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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작별 인사 (1) (162/733)


<제162화> 작별 인사 (1)
2022.06.22.


데 마레 저택 내부 입성에 성공한 알폰소는 양옆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문 안쪽은 아무도 없는 창고였다. 그는 실내로 안전하게 들어오자마자 품 안의 종이를 확인했다.

다행히, 종이는 모서리 약간을 제외하면 거의 젖지 않은 채였다. 그는 앞으로 평생 중요한 물건은 우의 없이는 밖에 들고 다니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주변을 살폈다.


‘2층으로 가야 하는데…….’

왕자가 아니라 무슨 도둑이라도 된 것처럼, 알폰소는 창고 문을 살며시 열고 잠입을 시작했다.

* * *

천신만고 끝에 아리아드네의 방문 앞에 선 알폰소는 긴장 탓에 심호흡했다.

데 마레 추기경 관저의 중앙 계단은 저녁 식사가 끝난 시간에도 돌아다니는 하인들이 은근히 많았다. 몰래 2층까지 올라오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그는 사람의 눈을 피하려고 계단 난간에 매달려 있다가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 가기까지 했다.

명색이 왕자씩이나 돼서 좀도둑처럼 남의 집 안을 숨어다니는 경험은 정말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사실 약간 신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지금 자기의 처지에서 기쁜 감정을 느꼈다는 데에 알폰소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지금 알폰소의 손아귀에는 약간의 땀이 배어 있었다. 야밤에 쳐들어온, 당분간 보고 싶지 않다고 축객령을 내린 남자친구—설마 벌써 ‘전 남자친구’가 된 것은 아니겠지—를 만나면 아리아드네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화를 낼까? 기뻐할까?

문고리를 돌리기가 겁이 났지만 알폰소에게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복도를 돌아다니는 하인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그는 마음을 굳게 먹고 아리아드네의 방문을 열었다.

- 찰칵.

방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알폰소는 어두운 방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고 등 뒤로 문을 닫았다.

그녀의 방문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예전에 들어와 보았던 바로 그 소파였다. 응접실인 듯했다.

아리아드네의 처소는 거실 같은 형태로 중앙에 응접실을 끼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각각 서재와 침실이 있는 아파트 같은 형태의 스위트였다.

응접실은 완전히 어두컴컴했다. 약간의 불빛이 새어 나오는 쪽은 왼쪽 문이었다.

알폰소는 도둑이 된 기분을 느끼며 살금살금 다가가 조용히 두 번째 문을 열었다.

- 삐익.

두 번째 문은 아주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알폰소는 이 문을 열자마자 이 방이 침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녀의 체향이 훅, 풍겨왔기 때문이다. 은방울꽃 향기를 닮은, 고혹적이면서도 풀 향이 은근하게 섞인 은은한 향이었다.


“……아리?”

알폰소 왕자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고요한 침실 안에서는 천둥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렸다.

알폰소는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협탁에 놓인 촛불 하나가 위태롭게 춤을 추며 타오르고 있었다. 그 옆에 드리운 캐노피 침대 안에는 전혀 인기척이 없었다.


“아리……?”

보드라운 목소리로 한 번 더 아리아드네의 이름을 불러본 알폰소는, 그래도 답이 없자 조심스럽게 아리아드네 침대의 휘장을 옆으로 걷었다. 사각거리는 얇은 아사면 소재가 그의 손을 간질였다.


“!”

휘장을 걷은 그는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얼굴을 맞댄 그녀가 화를 낼까 반가워할까를 고민했던 보람도 없이, 그의 그녀는 단출한 잠옷을 입은 채 베개에 고개를 묻고 깊은 꿈에 빠져 있었다.

* * *



“아리?”

알폰소는 부드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하지만 꾹 닫힌 눈꺼풀과 새카만 속눈썹은 미동조차 없었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침대에 앉아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가만히,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아리. 나야.”

하지만 그녀는 작은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깊은 잠에 빠져 일어날 줄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알폰소는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았고, 촛불이 타닥타닥 타고 있는 협탁 위에 고블렛 하나가 놓인 것이 보였다. 고블렛 바닥에는 다 마셔서 거의 남지 않은 노란 액체가 약간 고여 있었다.


‘……약을 먹고 잠든 건가?’

기다리는 것 외에는 수가 없었다.

- 털썩.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숨어들어오면서 느꼈던 긴장이 단숨에 풀린 채였다. 침대에 앉은 알폰소는, 깊게 잠든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꽉 내리닫고 있지만 누구보다 아름답게 웃을 수 있는 눈매와 풍성한 검은 속눈썹, 훤칠하게 높게 뻗은 콧날, 그 아래의 앵두 입술과 벌려진 입술 사이로 살짝 보이는 귀여운 토끼 이빨. 만지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는 저 볼이, 저 피부가 얼마나 보드라운지 알았다.

하지만 알폰소는 다만 손을 들어 앞으로 쏟아진 아리아드네의 흑단 같은 머릿결을 이마 뒤로 넘겨주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지금의 아리아드네를 조형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길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무방비로 잠든 그녀에게 욕정을 느낄 것이다. 이 방 안에 들어와서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껴안고 입 맞추고 싶지 않았다면 물론 거짓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알폰소가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은……. 애처로움이었다.


‘누구보다도 뛰어나고, 어떻게 보면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많이 누릴 수 있는 자리에 태어나서도 고생만 한 가엾은 사람.’

산 카를로에서 가장 권세가 높은 사람 중 하나의 딸이지만 그녀가 믿고 기댈 어른은 없다. 알폰소는 이 부분에서 아리아드네와 자기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에게는 얼마 전까지 어머니라도 있었지. 알폰소가 느끼기에 이제 자신은 물가에 혼자 내놓은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정말로 무섭고, 무거운 감정이었다.

이 막막한 사선(死線)을 아리아드네는 몇 년 동안이나,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걸어왔다.


‘……나라면 못 했을지도.’

그녀의 심지 곧음에, 단단함에 알폰소는 감탄밖에 할 수 없었다.

그는 밤이 깊어지는 내내 점점 길어지는 초의 심지를 보며 생각했다. 그는 아리아드네가 16년간 버텨냈고 또 이뤄낸 과업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동경했다. 하지만 사실 그는 그것이 그 두 배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녀가 벼려낸 결과물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만큼을 단숨에 따라잡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을 자책하며, 알폰소 왕자는 밤을 지새웠다.


‘…….’

촛농이 초 받침대를 가득 채우고 넘치기 직전이 되고, 어슴푸레한 서광이 창문을 메우기 시작할 때 알폰소는 스스로 고민의 결론을 내렸다.


‘……갈리코 왕국에 다녀올게. 아리.’

그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리아드네가 침실에서 간단하게 독서할 때 쓰는 작은 책상 위에 양피지와 깃펜이 있었다.

알폰소 왕자는 거의 다 사그라져가는 촛불과 멀리서 들어오는 새벽빛에 의지해, 한 글자 한 글자 글씨를 써나갔다. 그가 항상 쓰는 푸른 잉크는 아니었지만 예의 그 힘찬 악필이었다.

「내 가장 소중한 아리아드네에게,

이렇게 불러도 되는지조차 모르겠어. 일방적인 애정이 무례가 된다면 나는 필시 무례를 저지르고 있는 중이겠구나. 하지만 떠나기 전에 이 말은 꼭 고백하고 싶었어. 너는 나에게 남은 것 중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급작스럽게 이런 편지를 놓고 가는 나를 용서해. 이야기 나누고 떠나고 싶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네. 네 잠든 얼굴이라도 보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야.

부왕께서 내게 갈리코 왕국으로 떠나라고 명을 내리셨어. 출발은 내일……. 아니, 오늘 오전이야. 명목은 갈리코의 외척들을 위로하고 오라는 이야기야. 따라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지만, 그리고 사실 따르지 않을 재간은 없지만, 밤새 고민을 해 본 결과 역시 가는 게 맞는 것 같아.

부왕과 동의하는 건 아니야. 어머니를 잃은 에트루스칸의 왕자가 고모를 잃은 갈리코의 외척들을 위로하고 오라는 건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부왕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건 라리에사 대공녀와 약혼을 완료하고 결혼 동맹을 공고히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하지만 그 말씀은 따르지 않을 거야.

다만 이 지긋지긋한 이야기에 종지부를 찍을 필요는 있는 것 같아. 갈리코 측에 혼담은 최종적으로 결렬되었음을 확실히 하고, 국경 침공에 대한 사과를 받고,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졌어야 하는 책임을 뒤늦게라도 지고 싶어.

아리, 나는 갈리코에 가서 엘코 경을 돌려받을 생각이야. 나 때문에 다친 사람을 그냥 손 놓고 두고 볼 수는 없어.

내가 져야 하는 책임을 질게. 내가 해내야 하는 일을 완수하고 돌아올게. 네 앞에 당당한 한 명의 남자가 되기 위해서라도, 이번 갈리코 방문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게.

레이디 L의 편지는 네게 맡기고 간다. 사본은 갈리코로 가지고 가서 혼담을 깰 때 증거로 사용할 거야. 하지만 아무래도 원본을 갈리코로 가져가는 것은 현명치 못한 처사인 것 같아. 혹시나, 혹시나 해서 말이야.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고 혼자 간직하고 있어 줘. 설혹 나를 보고 싶지 않더라도 나라를 위한 일이니……. 부탁할게. 남기고 가는 편지에서 하는 말조차도 너에 대한 부탁이라니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

다시 만날 날 너와 반드시 웃으며 볼,

A.」

알폰소 왕자는 꾹꾹 눌러쓴 편지를 아리아드네의 베갯잇에 올려놓고, 품속에서 이제는 다 말랐지만 테두리가 조금 울퉁불퉁해진 라리에사 대공녀의 쪽지를 꺼내 베개 아래에 집어넣었다. 아리아드네가 일어나자마자 확인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잠들어 있는 그의 이불 속의 공주를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는 동이 터오고 있는 시간까지도 깊은 잠에 취해 있었다. 새근새근 숨결에 따라 올라가고 내려가는 목덜미와 가슴팍에 눈길이 닿았다. 저번에 보았을 때보다 확연히 말라 있었다.


“가엾긴.”

아리아드네가 또 식사를 걸렀을 거라는 생각에 알폰소는 가슴이 아팠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몇 가닥 흘러내리지도 않았건만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뭐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쓰였다.


“혼자서 다 감내할 필요 없어.”

알폰소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부터는 내가 네 기댈 자리가 되어 줄게.”

그녀에게 기대려고 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데 카를로의 아들은, 그의 어머니의 아들은 스스로 온전히 서야 했다.

주변 사람은 의지의 대상이 아니라 보호의 대상이었다. 그는 어머니를 잃고 강제로 그녀의 그늘에서 추방되고서야 이 사실을 깨달았다.

알폰소는 조용히 아리아드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경건할 정도로 고요히. 마치 맹세와도 같았다.

- 꼬끼오!

아득히 멀리서부터 새벽 장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모두가 일어날 시간이다. 그 역시, 일어날 시간이다.

그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모든 것은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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