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65화 미래를 향한 기약 (165/733)


<제165화> 미래를 향한 기약
2022.07.03.


알폰소 왕자가 떠난 후 아리아드네는 전보다 더 열심히 살았다.

정해진 시간에 칼같이 일어나 속이 좋든 좋지 않든 꾸역꾸역 식사를 했다. 추후에 토하게 되는 것은 나중 문제였다.

정확한 일정을 지키며 당일의 업무를 보고 빠질 수 없는 사교계 이벤트에 모두 참석했으며, 거기에 남는 시간을 쪼개 공부를 했다.

최근에 찾아보는 것은 신학서 중 기적과 이적에 대한 부분이었다. 학문적 가치보다는 야사, 혹은 흥미 위주로 어린이나 배움이 짧은 자들을 계도하기 위한 이야기라고 폄하 당하기 일쑤인 파트였으나, 어차피 신학 구도를 위해 읽는 것은 아니었다.

16582262003497.jpg

‘손끝에 내려앉는 밝은 빛무리.’

아리아드네가 보았던 반짝이는 빛무리는 그녀의 오른손 끝에 내려앉은 후에도 계속 조금씩 빛났다. 누가 본다면 손톱에 장식용 다이아몬드 가루를 뿌렸다고 할 정도의 약한 반짝임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 외에 그 누구의 눈에도 그 빛은 보이지 않았다.

16582262003503.jpg

- “네? 전 아가씨 오른손이랑 왼손이랑 다른 거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산차에게 보여준 것을 시작으로, 안나나 주세페 같은 그녀의 사람들,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의 사제와—데 마레 추기경은 신앙심 따위 없어 보여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캄포 데 스페지아에서 용하다는 점 봐주는 집시 노인까지, 아무도 그녀 손끝의 빛무리를 보지 못했다.

16582262003497.jpg

‘뭐 때문에 생긴 것일까?’

아프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 쓸모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하얗게 반짝이는 거라면 역시 치유력이지! 라고 생각해 마구간에 가서 다친 말에게 손끝을 들이밀어 보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동물 친구를 만들어주는 것 같지도 않았다. 괜히 심기 불편한 말을 건드렸다가 뒷발에 차일 뻔했다.

그녀는 민담 속 공주님이 되는 것은 포기하고 해결되지 않는 난제는 일단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16582262003497.jpg

‘알폰소가 떠나 있는 동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

그는 그의 싸움을 할 것이다. 그녀는 그녀의 싸움을 하면서 알폰소를 기다릴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알폰소를 다시 만나는 날, 그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이제 슬슬 가을에 파종한 가을밀의 수확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대역병은 늦여름에 터진다.

운이 좋다면 역병 창궐 전에 봄밀까지 추수할 수 있겠지만 보수적으로 본다면 올봄에 나오는 가을밀이 앞으로 2년간 산 카를로가 온전하게 추수할 수 있는 마지막 밀일 가능성이 높았다.

16582262003497.jpg

‘최대한 많이 매집해야 해.’

아리아드네는 주세페를 불렀다. 그는 이내 올라와 서재 문을 두드렸다.

16582262003497.jpg

“들어와, 주세페. 그때 부탁했던 창고 섭외는 어떻게 되어가?”

16582262003528.jpg

“베르가모 농장에 5만 칸타로(약 5000 킬로그램) 정도는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 외로 산 카를로 성 바깥에 15만 칸타로(약 1만 5천 톤)가 들어갈 만한 창고를 하나 찾았는데, 여기는 연 임대료가 20 두카토(약 2000여만 원)로도 충분합니다.”

16582262003497.jpg

“다른 곳도 있어?”

아리아드네가 당연히 첫 번째 옵션을 고를 줄 알았던지, 주세페는 약간 놀라 쭈뼛쭈뼛 말을 꺼냈다. 그가 생각하기에 첫 번째 옵션이 두 번째 옵션보다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16582262003528.jpg

“성안에도 창고를 찾아보긴 했는데, 여기로 한다면 두 군데에 나눠서 보관해야 합니다. 하나는 3만 칸타로, 다른 하나는 12만 칸타로 정도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임대료가 창고치고는 많이 비싸서 좋은 생각일지는…….”

두 군데라는 이야기에 아리아드네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창고가 나누어져 있다면 비상시에 그녀의 사람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서 곡식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성 밖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흑사병이 터지고 한 달만 지나도 치안은 엉망이 될 것이 뻔했고 식량은 산 카를로 전체에서 가장 귀한 물건이 되리라. 외곽 창고에 보관해 둔 식량이 손쉬운 약탈 대상이 안 되리란 보장이 없었다.

16582262003497.jpg

“임대료가 얼마인데?”

16582262003528.jpg

“작은 것은 1년에 80 두카토(약 8천만원), 큰 것은 130 두카토(약 1억 3천)은 합니다…….”

16582262003497.jpg

“가격이 거의 점포 수준인데?”

그것도 장사가 잘되는, 이라고 아리아드네는 덧붙였다. 주세페는 대체 아가씨가 언제 저잣거리 상가의 시세를 파악한 건지 신기해하며 마저 보고했다.

16582262003528.jpg

“작은 쪽은 점포 비슷한 것이 맞는데, 큰 쪽은 점포라기보다는 저택이라서 그렇습니다. 앞의 것은 센트로 아니마에 있는 창고이고, 뒤의 것은 보카 델라 지아노에 있는 귀족의 저택입니다. 산 카를로 성 안쪽에 진짜 대규모 창고는 없더군요.”

보카 델라 지아노는 대귀족의 고급 주거지로, 데 마레 대저택도 그 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완만한 언덕이 많아 지대가 높았고 주변이 모두 대귀족의 고급 주거지였기 때문에 치안이 좋았다. 센트로 아니마는 산 카를로의 정중앙에 있는, 티베리 강을 낀 북적이는 상업지대였다.

16582262003528.jpg

“특히 작은 것은 강에 바로 닿아 있어서 배에 짐을 부리기 좋아 가격이 높은 모양입니다.”

주세페는 캄포 데 스페지아나 코뮨 누오바처럼 임대료가 싼 곳에서 적당한 창고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 송구스러운지 쩔쩔매고 있었지만, 아리아드네의 귀에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주세페가 찾아낸 작은 창고는 완벽했다.

작은 창고에서는 유사시에 수로를 통해 빠르게 양곡을 이동시킬 수 있었고, 큰 창고는 방어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16582262021411.jpg

 

16582262003497.jpg

“그곳으로 하자.”

16582262003528.jpg

“첫 번째 말씀입니까?”

어리둥절해 하는 주세페를 앞에 두고 아리아드네는 크게 웃었다.

16582262003497.jpg

“아니, 두 번째. 지금 당장 가서 계약금을 지불하고 와. 나머지 금액으로는 창고를 지킬 인원을 고용할 테니 그것도 알아봐 줘.”

16582262003528.jpg

“외부 인력으로 데려오면 족합니까, 아니면 아예 우리 사람이어야 합니까?”

아리아드네는 잠시 고민했다.

16582262003497.jpg

“일단은 2년 정도만 필요해. 적당한 외부 인력이 있다면 고용할 수도 있겠어. 하지만 충성심은 절대적으로 필요해.”

치안이 난리가 나고 식량이 금보다 귀해진 사태에 보안 인력이 창고를 털어 도망간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16582262003497.jpg

“창고는 당장 계약하고, 인원은 한번 적당히 알아보고 나서 나한테 보고해 줘.”

16582262003528.jpg

“알겠습니다, 아가씨.”

주세페를 내보내고 난 아리아드네는 이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창고는 마련되었고 인원은 주세페가 준비해 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밀을 구매할 황금이다. 이것은 아리아드네가 직접 마련해야 했다.

16582262003497.jpg

“이 돈을 어디서 구한다?”

가지고 있는 현금이 없으니 빌려야 한다. 그녀가 필요한 돈은 최소 2만 두카토(약 200억 원), 양껏 쓰려면 10만 두카토(약 1000억 원).

하지만 그녀에게는 담보가 있었다.

16582262003497.jpg

‘푸른 심해의 심장.’

못해도 2만 4천 두카토(약 240억 원), 후하게 쳐준다면 4만 두카토(약 400억 원), 아니 그 이상도 충분히 받아낼 수 있다.

다만 푸른 심해의 심장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

16582262003497.jpg

‘내가 저걸 담보로 건 사실을 들키거나, 만에 하나 소유권을 뺏기기라도 한다면…….’

레오 3세가 그녀를 곱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16582262003497.jpg

‘믿음직한 상인이 필요해.’

그녀가 현재 가장 잘 아는 거금을 융통해줄 만한 거상은 카멜리아의 아버지인 카스틸리오네 남작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를 믿을 수 있을까?

16582262003497.jpg

“한번 알아봐야지.”

아리아드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알폰소 왕자는 백마 위에서 느릿느릿 북쪽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산 카를로를 출발한 지 만 하루째였다.

1658226203936.jpg

‘아리아드네.’

떠나기 전에 그녀를 보고 떠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웃을 상황이 아니었지만 알폰소는 고개를 숙이고 조금 웃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환청인 줄 알았다. 하지만 환청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성벽 위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을 때, 알폰소가 느꼈던 환희란.

1658226203936.jpg

‘그녀도 나를…….’

아리아드네가 완전히 마음의 문을 닫은 것이 아니라는 게, 이 애정이 쌍방이라는 것이 알폰소의 심장에 방아쇠를 당겼다. 머릿속에서 폭죽놀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멀리서 본 아리아드네의 몰골은 황급히 달려오느라 꼬질꼬질했지만 알폰소의 눈에는 그것이 하나도 거슬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사랑스러웠다. 항상 자기관리에 철저한 그녀가 아침에 몸단장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성벽까지 달려왔을 생각을 하니 안쓰럽기도 했고 귀엽기도 했다.

1658226203936.jpg

‘빨리, 모두 마무리 짓고 돌아가야지.’

산 카를로에서 몽펠리에까지는 마차를 대동한 일행에게는 약 한 달 정도 걸리는 일정이었다. 말로 전속력으로 달리면 일정이 그 절반가량으로 줄어들 수는 있었지만 프리노약 산맥이 중간에 끼어 있어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했다. 알폰소는 못내 답답한 심정으로 먼 길을 바라보았다.

16582262003528.jpg

“왕자 전하, 오늘은 여기서 쉬어 갈까요?”

보좌관 베르나르디노가 고했다.

1658226203936.jpg

“벌써?”

16582262003528.jpg

“이게 오늘 나올 마지막 마을입니다. 여기서 더 가면 노숙을 하게 돼요.”

알폰소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의 일행은 단출했다. 왕자 휘하의 직속 기사 9명과 보좌관 베르나르디노, 국왕이 붙여준 근위대 기사 50기와 마르케즈 백작, 그리고 왕궁 시종 약간명과 짐을 나르는 허드렛일꾼들이었다.

16582262057844.jpg

- “금방 다녀올 텐데 짐이 많을 필요 있나!”

레오 3세의 호언장담이었다. 결국 그들은 마차 세 대에 간략하게 짐을 꾸려 출발했다. 하지만 알폰소는 부왕의 예측이 지나치게 희망적이라고 생각했다.

1658226203936.jpg

‘과연, 부왕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빠르게 돌아올 수 있을까?’

왕자는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쳤다. 지금 와서는 걱정해봐야 소용없다. 갈리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닥쳐봐야 아는 것이다.

16582262003528.jpg

“왕자 전하. 고민이 많아 보이십니다그려.”

알폰소의 훤칠한 백마 옆으로 탄탄한 점박이 말 한 필이 따라붙었다.

1658226203936.jpg

“만프레디 경.”

라파엘 데 발데사르가 왕자의 기사들에서 빠진 이후로는 내내 기사들의 좌장 역할을 맡고 있는 안토니오 데 만프레디 경이었다.

만프레디 백작의 둘째 아들로, 명문가의 자제였지만 가문은 형의 차지가 될 테니 군문에 투신한 젊은 기사였다.

16582262003528.jpg

“골 아프다, 골 아프다 생각하면 점점 더 복잡해지기 마련입니다. 가볍게 가자고요.”

알폰소는 가볍게 웃으며 말고삐를 꽉 쥐었다.

1658226203936.jpg

“자네 말이 맞아.”

16582262003528.jpg

“엘코 경이 빨리 돌아와야지, 제가 아주 뼛골이 녹겠습니다.”

알폰소 옆에 딱 붙어서 갖은 궂은일을 다 챙기던 엘코 경이 갈리코 왕국으로 끌려가고 나서 각종 허드레 잡일은 모두 다 만프레디 경 차지가 되었다. 한량에 가깝던 그는 팔자에도 없이 격무에 시달리던 중이었다.

16582262003528.jpg

“저처럼 엘코 경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사람은 또 없을걸요.”

1658226203936.jpg

“둘이 별로 사이가 안 좋은 것 아니었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서 사교성이 좋은 만프레디 경과 출신이 한미하고 주변에 마음을 잘 열지 않는 엘코 경은 물과 기름이었다.

16582262003528.jpg

“잡일을 덜어가 줄 사람이라면 엘코 경 아니라 고양이 앞발이라도 환영입니다.”

만프레디 경은 낄낄댔다.

16582262003528.jpg

“고양이 같은 놈이기는 하잖아요.”

1658226203936.jpg

“엘코에게는 비밀로 해 주지.”

16582262003528.jpg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그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16582262003528.jpg

“마음에 안 드는 놈이라도, 동고동락한 세월이 있는데요.”

1658226203936.jpg

“…….”

16582262003528.jpg

“……무사했으면 좋겠네요.”

1658226203936.jpg

“……그래.”

무거운 마음으로, 알폰소 왕자는 프리노약 산맥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바라보았다.

16582262091074.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