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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화 심술 (167/733)


<제167화> 심술
2022.07.10.


체자레 백작은 루비나 백작 부인이 갇혀 있는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레오 3세의 명으로, 루비나 백작 부인은 지하 감옥 중 가장 고급스럽고 큰 방으로 옮겨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래 봤자 지하 감옥이었다. 한 쪽의 햇살조차 들어오지 않았고, 석벽에 낀 습기는 눅눅했으며, 뼛골 시린 한기는 여우털 모피로도 지울 수 없었다.

- 끼리릭.
 


“체자레?”

방문하는 사람이 아들밖에 남지 않은 루비나 백작 부인은 인기척에 바로 반색하며 답했다.


“……네, 저예요.”

체자레 백작은 느릿느릿 답했다. 물빛 눈동자가 착 가라앉은 참이었다.


“어떻게 돼 가고 있어, 국왕 폐하께서 나를 꺼내 주신대?”

“…….”

그는 가만히 감옥의 쇠창살에 이마를 댔다. 차가운 철의 냉기가 부어오른 얼굴을 식혔다.


“체자레? 얘, 말 좀 해봐라 체자레!”

 

 
체자레 백작은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그는 얼굴을 떼내고 자세를 똑바로 잡은 후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루비나 백작 부인은 아들에게서 형용하기 힘든 어딘가 서늘한 기세가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가 볼게요. 당분간 건강 조심하고 계세요.”

그는 몸을 홱 돌려 걸어나갔다.


“얘, 체자레! 어디 가니 체자레!”

 

* * *

라리에사는 안도 반, 걱정 반으로 자기의 말동무에게 반문했다.
 


“정말로 결혼 준비 중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네. 원래 기존의 약혼자와 결혼 준비하던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대요, 대공녀님.”

 
라리에사의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한 대공 부부는 수잔느가 죽고 나자 딸의 말동무로 하급 귀족의 딸을 하나 들였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산 카를로에서도 그랬지만 몽펠리에에서도 친구를 쉬이 만드는 성격이 아니었다. 신분이 높아 함께 다니면 이로울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귀족 영애들은 대공녀를 슬슬 피했다.

라리에사를 참아내고 붙어 있는 소수는 정말로 콩고물만 바라보고 붙어 있는 부류였는데, 눈앞의 말동무가 딱 그런 사람이었다.
 


“제대로 알아본 것 맞아? 브장송 영애도, 드라루이레 영애도 정말로 다 별다른 기색이 없었어?”

 
라리에사는 왕가와 먼 혈연이 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가문의 격이 높은 예비 라이벌들의 이름을 읊었다. 말동무는 고개를 저었다.
 


“두 분 모두 당연히 가장 먼저 알아봤습니다. 브장송 공작 영애는 도리어 조만간 엉제 백작가와 혼약을 맺을 것 같던데요. 드라루이레 후작 영애는 요새 한탄이 하늘을 찔러요. 나이가 차 가는데 아직도 혼처를 못 찾았다고요. 브장송 영애가 먼저 결혼한다니 약이 바짝 올랐어요.”

 
본인이 먼저 브장송 영애와 드라루이레 영애를 입에 올렸으면서도, 말동무가 저 두 명에 대해 가장 먼저 알아봤다고 말하자 라리에사는 약이 올랐다.


‘저 두 명이 나랑 격이 맞다고 생각하는 거야, 뭐야. 브장송과 드라루이레는 대 발로아 가문의 발끝에도 못 따라오는데.’

 


“넌 꼬락서니가 그게 뭐니?”


“네?”


“그런 촌스러운 옷차림으로 고위 귀족가에 출입하니까 제대로 된 소식을 못 얻어듣는 거 아니야? 우리 부모님이 너한테 급료를 충분히 지급 안 하는 것도 아니잖아?”


“아…….”

 
말동무의 옷차림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말동무의 얼굴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것을 본 라리에사는 기분이 풀려 축객령을 내렸다.
 


“나가 봐.”


“네…….”

 
혼자 남은 라리에사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브장송도 드라루이레도 아니라면 남는 것은 오귀스트 공주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알폰소 왕자와 사촌 사이라서 성황청의 6촌 이내 혼인 금지 율법상 왕자와 결혼할 수 없다.


‘……법황의 특별 허가.’

다만, 법황의 특별 허가가 있다면 가능했다. 그것은 라리에사 본인도 받을 뻔했던 것이었다. 필리프 4세가 라리에사를 본인의 딸로 입양해서 공주로 만들어 준 뒤에 에트루스칸 왕국으로 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왕궁에 들어가 봐야겠어.’

오귀스트 공주가 어떻게 지내는지 살펴보면 뭐라도 알게 될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라리에사의 바깥출입을 자제시키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기준 없이 너그러웠고 궁전에 출입할 핑계는 얼마든지 있었다.

게다가 오귀스트 공주는 라리에사가 에트루스칸으로 떠날 때, 라리에사에게 특별히 귀띔한 적이 있다.


‘꼭 ‘황금의 왕자님’과 함께 몽펠리에 궁전에 방문해 줘.’

그때는 그저 결혼이 성공하면 네 남편을 데리고 와서 보여달라는 정도의 덕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금 생각해보니 어딘가 수상했다.


‘오귀스트 언니.’

알폰소 왕자는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전투적으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 * *

아리아드네는 보카네그로 상회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정확히는, 일방적으로 날짜를 정하고는 쳐들어갔다.


“인원이 많습니다.”

“응.”

그녀는 건성으로 주세페에게 대답했다. 호위로는 주세페를 대동하고, 그간 양성해왔던 경비 인력 중 서른 명을 뽑아 함께 데려왔다. 추기경의 딸이라기보다는 흡사 악당들의 보스 같은 기세였다.

보카네그로 상회는 삼십여 명의 장정들이 자기네 안마당까지 밀고 들어와 자리를 잡고 기세등등하게 서 있는 상황을 뜬 눈으로 보아야 했다.


“데 마레 영애 오셨습니까.”

예쁘게 생긴 시동이 나와 아리아드네 일행을 맞았다. 12-13여 세 언저리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음.”

아리아드네의 긍정에, 소년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보카네그로 상회의 대표이신 카루소 님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리아드네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자, 소년은 싹싹하게 허리를 숙였다.


“안내하겠습니다.”

아리아드네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서른 명의 경비대원들은 보카네그로 상회 건물의 중정(中庭)에 세워 놓고, 상회 대표의 집무실에는 주세페만 대동하고 들어갔다.

소년의 살뜰한 안내로 둘러보게 된 상회 건물은 의외로 소박한 공간이었다. 카루소 대표의 집무실 앞에 섰을 때까지도 그랬다. 대표의 집무실은 그저 회칠을 했을 뿐인 하얀 벽과 고동색 떡갈나무 문 건너편에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그 의외성에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전생의 카루소 대표는 황금이 넘쳐나는 자였기 때문이다.

- 똑똑.

시동 소년이 방문을 노크한 뒤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 마레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유독 맑은 미성이었다.


“손님께 드시라고 해라.”

대답을 들은 소년은 거리낌 없이 문을 열었다.

- 끼리릭.

안은 화사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집무실이었다. 밝고 공간이 넓은 것이 전혀 담배 밀수업자의 사무실 같지 않았다. 깨끗했지만 검소했다.

골동품이나 고급 집기 같은 것은 없었고, 대신 손때가 탄 튼튼한 책상과 걸상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아리아드네의 차림새는 그와 정반대였다. 굳이 화려한 차림을 즐기지 않는 그녀는 오늘만큼은 웬만한 무도회 뺨치게 잘 차려입은 참이었다.

이제는 단골이 된, 콜레지오니 의상실에서 맞춘 짙은 장밋빛의 실크 드레스에는 같은 색상의 가넷이 격자무늬로 촘촘히 박혀 더할 나위 없이 호화로웠다.

머리는 영애라기보다는 귀부인처럼 높이 땋아 올렸고, 그 위에는 돌아가신 마르그리트 왕비의 희사품인 토파즈 티아라를 얹었다. 목에는 커다란 붉은 루비 목걸이를 걸었다.


“어서 오십시오.”

카루소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리아드네를 맞이했다. 아리아드네는 짐짓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가 그의 환대에 답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카루소 대표님.”

몹시 급하게 잡은 약속이었지만 굳이 일정을 비워준 데에 대한 감사 인사는 하지 않았다. 위세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눈앞의 삼십 대 초중반의 남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상한 티를 전혀 내지 않은 채 그녀를 깍듯하게 환대했다. 전생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10여 년 젊은 얼굴이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데 마레 영애.”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까딱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옛사람을 만나서 옛날처럼 굴자니 전생에서 궁의 내무를 총괄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사실, 체자레와 사교계에서 업신여겨졌던 것을 제외하면 권력 면에서는 무소불위였던 시절이다.


“오늘은 어쩐 일로 이런 누추한 곳까지 발걸음을 하시게 되셨습니까?”

카루소는 최대한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하며 부드럽게 물었다. 기실 그는 이것이 가장 궁금하던 차였다.

수도에서 위세가 대단한 데 마레 추기경의 금지옥엽인 둘째 딸이 본인을 만나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도대체 왜?

그는 최근에야 사업 아이템을 다각화하기 시작한 담배 밀수 상인일 뿐이었다. 무어 제국에서 들여온 기호품 장사로 큰돈을 벌었다. 담배로는 에트루스칸 왕국 제일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담배와 성직자의 딸이야말로 대륙의 끝과 끝처럼 멀리 떨어진 물건들 아닌가.


‘귀한 항신료 같은 걸 구해 달라고 온 건가?’

귀족 영애들은 그런 변덕이 있었다. 수도에서 가장 귀한 물건을 자기가 가장 먼저 선점하겠다는 욕심.


‘우리는 사교계 아가씨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을 취급하진 않는데…….’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복음서의 한 구절이었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런 자와는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그리하는 자는 가난해질 것이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이니라.”

말을 끝낸 아리아드네는 카루소 대표를 바라보며 탐스럽게 웃었다.


“복음서에는 방탕한 자는 가난해진다고 하는데, 막상 방탕의 첨병을 파시는 곳에 와 보니 금고에 황금이 그득하고 집 안이 화사하게 밝으며 모두가 건강합니다?”

카루소 대표는 순간 말문이 막혀 물컵을 들어 찬물을 들이켰다. 맞다, 사교계의 돌풍이라고만 생각해 잊고 있었는데 저 여자는 원래 신학과 그 신앙심으로 명망이 높았다.

설마 담배 밀수에 대해서 시비를 걸러 온 것인가?


“오, 오해이십니다. 데 마레 영애. 저희는 롬바르디 지역의 밀과 가에타 지방의 장미수를 비롯해 많은 물품을 수도에 유통하고 있습니다. 방탕이라니요. 생활필수품입니다.”

아리아드네는 과거 섭정공의 약혼녀이던 시절에 아랫사람을 부리던 것처럼 눈을 접어 웃었다.


“무어 제국의 담배는 이제 그만 파시기로 하신 건가요?”

“그, 그건.”

무어 제국의 담배는 성황청에서 금하는, 정신을 흐리는 기호식품이라는 점 외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밀수품이라는 점이었다. 에트루스칸 왕국은 무어 제국산 수출품에 대해서는 높게는 90%까지 관세를 물렸다. 보카네그로 상회가 취급하는 담배는 모두 다 탈세의 열매였다.

카루소 대표는 자세를 바로 하고 아리아드네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오늘은 이런 이야기를 하러 오신 겁니까?”

그는 테이블 위에 올린 두 손을 깍지낀 채 다음 단어들을 말했다.


“저희는 성황청에 정기적으로 기부를 하는 선량한 예삽교도입니다.”

이미 뇌물을 바치고 있으니 건들지 말라는 말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쿡쿡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고, 급기야는 대놓고 깔깔댔다.


“하하, 하…….”

한참을 웃다가 간신히 진정한 그녀는 입가에 매달린 웃음 한 조각을 여전히 지우지 못하고 카루소 대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오늘 여기에 푼돈을 뜯으러 왔다고 오해를 하셨군요.”

그녀는 자세를 똑바로 잡고 주세페에게 손짓을 했다. 뒤에 팔짱을 끼고 있던 주세페가 가까이 다가와 아리아드네와 카루소 대표 사이에 놓인 떡갈나무 책상 위에 검은 흑단나무 상자 하나를 쿵, 내려놓았다.


“여러모로 도움이 안 되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보카네그로가 데 마레 추기경과 관련이 없음을 집안의 회계장부를 모두 쥐고 있는 아리아드네는 안다. 카루소의 뒷배는 아마 아버지 밑에 있는, 산 카를로 교구의 어떤 성직자일 것이다.

더 낮은 연줄로 권력자에게 직통으로 연결된 사람에게 대항하려 드는 것은 무용한 짓이다. 카루소의 떨리는 눈동자를 보니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아직 세가 강하지 못해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뿐이다.


“전 여기에 거래를 하러 왔어요.”

그녀는 흑단나무 상자 위에 오른손을 얹고 카루소 대표와 눈을 맞췄다.


“술이든, 담배든. 뭐로 벌었든 상관없어요. 황금이 얼마 있는지가 중요하죠.”

아리아드네의 녹색 눈이 교교하게 빛났다.


“당신은 이 물건에 얼마까지 내놓을 수 있나요?”

아리아드네는 흑단나무 상자의 뚜껑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온 눈부신 광채에, 카루소는 그만 순간적으로 양손을 들어 눈 앞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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