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화 협상에 협박 한 방울 (168/733)


<제168화> 협상에 협박 한 방울
2022.07.13.



“이, 이것은!”

카루소 대표가 반쯤은 경악의, 반쯤은 감탄의 경탄사를 내뱉었다. 아리아드네는 희미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심해의 심장. 국왕 폐하께서 내리신 보물입니다.”

“이런 귀물을 도대체 왜…….”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수많은 권력자들이 탐을 냈으나 국왕의 수중에 들어간 이후로는 넘볼 수 없게 된, 타란토에서 난 귀보석이었다.


“이것을 맡기고 돈을 융통하려 합니다.”

카루소 대표의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예?”

그는 본디 침착한 사람이었지만 오늘 벌어지는 일들은 지나치게 예측 불허였다. 다짜고짜로 잡힌 사교계의 꽃과의 약속, 그녀의 성황청 교리를 앞세운 협박, 그러고는 레오 3세의 하사품을 돈으로 바꿔가겠다는 패기까지.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이것이 쉽게 유통될 수 없는 물건임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푸른 심해의 심장’은 레오 3세의 하사품이었고, 손바뀜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소문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다.

소문이 난 후에는? 레오 3세가 귀보석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려 들겠지. 아리아드네 데 마레가 이 물건을 팔아버린 것이 확실해진다면 국왕은 그녀를 국왕 모독죄로 처벌하려 들 것이다.


“맞아요. 그래서 전 유통되기 전에 돈을 갚고 이 물건을 도로 찾아갈 거에요.”

카루소 대표는 카스틸리오네 남작과 달리 돈의 사용처를 묻지 않았다. 필요가 있으니 빌리는 것이다. 이런 거금이 필요한 사용처는 몇 없었다.

카스틸리오네 남작이 생각했던 것처럼 용병대장을 고용한다거나, 쿠데타를 일으킨다거나, 아니면 대형 토목공사를 한다거나. 그런 류의 일이 아니고서야.

그리고 카루소 대표는 아리아드네가 그런 종류의 일에 연관될 경우라면 거기에 연루되고 싶지 않았다.


“귀한 보석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하지만 저희 같은 미천한 상인은 이런 귀물을 받아서 안전하게 보관할 재간도 없고 이런 귀물에 합당한 금화를 빌려드릴 여력도 없습니다.”

아리아드네는 이 상황이 올 것을 미리 예견했다. 그래서 그녀는 카스틸리오네 남작한테는 쓸 수 없었던, 오직 카루소 대표에게만 통하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황금이 없으시긴요. 무어 제국에서 사탄의 잎사귀를 수입해 오시는 큰손이신데요. 산 카를로에서 황금이 물처럼 흐르는 상회를 한 곳만 찍으라면 단연코 보카네그로 아닌가요?”

카루소 대표의 동공이 흔들렸다.


“성황청의 대리인이 교리를 어긴 죄를 물으러 와서 황금이 가득 담긴 금고를 압수한다면……. 정말로 그 안에 든 황금이 이 목걸이 값보다 많이 모자랄까요?”

협박이다. 제대로 협박이다.

말을 잃은 카루소 대표에게 아리아드네가 새가 지저귀는 듯한 어조로 그를 을렀다.


“아니면……. 성황청에서는 전부 다 압수해 갈 텐데 그나마 탈세액만큼만 추징해 갈 국왕 폐하의 세리(稅吏, 세금 징수원)들에게 찌르는 게 나으려나요?”

성황청의 대리인들이 나온다면 압수 후 파문이고, 국왕의 세리들이 나온다면 추징 후 지하 감옥 투옥이다.

카루소 대표는 목소리를 떨며 반문했다.


“나한테 뭘 원하는 거요.”

아리아드네는 웃음기를 싹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당신을 괴롭히고자 이러는 게 아니에요. 문제가 될 만한 곳에 돈을 쓰지도 않을 거예요. 이 자금은 백성의 구휼을 위한 양곡을 비축하기 위해 사용할 겁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해요.”

봉사활동이라니.


“갚을 기약은 있습니까?”

“내가 갚지 못한다면 ‘푸른 심해의 심장’을 내다 파세요. 내국에서는 현금화하기 어렵겠지만 국경 넘어 무어 제국으로 빼돌린다면 충분히 처분할 수 있을 겁니다.”

“얼마나 필요합니까?”

승패를 가를 순간이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상대방의 목줄을 쥐고 있었다. 강자만이 원하는 것을 양껏 취할 수 있는 법이다.


“10만 두카토(약 1000억 원).”

카루소 대표의 눈이 다시금 커졌다.

그는 지금 거절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제안, 아니 강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불가합니다.”

카루소 대표는 아리아드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푸른 심해의 심장’은 물론 비할 바 없는 귀보석이지만, 넉넉히 쳐 줘 보았자 4만 두카토를 넘지 못합니다.”

“에트루스칸 국내에서는 그렇죠. 하지만 당신에게는 무어 제국으로의 밀수선이 있어요. 그리로 넘어간다면 6만 두카토는 쉽게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에트루스칸 왕국의 비보라는 이야기까지 붙으면 8만 두카토도 불가능은 아니겠군요.”

“밀수선 운용비용과 위험부담은 안 치십니까?”

“그 밀수선은 담배만 태우고 움직일 때도 똑같은 운용비용이 발생할 텐데요.”

둘은 팽팽하게 대치했다. 먼저 타협안을 제시한 것은 아리아드네였다. 빡빡하게 공기를 채운 돼지 오줌보 풍선은 바람을 빼 주지 않는다면 필연코 터진다.


“7만 두카토. 나머지 3만 두카토는 제가 그쪽으로부터 빌리는 게 아니라 그쪽이 저에게 투자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7만 두카토가 대여금이라면 아리아드네 데 마레가 책임지고 갚아야 한다.

본인이 갚지 못하면 목걸이 판 돈으로 충당이 될 것이고, 사실 카루소 대표도 ‘푸른 심해의 심장’을 무어 제국으로 밀반출한다면 7만 두카토는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3만 두카토는 아리아드네 데 마레가 벌이는 사업이 망하는 경우 허공으로 날아가는 돈이 된다.


“3만은 담보도 없이 날리라는 소리입니까?”

“비관주의자시네요. 잘 될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그 3만 두카토로 우리는 같은 배를 타는 거예요. 제가 성공하면 보카네그로 상회도 투자액만큼 벌어가시는 겁니다.”

아리아드네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다리를 꼬았다.


“내년엔, 아니 당장 올해 가을부터 에트루스칸 왕국에는 엄청난 식량난이 덮칠 거에요.”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보고 왔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대신 중앙 대륙의 식량난에 일조한 다른 원인을 댔다.


“아세레토에 메뚜기떼가 나타난 사실은 알고 계시나요?”

“익히 알지요. 저희 밀 구매처 중 하나인걸요.”

아세레토 공국은 재작년부터 밀밭에 창궐하는 메뚜기 떼로 골머리를 앓아왔다. 메뚜기 떼가 한번 아세레토의 벌판을 지나가면 수확해야 할 곡식의 1/4는 털리고는 했다. 이런 메뚜기 피해를 한 해에도 서너 번씩 입었다.


“저는 처해 있는 주변 환경상 그것이 신의 징벌이라는 이야기를 먼저 들었습니다만.”

성황청에서는 ‘아세레토의 사도’ 때문에 노한 천신께서 아세레토 땅에 천벌을 내렸다고 설파했다.


“사실은 병충해라고 봐야죠.”

“영애께서는 참으로 종잡을 수 없군요.”

신실한 신앙인처럼 담배의 취급을 비난하다가, 이제는 교회의 가르침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구는 태도에 대한 일침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고 대신 빙긋이 웃었다.


“천벌이라면 아세레토 땅에서 끝났겠죠. 하지만 메뚜기떼는 이제 타란토를 거쳐 에트루스칸 본토로 북상하고 있어요.”

“예?”

카루소 대표는 깜짝 놀랐다. 그로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아리아드네는 그의 그 반응에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타란토에 상륙한 메뚜기 떼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은 당연했다.

저 메뚜기 병충해는 사실 내년까지는 본토에 상륙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뚜기 떼가 본격적으로 에트루스칸 내륙을 유린하는 것은 내후년부터다.


‘1123년에는 아직 무르네, 카루소 비텔리. 놀란 게 얼굴에 다 드러나고.’

1137년의 카루소 대표와 납품가를 가지고 기 싸움을 하던 기억이 생생한 아리아드네는 속으로만 미소지었다. 이 정도면 할만했다.


“남쪽 교구에서 제 아버지께 올려보낸 보고에 검은 줄 메뚜기떼에 대한 코멘트가 눈에 띄기 시작했어요.”

남쪽이든 북쪽이든 교구에서 데 마레 추기경에게 보낸 보고를 아리아드네가 읽어본 일은 없었지만, 데 마레 추기경의 서재 어딘가에 쌓여 있을 것이다.

외부인이 그녀가 그것들을 읽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밥 먹듯이 쉬웠다.


“이대로라면 이번 봄의 가을밀 추수, 늦어도 올가을의 봄밀 추수가 에트루스칸 왕국이 누릴 마지막 정상적인 수확입니다.”

카루소 대표의 눈이 터질 듯이 커져 있었다.


“7만 두카토는 저에게 빌려주시는 거로 하고, 3만 두카토는 대표님이 저에게 투자하시는 것으로 하죠.”

아리아드네는 카루소 대표를 바라보았다.


“저는 이 10만 두카토를 모두 밀의 수매에 사용할 겁니다. 제가 사 모은 밀의 판매대금 중 7할은 제 것입니다. 3할은 대표님께 드리지요.”

“영애. 빈민의 구휼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빈민은 식량을 살 돈이 없다.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곡물가 하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아리아드네는 진하게 웃었다.


“빈민은 값을 치를 여력이 없지만 왕궁에는 금화가 있습니다. 맞아요, 일부는 무상으로 풀어야 할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가질 밀의 대부분은 국왕께서 같은 무게의 금을 대금으로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사 가시게 될 것입니다.”

같은 무게의 금. 상인의 영혼을 홀리는 단어들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흉년이 온다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는 일이었다.


“영애……. 제게 시간, 심사숙고할 시간을 주십시오.”

카루소 대표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모레 이맘때까지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아리아드네는 카루소 대표를 빤히 쳐다보았다. 반쯤은 안쓰럽다는, 반쯤은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카루소 대표의 눈에는 그것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보였다.


“카루소 대표님.”

그녀는 목소리를 착 깔고 말했다.


“예, 예?”

“저도 오늘 여기에 상당한 위험부담을 안고 왔습니다.”

그녀는 아직도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흑단나무 상자를 흘깃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안에서 오후의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작열하는 메추리알만한 사파이어에 시선을 고정했다.


“제가 ‘푸른 심해의 심장’을 담보로 제시했다는 이야기가 국왕 폐하의 귀에 들어간다면 저는 어떻게 되겠어요?”

“…….”

“대표님께서 저와 한배를 타셨다는 것이 확실해지지 않으면 저는 여기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물론 사무실에서 풍찬노숙을 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카루소 대표가 지금 이 자리에서 승낙하지 않으면 바로 담배 밀매를 성황청이나 왕궁에 찔러 버리겠다는 압박의 은유였다.

카루소 대표는 지그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30대 초반답지 않은 깊은 눈이었다.


“급한 결정 강요하게 되어 미안합니다.”

그녀는 탁자 위에 양손을 올려 깍지낀 채 말했다. 어느 정도는 그녀의 진심이었다.


“대신 밀의 수매는 전적으로 보카네그로 상회를 통해서 하겠어요. 밀을 가장 싸게 구매할 수 있는 루트는 아니지만 보카네그로의 손해를 이렇게라도 보전해 드려야 피차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카루소 대표의 눈이 빛났다. 이러면 이야기가 다르다.

보카네그로가 도매상 역할로 밀을 매집해준 대신 가져갈 이윤은 약 2할, 그러니까 10만 두카토 중 약 2만 두카토 정도는 차지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아드네의 사업이 폭삭 망한다고 치더라도 보카네그로 상회 측은 밀 판매의 이윤 2만 두카토와, ‘푸른 심해의 심장’을 무어 제국에 내다 판 돈 만큼은 건지게 된다. 적어도 약 9만 두카토 정도는 확보가 된 셈이다.

남는 1만 두카토만이 문제였다. 이는 뇌물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아리아드네의 협박대로 성황청이나 왕궁에 끌려가지 않는 대가였다. 동시에 아리아드네가 성공했을 때에 벌어들이게 될 이익의 3할에 대한 투자금이기도 했다.

할 만한 것 같지만, 지나치게 달았다.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카루소 대표는 눈을 감았다.

고민하던 그의 귓가에 아리아드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스키한 저음이지만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하게 들리기도 하는 목소리였다.


“보카네그로 상회의 미래를 10년은 더 앞당겨 드리겠습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카스틸리오네 상회는 감히 보카네그로에게 견줄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겁니다.”

카스틸리오네. 카루소 대표의 눈이 번쩍 떠졌다.


“비열하고 오만한 찌꺼기 귀족.”

아리아드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 앞에서 고개 숙일 일, 절대 없을 겁니다.”

카루소 대표가 입을 연 것은 다소 충동적이었다.


“……내가 만일 한다면, 황금은 어떻게 지급받으시겠소.”

산 카를로에는 초기의 은행은 있었지만 10만 두카토 같은 거금의 어음은 아직은 무리였다. 금화를 직접 들고 옮겨야 했다.


“하시겠다면 황금은 오늘 자정까지 3천, 이번 달 보름까지 추가로 2만 7천, 총 3만 두카토만 데 마레 저택으로 보내 주시고, 나머지 7만 두카토는 보카네그로 상회에서 밀의 수매 자금으로 사용해 주세요.”

몹시 너그러운 제안이었다.


“‘푸른 심해의 심장’은 담보 조로 오늘 여기에 놓고 가겠습니다.”

두 번째로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그럽다 못해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카루소 대표도 놀랐다. 전폭적인 믿음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그들은—최소한 그가 알기로는—오늘이 초면이다.


“대신…….”

아리아드네의 녹색 눈이 카루소 대표의 방 안을 훑었다.

그녀 역시도 카루소 대표의 이행을 담보하기 위해 가져갈 것이 있었다.



0