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작별 인사 (2)
(163/733)
163화 작별 인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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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화> 작별 인사 (2)
2022.06.26.
아리아드네는 찬란한 햇살이 눈을 찌르는 통에 깨어났다. 인상을 조금 찌푸린 채였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산차가 아픈 아가씨 푹 주무시라고 평소와 같은 시간에 깨우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방 안의 공기가 조금 달랐다. 그녀는 주변을 살폈다. 항상 같은 휘장, 항상 같은 커튼. 커튼……?
- 후웅!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힘차게 들어왔다. 드리워져 있어야 할 커튼 역시 옆으로 열려 있었다.
인상을 찡그린 아리아드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문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때, 베갯잇 위에서 양피지 한 장이 흘러내렸다.
‘이건?’
누군가가 내 방에 들어왔다 나갔다.
긴장한 아리아드네는 우선 양피지부터 집어 들었다. 그러자 베개 아래에 깔린 나머지 한 장의 종이도 마저 보였다.
그녀는 두 번째 종이는 무릎 위에 얹은 채, 서둘러 첫 번째 종이의 내용을 읽어나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편지를 읽어나가던 아리아드네의 눈이 커졌다.
‘……바보, 바보 같으니!’
그리고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갈리코에 간다고?’
아니, 갈리코에 가는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일이지만 그녀를 감정적으로 건드리는 것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멍청이, 자기 어머니를 잃은 지 며칠이나 됐다고 남의 걱정을 해?’
아리아드네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모친을 잃었던 날을 기억한다. 어린 아리아드네는 방 안에 틀어박혀서 자신이 이 지표면 위에 존재하는 생물 중에서 가장 불쌍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대저택에서 농장으로 쫓겨가서도 그 생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날을 세우며 한참 동안이나 벽을 쳤다.
그러다가 밉보여서 굶어 죽을뻔하고서는 곧 강제로 생각을 고쳐먹었지만, 어린 시절을 잠식했던 어머니의 상실과 자기 연민을 그녀는 기억한다.
그런데 이 황금의 왕자님은, 스스로를 가엽게 여기기보다는 자기 주변 사람을 더 가엾게 여긴다.
‘착해빠진 바보…….’
아리아드네보다 더한 말미잘이 있다면 알폰소임이 틀림없다.
‘……보고 싶어.’
그의 금빛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이야기해주고 싶다. 너는 내가 기댈 어깨가 될 필요 없다고. 네 모습 있는 그대로 충분하다고.
손을 꼭 잡아주고 싶다. 너의 조력은 내가 되어 주겠다고. 내가 네가 기댈 어깨가 되어 주겠다고. 내가……. 너의 힘이 되어주고 싶다고.
아리아드네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쳤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편지에는 분명히 ‘내일 오전에 출발’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두 번째 양피지를 펼쳤다. 과연, 라리에사 대공녀의 쪽지다.
아리아드네는 맨발로 서재로 달려가 자신의 금고 안에 두 번째 양피지를 넣고는 단단히 잠가 버렸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산차를 불렀다. 침실에 있는 설렁줄까지 달려갈 겨를도 없었다.
“산차!”
아리아드네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산차가 바람같이 달려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일어나셨어요?”
“마차, 아니, 말을 준비해 줘!”
“네?”
“당장!”
산차가 아리아드네의 기에 질려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간 사이 아리아드네는 옷장으로 들어가 아무 겉옷이나 꺼내 잠옷 위에 걸치고 신발에 발을 구겨 넣었다.
산차의 완료됐다는 보고도 기다리지 않고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간 아리아드네는 현관문 앞에 자신의 갈색 말이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한달음에 안장에 발을 걸치고 올라탔다.
“아가씨!”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아리아드네의 모습에 기겁한 산차의 비명을 뒤로하고, 아리아드네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이랴!”
* * *
그녀는 출발 예정 시간이 오늘 오전 내라는 사실만 알았지, 언제, 어디서, 어떤 규모로 떠날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산 카를로에서 갈리코로 출발한다면 출발지는 당연히 성 북문이다.
바람과 같은 속도로 말을 달려 북쪽 성벽으로 도달한 아리아드네는 북문을 통과하려다가 닫히는 중인 문에 막혔다.
“문을 열어주세요!”
도르래를 돌려 육중한 성문을 닫던 병사에게 아리아드네가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었다.
병사는 속도조차 줄이지 않고 쇄도하다가 코앞에서 가까스로 멈춘 아리아드네에게 깜짝 놀랐고, 그녀가 두른 고급스러운 망토의 재질과 말 털에 흐르는 윤기에 두 번 놀랐으나 굴하지 않고 그 앞을 가로막았다. 왜냐하면 오늘은 평소와 달리 기강이 엄하게 서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나랏일 때문에 정오까지 일반인은 출입이 불허되었습니다. 서문이나 동문으로 돌아서 가시오.”
“나랏일이라는 게 왕자 전하의 행차인가요?”
대답을 망설이던 그는 아리아드네의 차림새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자는 지체가 높은 귀족 같았고, 이미 무슨 일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맞소이다. 이미 북문을 통과하셨어요.”
“지금 막 나갔어요?!”
“문 닫히는 거 보면 모르슈?”
아리아드네는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고 바로 품에서 두카토 금화 하나를 꺼내서 병사에게 건넸다.
“선생님……. 어떻게 안 될까요?”
병사는 금화는 날름 챙겼으나 주변을 둘러보더니 곤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중앙에서 나온 사람들이 많아서……. 문을 열 수는 없소이다.”
저럴 거면 금화는 대체 왜 받은 거야. 아리아드네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히고 주변을 살폈다.
“그럼 성벽에라도 올라갈 수는 있을까요?”
그가 떠나는 뒷모습이라도 보고 싶다.
병사는 두리번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성벽만이라면…….”
아리아드네는 병사의 뒷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녀는 한달음에 북쪽 성벽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숨이 차오르고 가슴이 가빴지만 이 순간을 놓칠 수는 없었다. 중간에 발을 헛디뎌 신발 한 짝이 벗겨졌지만 신경 쓰지 않고 맨발로 달렸다.
아리아드네가 북벽 위에 도달한 것은 폐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공기가 들어갈 때마다 허파가 쓰리고 아렸다. 눈앞이 노래진 아리아드네의 시야에, 성벽 아래 일렬종대로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가는 중인 마차 세 대와 육십여 기의 마필이 보였다.
그녀는 돌로 된 성벽의 총안에 매달리다시피 서서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알폰소-!!!!”
하지만 야속하게도 느리게 꾸물대며 전진하는 마차와 말의 일행은 멈추는 일 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아리아드네는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다시 한번, 있는 힘껏 외쳤다.
“알폰-소-!!!!!”
행렬은 멈추지 않았으나 약간의 변화는 있었다. 중앙에서 걷던 백마 한 필이 옆으로 빠져서 속도를 늦췄다. 백마의 주인은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겉에 푸른 서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말머리를 뒤로 돌려,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황금 같은 금빛 머리칼이 쏟아져 내려왔다.
아리아드네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났다. 알폰소다!
멀어서 가물가물하게 보였지만 알폰소의 얼굴에 큰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하얀 치아가 정갈한, 정직하고 다정한 남자의 진심 어린 기쁨의 표시다. 알폰소 왕자는 투구를 벗은 채 큰 소리로 외쳤다.
“몸 건강히 기다리고 있어-!!”
주변의 수행원들이 들을까 봐 그녀의 이름은 생략한 채였고, 거리가 먼 탓에 단어들은 아리아드네에게는 분절되어 띄엄띄엄 들렸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미 통한 상태였다.
“응, 응!”
대답이 들릴 거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아리아드네는 성곽 위에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폰소는 다시 두 손을 입에 대고 외쳤다.
“끼니 거르지 말고!”
눈물로 범벅이 된 아리아드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 역시 있는 힘껏 외쳤다.
“몸 조심히 다녀와-!”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알폰소가 미소가 조금 더 커진 것 같았다. 금발의 왕자님은 오른팔을 번쩍 들어서 흔들었다.
언젠가, 치보 후작가의 살롱에서 만났을 때 인파 한가운데에서 아리아드네에게 손을 흔들었던 그때와 꼭 같은 모양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알폰소의 일행이 멀어지고 있어 이제는 합류해야 했다. 그는 한참 손을 흔들고는 백마의 기수를 돌렸다. 아리아드네는 웃는지 우는지 애매모호한 얼굴로 알폰소의 등에 대고 내내 손을 흔들었다.
왕자는 점점 작아졌고, 이윽고 능선과 구릉을 넘어 작은 점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성벽에 기대어 배웅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무사히 돌아올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모두 다 잘 될 것이다.
인생 처음으로 가져 본 그녀답지 않은 소망이었다. 복수도, 분노도 아닌 모든 게 다 잘 되길, 모두가 다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 그녀는 그것을 마음 깊숙이 품었다.
* * *
체자레 백작은 눈에 핏발이 선 채 외국인 거주 구역인 캄포 데 스페지아를 뒤지고 다녔다. 부하들에게만 맡기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는 향신료 상인 스트로치의 집에서 일한 사람이나 스트로치의 거래처, 그를 아는 사람들까지 샅샅이 만나 왕비 암살범에 대해 캐고 다녔다.
입을 열기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충분한 은화를 지불했고, 그로도 안 된다면 체자레 백작이 뒷배를 봐 주겠다는 약속으로 마음을 녹였다.
결국 결정적인 증언이 나왔다. 스트로치의 집에서 반쯤은 정부, 반쯤은 하녀로 지내던 여자의 입에서였다.
“에……. 스트로치 씨는 자기 출신을 말하고 싶지 않아했지만 드시는 음식이나 즐기는 술이 다 갈리코 산이었고……. 간혹 갈리코 사람들이 집에 출입했어요.”
금화를 꺼낼 것까지도 없었다. 푼돈과 체자레의 잘생긴 얼굴에 한눈에 빠져버린 것 같은 여자는 술술 불었다.
“갈리코 인들이 오는 날에는 집안사람들이 다 별채에는 얼씬도 못 했고……. 저도 마찬가지였고…….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면 생각이 날지도 모르죠.”
그녀는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로 체자레를 올려다보았다. 체자레는 미끈한 표정으로 그녀의 희망을 모르는 척했다. 이런 여자들이라면 지겨울 정도로 많이 봤다.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었나?”
“귀해 보이는 사람들이었어요. 옷도 귀족 같았고 우리 말은 전혀 못 했습니다.”
“그 갈리코 인들이 마지막으로 왔던 날짜는 언제요?”
“한 달 전 정도 되었습니다.”
날짜가 맞는다. 그들과 만난 후 향신료 상인 스트로치는 전 재산을 처분하고 에트루스칸을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체자레는 품속에서 두카토 금화를 꺼내 거기에 입을 맞춘 뒤 여자에게 건넸다.
“기억을 잘 되살려 봐. 내가 조만간 다시 와서 궁금한 것들을 더 물을지도 몰라.”
금화도 금화지만 체자레가 돌아와서 자기와 만난다는 생각에 얼굴이 발개진 여자가 두 손으로 금화를 받아들었다. 체자레 백작은 증언 수집을 위해 국왕의 군사를 보낼 생각이었지만, 여자의 착각을 한다면야 고마운 일이다. 더 순순히 협조할 테니.
“언제쯤 오실 건가요?”
“곧.”
성의 없게 손을 휘저은 체자레는 그녀의 거처를 나섰다. 불충분하나마 어머니의 구명을 할 거리를 손에 쥐었다.
루비나는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체자레에게 단 하나 있는 가족이었다. 그는 골목에 세워둔 짙은 적갈색 애마에 훌쩍 뛰어올랐다.
“가자, 이랴!”
- 이히힝!
편편한 돌로 포장된 산 카를로의 도로와 단단한 편자가 부딪히는 소리가 청량하게 울렸다.
* * *
“체자레가? 알현을?”
레오 3세는 얼굴을 찌푸렸다. 시종장은 최대한 유순하게 고했다.
“예, 폐하.”
이럴 때 신경을 거슬렀다간 불호령을 맞기 딱이다.
“돌아가시라고 할까요?”
그래, 그게 좋겠다, 라고 대답하려던 레오 3세는 알현실에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체자레를 보고는 기함했다.
“체, 체자레!”
체자레 백작은 유들유들하게 양팔을 벌리며 외쳤다.
“우리 사랑하는 국왕 폐하!”
체자레를 보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루비나를 투옥시켰다며 체자레가 따질까봐였던 레오 3세는 아들이 전혀 그럴 기색 없이 싹싹하게 굽히고 들어오자 노기를 지우고 조금 누그러진 음색으로 답했다.
어쨌거나, 홧김에 루비나를 투옥하긴 했지만 나오는 증거들이 제시하는 방향은 점점 더 그녀와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도 조금은 찔렸기 때문이다.
“체자레 백작. 얼굴이 좋아 보이는구나. 그래, 그간 잘 지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