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약간의 수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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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약간의 수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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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화> 약간의 수작질
2022.06.08.
아리아드네가 지금 쓸 수 있는 패는 대충 두세 가지 정도였다.
‘첫째는 아버지.’
데 마레 추기경은 궁전에 출입이 가능한 고위 성직자다. 레오 3세에게 고언 한두 마디 정도는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도 결국에는 성황청의 대리인, 데 카를로의 궁정에서는 이방인이지.’
외교관이나 다름없는 그의 입지를 고려해 보았을 때 내정에 해당하는, ‘가에타 변경백을 자기 영지로 돌려보내지 말라’라는 조언이 확실한 효과를 낼지 여부는 미정이었다.
‘둘째는 알폰소.’
아리아드네는 알폰소 왕자에게, ‘가에타 변경백을 영지로 돌려보내면 안 된다’고까지는 조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알폰소가 레오 3세를 설득해야 했다.
‘……과연 국왕 폐하께서 지금 알폰소의 말을 들어주실까?’
알폰소 왕자는 미레이유 공작을 죽인 일로 레오 3세의 눈 밖에 제대로 난 상태였다. 지금이라면 알폰소가 소젖으로 치즈를 만든다고 해도 레오 3세 귀에는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세 번째……. 이걸 세 번째라고 불러야 하나.’
최근 아리아드네의 중앙 정치를 엿보는 통로로 급부상한 사람은 라파엘 데 발데사르였다.
‘라파엘에게 발데사르 후작님께 고해달라고 부탁하면 효과가 있긴 있을 거야.’
발데사르 후작은 레오 3세가 중하게 등용하는 측근이었고, 레서 큐리아 레지스의 멤버였으며, 마침 내치를 맡고 있는 위치였다.
‘그분이 가에타 변경백이 수상하니 영지로 돌려보내면 안 된다고 주장하신다면 국왕 폐하께서도 귀담아들으시겠지.’
하지만 아리아드네가 알고 있는 것은 미래에 벌어질 일일 뿐이었다. 가에타 변경백의 배반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적군이 국경에 나타난 상황에 멀쩡한 성주를 도성에 잡아두라고 조언한다면 아마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조언자를 팽할 것이 틀림없다.
머리를 굴리던 아리아드네의 뇌리에 갑자기 한 사람이 떠올랐다.
‘거기라면……!’
아리아드네는 재빠르게 편지 한 통을 작성해서 우편물 전담 하인을 불렀다.
“여봐라.”
“예, 아가씨.”
“이 편지를 지금 당장 여기에 쓰인 주소로 전하고 오너라. 그냥 오지 말고, 답장을 주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답장을 받아 와.”
“예!”
* * *
아리아드네의 편지는 다행히 긍정적인 답신을 받았다. 그녀가 편지에서 했던 제의도 받아들여졌다.
「급하게 만나 뵐 일이 있습니다. ……(중략)…… 괜찮으시다면, 오늘 당장이라도 저희 집으로 초대를 드리고 싶습니다. 혹시나 데 마레 저택이 불편하시면 제가 댁으로 가도 상관없어요.」
상대방은 데 마레 대저택에 방문하느니 차라리 아리아드네를 자신의 자택으로 초대했다. 그런 연유로 아리아드네가 현재 걷고 있는 곳은 카스틸리오네 남작의 수도 저택 복도였다.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
이사벨라와 대판 싸우고 이사벨라가 수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남자의 내연녀라는 소문을 냈던 장본인이었다.
‘우리 집에 오는 대신에 날 여기로 부르다니, 언니가 무섭기는 한가 보네.’
이사벨라의 욕이 그간 얼마나 일취월장해서 곱게 자란 카멜리아를 패닉으로 몰아넣었는지 까맣게 모르는 아리아드네였다.
데 카스틸리오네 남작가의 저택은 약 20여 년쯤 전에 수도의 고택을 사들여 번쩍번쩍하게 수리한 것이었다. 오래된 명문가의 골조는 졸부의 황금과 대리석, 벽화로 뒤덮여 보통 사람을 압도하는 한편 가슴을 약간 답답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딱 우리 집 같네.’
아리아드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데 마레 대저택도 비슷한 시기에 데 마레 추기경이 에트루스칸 영지로 부임해 온 이후 대대적인 수리를 거쳤다.
데 마레 추기경의 취향이 데 카스틸리오네 남작보다 조금 더 고상하다는 차이점이 있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그 시대의 스타일대로 금화를 아낌없이 퍼부어 만든 호화 사치 건축물이다.
수도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이 애처롭게 스스로를 과시하는 금화의 향연.
아직 주인이 오지 않은 빈 응접실로 안내된 아리아드네는 화려한 벨벳 직물을 씌운 장의자에 앉아서 생각했다.
‘열등감. 나를 깔아뭉갰던 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열망. 내가 오늘 건드릴 감정은 그거야.’
카멜리아는 급작스레 도착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몸단장을 하는지, 아니면 기 싸움을 거는 것인지 한참동안이나 응접실에 내려오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마음 편한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꽃단장 중인가 보지.
- 달칵.
응접실 문이 열렸고, 왕궁의 예를 따라 하고 싶었는지 이 집의 일 도메스티코가 점잔을 빼며 길게 외쳤다.
“카멜리아 아가씨 납십니다!”
아리아드네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거 아냐, 바보야. 왕궁식으로 하려면 문이 열리기 전에 외쳐야 하고, 애초에 정식 파티가 아니면 저런 짓 안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속내를 일절 내색하지 않고 반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카멜리아를 맞이했다.
“카멜리아!”
“아리아드네.”
카멜리아는 동그란 볼살이 예쁜 얼굴로 화사하게 웃으며 아리아드네를 맞이했다.
“오랜만이에요, 그간 격조했지요. 연락 좀 자주 주시지 않고.”
“급작스러운 연락에도 흔쾌히 맞아주셔서 감사해요. 실례인 줄 알면서도 저질렀습니다.”
상냥한 태도 속에 ‘넌 왜 연락도 없더니 오늘 갑자기 나타나서 친한 척이냐?’ ‘내가 보자면 네가 날 봐야지 별수 있냐?’라는 가시를 교차시키는 대화였다.
카멜리아는 단출한 실내 드레스 차림이었고, 얼굴도 거의 민낯이었다. 꾸미거나 씻느라 오래 걸린 게 아니라, 그냥 시간을 지체하다가 늦게 내려온 거다.
‘기 싸움 맞았네.’
차와 다과가 나오는 것도 늦어지고 있었다.
‘이사벨라랑 싸웠지 나랑 싸웠나? 얘 왜 이래?’
하지만 오늘은 카멜리아와 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카멜리아를, 정확하게는 카멜리아의 아버지를 다른 사람과 싸움 붙이는 것이 목표다.
아리아드네는 그간의 안부를 묻고, 카멜리아의 칭찬을 하고, 요즘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물었다. 전생의 왕궁에서 갈고 닦은 아리아드네의 사교술은 이번 생이 되면서 제대로 꽃을 피웠다.
카멜리아는 어쨌거나 갓 스무 살이 된 애송이에 불과했다. 노회한 귀부인이나 쓸법한 성심을 담아 추켜올려주고, 칭찬하고, 관심을 묻는 스킬에 불퉁하게 다물렸던 입가도 살살 풀렸다.
“이번에 산 제비꽃 향수는 참 마음에 들어요.”
“어디에서 구하신 건가요? 카멜리아의 안목은 정말 대단해요. 남들보다 두 시즌은 앞서가시는 것 같아요.”
현재 산 카를로의 유행을 휩쓸고 있는 것은 가에타의 장미 향수였다.
카멜리아도 원래는 가에타 산 장미 향수만 썼고, 개중에서도 그녀의 아버지가 가에타에서 직수입한 가에타 로즈 농축액만을 사용했었다. 얼마 나지 않는 최고급품이었다.
“아버지가 가에타와 거래를 끊으셔서요, 제비꽃 향수는 남부의 아세레토에서 수입해 오는 거랍니다! 다음 시즌에는 좀 더 대량으로 사 오실 거예요. 그때까지 저더러 많이 좀 뿌리고 다니라고 하셨어요.”
“세상에. 저도 좀 나눠주실 수 있나요?”
“아리아드네 양이 그래 주신다면 아버지께서도 좋아하실 거에요!”
아리아드네는 명실상부한 산 카를로 최고의 재원이었고, 그녀가 걸치고 사용하는 물건들은 전부 다 산 카를로, 아니 에트루스칸 최고의 히트 상품이 되고 있는 중이었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가 무언가를 걸치고 나타나는 것은 최고의 홍보다.
그리고 지금 카스틸리오네 남작이 제비꽃 향수를 시장에서 미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가에타와의 거래선이 끊겼다.
‘가에타 변경백이, 저 더러운 상인을 내 영지에서 내쫓으라며 호통을 쳤댔지.’
가에타 백작의 문장인 가에타 로즈를 상품화해서 팔아보자고 한 것이 화근이었다.
가에타 로즈를 로고로 만들어 직물에다가도 무늬로 넣고, 향수병에다가도 새기자는 시대를 앞서가는 카스틸리오네 남작의 제의는 구귀족인 가에타 백작의 귀에는 ‘조상님들을 팔아치우자’로 들렸다.
게다가 카스틸리오네 남작은 가문의 문장인 가에타 로즈를 사용하는 대가로 ‘수익의 1할을 드리겠다’고 제의했는데, 이는 가에타 백작을 더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감히 우리 조상님들의 얼굴과 이름을 파는데 자기가 9할을 먹고 우리가 1할을 먹어? 이 더러운 사기꾼 놈이! 라고 생각한 가에타 백작은 카스틸리오네 남작에게 욕설을 섞은 호통을 치며, 치도곤을 맞고 쫓겨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알라고 일갈하고는 남작을 성 밖으로 내쫓았다.
병사들이 사지를 붙들고 나가서 해자 밖으로 던져버리는 수준의 박대였다.
거래선도 다 끊겼다. 최상급 가에타 로즈의 유통권은 아예 평민인 보카네그라 상회로 넘어갔다.
덜 막돼먹을 것 같아서 남작 작위 있는 놈과 거래했더니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니, 차라리 아예 굽신대는 평민 상인과 거래하겠다는 심보였다.
카스틸리오네 남작은 이를 갈았지만 구귀족중에서도 군권까지 가지고 있는 명문, 가에타 변경백에게 한낱 남작이 할 수 있는 복수는 별로 없었다. 구귀족의 재력과 권력은 영지에서 나왔지, 상인과의 거래는 용돈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제비꽃 향수를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뿌리고 다닐까요? 분명히 카스틸리오네 남작님께서 생각하시는 홍보 방법이 있을 텐데요.”
“그, 글쎄요. 거기까지는 잘…….”
“혹시, 제가 직접 남작님을 만나 뵙고 여쭈어봐도 될까요?”
아리아드네는 미끼를 던졌다. 물어라!
하지만 카멜리아는 망설이며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요사이 공사다망하셔서…….”
아리아드네는 속이 탔다. 뭘 그리 망설이는 거야!
“가에타 산 장미 제품을 시장에서 완전히 몰아낼 기회인걸요. 남작님께서도 흡족해하실 거에요.”
아리아드네는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카스틸리오네 남작님의 사업수완을 예전부터 존경해 왔었습니다. 카멜리아, 우리 같이 수도에 신규로 진입한 사람들은 언제나 새롭고 신기한 일을 하면서 눈길을 끌어야 해요. 우리 아버지 대에서 그 일을 가장 잘 해내신 카스틸리오네 남작님을 뵙고 식견을 넓힐 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한참을 고민하던 카멜리아는, 결론을 내렸다.
“……미안해요.”
카멜리아의 결정은 아리아드네의 청을 거절하는 쪽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사업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카멜리아는 아버지의 고분고분한 딸이 되고 싶었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아리아드네를 위해서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를 생각은 없었다.
“그건 좀 어렵겠어요. 아무리 가에타에 대한 일이라고 해도…….”
그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왔다.
“가에타? 가에타가 왜?”
- 벌컥.
염소수염을 한 중년 남성이 노크조차도 없이 응접실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아버지!”
카멜리아의 볼이 붉게 변했다.
‘아이, 참, 손님 앞에서 교양 없게!’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준엄하게 꾸짖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돈줄, 그러니까 목숨줄을 쥐고 있는 아버지가 저렇게 구니 차마 제지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카스틸리오네 남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리아드네를 돌아보고는 물었다.
“가에타가 어떻게 됐다고?”
아리아드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걸렸다.’
* * *
카스틸리오네 남작에게 계책을 전한 아리아드네는 뿌듯한 마음으로 귀갓길에 올랐다. 그녀가 알고 있는 가에타 변경백의 약점을 남작에게 모두 이야기하고 돌아오는 참이었다.
물론 가에타 변경백이 지하실에서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거나, 가에타 영지를 통째로 퍼다가 갈리코에 갖다 주기로 사전 모의한 서류 따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확실한 증거가 있었었다면 왕궁 법정을 소환하자며 레오 3세에게 곧장 고했겠지.
아리아드네는 다만 가에타 변경백이 절반은 갈리코 사람이며, 그의 아내도 갈리코 출신이고, 그의 자식들은 에트루스칸 어보다 갈리코 말이 더 편하다는 사실 그 자체만 알렸다. 그녀는 거기에 은근슬쩍 정보 하나를 더 덧붙였을 뿐이다.
‘국왕 폐하께서는 항상 영지를 가신 봉신들의 유능함에 의문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가에타 영주를 단독으로 영지로 돌려보내는 것보다, 훌륭한 중앙 귀족이 그와 함께 돌아가 영주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좋다고 말씀드리면 국왕 폐하께서는 몹시 흡족해하시지 않을까요.’
카스틸리오네 남작은 작위가 낮아 궁정에 제약 없이 출입할 수 있는 몸은 아니었다.
큐리아 레지스 전체 회의가 열릴 때에만, 그것도 그의 소관인 상업이 중요한 의제인 날에만 간혹 국왕의 회의를 말석에서 참관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수많은 친구가 있었고, 국왕의 귀에 속살거릴 수 있는 힘 있는 자들도 이미 황금으로 녹여 놓은 지 오래였다.
‘복수심에 불타는 무시당한 상인은 이제 최선을 다해서 가에타 변경백을 끌어내릴 거야.’
국왕 폐하의 눈에 들 수도 있다고 귀띔해준 것은 화룡점정이다. 원래 돈이 생기면 권력이 갖고 싶은 법이다. 지금 카스틸리오네 남작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나서서 이야기할 수 없는 게 한이네.’
레오 3세에게 점수 좀 땄을 텐데.
아리아드네는 정말로 궁정 귀족 회의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을 누군가를 찾아 한 쿠션씩 먹여 힘들게 전해야 하고, 성공해봤자 그 과실을 누릴 수가 없는 입장이라니.
‘지위는 잘하는 사람한테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한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저었다. 모든 작용이 있으면 거기에는 반작용이 있었다.
이번에 낭패를 당한 후 분노에 펄펄 뛰는 가에타 변경백이 탓할 사람을 찾는다면 그 칼날은 아리아드네가 아닌 카스틸레오네 남작을 향할 것이다.
뒤에 숨어 있는 것도 나름의 장점이 있지. 그녀는 호화로운 은마차에 앉아 쿠션에 비스듬히 고개를 기댔다.
* * *
“과연!”
아리아드네의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 들어갔다.
“그래, 자네의 말이 맞아. 중앙 관료를 가에타 변경백이 돌아갈 때 하나 조언자로 붙여줘야겠어!”
아리아드네로서는 조금 덜 억울한 것이, 카스틸리오네 남작도 ‘기가 막힌 제안을 한 레오 3세의 총신’ 자리를 본인이 차지할 수는 없었다.
카스틸리오네 남작이 부탁해서 그 역할을 대신 맡게 된 콘타리니 백작, 즉 카멜리아의 약혼자인 오타비오의 아버지가 레오 3세의 사랑 넘치는 눈빛을 받았다.
“누구를 보내면 좋을꼬……?”
잠시 고민하던 레오 3세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아, 그래!”
레오 3세가 터무니없는 짓을 할 때 보이는 바로 그 눈빛이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인선이 끝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