸고 방식도 틀렸다. 체자레를 왕으로 만들고 싶다면 알폰소를 독살해야지 뭐하러 마르그리트 왕비를 건드리나.
그가 의구심을 가진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그런데, 서쪽 탑도 아니고 지하 감옥?”
“예…….”
이것은 레오 3세가 정말, 매우, 몹시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모든 구름에는 빛나는 부분도 있다고, 지하 감옥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가자. 마침 잘 됐다.”
“예? 백작 부인의 투옥이요?”
“그럴 리가 있냐!”
서쪽 탑은 궁전의 일부로 마르그리트 왕비의 직통 관할 하에 있었지만, 지하 감옥을 비롯한 에트루스칸 왕국 사법기관의 총 책임자는 마침 오타비오의 아버지인 콘타리니 백작이었다. 지하 감옥은 체자레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오타비오를 데려와.”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 백작 영식을 말씀하신 것인지요?”
“그래! 발바닥에 불나게 나한테 달려오라고 해!”
체자레는 마시려던 발포주 잔을 대충 테라스 아무 데나 내려놓고 시종을 불러 망토를 걸쳤다.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가 빛과 같은 속도로 달려오리란 것을 확신하는 태도였다.
“어머니를 뵈러 간다.”
* * *
오타비오를 인간 열쇠처럼 사용해서 안 된다고 버티는 지하 감옥 관리 세 명을 순차적으로 제치고 감옥 내부로 입성한 체자레는 코에 훅 들어오는 곰팡이 냄새에 인상을 찡그렸다.
- 철컹!
체자레 백작의 등 뒤로 철문이 닫히고, 그 안에는 쇠창살로 내부와 복도를 나눈 감옥이 있었다. 다른 죄수들과 쇠창살이 아닌 석벽으로 차단된 독방이었다. 그나마 루비나 백작 부인의 지위를 감안해서 독방을 내준 모양이었다.
“누구?”
눈을 감고 있던 루비나 백작 부인이 물었고, 체자레가 답했다.
“저예요, 어머니.”
그 목소리에 루비나 백작 부인은 반색을 하며 눈을 반짝 뜨고 일어나 쇠창살에 매달렸다.
“체자레!”
체자레 백작은 자신의 어머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루비나 백작 부인은 아직 갓 감옥에 들어와 그런지 다른 죄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말쑥했다.
체자레는 혀를 차며 말했다.
“어머니, 도대체 왜 그랬어요?”
루비나 백작 부인은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너까지 나를 못 믿니! 난 안 그랬어!”
체자레는 짜증스레 답했다.
“나한테까지 거짓말하시는 거예요? 상황을 알아야 돕든지 말든지 하죠!”
“정말 내가 아니라고!”
루비나 백작 부인은 마주 화를 냈다. 체자레는 모친에게 물었다.
“어머니, 그럼 그 비소 병은 뭐예요? 방에서 비소 병이 나왔다면서.”
“…….”
“저한테까지 숨기려고 하지 마세요. 그 점쟁이가 엄마한테 바람 넣었던 거 알고 있어요.”
아리아드네가 무어 제국으로 쫓아 보낸 그 집시 점쟁이를 일컫는 말이었다. 루비나 백작 부인은 거기까지 알고 있다는 아들의 말에 들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래, 내가 살바르산 말고 진짜 비소를 가지고 있던 건 사실이야.”
루비나 백작 부인은 조금 풀이 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답지 않았다.
“집시 점쟁이가 나더러 계속 때를 보아 실행하라고 얘기했던 것도 사실이고. 있었던 일을 부인은 안 해.”
하지만 그녀는 억울함을 숨기지 못하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렇지만 집시 점쟁이는 겨울 동안 연락이 끊겼어! 타란토에서 다시 산 카를로로 돌아왔더니 온 데 간 데 찾을 수가 없더군! 배은망덕한 인간!”
“엄마는 그럼 도망친 점쟁이의 말만 믿고 왕비한테 독약을 쓴 거예요?”
“아니라니깐! 넌 네 엄마가 그런 바보 천치 머저리로 보이니!”
루비나 백작 부인은 씩씩대며 말을 이었다.
“비소는 옛날에 구해둔 게 맞아. 내가 가지고 있었어. 하지만 정말, 천신께 맹세코, 이번에 독을 푼 건 내가 아니야!”
체자레는 심드렁한 얼굴로 자신의 모친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요. 어머니가 안 하셨다 칩시다.”
그다지 모친의 결백을 믿는 것 같지는 않은 태도였다.
“그래서, 존경하옵는 레오 3세 폐하께서 어머니의 이야기에 설득이 될 거 같으세요?”
“……!”
루비나 백작 부인은 오찬장에서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레오 3세에게 매달렸지만 비참하게 내쳐졌다.
“엄마, 살바르산 얘기 남들 앞에서 꺼냈다면서요?”
“그건……!”
루비나 백작 부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급해서 꺼냈던 얘기였다. 이제 산 카를로 전역에 매독 환자라고 소문이 났을 것이다.
“어머니가 그 얘기를 꺼내셨으니 국왕 폐하께서 보나 마나 화가 머리끝까지 뻗치셨을 겁니다. 어머니가 서쪽 탑 대신 여기 들어와 앉아 계신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일 거고요. 살바르산 얘기가 만천하에 ‘국왕 폐하께서 몽펠리에 병 환자다’라고 떠벌린 거랑 뭐가 달라요?”
신벌을 받는, 문란한 쓰레기. 수명이 짧은 불완전한 문둥이.
산 카를로 사람들이 매독 환자를 보는 시선이었다. 도덕적이고 동시에 강건해야 할 군주가 걸렸다고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병이었다. 레오 3세는 심지어 오랫동안 예삽교의 본산이었던 에트루스칸 왕국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신실한 예삽교 군주여야 할 책무도 있었다.
“차라리 질투에 눈이 멀어 저질렀다고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비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요.”
“체자레 네 이놈 새끼……!”
루비나 백작 부인은 발칵 화를 냈지만 체자레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난 현실을 말하는 거라고.”
“이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새끼!”
체자레는 짜증을 냈다.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 뭐 다 옳다고 쳐요.”
1 온시아 만큼도 믿고 있지 않은 말투였다.
“그런데 지금 난 잘못한 거 없다고 버티면 그게 아버지한테 입력이나 되겠느냐고요.”
체자레는 레오 3세의 심기를 기가 막히게 살폈다. 아버지를 많이 닮은 아들이라서이기도 했고, 서자로 자라며 눈치를 보는 것이 유일한 생존 전략이어서이기도 했다. 지금 그러한 체자레가 보기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레오 3세를 달랠 방법은 보이지가 않았다.
‘나라도 화가 안 풀리겠다.’
“하여간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여기 잘 있어요.”
“뭐라고?”
아들이 자기를 당장이라도 꺼내주지는 못할지언정, 뭔가 쓸모 있는 계책을 내거나 아니면 하다못해 위로라도 해줄 줄 알았던 루비나 백작 부인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체자레는 루크레치아 슬하의 데 마레 남매처럼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는 자식은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든 방도를 강구해 볼게. 괜히 이런저런 소리 해서 국왕 폐하 심기 거스르지 말고, 이상한 조사 같은 거 시작하게 하지 말고. 어머니는 그냥 입 꾹 다물고 얌전히 있으세요.”
체자레 백작은 곧장 빙글 돌아 감옥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체자레!”
“필요한 것 있으면 간수한테 전하고. 그럼 그 사람들이 나한테 얘기할 거야. 콘타리니 백작이 책임자니까 크게 괴롭히지는 않겠지. 괴롭히면 좀 참아.”
“이놈의 새끼가!”
“다시 올 테니까 조용히 있어요.”
아들은 매몰차게 감옥 밖으로 나섰다.
- 쿵!
두꺼운 철문이 닫혔다.
* * *
왕비 독살 시도가 있은 후로 왕비궁은 철통 보안을 유지했다. 왕비궁 구성원만이 왕비궁에 출입할 수 있었고, 본궁 사람은 근처에도 오지 못했다. 혹시나 루비나 백작 부인의 수족일까 두려워서였다.
평소에 왕비를 지키던 푸른 서코트의 기사들에 더해 충원된 붉은 서코트의 국왕 근위대 기사들이 정시에 딱딱 맞춰 순찰을 돌았다. 일촉즉발의 긴장된 분위기였다.
카를라 부인은 왕비의 내실에 연결된 수석 시녀의 휴게실에서 좋지 못한 표정으로 <명상록>을 읽고 있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내실에서 오침중이라, 호출을 기다리며 대기하는 동안 시간을 때울 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집중이 영 되지 않는 모양인지 한 페이지를 넘기는 데에 십 분이 넘게 걸렸다.
- 똑똑.
“카를라 부인, 면회를 요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깥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울렸다. 카를라 부인은 <명상록>을 덮고 물었다.
“손님? 이 시국에 무슨 손님?”
“향신료 납품업자인 스트로치 씨입니다.”
카를라 부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 양반이 왕궁에서 뭘 하고 있느냐!”
“정기 대금 지급일인데, 왕궁에서 지급한 대금에 오류가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면담 신청을 하셨습니다. 급해 보이시길래……. 항상 오실 때가 되기도 했고…….”
지금 여기에 나타나면 절대로 안 될 양반이었다. 하지만 할 이야기가 있는 상대이기도 했다.
‘무슨 낯으로 여길 나타나!’
그녀는 시종을 호되게 꾸짖고 스트로치 씨를 내쫓으려다가, 마음을 바꿔먹고 이를 악문 채 낮게 말했다.
“접견실로 드시라 하게.”
카를라 부인은 수석 시녀의 휴게실에서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있는 업무용 사무실로 이동했다. 책상이 하나 있고 각종 장부가 쌓여 있는 실용적인 방이었는데, 원래라면 왕비의 내실 근처에는 있을 수 없지만 마르그리트 왕비의 허락으로 작은 창고 방을 개조한 곳이었다.
카를라 부인이 의자에 앉자마자 중키의 중년 남자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문을 닫은 것을 확인하자마자, 카를라 부인은 언성을 높였다.
“약속과 다르잖아!”
그녀는 갈리코 어로 화를 냈지만 에트루스칸 성씨인 ‘스트로치’ 씨는 역시 능숙한 갈리코 어로 대답했다.
“워, 워. 레이디 디외도네. 성을 잃더니 혈통의 고귀함마저 잃으신 게요. 체통을 지키시지.”
‘디외도네’는 카를라 부인의 원 가족이 반역죄에 연루되어 귀족 지위를 박탈당하기 전에 쓰던 성이었다. 카를라 부인은 화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여기는 도대체 어떻게 들어왔어!”
“당신이 알선해 준 자리 아니요. 왕가와 오래 거래한 믿음직한 향신료 상인. 시국이 흉흉할수록 이제껏 사고 한 건 안 터트린 믿을 만한 업자한테서 후추를 납품받아야지.”
그는 킬킬 웃으며 답했고, 카를라 부인은 ‘스트로치 씨’를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믿을만하긴, 이 순 사기꾼! 은혜를 이렇게 갚아?!”
그녀는 분노로 파랗게 질린 낯색으로 앞에 앉은 남자를 비난했다.
“나한테 뭐라고 했지? 당신은 분명히 그저 식초 같은 거라고, 왕비님 몸에는 해가 가지 않을 테니 루비나 백작 부인을 치워버리고 싶으면 왕비 폐하와 백작 부인이 만나는 식사 자리에서 넣으라고 했어!”
남자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귀를 후비며 대답했다.
“원한 대로 됐잖아? 가련한 루비나 백작 부인은 지금 지하 감옥에서 썩고 있다며. 도대체 뭐가 불만이야?”
카를라 부인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스트로치 씨와 그 일당들은 애프터서비스까지 충실히 했다. 루비나 백작 부인의 하녀를 투입해 결정적인 증언으로 쐐기를 박은 것이다. 하지만 카를라 부인은 펄쩍 뛰었다.
“루비나의 개가 핥아먹고는 칠공에서 피를 뿜으며 그 자리에서 즉사하더군! 하마터면 내 손으로 왕비 폐하를 죽일 뻔했어!”
“……세상에 죄다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어디 있나? 딱 맞는 온도의 수프는 없어,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갑거나 둘 중 하나지.”
“뭐, 뭐라고?”
최소한 ‘오해가 있었다’라거나, ‘우리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같은 해명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카를라 부인은 의외로 당당한 상대방에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스트로치 씨’는 비릿하게 웃으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