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숨겨진 진심
(156/733)
156화 숨겨진 진심
(156/733)
<제156화> 숨겨진 진심
2022.06.01.
“내가 마르그리트 왕비를 죽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루비나 백작 부인은 화들짝 놀라 외쳤다.
“저번에 의심받은 건 뭐 수상해 보였다고 쳐, 왕비가 어제 죽은 거라면……. 내가 이 안에 처박혀서 무슨 수로 마르그리트 왕비를 죽이니!”
“스트로치라고 아세요?”
루비나 백작 부인의 얼굴에 ‘앗차’ 하는 기색이 지나갔다.
“스, 스트로치는 왜?”
체자레는 한탄했다. 정말로 아는 사이로구나. 이 아줌마,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어머니. 진짜 저에게 하나도 숨기는 것 없이 다 이야기해 주셔야 해요.”
긴장한 루비나 백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트로치는 왕비궁에 향신료를 대던 상인이에요. 15년 넘게 거래를 해 왔던 장기 거래선이라고 합디다. 사고 한번 안 치고, 믿음직하고.”
스트로치가 상인답지 않게 입이 무겁고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루비나 백작 부인도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그, 그렇지. 그런데?”
“어제 스트로치가 물건 납품을 핑계 삼아 왕비궁에 들어갔고, 어처구니없게도 그게 통과가 된 모양이에요. 거기 들어간 스트로치가 왕비의 심복인 카를라 부인을 죽인 후 왕비를 독살하고 달아난 것으로 추측됩니다.”
“뭐라고!”
루비나 백작 부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 역시 스트로치와 관련해서 켕기는 것이 없지 않아 있었기 때문이다.
“대담하게 방명록에 이름까지 다 남기고 저지른 짓이라. 왕비의 숨이 끊어진 걸 발견하자마자 왕궁 근위대가 성문을 닫고 스트로치를 찾아 샅샅이 뒤졌답니다.”
하지만 10년 넘게 산 카를로에 자리를 잡고 항신료를 거래하던 상인 스트로치는 이미 몇 주 전에 전 재산을 헐값에 처분한 상태였고, 근위대가 뒤늦게 성문을 닫은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왕궁에서 나오자마자 유유히 산 카를로를 떠나 행적이 묘연해졌다고 한다.
“그놈, 배후에 분명히 누가 있어요. 단독으로는 그렇게 대담한 범죄를 저지를 수도 없을뿐더러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지는 건 불가능해요.”
잡아야 한다고 나라 전체를 뒤지기 시작했지만 치안이 비교적 촘촘한 수도에서도 못 잡은 범죄자를 수도 밖에서 잡을 수 있을 가능성은 낮았다.
“문제는 더 있어요. 왕비는 칼에 찔려 죽은 게 아니라 독살당했어요. 그 독은…….”
“……내가 가지고 있던 비소와 똑같은 것이었겠구나.”
루비나 백작 부인은 체념에 가까운 몸짓으로 쇠창살에 이마를 기댔다.
“그럴 수밖에. 그 비소는 스트로치에게서 산 거야.”
끄응, 체자레는 고뇌의 신음을 냈다. 그는 말을 이었다.
“검출하기 좋게 먹이고 남은 잔량이 컵에 담겨 시체 옆에 놓여 있었답니다. 그거뿐만이 아니에요. 환장할 소식은 더 있습니다.”
체자레 백작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 찼다.
“어머니 하녀 기억나시죠? 어머니를 고발한.”
“그래, 그 맹랑한 년.”
“그 하녀가 어머니와 상인 스트로치가 오랫동안 거래했으며 어머니가 스트로치를 수족처럼 아꼈다고 증언했다고 합니다.”
루비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쇠창살을 흔들었다.
“그건 사실이 아니야!”
“저도 익히 알아요. 사실이 아닌 거.”
체자레는 이 상황이 되어서도 이죽거렸다.
“어머니의 뛰어난 용인술과 손바닥만 한 교우 관계는 제가 제일 잘 알죠. 스트로치는 어머니의 심복이 아니었어요. 이름을 들은 적이 없는걸요.”
루비나 백작 부인은 시시콜콜한 자기 주변 사람 이야기로 아들을 고문하는 것이 취미였다.
체자레가 몇 시간이고 루비나 백작 부인의 주변 사람 이야기나 레오 3세에 대한 욕과 한탄을 들어주지 않으면 벌컥 화를 내고는 했다.
체자레 백작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루비나 백작 부인의 주변 사람들에 대해 빠삭했다.
“삼자 대질이라도 하자고 해! 스트로치는 내 심복이 아니야!”
“안타깝게도 불가능합니다. 그 하녀는 그 진술을 하고 감옥에서 혀를 깨물어 자결했어요.”
체자레는 덧붙였다.
“바로 사람을 보내서 하녀의 가족들을 수소문해 봤죠. 저번 달에 어디론가 소리소문없이 다 같이 이주했답니다.”
“이……. 이 무슨…….”
손을 떠는 모친을 앞에 두고 체자레 백작은 건조하게 결론을 냈다.
“우리는 함정에 빠진 거예요.”
“처음부터 내가 죽인 게 아니랬잖아! 드디어 믿는구나.”
“어머니가 딱히 신뢰가 가는 캐릭터는 아니잖아요?”
“이 망할 새끼가! 입 다물어!”
체자레는 발광하는 루비나 백작 부인을 무시하고 이마를 짚었다.
“누군가가 어머니한테 뒤집어씌울 생각을 하고 아예 처음부터 판을 짰어요.”
“……도대체 누가!”
“난들 알겠습니까? 알아도 어머니가 아셔야지. 어디서 원한 산 일 없어요?”
루비나 백작 부인은 그 말에 표정이 컴컴해졌다. 사소한 원한이야 수도 없이 많이 샀겠지만, 그녀는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은 봐가면서 개겼다고 자부했다.
루비나 백작 부인이 대놓고 안 좋은 사이를 유지했던 윗전은 마르그리트 왕비뿐이었다.
“모, 모르겠다.”
“잘난 척은 있는 대로 하더니.”
“이 배은망덕한 놈! 아들 키워봤자 돌아오는 것 하나 없지!”
체자레는 골이 빠개지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 이제 와서 나한테 소리 질러 봤자 바뀌는 게 뭐가 있죠?”
“저, 저! 제 어미에게 잘하지는 못할망정!”
“지금 당신을 여기서 꺼내드릴 사람은 ‘이 배은망덕한 새끼’ 밖에 없으니 얌전히 있으시죠.”
그는 쇠창살 안에 모친을 남겨두고 휙 돌아섰다. 망토가 펄럭 날려 흙먼지가 방 안에 퍼졌다.
언제나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화려한 살롱에서 낮술이나 홀짝이는 체자레 백작답지 않은, 흐트러진 차림새였다. 루비나 백작 부인은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기침을 간신히 멈춘 루비나 백작 부인은 가련한 목소리로 아들을 불렀다.
“체자레.”
“……왜요.”
“곧 돌아올 거지?”
“몰라요.”
버리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의 피곤과 짜증이 그득한 목소리였다. 그의 그늘진 등 뒤로 철문이 닫혔다.
- 쿵!
* * *
알폰소 데 카를로, 마르그리트 왕비의 유일한 혈육은 팔라지오 카를로의 ‘유리의 홀’에 마련된 어머니의 안치실에 석상처럼 서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숨이 멎은 마르그리트 왕비는 창백한 혈색과 부자연스럽게 뻣뻣해진 피부를 제외하면 마치 잠든 것처럼 평온했다. 그녀는 모국의 상징인 흰 백합꽃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대리석 관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가 마르그리트 왕비를 감싼 채였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인 알폰소 왕자가 가장 잘 알았다. 어머니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다. 마르그리트 왕비의 일생은 의무에 짓눌린 공주의, 가련하기 짝이 없는 분투기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치보 후작. 와줘서 고맙네. 모친께서도 반가워하셨을 거야.”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나누며 벌써 백여 명에 가까운 귀족들을 만났다. 오늘은 왕가의 친척들과 공후백, 고위 귀족들만이 출입이 허용되는 날이다.
알폰소 왕자는 오늘까지는 자리를 지키며 문상객들을 만나고, 예법에 따라 내일과 모레는 자리를 비울 예정이었다.
늦게 도착한 사람들이나 하급 귀족들은 내일과 모레, 직계 가족이 아닌 왕궁 관리들이 지키는 관을 알현한다.
그 뒤로는 왕비의 관은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으로 옮겨져, 18일간 일반인들의 추모와 조문을 받고, 숨이 끊어진 지 21일째 되는 날 추도 미사를 올린 후 왕가의 묘지인 ‘산투아리오 데이 레알레 모르티’에 묻히게 된다.
알폰소 왕자는 장례식 전체 과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그가 난생처음으로 단독으로 맡아 보게 된 공무이다.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
“왕자 전하, 장례식 인원 배치도가 모두 나왔습니다. 한번 확인을…….”
“문상 오시는 분들이 조금 뜸해진 다음에 보도록 하지.”
“오늘 안에는 결재가 되어야 관련 자재 주문이 들어갑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오겠습니다.”
슬퍼할 틈도 없이 눈코 뜰 새 없었다. 알폰소 왕자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다음 문상객을 맞이했다. 줄은 몹시 길었다. 알폰소 왕자는 산 카를로에 이토록 많은 고위 귀족이 있는지 피부로 체감했다. 몹시 긴 하루였다.
* * *
“그렇게 된 일이로군요…….”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추기경과 발데사르 남매를 통해 취합한 정보로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줄리아와 라파엘 데 발데사르는 아리아드네의 응접실에 앉아 사태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왕비 폐하의 암살범은 종적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이제 와서 잡기는 어렵겠지, 오빠?”
“산 카를로 시내를 벗어났으면 운이 몹시 좋지 않은 한 어렵다고 봐야지.”
줄리아는 자기 친구를 보러 가는데 대체 왜 오빠가 따라오겠다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으나,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인간이 밖으로 나가겠다니 반색한 어머니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혹을 달고 나온 차였다.
막상 데리고 와 보니 쓸모없는 인간인 줄 알았던 오라비가 꽤 식견도 높고 대화도 사람같이 하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고 평소의 한량 같은 행적이 괘씸하기도 했다.
“그리고…….”
라파엘은 말을 꺼냈다.
“이 말씀을 드리러 직접 방문했습니다, 아리아드네.”
종이에 적기는 너무 민감한 이야기였다.
“어떤 내용일까요?”
줄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오빠를 노려보았다. 아니, 나한테 말로 전하라고 귀띔했으면 내가 몰래 전했겠지, 나를 그렇게 못 믿나?
동생의 속은 상상도 못 한 채, 혹은 별 신경을 쓰지 않은 채 라파엘은 목소리를 낮추어 이야기했다.
“암살자로 지목된 ‘스트로치’는 사실 원래 이름이 ‘스트로치’가 아니고, 15여 년도 더 전에 산 카를로로 와서 정착한 외지인이라고 합니다.”
아리아드네의 눈빛이 빛났다.
“어디 사람이라고 하던가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북쪽 사람인 것 같다는 이야기가 가장 최신입니다. 갈리코 왕국일 수도, 슈테른하임 대공국이나 그 주변 군소국 사람일 수도 있겠지요. 본인이 자기 출신을 적극적으로 숨겼다고 합니다.”
에트루스칸에 들어와서 살고 있는 외지인의 숫자는 갈리코 인과 아세레토 인이 비등비등했고, 슈테른하임 대공국을 비롯해 북부 공국 연합 출신들은 많지 않았다.
‘확률상……. 갈리코 사람일 가능성이 높네.’
“알게 되면 저에게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 대저택을 방문할 좋은 이유가 될 터인데, 라파엘이 알려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왕궁의 동향은 어떤가요?”
발데사르 후작가는 대귀족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마르그리트 왕비가 홀에 안치된 첫날 문상을 드리러 갈 수 있었다.
발데사르 후작 본인은 원래 행정과 내정 보조 담당이라 궁전의 일부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왕비가 갑작스레 승하한 지금 모든 업무가 폭발해서 그쪽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그래서 대신 가문 대표로 공식 문상에 참여한 것은 소후작인 라파엘이었다.
“급작스러운 사태라, 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근위대를 위시해 국왕 폐하께서는 사태 파악에 여념이 없으신 것 같고, 일체의 장례 절차는 알폰소 왕자님께서 주관하고 계십니다. 루비나 백작 부인은 여전히 투옥 상태이고…….”
말이 좋아 사태 파악에 여념이 없는 것이지, 국왕이 아내의 장례식에 신경을 크게 쓰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문상 첫날 남편으로서 자리를 지키지도 않았다.
아리아드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범인이 꼭 잡혔으면 좋겠습니다.”
“동감입니다.”
“정말로요.”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할 말이 있는 듯이 라파엘을 올려다보았다. 라파엘은 순간 긴장해 얼굴에 확 피가 몰려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그녀를 알게 된 지는 오래지 않았지만 아리아드네는 말을 꺼낼 때 뜸을 들이는 법이 없고 항상 거침이 없었다.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걸까?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라파엘은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길 간절하게 빌면서 질문했다. 망할 백색증. 피부가 얇아 감정이 투명하게 다 드러났다.
아리아드네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알폰소 왕자님은 혹시 어떠셨나요.”
“아.”
라파엘은 얼굴에 몰린 피가 확 식는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